도널드 케이건: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13. 5. 30.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 도널드 케이건 지음, 허승일.박재욱 옮김/까치 |
제1부 전쟁을 향하여
제2부 페리클레스 전쟁
제3부 새로운 전략
제4부 거짓된 평화
제5부 시칠리아에서의 재앙
제6부 제국과 아테네에서의 혁명
제7부 아테네의 몰락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자료들
역자 후기
인명 색인
[공부/인문학공부 I] - 강유원의 라디오 인문학 | 2013 | 04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
제35장 키로스와 리산드로스, 그리고 알키비아데스의 몰락 (기원전 408-406년)
560 기원전 404년 3월의 어느 날, 전쟁이 시작된지 27년이 조금 넘은 시점에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대전쟁은 끝이 났다. 그 달 후반부에 리산드로스는 평화조약의 조건들을 실행하기 위해서 도착했다. 그와 함께 돌아온 망명객들은 이것이 아테네 역사에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스파르타의 동맹국들은 화관을 쓰고 춤추며 기뻐했다. "엄청난 열정으로 그들은 소녀들의 피리 소리에 맞추어 방벽을 무너뜨렸고, 이날에 그리스인의 자유가 시작되리라고 생각했다."(크세노폰, <헬레니카> 2.2.3)
기원전 431년에 스파르타인이 전쟁을 자식들에게 물려주게 되리라던 아르키다모스의 예언은 이루어졌다. 그러나 아르키다모스는 그 분쟁이 스파르타인이 해상에서 거둔 위대한 승리로 종결되었다는 것을 사실을 알면 무척 놀랐을 것이다. 또 스파르타가 기원전 479년에 물리친 것을 자랑스러워했던 바로 그 "이방인"들과 동맹을 맺었다는 사실에도 놀랐을 것이다. 전쟁의 경로에 대한 펠리클레스의 예언은 이미 오래 전부터 불신되었다. 사실 누구도 이 대결이 그토록 오랫동안, 그토록 격렬하게, 그토록 값비싼 대가를 치르며 진행되리라고, 그리고 수많은 생명과 재산과 그리스인의 오랜 전통과 제도들을 파괴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투키디데스가 말하듯이 전쟁은 폭력 교사였고, 그리스에서 벌어진 이전의 어떤 전쟁도 이처럼 잔인하지는 않았다. 인간을 고귀하게 살아가게 하고 더 높은 가능성들을 성취하도록 했던 문명의 얇은 망은 수 차례에 걸쳐 산산조각이 났고, 전투 참가자들은 가장 최악의 인간만이 저지를 수 있는 잔인함과 사악함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승리자의 공표된 목표였던 그리스인의 해방은 전쟁이 끝나기 전부터 이미 비웃음을 당했고, 뒤이은 평화는 지속 기간이 짧았다. 투키디데스가 말했듯이 이 전쟁은 "그리스인과 또 이방인의 일부분을 포함하여, 어쩌면 인류의 가장 많은 부분을 휩쓸었던 가장 큰 사건"(1.1.2)이었다. 이것은 그리스에서 벌어진 가장 큰 전쟁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가장 끔찍한 그리스 비극이기도 했다.
결론
561 결국 스파르타의 승리는 이전의 아테네 속국들에 그 어떤 자유도 가져다주지 않았다. 리산드로스는 소아시아의 여러 그리스 도시들을 점령했고, 페르시아인도 많은 도시들을 회복했기 때문이다. 스파르타인은 아테인의 해상 제국을 자신들의 제국으로 대체했고, "해방 도시들"에 소수의 과두정과 스파르타 군 주둔군과 총독들을 배치하고, 공납을 다시 부과했다.
스파르타 인은 아테네 자체에는 곧 잔인함으로 명성을 얻을 과두파의 괴뢰 정부, "30인 참주정"을 부과했다. 이 새로운 체제는 공포정치를 시작했다. 광범위한 재산 압류와 사법적인 살해가 이루어졌다. 우선은 유명한 민주정 지도자들로 시작했고, 그 다음에는 이익을 얻기 위해서 부자들을 몰아쳤고, 마지막으로는 이러한 잔혹행위들에 항의했던 자신들 내부의 구성원인 중도파들마저 숙청했다. 적개심과 저항심이 증대되었고 30인 정부는 스파르타 군 주둔군을 불러 자신들을 동료 시민들에게서 보호하도록 했다.
563 물론 스파르타는 그리스에서 지배적인 세력이 되었다. 그러나 승리는 휴식을 가져다 주지 않았고 오히려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몇 년 안에 스파르타인은 제국과 공납을 포기해야 했다. 그러나 이미 스파르타의 전통적인 규율과 제도를 잠식하기에 충분한 돈이 스파르타로 유입되었다. 곧 스파르티아타이는 자신들의 정체와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내부의 음모들과 싸워야 했다. 국외에서는 이전의 동맹국들과 이전의 적들이 맺은 연합에 대항해서 큰 전쟁을 벌여야 했고, 이것은 스파르타인을 펠로폰네소스 안에 가두었으며, 페르시아의 개입 없이는 펠로폰네소스에서 온전히 빠져나올 수 없었다. 일시적으로 스파르타인은 동료 그리스인에 대한 일종의 헤게모니를 장악했으나, 이것은 페르시아 왕이 허용하는 한에서만 가능했다. 스파르타인은 승리를 거둔 후 30년 안에 육상 전투에서 테베인에게 패배했고, 그들의 권력은 영원히 사라졌다.
길고 잔인했던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대가는 엄청났다. 인명 손실은 전례가 없을 정도였고 어떤 곳들은 황무지로 변했다. 멜로스와 스키오네에서는 남성 주민 전부가 전멸했고, 플라타이아는 남성의 상당수를 잃었다. 전쟁이 끝나고 10년 뒤 아테네 남성 시민의 수는 분쟁 시작 당시의 약 절반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테네는 그 어떤 나라들보다 많은 주민을 잃었다. 그들만이 주민의 3분의 1을 죽인 역병을 겪었고, 게다가 다른 나라들처럼 전쟁이 농지를 황폐하게 하고 무역을 막았기 때문에 가난, 영양 결핍, 질병을 겪어야 했다.
565 기원전 404년의 협정은 결국 아테네의 힘을 항구적으로 파괴한 "카르타고의 평화조약"도 아니었고, 쓰디쓴 감정들을 완화시키려는 온건하고 타협적인 조정도 아니었다. 게다가 아테네는 패배의 순간에 드러난 것보다 훨씬 더 큰 실제적이고 잠재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때가 되면 다시 그 힘이 드러나게 될 것이었다. 아테네인은 자유를 얻자마자 제국, 권력, 영광을 되돌리고, 그리스 국가들에 대한 스파르타의 지배에 도전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기원전 404년의 아테네는 무장해제를 당했지만 진정되지는 않았고, 아테네를 계속 무장해제 상태로 유지하려면 어느 정도의 힘과 헌신과 협력과 일치된 목표가 있어야 했으나 승리한 세력들은 이런 것들을 보유하지 못했다. 테베의 야심은 이미 주도적인 국가로서의 동등성을 주장하기에 이르렀고, 얼마 뒤에는 헤게모니를 요구했다. 그리스를 지배하려는 스파르타의 헛된 시도는 오직 쇠약함을 가져왔다. 곧 그리스인에 의한 지배는 끝이 났고 외부들의 통제에 종속되었다. 처음에는 페르시아가 개입했고, 나중에는 마케도니아에 의해서 정복되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또 어느 학자가 명명했듯이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대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이 전쟁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것은 정당하고 또 유익하다. 1913~1918년의 유럽 전쟁에 대해서 초기 세대들이 "대전(the Great War)"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처럼, 이 전쟁은 비극적 사건이었고, 역사의 거대한 전환점이었으며, 진보, 번영, 자신감, 희망의 시대의 마지막이었고 더 어두운 시대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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