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낭 브로델: 지중해의 기억


지중해의 기억 - 10점
페르낭 브로델 지음, 강주헌 옮김/한길사


지중해로 역사의 긴 시간을 관통하다|저자의 말·38 

천부적인 이야기꾼 브로델이 전해주는 지중해 이야기|서문·40 

브로델이 남긴 원고로 책을 펴내다|편집자 서문|46 


1 문명의 바다, 지중해 


1 바다를 보라·55 

2 문명세계를 향한 대장정·75 

3 두 번 태어난 지중해·117 

4 통합의 세기: 기원전 2500~1200년의 동지중해·185 

5 모든 것이 변했다: 기원전 12~8세기·271 


2 지중해, '우리'의 바다 


6 식민지 개척 또는 아메리카의 발견: 기원전 10~6세기·297 

7 그리스의 기적·367 

8 로마, 지중해를 넘어서·427 


지중해 관련 자료·491 

브로델의 전체사|고원·511 

지중해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옮긴이의 글·529 

찾아보기·531





55 지중해의 유구한 역사를 곁에서 지켜본 최고의 목격자는 바로 지중해일 것이다. 누구도 이런 사실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지중해를 보고 또 보아야만 한다. 물론 지중해를 물끄러미 지켜보는 것만으로는 인간이 계산과 변덕과 착각으로 빚어온 복잡한 과거를 와전히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지중해는 우리를 위해 과거의 경험들을 재현해내고, 그 경험들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는다. 따라서 그 경험들이 지금 우리 눈앞에 펼쳐진 하늘 아래와 풍경 안에서 되살아난다. 먼 옛날과 다름없는 하늘과 풍경에서! 잠깐만이라도 정신을 집중하거나 상상에 잠겨보라. 그러면 그 옛날이 되살아날 테니까.


68 지금까지의 내용을 잠깐 요약해보자. 우리는 지중해 지역의 삶을 포근하고 편한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짙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매력적인 풍겨에 대한 착각이다. 경작지는 부족한 반면 메마르고 척박한 산들이 사방에 널려 있다. 한 지리학자의 표현을 빌리면, "뼈는 많지만 고기는 부족한 땅"이다. 강우량도 고르지 못하다. 식물이 동면해야 하는 겨울에는 비가 풍부하지만, 식물이 성장을 위해 비를 필요로 할 때는 비가 떨어지지 않는다. 이런 기후 조건에서는 많은 일년생 식물과 마찬가지로 밀도 신속히 익어야 한다. 그렇다고 기후가 인간의 노동을 덜어주는 것도 아니다. 태양빛이 한창 뜨거운 여름에 힘든 일을 처리해야만 한다. 그렇다고 해서 거둔 수확이 변변할 리가 없다. 헤시오도스는 "여름에는 옷을 벗고 씨를 뿌리고, 옷을 벗고 쟁기질하며, 옷을 벗고 수확하라"고 충고했고, 베르길리우스도 "벌거벗고 쟁기질하고, 벌거벗고 씨를 불려라"라는 후렴을 사용했다. 또한 베르길리우스는 한 해를 끝낼 때 수확이 부족하면 "숲에 들어가 떡갈나무를 흔들어 떨어뜨린 열매로 허기를 채워라"라고 덧붙였다.


72 처음부터 끝가지 기억에 의존해서 만든 이런 상상의 항공도에는 언제나 지중해를 둘로 가르는 선이 있는 듯 했다. 지중해의 역사에서 뚜렷한 사건들로 인해 그어진 선이다. 하지만 그런 선이 그어진다고 그렇게 놀라운 일은 아니다. 남과 북의 대립은 로마와 카르타고의 다툼이었고, 동과 서의 대립은 동양과 서양 그리고 이슬람 세계와 기독교 세계의 다툼이었다. 과거의 모든 전투가 지도 위에 그려진다면, 코르푸 섬에서 악티움, 레판토, 몰타, 자마를 거쳐 제르바까지 이어지는 엄청난 길이의 전투지역이 그려질 것이다.

역사는 지중해의 두 유역, 즉 동과 서가 간혹 상품과 사람, 심지어 종교까지 교환하긴 했지만 상대적으로 자족적인 세계였다는 사실을 거듭 증명해주었다. 결국 지중해는 두 세계를 공존하게 해주었지만, 두 세계는 모든 면에서 다르기 때문에 끊임없이 다투는 형제였다. 시칠리아를 중심으로 동과 서는 하늘과 하늘의 빛깔까지도 다르다. 동쪽이 좀더 맑다. 바다도 푸른빛이라기보다 보랏빛을 띤다. 호메로스의 표현대로라면 포도주처럼 검은빛이다. 키클라데스 제도는 밝은 오렌지빛을 띤 조각들이고, 로도스 섬은 검은 덩어리이며, 키프로스는 짙은 푸른색을 띤 덩어리이다. 어느 날 오후, 내가 아테네에서 베이루트까지 수상비행기를 타고 가면서 보았던 느낌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물론 지금은 많은 발전을 이루어 빛깔이 바뀌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지중해를 보고 싶다면 맑은 날을 택해서 소형비행기로 지중해를 비행해보라. 너무 높지 않게 그리고 너무 서두르지 말고...


73 사실 지중해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지구에서 가장 큰 땅덩어리에 갇혀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유럽-아프리카-아시아가 하나로 연결된 거대한 대륙에 갇혀 있는 꼴이다. 이 거대한 땅덩어리는 그 자체로 지구라고 할 수 있으며, 처음부터 상품과 인간이 교류되었던 땅이기도 하다. 인류는 이렇게 세 대륙이 하나로 연결된 땅에서 역사라는 드라마를 공연해왔다. 또한 이 땅은 중대한 교환이 이루어진 곳이기도 하다.

인류의 역사가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지중해까지 내려왔지만 그 경계에서 어김없이 멈추었기 때문에 지중해가 곧 세계의 살아 있는 중심이 되었고, 지중해가 공명판처럼 그 거대한 대륙들에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은 조금도 놀랍지 않다. 따라서 지중해는 세계의 역사가 집약되는 곳이었고, 지중해의 역사는 멀리에서도 들을 수 있었다. 이런 쌍방향의 흐름이 과거 역사의 주된 특징이었다. 지중해는 주는 것이 있었고 받는 것이 있었다. 그렇게 교환된 '선물'은 재앙일 수도 있었고 은총일 수도 있었다. 모든 것이 뒤섞였다. 뒤에서 다시 설명되겠지만, 지중해에서 최초의 문명세계가 탄생한 이유는 모든 것이 모여드는 지중해의 지정학적인 위치로도 쉽게 설명될 수 있다.


294 기원전 1100년부터 700년까지 이어진 암흑의 시대가 지난 후 다시 역사의 조명을 받기 시작한 지중해의 삶은 한결 단순하게 정리되는 듯하다. 이때부터 지중해의 삶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뉠 수 있다.

- 동쪽 사람들(페니키아인·에트루리아인·그리스인)에 의한 서지중해의 식민지 개척, 지중해를 처음으로 하나의 역동적인 단위로 묶어는 시기였다.

- 그리스 문명의 발흥. 바다를 배경으로 시작했지만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왕조와 벌인 전쟁 후 쇠락의 길로 떨어졌다.

- 로마의 운명. 로마 제국이 곧 지중해였다.

고전적이면서도 우리에게 아주 친숙한 이야기들로, 검증된 자료도 많고 그에 따른 주장도 많아 새삼스레 다시 언급하기가 겁날 지경이다. 그러히만 나는 아주 특별한 관점, 즉 바다를 중심으로 재정리해볼 생각이다. 대략 세 번의 이동이 있었다. 처음에는 서쪽 바다의 개척으로 지중해가 서쪽으로 확장되었다. 다음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광적인 정복용으로 균형의 추가 동으로 돌아갔으며, 끝으로 로마에 의해 균형점이 찾아졌다. 그러나 지중해 세계 전체를 동쪽에서 서쪽까지 몇 세기 동안 계속해서 지배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로마조차도 그 힘을 영원히 유지할 수 없었다.

물론 이런 단순한 구분이 문제가 없지는 않다. 고대 세계의 역사는 수 천 년 전의 이야기지만 우리에게 뜨거운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세계다. 앞에서 우리는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를 연구한 사람들, 크레타와 그리스를 사랑한 사람들, 또한 동양에 심취한 사람들과 서양을 옹호하는 사람들도 만났다. 나는 에트루리아를 무비판적으로 찬양하고 싶지도 않고, 그리스를 위해 에트루리아를 제물로 삼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페니키아를 혹평하고 카르타고가 어린이를 신의 제물로 바쳤다며 비난하는 역사학자들과 똑같은 목소리를 내고 싶은 마음은 없다. 물론 그리스인들이 뛰어난 업적을 남겼더라도 그들에게 무턱대고 박수를 보내고 싶지도 않으며, 산문은 아름답지 않은 글인 것처럼 로마를 '역사의 산문'이라고 비난한 헤겔에게 동조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요컨대 나는 어느쪽에도 기울지 않고 오른쪽과 왼쪽 모두를 보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접근이 항상 가능할 수 있을까? 게다가 이런 접근법이 바람직한 것일까? 하지만 이런 모순적인 열정이 역사, 즉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역사와 우리가 다시 찾으려고 애쓰는 역사를 살아 있게 만다는 불꽃이다. 이 과정에서 고통이나 감격을 어떻게 피해갈 수 있겠는가? 그런 감정을 품는 것이 공정함이라는 절대적 원칙에 어긋나는 죄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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