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르: 불안의 개념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13. 5. 29.
불안의 개념 - 쇠얀 키에르케고어 지음, 임춘갑 옮김/치우 |
서문 009
서론 013
1. 원죄의 전제로서, 동시에 그 원죄의 기원에까지 소급하여 설명하는 것으로서의 불안 043
2. 점진적인 원죄로서의 불안 099
3. 죄의식이 없는 죄의 결과로서의 불안 159
4. 죄의 불안, 혹은 개체에 있어서의 죄의 결과로서의 불안 221
5. 신앙의 힘으로 구원의 징검다리가 되는 불안 309
역자 후기 326
부록 키에르케고어의 생애에 대한 짧은 이야기 338
322 유한성의 비참 속에 침몰하기를 원하지 않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가장 깊은 의미에서의 무한성을 지향하고 돌진해야만 한다. 무한성을 향하여 우선 이런 방향결정을 한다는 것은 가능성 속에서 교육을 받은 것에 비유되며, 또 그런 결정은 가능성에 의하지 않고서는 일어날 수 없다. 따라서 분별성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계산을 완료하고 나서 이제 승리는 패배인지도 결정되고 있지 않은 동안에 불안이 닥쳐온다. 그리고 불안은 악마를 향하여 성호를 긋는다. 그러면 분별은 속수무책이 되고 만다. 분별에 의한 지극히 교활한 타산도 불안이 가능성의 전능으로 창조해내는 우연 앞에서는 마치 잠꼬대처럼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비록 극히 사소한 것에 관해서일지라도, 분별이 그야말로 교활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그런 방향전환을 하려고 할 때, 살그머니 도망치려고 할 때, 또 그리고 그것이 성공할 것 같은 온갖 개연성이 존재할 때(왜냐하면 현실성은 결코 불안처럼 준엄한 검사관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곧 불안이 나타난다.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사소한 것이라 하여 불안을 거부하는 경우, 불안은 그 사소한 것을 마치 역사가 '마렝고'라는 작은 지역을 유럽 역사에서 극히 중요한 곳으로 만들었듯이(왜냐하면 '마렝고'에서 대단했던 전투가 벌어졌었기 때문이다), 충분히 심오한 것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만일 인간이 어린아이의 젖을 떼듯이 스스로 분별을 떼어버리지 않는다면, 이러한 젖떼기가 유리하게 실현되는 일이 결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유한성은 언제나 결코 전반적으로가 아니고, 단지 단편적으로만 설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인간의 분별이 항상 실패만을 거듭할 경우에는(이런 일이란 현실에서는 생각할 수 없다), 그는 언제나 다시금 그 원인을 분별 속에서 찾아가며 좀 더 영리해지려고 노력해 보기가 일쑤다. 불안은 신앙의 도움을 받아 개체를 섭리 안에서 안식하도록 교육한다. 불안이 발견하는 또 하나의 것, 즉 허물에 대한 관계도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이 죄 있는 자임을 단지 유한성에 의해서만 알게 되는 사람은 유한성 속에서 자기를 잃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유한성은 어떤 외적이고 법률적이고 또 극히 불완전한 방법 이외의 방법으로는, 어떤 인간이 죄 있는 자인지 아닌지에 관한 결정을 결코 내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허물을 단지 경찰이나 형법에 의한 유죄판 결과의 유사점을 통해서만 알게 되는 자는 자신이 허물 있는 자라는 것을 본질적으로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만일 어떤 인간이 허물 있는 자라고 한다면, 그는 무한히 허물이 있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한성에 의해서만 교육을 받는 인간은 만일 그가 경찰이나 여론에 의해서 허물 있는 자로서 판결되는 일이 없다고 하면, 그때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우스꽝스럽고 가련한 존재가 될 것이다 - 즉, 세상의 보통 사람들보다는 약간 훌륭하지만, 아직 전적으로 목사만큼은 훌륭하지 못한 덕의 전형이 될 것이다. 그러한 인간이 어떻게 그의 생애에 있어서 도움 따위가 필요할 것인가, 어쩌면 그는 아직 죽기도 전에 모범자 연감에 오르게 될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유한성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가 있다. 그러나 불안을 느끼는 일은 배울 수가 없다 - 극히 평범하고 해로운 의미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와는 반대로 진실한 의미에서 불안을 느끼는 일을 배운 자는 유한성의 온갖 불안이 연주를 시작하여 유한성의 제자들이 분별과 용기를 잃을 때, 그는 이를테면 춤이라도 추듯이 서서 걸어갈 것이다. 이 점에 관해서 사람들은 흔히 속고 있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은 어떤 하찮은 일에 관해서도 불안을 느낀다. 그러나 중대한 일이 닥쳐오면 그는 숨을 돌리고 안심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아무리 중대한 현실성일지라도 그 사람 자신이 만들어내는 가능성에 비하면 그다지 무서운 것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 그는 이 가능성을 만들어내기 위하여 다른 아닌 자신의 힘을 소모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서 현실성에 대해서는 이제 그의 전력을 다하여 대결할 수 있다. 그러나 우울증에 걸린 인간은 가능성에 의하여 교육을 받은 인간에 비한다면, 역시 불완전한 독학자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우울증은 어느 정도 육체적인 조건에 의존하고 있는 탓에 결국은 우연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독학자는 언제나 다른 저술가도 말하고 있듯이, 독학자인 동시에 같은 정도로 하느님의 가르침을 받는 제자이다. 혹은 또 지나치게 지적인 면을 상기시키고 있는 독학자라는 말을 피한다면, 그는 '철학에 독특한 방식으로 봉사하는 노동자'인 동시에, 또 그와 마찬가지 정도로 '신의 솜씨를 배우는 자'이다. 허물과의 관계에 있어서 불안에 있어서 불안에 의하여 교육을 받는 자는, 그러므로 구원에 있어서 비로소 안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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