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맥닐: 전쟁의 세계사


전쟁의 세계사 - 10점
윌리엄 맥닐 지음, 신미원 옮김, 이내주 감수/이산

머리말 


1. 고대와 중세 초기의 전쟁과 사회 

2. 중국의 우위의 시대, 1000~1500년 

3. 유럽에서의 전쟁이라는 비즈니스, 1000~1600년 

4. 유럽 전쟁기술의 진보, 1600~1750년 

5. 유럽의 관료화된 폭력, 시련을 맞다, 1700~1789년 

6. 프랑스의 정치혁명과 영국의 산업혁명이 군사에 미친 영향, 1789~1840년 

7. 전쟁의 초기 산업화, 1840~1884년 

8. 군사·산업 간 상호작용의 강화, 1884~1914년 

9. 20세기 두 세계대전 

10. 1945년 이후, 군비경쟁과 명령경제의 시대 


결론 

지은이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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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대와 중세 초기의 전쟁과 사회 

14 전쟁의 산업화라는 현상은 어떤 의미에서 문명 자체만큼이나 오래되었다. 청동야금이 도입된 후로 무기와 갑옷을 제조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기능을 지닌 직인이 불가결해졌기 때문이다. 더구나 청동은 원료를 구하기 어렵고 값이 비싸서 소수의 특권적인 전사계급만이 청동 무기와 갑옷 일체를 갖출 수 있었다. 그것은 청동 야금 전문가가 생겨남에 따라 전쟁 전문가도 생겨났음을 뜻한다. 적어도 처음에는 전쟁 전문가만이 야금 전문가가 제작한 물건들을 거의 독점적으로 사용했다.


23 고대제국에는 또 한가지 주목할 만한 특징이 있었다. 바로 이런 종류의 정치조직에는 최적의 규모가 있었다는 점이다. 징세행정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려면 제왕은 적어도 해마다 일정기간 동안 수도에 머물러야 했다. 왕권을 섬기는 주요 관리들의 성적을 평가하여 상벌을 결정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정보를 한곳에 집중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25 고대의 통치자와 그 군대가 직면한 가장 중요한 한계는 수송과 보급이었다. 금속과 무기의 공급은 중요하기는 해도 좀처럼 결정적 요인이 되지 않았으므로, 전쟁에서 산업적 측면의 중요성은 아직 매우 낮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전환점 가운데 첫 번째에 관해서는 이미 언급했다. 그것은 문명의 역사가 시작됨과 동시에 또는 그 직후에 일어난 청동제 무기와 갑옷의 채용으로, 기원전 3500년경 메소포타미아에서 시작되었다. 무기 시스템의 두 번째 중요한 변화는, 후대에 크세르크세스 휘하에 있었던 것과 같은 명령구조가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아직 확고하게 뿌리 내리지 않은 가운데 일어났다. 그 변화란 전차 설계의 근본적 개량이었다.


28 무기 시스템에서 일어난 세 번째 큰 변화는 고대세계의 전쟁에 근본적인 민주화를 가져왔고, 그에 따라 사회적 균형이 크게 달라졌다. 철세 도구나 무기를 만드는 기술은 기원적 1400년경 소아시아 동부 어딘가에서 개발되었고, 기원전 1200년경 이후 발상지를 넘어 널리 퍼져갔다.


37 지리적 요인 및 사회경제적 요인과 더불어, 새로운 무기 시스템의 변화라는 또 하나의 요인이 유목부족민과 정착농경민 사이의 균형을 바꾸어놓았다. 이런 변화는 이제까지 서술한 청동제 무기, 전차전술, 철제무기, 기마전술만큼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지만 서아시아의 많은 지역과 유럽의 대부분에서 사회구조의 패턴을 변모시킬 정도로 중요한 것이었다.


41 이슬람의 발흥과 초기 칼리프 왕조의 수립은 세계사의 수많은 대사건 가운데 어느 것보다도 더 뚜렷하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증명해준다. 즉 인간의 일에서는 관념도 중요하며, 때에 따라서는 관념이 장기간 지속되는 기본적인 인간유형을 규정하는 여러 힘의 균형에 결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44 먹을거리를 충분히 획득하는 것이야말로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자 대다수의 인가에게 영원한 문제였다. 거기에 비하면 다른 모든 일은 나중 문제였다. 대규모 사업을 일으키는 데 산업적 기반이 필요하다는 것은 충분히 현실성을 띤 명제였지만, 인간이 할 수 있다거나 이미 해놓은 일에서 도구나 무기의 입수 여부가 현실적인 한계로 느껴진 경우는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그것은 사소한 요소였다.

이 책의 주제인 "전쟁의 상업화'와, 그에 뒤따르게 마련인 '전쟁의 산업화'가 더욱 중요한 의미에서 진행되기 시작한 것은 서기 1000년 이후의 일이다. 그 변용은 처음에는 완만하게 이루어졌고, 최근 1~2세기 동안 걷잡을 수 없이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2. 중국의 우위의 시대, 1000~1500년 

74 중국은 제철 및 해운에서 유럽의 기술적 성과를 먼저 달성했지만, 그 두 가지 성취 모두 역사 속에서 아무런 영속적 변화도 낳지 못하고 당시 중국인의 삶 속에 흡수되어버렸다. 중국인 상인이나 제조업자들 자신도 자기들의 사회적 역할을 평가절하하는 가치체계에 동의하고 있었다. 그들이 벌어들인 돈을 토지나 자녀교육에 투자했다는 사실이 이 점을 증명해준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녀들은 지배계급인 지주층에 합류했고 관료조직 안에서 벼슬을 어기 위해서 경쟁할 수 있었다.


75 결국 중국사회의 전통적인 체제는 단 한번도 심각한 도전을 받은 적이 없었다. 정부의 명령구조는 맹아단계의 시장경제 위에서 균형을 유지하며, 때로는 위태로운 적도 있었지만 결코 근본적인 통제력을 잃지 않았다. 제철업자나 조선업자도 다른 모든 사회구성원들과 마찬가지로 끝내 한 번도 자율성을 갖지 못했다. 관료들이 허용해주었을 때는 눈부실 정도로 기술이 진보하고 조업 규모가 확대될 수 있었다. 11세기에는 철강생산이, 12세기부터 14세기까지는 조선업이 그런 급성장을 보였다. 그러나 그와 마찬가지로 관의 정책이 바뀌면 달라진 우선순위에 맞추어 자원도 급속히 재배치되었다.



3. 유럽에서의 전쟁이라는 비즈니스, 1000~1600년 

101 1500년부터 1900년까지의 세계사는 이 방면에서 유럽이 얼마나 탁월했는지를 증언해준다. 오늘날 세계를 긴장시키고 있는 군비경쟁은 14세기부터 유럽 국가들과 민간기업가들이 공유하기 시작한 강력한 군사적 상호작용의 직계자손이다. 따라서 14세기에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꼼꼼히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154 서유럽과 그 밖의 문명세계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는 대규모 자본의 사적인 축적에 대한 억압이 유럽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155 리에주를 비롯한 무기제조 중심지의 직인이나 자본가에게 정해진 가격으로 제품을 넘기도록 강요하지 않았을 때에만, 통치자들은 원하는 것을 필요한 만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즉 리에주 사람들은 군사적으로 약했던 덕분에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가격을 매길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강력한 통치자라도 제값을 지불해야지, 그러지 않고는 원하는 물건을 손에 넣을 수 없었다. 유독 리에주만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극단적으로 세분화된 유럽의 정치적 지리 덕분에 리에주 외에도 유럽 전역에 기업가를 위한 피난처가 수십 곳이나 산재해 있었다.


158 유감스럽게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인류역사에 대한 마르크스의 전망을 제약할 수밖에 없었던 19세기 유럽중심주의의 색안경을 공유하고 있다. 마르크스 시대의 유럽인들은 시장과 금전을 매개로 한 인간관계가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시대에 걸쳐 최고의 지배력을 갖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의 시점에서 보면 그것은 더 이상 자명한 진실이라고 할 수 없으며, 따라서 역사가들은 곧 유럽 자본주의 발흥의 군사기술적•정치적 측면에 눈을 돌리게 될 것이다.



4. 유럽 전쟁기술의 진보, 1600~1750년 

183 이에 못지 않게 놀라운 일이 또 있다. 군대의 각 부대가 상관이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눈앞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 명령에 절대 복종했다는 점이다. 적과 맞서 싸울만한 개인적인 이해관계가 없었던 만큼, 가능하면 적의 화선에서 벗어나 있기를 바랄 법도 한데 이 수 많은 남자들은 당연한 일상으로서 명령에 따랐던 것이다. 그 결과 관료제적으로 임명된 장교들은 개인적인 능력에 관계없이 자신들의 명령에 무조건적으로 복종이 뒤따를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었다. 지구상의 어느 곳에 배치되어 있든 간에 여기에는 거의 예외가 없었다.


193 17세기 중반에 이르면 프랑스, 네덜란드 공화국, 영국 같은 나라는 예전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군사 경영과 유사한 패턴을 이룩했고, 국가의 세수와 육해군의 지출 사이에 어느 정도 안정적인 관계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북유럽 국가들은 이탈리아인들의 선례에 두 가지 중요한 개량을 더 했다. 체계적•반복적인 훈련을 발달시키고 주권자(보통은 국왕)로부터 최하급 하사관에 이르는 명확한 지휘계통을 만들어낸 것이다. 물론 지휘계통 내부의 갈등이 완전히 배제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국왕이 여전히 신성한 후광을 두르고 있던 알프스 이북의 유럽에서는 베네치아 시당국이나 밀라노의 행정관들이 직업군인을 지배하기 위해 의존했던 '분할통치'정책이 불필요했다.


194 간단히 말해서 유럽은 그 군사기구로 지구상의 다른 민족이나 국가를 희생시키는 경제적•정치적 확장을 유지하는 한편 다시 그것에 의해 유지되는 자기강화적인 순환의 궤도에 들어선 것이다.

이런 사실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근대 세계사는 또 하나의 사실에 의해서도 크게 좌우되었다. 즉 17세기 유럽의 군대가 대단한 정밀성과 경직성에 이르렀지만, 그렇다고 해서 조직화된 폭력의 경영에 있어 기술적•조직적 혁신이 영구적으로 중단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기술적•조직적 혁신은 계속되었으며, 그 결과 유럽은 지구상의 다른 민족을 점점 더 확실하게 능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아시아•아프리카•오세아니아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재앙이었던 19세기의 전지구적 제국주의가 유럽인들에게는 값싸고 손쉬운 사업이 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5. 유럽의 관료화된 폭력, 시련을 맞다, 1700~1789년 

197 1750년부터 1830년까지 서유럽과 동유럽의 차이를 조금 다르게 표현하자면 이렇다. 동유럽에서 인구증가는 예전부터 친숙한 촌락생활의 양식을 단순 복제하게 했다. 동유럽의 특산물 수출량은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늘기는 했지만 이전과 다른 새로운 사회조직의 형태를 낳을 정도로 크게 늘지는 않았다. 그러나 서유럽에서는 인구 증가로 인한 부담이 훨씬 더 컸다. 농촌은 늘어나는 노동력의 작은 부분 밖에 흡수할 수 없었다. 농촌에서 흡수되지 못한 훨씬 더 큰 부분을 위해 도시에서 일자리가 마련되어야 했지만 그 일은 곤란하거나 불가능했다. 따라서 인력은 약탈활동 쪽으로 이동하는 경향을 띠게 되었다. 이러한 약탈자는 사략선의 선원처럼 당국의 인가를 얻어나 병사들처럼 당국에 의해 징모된 경우도 있었고, 노상강도나 도적떼 혹은 도시의 일반적인 도둑처럼 공권력의 인정을 받지 않고 활동하는 경우도 있었다.


201 애초에 중요한 혁신이 우세해지는 것은 문명세계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자주 반복된 패턴 가운데 하나다* 따라서 18세기에 유럽 열강 사이에서 일어났던 일은 아주 옛날부터 있었던 과정의 최근의 예일뿐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물론 그런 과정은 19세기에도 계속되었으며, 20세기에 들어서도 결코 최종적 균형점에 도달했다고는 볼 수 없다.


* 중동의 고대사에서는 역사가 오래된 작은 국가들을 신흥 변경국가가 정복하는 일이 적어도 세 차례 일어났다. 아카드(B.C 23450년경), 아시리아(B.C 1000년경~B.C 612년), 페르시아(B.C 550~B.C 331)의 제패가 그것이다. 지중의 역사에서도 비슷한 예를 많이 볼 수 있다. 고대에는 마케도니아(B.C 338)와 로마(B.C 168)가 그러했으며, 근대에 들어서는 앞장에서 살펴본 스페인의 이탈리아 지배를 예로 들 수 있다. 고대 중국(B.C221년전 진의 제패)과 고대 인도(B.C321년 마기아 왕조의 제패), 혹은 콜럼버스 이전의 멕시코(아스텍인의 제패)와 페루(잉카인의 제패)까지, 모두 같은 패턴을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일정한 조직과 기술의 수준을 더 큰 영토에 적용하면 더 큰 수확을 거두는 것은 당연하다. 기술수준이 특별히 높은 문명 중심부의 주변지역들에서 종종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다. 어떤 통치자가 상대적으로 큰 변경의 영토를 장악할 때마다, 문명화된 조직형태를 갖춘 반쯤 미개한 군사력을 가진 주변부가 부와 기술을 가진 오랜 역사의 중심부를 정복할 가능성은 생기게 마련이며 실제로 종종 그런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206 우세한 군사력과 거의 모든 속박을 벗어 던진 상업적 이윤추구의 조화는 18세기 유럽 해외사업의 특징이었는데, 그것이 낳은 정말로 중요한 결과는 수십만, 그리고 세기말에는 수백만의 아시아인, 아프리카인, 남북 아메리카인의 일상생활이 유럽 기업가의 경제활동에 의해 변화되었다는 점이다. 시장의 규제를 받는 행동양식은 소수의 유럽인에 의해 관리되고 통제되었고, 해상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지구상의 거의 모든 땅에서 예전의 사회구조를 잠식하고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216 보통은 무기, 화약, 군복과 그외 장비의 보급이 군사사업에 제약을 가하지는 않았다. 이런 품목에 들어가는 비용은 비교적 얼마 되지 않았다. 통상적으로 부족한 것은 식량, 여물, 말, 운송수단이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직인이 제작하는 머스킷총이나 군복•군화 등이나, 국가 조병창에서 제작하는 대포도 증산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보통 전쟁은 사전에 축적된 비축분을 가지고 수행되었다. 7년 전쟁 때의 프로이센군처럼 심각한 손실을 입었을 경우에는 외국에서 사들여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물론 돈이 필요했다. 주요한 국제무기시장은 여전히 저지대국가들에 있었고, 그 중에서도 리에주와 암스테르담이 가장 번성했다.


247 프랑스 정부도 1780년대에 재원의 한계에 부딪쳤다. 미국 독립전쟁 비용은 정부의 기존 신용거래와 세입의 형식에 감당할 수 없는 부담을 지웠다. 그에 따른 재정적자를 보전하려는 노력이, 잘 알려져 있다시피 1789년 5월의 전국 삼부회 소집과 프랑스 혁명의 발발로 이어졌던 것이다. 혁명으로 초래된 격렬한 정치적•사회적 변화는 그때까지 상상할 수도 없었던 거대한 군사력을 풀어놓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동시에 영국에서도 다른 종류의 혁명(기술 및 산업 혁명)이 민간부문뿐만 아니라 군사부문에서도 인류가 이전에 꿈꾸던 이상으로 가능성의 한계를 끌어올렸다. 1789~1815년에 프랑스와 영국에 닥친 엄청난 변용으로 인해 유럽과 세계의 다른 나라들은 크게 뒤처지게 되었다. 실로 18세기의 마지막 10여년 동안 저토록 예기치 않게 시작된 민주혁명과 산업혁명의 충격으로 전인류는 아직도 비틀거리고 있다. 



6. 프랑스의 정치혁명과 영국의 산업혁명이 군사에 미친 영향, 1789~1840년 

253 전국 삼부회로부터 국민의회가 결성되어 왕권에 대한 최초의 도전이 이루어진 1789년 6월부터 프랑스군이 승승장구하며 벨기에와 라인란트로 전진한 1793~1794년까지의 몇 년 동안, 구체제로부터 이어져온 육군과 해군에 중요한 변화들이 일어났다.

그 가운데 첫 번째 변화는 혁명의 대의가 성공을 거두는 데 절대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변화로 인해 육군이 혁명군으로부터 구체제를 방위할 의욕을 잃었기 때문이다*


* 정규부대를 이용하여 민간인 군중을 진압한다는 것은 18세기의 군대에게는 난감한 일이었다. 군중을 향해 근거리 머스킷총으로 일제사격을 하면 대참극이 벌어질 것이 뻔했으며, 그렇다고 다른 전술이 개발되어 있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유럽 국가들의 경찰대가 군중통제법을 체계적으로 개발한 것은 1880년대 이후의 일이다. 1889년의 런런 항만노동자 파업 때 "계속 걸으시오"(Keep moving please)라는 원칙이 확립되었다. 즉 협의를 거쳐 미리 정해진 코스를 따라 행진하는 것과 평화적인 시위가 허용되었던 것이다. 격양된 군중에게  몇 시간 동안 육체적 움직임과 큰소리로 외치는 것을 허용하여 그 에너지를 무해하게 발산하도록 함으로써 군중을 폭력적으로 해산할 필요가 없게 만드는 현대적인 군중통제기법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1789년 당시 이런 세련된 기법은 아직 먼 훗날의 일이었고, 또한 훈련된 민간 경찰대도 존재하지 않았다.


254 혁명에 대한 군대 내부의 공감은 파리 군중이 바스티유를 습격한 1789년 7월 14일에 극적으로 드러났다. 이 역사적인 날, 바스티유를 습격한 사람들이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파리 시내에 주둔하면서 왕궁을 호위하고 국왕을 위해 이런저런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7천 명 가량의 병사들로부터 암묵적인 동의를 얻어야 했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 정도가 아니라 프랑스 근위대의 몇몇 분견대가 군중에 가담했고, 대포를 끌어내 바스티유를 향하게 함으로써 바스티유 점령에 큰 역할을 하기까지 했다.


294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1792~1815년에 프랑스가 혁명적 이상주의와 자유•평등의 원리를 군사 경영에 적용함으로써 전대미문의 효과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후 유럽의 통치자와 직업군인들은 기존 방식의 안정성을 명백히 그리고 확고하게 선호했다. 그 결과 구체제 육해군의 전통과 패턴은 프랑스 혁명기의 태풍을 무사통과하고 살아남았다. 무기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기대할 만한 기술혁신은 보수적인 사령관들에 의해 묵살되었다. 


296 유럽의 통치자들이 하나같이 더 이상 군사실험을 하는 것은 현명한 행동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도 일리가 있었다. 구체제의 방식대로 훈련되고 장비된 육해군이야말로 통치자들이 원하는 것이었으며, 실제로 그들은 그것을 획득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혁명의 시대에 드러난 국민의 에너지라는 심연으로부터 힘을 길어올릴 수 없게 된다 할지라도, 전승국들이 혁명적 무질서라는 망령의 손발을 묶어두자고 합의하고 있는 한은 아무 문제도 없었다.



7. 전쟁의 초기 산업화, 1840~1884년 

300 1840년대에 프로이센의 육군과 프랑스 및 영국의 해군은 구체제하 유럽 국가들의 정부에 착착 손발을 맞춰주던 무장의 패턴으로 이탈했다. 이러한 전환은 '전쟁의 산업화'를 예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무기제조업의 변용에 정말로 가속도가 붙은 것은 좀더 나중인 1850년대에, 크림 전쟁(1854~1856)을 계기로 전통적인 보급방법의 결함이 드러나는 한편 영국과 프랑스의 발명가들이 민간의 공학기술을 군사문제의 모든 면에 적용하는 기회를 얻으면서부터였다. 그 후 무기체계와 군대 경영방법의 변화속도는 점점 더 빨라졌으며, 그 결과 1880년대가 되자 육해군의 공학기술이 민간의 공학기술보다 앞서게 되면서 양자의 관계는 30년 전과 반대로 역전되었다.

물론 새로운 무기가 전쟁을 변화시키기는 했지만, 전쟁의 산업화에 있어 첫 번째 국면에서는 오랜 골치거리였던 보급과 부대 배치에 화석연료로 움직이는 운송수단을 사용하면서 야기된 수송의 혁신이 무기의 혁신보다 큰 역할을 했다. 증기선과 철도는 인간과 무기와 보급물자를 전대미문의 규모로 수송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것은 유럽의 남성인구 대부분에게 전쟁에 필요한 훈련을 받게하고 실제로 그들을 전장까지 수송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모든 남성이 병사가 된다는 이상은 과거에는 야만족 사회에서나 실현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이제는 지구상에서 가장 기술이 진보한 나라들에서도 현실화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육군 병력이 100만 명을 헤아리는 나라가 속속 생겨나게 되었다.



8. 군사•산업 간 상호작용의 강화, 1884~1914년 

344 세계사의 놀라운 사실 가운데 하나는 19세기에는 최신 유럽식 장비로 무장하기만 하면 아무리 소규모의 부대일지라도 아프리카나 아시아 국가를 가볍게 이길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증기선과 철도가 동물이 끄는 수송대를 보완함에 따라 지형이나 거리 같은 자연적 장벽은 점차 사소한 문제가 되었다. 그러므로 유럽의 육해군은 이전에는 도저히 진출할 수 없었던 먼 곳에서도 군사적 지원을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전쟁을 치를 현지인 조직과 유럽인 조직 사이의 극단적인 차이가 세계 곳곳에서 차례차례 드러나게 되었다.

다른 대륙 민족들에 대한 유럽인의 군사적 우월성이 19세기에 더 커졌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사건이 1849~1842년 중국의 연해지역에서 벌어진 아편전쟁이었다. 소규모 영국군 부대가 당시 중화제국이 동원할 수 있었던 군사력을 제압해버린 것이다.



9. 20세기 두 세계대전 

411 설령 우리가 동시대인의 판단을 그대로 받아들여 제1차 세계대전은 유럽과 세계 역사의 한 시대를 갑작스럽게 폭력적으로 종식시킨 일종의 아마겟돈이었다는 견해에 동의하더라도, 그 후 오랜 세월이 지난 오늘날에는 이 '대전'이 세계 역사상 새로운 시대를 열었고, 1980년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여전히 그 시대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제1차 세계대전을 역사발전의 정상적인 과정을 일시 중단시킨 유례없는 파국으로 취급하는 것은 실용적이지 않다. 어쨌든 그 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남으로써 '대전'이 유례없는 일이 아님을 증명해주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마저 현대인의 의식의 표면에서 사라지기 시작한 오늘날에는, 20세기 이 두 차례의 대규모 무력 분쟁을 어느 정도 장기적인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효과적으로 보이는 세 가지 접근방법이 있다. 첫 번째 접근법에 따르면 두 차례의 대전은 경쟁관계에 있는 국가들로 구성된 시스템 속에서 세력균형정치가 또다시 실행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확실히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힘이 연합국 측에 의해 상쇄된 과정은 과거 유럽 역사의 두 시대와 본질적으로 일치한다. 그 두 시대란 1567~1609년과 1618~1648년 합스부르크가의 힘을 봉쇄한 두 차례의 전쟁기, 그리고 1689~1714년과 1793~1815년 프랑스의 패권 장악을 저지한, 이전보다 간격이 크게 벌어진 두 차례의 전쟁기였다.


414 이런 인식이 두 대전을 이해하기 위한 두 번째 접근방법이다. 6장에서 지적했듯이 18세기 말의 민주혁명과 산업혁명이 무엇보다도 당시 서유럽을 괴롭히던 인구압에 대한 대응이었다면, 20세기의 군사적 격변 역시 인구증가와 농촌지역의 전통적 생활양식이 수용할 수 있는 인구 한계 사이의 충돌에 대한 대응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472 제2차 세계대전 때의 무기설계 경험을 통해 하나의 완결된 무기 시스템이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그 시스템은 각 구성요소가 다른 모든 요소들과 정확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것이었다. 


현대 기업들의 번영을 가져온 모든 생산요소의 원활한 흐름이라는 패턴을 파괴에 필요한 요소들을 조합하는데 적용함으로써 예상대로 비용을 절감하고 산출을 늘리는 데 성공을 거두었다. 오컨대 산업이 군사화된 것만큼이나 군사적 측면도 산업화되었던 것이다.


이보다 더 눈부시고 아마도 더욱 중요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기간과 그 이전에 출현한 여러 새로운 장비일 것이다. 이런 장비 가운데 초기에 가장 주목을 받은 것이 레이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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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와 전쟁도 제1차 세계대전 때보다 더욱 긴밀하게 연결되었다. 두 대전 사이에 인간이 음식에서 섭취하는 필수영양소에 관한 지식이 축적되면서 식량배급을 과학화할 수 있게 되었다. 각 집단별로 필요한 비타민•칼로리•단백질의 섭취량을 정확하게 산출하여 공급 여력이 있는 한 정확하게 그만큼을 배급했다. 실제로는 영국에서는 전쟁기간에 국민의 영양상태가 개선되었는데, 이는 주로 식량배급 때문이었다. 또 민간인 사이에 전염병이 돌아서 잠시라도 군사작전계획이 방해받을 우려가 있으면, 숙련된 의료진이 신속히 유행병의 확산을 막았다. 또 군사의학의 발달로, 전투지대에 있지만 않는다면 군인들에게 제2차 세계대전은 그 어느 때보다 훨씬 안전한 전쟁이 되었다. 술파제나 페니실린 등의 신약과 DDT 등의 살충제는 감염 위혐을 줄였으며 생활환경 전체를 갑자기 바꿔놓았다.



10. 1945년 이후, 군비경쟁과 명령경제의 시대 

480 소련의 경제 재건은 애초부터 지속적인 군사비 지출과 경쟁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1945년에 미국이 일본에 사용한 것과 같은 원자폭탄을 개발하려는 노력은, 민간의 소비수준이 여전히 아주 낮았던 시점에도 분명 최우선 사항으로 추진되었다. 또 스탈린은 동유럽에 엄청난 규모의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미국을 비롯한 관찰자들은 소비에트 적군이 전 유럽 대륙을 석권할 능력이 있으며 실제로 그런 유혹을 이기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대한 대응조치로 미국은 1946~1949년에 '자유세계'라는 다소 부정직한 명칭의 초국적인 경제적•군사적 권력기구를 결성했다. 확실히 많은 의미에서 '자유세계'는 소련이 지배하는 지역보다는 자유로웠다. 반대의견을 공공연하게 표명하는 것이 조직적으로 억압되는 일은 없었으며, 공산당이 지배하는 지역에서처럼 노동력이나 식량, 원료가 정부의 명령에 따라 대대적으로 배분되는 일도 없었다.


481 '관리경제'는 모든 선진공업국에서 보편적인 상황이 되었고, 관리의 일반적 목적에 대해 일반 대중의 합의가 유지되고 있는 한은 누구도 거기에 강하게 반대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대다수의 미국인, 서유럽인, 일본인에게 자유는 관과 민의 관료기구가 정해놓은 행동양식에 대한 복종이자 순종으로 퇴화되었다. 공산주의 국가에서도 복종과 순종의 태도는 마찬가지였다. 대부분의 러시아인과 동유럽인, 그리고 중국의 방대한 인구도 하나같이 상위자인 관료들이 정한 목표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행동했다. 그 대가로 얻은 성과는, 생활수준이 급상승하여 곧 전전의 수준을 넘어선 서구나 일본의 그것에 비하면 약소했다. 그러나 공산권에서도 소비수준은 역시 향상되었고, 두 진영의 차이는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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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비경쟁을 멈추기 위해서는 정치적 변화가 필요하다. 만약 핵무기를 독점할 의지와 능력을 가진 전지구적 주권을 갖는 권력이 등장한다면, 그 권력은 연구개발팀을 해산하고 핵탄두를 단지 상징적인 수량만 남겨두고 모조리 제거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정도로 근본적인 변혁이 아니라면 도저히 군비경쟁을 멈추게 할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어쩌면 그런 세계에서조차도 무력충돌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 서로 미워하고 사랑하고 두려워하고 한데 모여 집단을 형성하며, 그 집단의 단결과 생존이 다른 집단과의 경쟁의 형태로 표현되며 또 경쟁을 통해 유지되는 한은 말이다.


이런 지구제국 외의 다른 길은 인간 종의 돌연한 절멸뿐인 것 같다. 여러 국가들로 구성된 시스템으로부터 지구제국으로의 이행이 언제 실현될 것이며, 과연 실현될 것인가 하는 것은 인류가 직면한 가장 중대한 문제이다. 그 답을 얻기 위해서는 시간에 기댈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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