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베르토 에코, 리카르도 페드리가: 움베르토 에코의 경이로운 철학의 역사 2 - 근대 편

 

움베르토 에코의 경이로운 철학의 역사 2 - 10점
움베르토 에코.리카르도 페드리가 지음, 윤병언 옮김/arte(아르테)

I. 지속과 단절, 15세기
1. 학문의 부활 — Luca Bianchi
2. 니콜라우스 쿠자누스 — Matteo d’Alfonso, Riccardo Fedriga
3. 15세기 이탈리아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 — Luca Bianchi
4. 이탈리아의 인문주의: 살루타티, 브루니, 발라 — Claudio Fiocchi
5.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철학과 과학 — Giorgio Stabile
6.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 호모파베르, 시간, 철학교육 — Stefano Simoncini
7. 마르실리오 피치노와 인문학자들의 헤르메스주의 — Umberto Eco
8. 피코 델라 미란돌라: 철학, 카발라, 보편적 화합 — Federica Caldera
9. 피에트로 폼포나치 철학의 위상과 한계 — Luca Bianchi

II. 근대의 탄생
1. 여행, 탐험, 발견 — Corrado Vivanti
2. 정치학의 탄생 — Corrado Vivanti
3. 16세기와 17세기의 정치와 유토피아 — Luca Pinzolo
4. 신세계의 등장을 마주한 철학 — Giuseppe D’Anna
5. 철학과 종교개혁 — Antonio Clericuzio
6. 인간과 우주 — Corrado Vivanti
7. 16세기의 천문학 — Antonio Clericuzio

III. 16세기와 17세기의 자연과 마술
1. 점성술과 별들의 영향력 — Antonio Clericuzio
2. 조반니 바티스타 델라 포르타 — Antonio Clericuzio
3. 지롤라모 카르다노 — Antonio Clericuzio
4. 카발라주의, 유이주의, 밀어 탐구 — Umberto Eco
5. 근대의 문턱: 연금술에서 화학으로 — Antonio Clericuzio
6. 르네상스 궁정의 문인들 — Ezio Raimondi
7. 16세기와 17세기의 우주론 논쟁과 인간중심주의의 위기 — Luca Bianchi
8. 베르나르디노 텔레시오 — Elisabetta Scapparone
9. 조르다노 브루노 — Nicoletta Tirinnanzi
10. 톰마소 캄파넬라 — Germana Ernst

IV. 17세기, 확신과 불안 사이에서
1. 세상은 극장이다 — Mariateresa Fumagalli, Beonio Brocchieri
2. 17세기의 ‘문필 공화국’ 혹은 이미지와 말 사이에서 — Ezio Raimondi
3. 몽테뉴에서 벨에 이르는 근대 회의주의 — Gianni Paganini
4. 헤르메스주의 전통 — Roberto Pellerey

V. 철학과 방법론
1. 베이컨에서 뉴턴에 이르는 철학과 과학의 방법론 — Gianluca Mori
2. 프랜시스 베이컨 — Giulio Blasi
3. 갈릴레오 갈릴레이 — Antonio Clericuzio
4. 르네 데카르트와 ‘이성의 규칙에 따른’ 철학 — Mariafranca Spallanzani
5. 아이작 뉴턴 — Antonio Clericuzio

VI. 17세기의 다양한 전통
1. 토머스 홉스 — Vittorio Morfino
2. 신학과 철학: 말브랑슈와 기회원인론 — Riccardo Fedriga
3. 신정론의 문제 — Luca Fonnesu
4. 포르루아얄과 얀센주의 — Roberto Pellerey
5. 블레즈 파스칼 — Riccardo Fedriga
6. 스피노자 — Umberto Eco
7. 존 로크 — Umberto Eco
8. 라이프니츠 — Massimo Mugnai

VII. 상식과 이성의 시대
1. 잉글랜드 철학과 자유사상가들 — Antonio Senta
2. 조지 버클리 — Gianni Paganini
3. 데이비드 흄 — Paola Zanardi
4. 피에르 벨 — Gianluca Mori
5. 몽테스키외 — Lorenzo Bianchi
6. 볼테르 — Lorenzo Bianchi
7. 콩디야크 — Gianni Paganini
8. 디드로 — Elio Franzini
9. 백과사전, 한 철학적 기획의 역사 — Walter Tega
10. 18세기의 여성 철학 — Paolo Quintili

VIII. 이성의 그림자에서 칸트의 사유까지
1. 17세기와 18세기 사이의 비코 — Giuseppe Cacciatore
2. 장자크 루소 — Alberto Burgio
3. 독일의 계몽주의 — Paola Rumore
4. 이탈리아의 계몽주의 — Antonio Senta
5. 계몽주의자와 계몽인 사이의 프리메이슨 — Umberto Eco
6. 칸트 — Umberto Eco

참고 문헌
찾아보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대조에서 조화로

36 라파엘로가 1508년과 1511년 사이에 그린 〈아테네 학당〉은 어떻게 르네상스의 인문학자들이 1400년대 내내 지속된 역사적이고 문헌학적인 탐구를 통해 대부분의 고대 철학자들을 재발견해 내는 데 성공했는지 놀랍도록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이 벽화를 통해 우리는 수세기에 걸쳐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 칭송받던 아리스토텔레스가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 소피스트들, 고전 시대와 헬레니즘 시대의 위대한 철학자 및 과학자들을 비롯한 고대의 수많은 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돌아와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물론 주목해야 할 것은 라파엘로가 미켈란젤로의 얼굴을 그려 넣으면서 뒤늦게 삽입한 헤라클레이토스나 쉽게 알아볼 수 있는 피타고라스, 소크라테스, 프톨레마이오스, 디오게네스, 플로티노스 등의 얼굴이 아니라 그림 전체를 지배하며 한복판에 위치하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위상이다. 플라톤은 『티마이오스』를 팔에 끼고 오른손 검지로 하늘을 가리키며 아리스토텔레스는 『윤리학』을 왼손에 쥐고 오른손 손바닥으로 땅을 가리킨다. 

라파엘로가 다른 저서들이 아닌 바로 이 책들을 고른 이유에 대해, 아울러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취하는 행동의 의미에 대해 학자들은 오랫동안 상이한 해석들을 제시해 왔다. 어떤 이들은 이 두 인물의 철학이 본질적으로 대조적이라는 측면을 상징한다고 보았고 다른 이들은, 좀 더 정확하게, 이 두 철학의 상호 보완성을 강조했다. 실제로 〈아테네 학당〉이 있는 '서명의 방'의 다른 모든 벽화에서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분명히 엿볼 수 있는 반면, 〈아테네 학당〉에서는 마르실리오 피치노와 피코 델라 미란돌라의 영향하에 하나의 또렷한 철학 개념이 부각되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이 철학은 전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사상이나 전적으로 플라톤적인 사상과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인간의 이성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경지의 조합, 죽 이질적이지만 화합이 불가능하지 않은 두 사상의 탁월한 조합이 이루어 낸 철학이다. 

라파엘로는 1400년대에 이 두 철학자들의 대조 혹은 비교라는 주제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벽화를 통해 서술했다. 중세에도 이미 논의된 바 있는 이 주제는 페라라-피렌체 공의회(1438~1439년)에 참여했던 비잔틴 철학자 플레톤에 의해 하나의 화두로 등장했다. 피렌체에서 지병을 얻어 더 이상 여행을 할 수 없게 된 플레톤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차이점들을 그리스어로 요약해 출간했다. 플레톤은 플라톤이 아리스토텔레스보다 훨씬 뛰어난 형이상학 사상가였다는 전통적인 견해를 지지했을 뿐만 아니라 소요학파의 철학을 총체적으로 논박하며 그들의 '중용' 같은 도덕적 원칙들뿐만 아니라 '천상의 원인과지상의 원인의 분리' 또는 '세계의 영원함'과 같은 우주론적 원칙들, '신의 창조 활동 부정' 같은 신학적 원칙 등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플레톤의 책은 비잔틴 세계에서 거센 반발을 일으켰고, 추기경 베사리오네 중심으로 로마에 모인 그리스 학자들 사이에서 열띤 논쟁의 주제로 떠올랐다. 하지만 라틴 세계의 학자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다는 기록은 적어도 20년 동안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이어서 약 1세기가 흐른 뒤에 (1540년) 플레톤의 책은 놀랍게도 라틴어 해설문과 함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차이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출판된다. 

라틴계 학자들 사이에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중 누가 우위를 거머쥐느냐 하는 문제가 열띤 토론과 논쟁의 주제로 확산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조르조 다 트레비손다(1395~1473년)이다. 그는 1458년에 출판한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철학적 비교』에서 플라톤을 뿌리 깊게 부도덕한 인간이자 수정이 불가능한 반反 그리스도교적 철학의 창시자로 묘사했다. 이에 자극을 받은 베사리오네는 1459년에 그리스어로 쓴 『플라톤의 중상자 논박』의 초판본을 출간했고 10년간의 수정과 보완 작업을 거친 뒤 1469년 가자의 테오도로스와 니콜로 페로티의 협력으로 그리스어-라틴어 판본을 출판했다. 

트레비손다는 자신의 풍부한 역사적, 문헌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당파성이 강한 표현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논리적 언어를 구사하며 아리스토텔레스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플라톤은 수다스럽고 모호하며 일관성이 없고 학문적 차원에서 기여한 바가 거의 없는 인물이었다. 트레비손다는 플레톤이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가 성삼위일체의 교리까지 예견했을 정도로 플라톤 같은 불경한 인물보다는 그리스도교에 훨씬 더 근접한 철학자이며 플라톤의 신학은 오히려 세속적인 미신으로 가득한 경계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에게 플라톤은 동성애를 찬양하는 '늙은 호색한'이었고 술을 좋아하고 조국을 사랑할 줄 모르는 인간, 자기중심적이고 과대망상에 사로잡힌 인간에 불과했다. 

이런 편파적인 비방은 르네상스 초기의 인문학자들이 시도했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조합과 절충주의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다시 말해 헬레니즘과 이슬람 및 중세의 철학 전통에서 면면히 강조해 왔던 것처럼 절대적 권위를 자랑하는 이 두 그리스 사상가의 철학적 체계 사이에는 조화가 가능하며, 극복할 수 없는 이론적 차이점이 존재하는 대신 단순히 용어와 방법상의 차이점이 있을 뿐이라는 편리한 해석을 전혀 근거가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따라서 좀 더 확실한 논리적 용어로 '조화'의 체계를 재정립할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이러한 시도의 일환으로 쓰인 것이 바로 베사리오네의 『플라톤의 중상자 논박』이다. 트레비손다가 쏟아부은 비난에 맞서 플라톤을 변호하지만 동시에 아리스토텔레스를 공개적으로 비판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쓴 이 저서에서 베사리오네는 플라톤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면서도 두 철학자의 평가에 공정을 기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인다. 예를 들어 플라톤이 『국가』에서 표명한 정치 이론을 높이 칭송하는 한편 결혼이 일반 남성에게는 부적합하다고 보았던 관점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이 부분에서만큼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훨씬 더 타당하다는 점을 인정했다. 베사리오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성인화'하려는 모든 시도를 단호하게 거부하면서도 플라톤에게 '세례를 주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이 두 철학자가 사실은 모두 그리스도교 신앙과 반대되는 이론을 구축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플라톤의 철학에 대한 아주 일반적인 의혹과 저평가 경향의 원인뿐 아니라 이미 두세기 동안 유럽 대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들을 철학 교과서로 활용해 온 이유가 그의 글들이 명확함과 논리의 견고함이라는 측면에서 훨씬 더 뛰어나다는 평가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던 베사리오네는 이러한 견해가 사실상 아무런 근거가 없는 편견에 불과하며 오히려 플라톤이 대화록을 쓴 진정한 의도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다. 그는 플라톤의 대화록이 지니는 수수께끼 같은 형식이나 신화적이고 시적인 이미지들이 논리학에 대한 플라톤의 부족한 이해나 과학적 엄밀함을 경멸하는 성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담론이 지닌 독특한 성격, 죽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표현될 수 없는 형이상학적 숭고함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다. 

베사리오네는 아울러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동등하게 다룰 때 해석학적인 차원에서 억측에 가까운 주장들을 수용해야 한다는 점, 예를 들어 플라톤의 영혼선재설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접목시켜야 한다는 점을 충분히 의식하면서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내재하는 본질적인 '의견 일치'를 주장했고 이 은밀한 '동의' 내지 '조화'를 동등함의 차원에서 다루는 대신 플라톤에게 선구자의 역할을 부여했다. 플라톤은 이 두 인물이 구축한 철학적 세계의 기원이며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철학을 방법론적으로 구체화하고 널리 전파했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대화록의 모호함을 '역사화'하면서, 아울러 아리스토텔레스의 글들이 부분적으로나마 드러낸 진실의 근원이 사실은 이 대화록에 있음을 강조하면서 베사리오네는 두 철학자 간의 부조화가 사실적이라기보다는 언어적이라는 전통적인 입장을 취했다. 하지만 그가 해석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전형적으로 플라톤적인 개념들의 구도 속에서 하나의 그림자 내지 반사된 이미지, 또는 신성한 플라톤의 불완전하고 지상적인 모방으로 축소된다. 베사리오네의 이러한 해석과 전략은 몇 가지 측면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학자들에게 환영을 받았고 뉘앙스만 달리할 뿐 1400년대의 수많은 학자들로부터 동의를 얻었다. 

'철학적 평화'의 사도였던 피코 델라 미란돌라가, 표현만 다를 뿐 '의미와 본질에 있어서' 동일한 것을 말하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완전한 조화’에 대한 생각을 제시한 반면 다른 학자들은 두 철학자의 조화를 순수하게 상호 보완적인 것으로 이해했다. 마르실리오 피치노와 에지디오 다 비테르보가 바로 이런 입장을 취했고 플라톤을 형이상학과 신학 분야에서 더 뛰어난 철학자로, 아리스토텔레스를 논리학과 자연철학 분야에서 더 뛰어난 철학자로 분류했다. 이들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조화'가 탐구 영역과 담론의 단계와 방법론의 엄격한 구분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1400년대 중반에 플레톤과 트레비손다와 베사리오네에 의해 도입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차이'와 '비교'라는 주제는 결과적으로 피코 델라 미란돌라와 피치노에 의해 '조화concordia'라는 차원으로 번역되었다. 결국 성공을 거둔 것은 다름 아닌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이라는 '그림으로 보는 고대 철학의 역사'에서 분명하게 드러난 접근 방식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관계를 다루는 1500년대의 수많은 논문에서, 예를 들어 끊임없이 등장하는 두 철학 간의 '화해', '동의', '조화' 같은 표현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