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셰크 코와코프스키: 마르크스주의의 주요 흐름 1 ─ 출범

 

마르크스주의의 주요 흐름 1 - 10점
레셰크 코와코프스키 지음, 변상출 옮김/유로서적

서문
제1장 변증법의 기원
제2장 헤겔 좌파
제3장 마르크스의 초기 사상
제4장 헤스와 포이어바하
제5장 마르크스의 초기 정치 철학적 저작들
제6장 파리 수고. 소외된 노동 이론. 청년 엥겔스
제7장 신성가족
제8장 독일 이데올로기
제9장 중간요약
제10장 19세기 중엽 초의 사회주의 이념과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제11장 1847년 이후의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술활동과 투쟁
제12장 자본주의: 탈인간화된 세계. 착취의 본성
제13장 자본의 모순과 모순의 철폐. 분석과 실천의 통일
제14장 역사과정의 동력
제15장 자연의 변증법
제16장 요약과 철학논평

참고문헌

 


5 마르크스주의는 철학적 혹은 유사-철학적 교의이며, 공산주의 국가가 정통성의 주요 원천이자 필수적 신념으로 이용했던 정 치이데올로기였다. 이 정치 이데올로기는 인민들이 그것을 믿었든 그렇지 않았든 상관없이 불가결한 것이었다. 공산주의 지배의 마지막 시기에는 그것이 생생한 신념으로는 거의 존립하지 않게 되었다. 이데올로기와 현실사이의 거리가 너무나 멀었고, 공산주의 파라다이스라는 행복한 미래에 대한 희망이 급속도로 시들었기 때문에 지배계급(즉, 당 기구)과 피지배계급 모두가 그것이 공허하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7 마르크주스의는 19세기와 20세기의 지적 전통과 정치적 역사를 품고 있다. 마르크스주의가 끝없이 되풀이되고, 종 종기괴한 형태를 취하기도 하며, 과학적 이론이라고 참칭되는 점에서 마르크스주의는 분명 흥미로운 것이다. 그러나 이 철학은 인류에게 형언할 수 없는 비참함과 고통을 야기한 몇몇 사실적 결과들을 낳기도 했다. 요컨대 사적 소유와 시장이 폐기되고 대신 도무지 불가능한 프로젝트인 모든 것을 포괄하는 세계적 계획이 수립되었던 것이다. 

8 프랑스어 번역판은 1 · 2 권만 나왔을 뿐이다. 3권이 출판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 파야르 출판사는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3권은 프랑스 좌파들을 분개하게 만들 수 있고, 출판업자들은 이것이 두려웠던 것 같다. 

9 이 책은 마르크스주의의 안내책자로서 씌어졌다. 이렇게 말하지만, 내 자신의 견해나 편견과 해석의 원칙을 모두 제거하여 그야말로 논란의 여지없이 마르크스주의의 역사를 성공적으로 서술했다는 식의 터무니없는 주장은 할 수 없다. 내가 이 자리서 말하고 싶은 것은 방만한 형태의 에세이로서가 아니라, 나의 평가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마르크스주의의 문제와 관련된 글의 안내서를 찾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은 중요한 사실들을 포함한 마르크스주의 역사를 제시하려고 노력했다는 점뿐이다. 또한 나는 논평을 해설로 얼버무리기보다는 가능하다면 내 자신의 견해를 분명히 제시하려고 했다. 

9 이 책은 마르크스주의의 역사, 죽 교의의 역사에 대한 하나의 접근일 뿐이다. 이는 사회주의 이념의 역사에 관한 것이 아니며, 자체 이념에 따라 이런저런 교의의 틀을 채택해온 당파들이나 정치운동의 역사에 관한 것도 아니다. 한편의 이론 및 이데올로기와 다른 한편의 정치적 논쟁 사이에 밀집한 연관관계를 맺고 있는 마르크스주의의 경우, 이념과 운동을 구분하기란 쉽지 않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601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입장 차이를 요약해보면 그들은 몇 가지 점에서 서로 대조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자연주의적 진화론과 인간중심주의에서 비롯된 대조점이 있다. 둘째, 지식에 대한 기술적 해석과 실천의 인식론에서 차이가 드러난다. 셋째, '철학의 여명'이라는 이념과 생활 일반 속으로 용해된 철학 이념 사이의 차이가 있다. 넷째, 무한한 진보와 혁명적 종말론의 대립이다. 여러 비평가들은 마르크스가 '유물론'이라는 용어를 엥겔스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지 않았다는 관점을 취해왔다. 이에 따르면, 마르크스의 경우 유물론은 정신에 대한 물질의 형이상학적 우선성이 아니라 사회적 조건에 대한 의식의 의존성을 의미한다. 심지어 조단과 같은 비평가들은 마르크스가 여하한 '실체론적' 형이상학마저 부정한 점에서 엥겔스보다 더 본질적인 실증주의자로 불릴 수 있다고까지 말한다. 그러나 이는 용어상의 문제일 뿐이다. 요컨대 마르크스는 용어의 역사적 의미에서 분명 실증주의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현상론적 지식이론이나 현상 너머에서 ‘본질'을 추구하는 것을 금기시하는 논리에 공감하지 않고 오히려 그 반대를 종종 표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엥겔스와는 달리 일차적 실체와 세계의 기원과 같은 형이상학적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는 자신의 초기 저작들에서 형이상학적 문제제기를 명확히 논박했다. 물론 그것을 그렇게 논박하는 것과 그 문제에 대해 부정적으로 답을 내리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마르크스가 물질에 대한 정신의 우선적 존재를 믿지 않았고, 그와 같은 문제를 무의미한 것으로 취급했다는 식의 넓은 의미에서 보면 '유물론자'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대체로 유물론이라는 용어는 '물질'이 존재하는 모든 것의 기저가 된다는 '실체론적' 신념을,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모든 대상은 과학적 경험과 일상적 경험을 통해 알게 되는 물체의 특질을 갖는다는 신념을 함의하는 것으로 사용된다. 이런 의미에서는 마르크스를 유물론자라고 부르기는 곤란하다. 우리가 보았듯이 엥겔스의 경우도 (형이상학적 교의가 아니라 지성의 규칙인) 과학주의적 현상론과 진정한 유물론을 구분한다. 이때의 유물론은 엄밀한 과학적 가늠의 범위를 넘어서며, 어떻게 공식화되는가에 따라 모호하거나 증명할 길이 없는 것이 되기도 한다. 

616 사회철학은 해석과 세분화를 요구하며, 총체적 구원론과 종말론의 기획에서 주목되지 않았던 마르크스주의 내의 긴장과 모순들을 조명하게 만든다. 필연과 자유를 둘러싼 논쟁은 이론으로 해소될 수도 있지만, 특정 논점에서 혁명운동은 자본주의가 경제적으로 성숙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가 아니면 정치상황이 허용하는 순간 권력을 장악해야 하는가의 문제를 결정해야 한다. 이러한 문제의 해결에서 총칙은 별 쓸모가 없었다. 마르크스주의는 사회가 하나가 될 것이고, 개인과 사회 사이의 모든 장벽은 허물어질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 다음의 단계는 실천적 결단을 내리고 그러한 확신을 정치강령의 언어로 바꾸는 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문명의 이념을 계급과 동시에 세계에 의해 조건지어지는 것으로 좀 더 명확히 규정할 필요도 있다. 국가가 '소멸한다'는 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며, 이것이 어떻게 실천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가? 공산주의로의 자본주의의 점진적 · 자동적 발전을 믿는 사람들과 혁명운동의 창조적인 역사적 역할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마르크스주의 저술들에서 공히 버팀목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전자의 경우 후자를 두고 마르크스가 제시한 역사의 법칙을 거스르고 있다고 비난한다. 또 한편 후자는 전자가 역사의 비인격적 과정이 자신들의 혁명을 만들어주기나 하는 듯 이 기대하는 것은 세계의 종말이 올 때까지를 기다리겠다는 의미로 밖에 볼 수 없다고 응수한다. 서로 논쟁을 벌이면서 마르크스로부터 취한 그들의 인용문들은 별로 설득력을 얻지 못하며, 흔히 보는 그러한 인용문들은 다른 이유에서 취한 자신들의 입장을 뒷받침하는데 이용될 뿐이다. 

617 좀 더 까다로운 문제는 공산주의의 성격과 관련된 마르크스의 예언을 둘러싼 실천적 해석의 문제이다. 마르크스에 의거하여 다음과 같은 주장도 있을 법하다. 즉, 모든 사회적 적대관계는 계급갈등에 기초하고 있다.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가 폐지될 때, 유산계급의 지리멸렬한 저항이 있겠지만 계급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계급갈등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마르크스는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더 이상 '중재 (mediacy)' 기구가 없을 것이라고 구상했다. 이는 사실 자유부르주아의 독립적 권력기구인 입법 · 사법 · 행정과 같은 단일기구의 폐지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마르크스는 '민족 원칙'의 소멸도 예고했다. 따라서 민족독립과 민족문화를 배양하려는 어떠한 경향도 자본주의의 유물로 해석될 수 있다. 마르크스는 국가와 시민사회가 하나가 될 것이라고 선언한 바 있다. 이를 가장 단순하게 해석할 경우, 기존 시민사회가 부르주아 사회였던 만큼 이 시민사회를 새로운 국가로 완전히 통합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새로운 국가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이데올로기인 마르크스주의를 고백하는 당이 지도하는 노동자계급의 국가를 뜻한다. 마르크스는 자유부르주아 전통의 부정적 자유(negative freedom)는 적대관계의 사회적 성격을 드러내는 것일 뿐이기 때문에 사회주의 사희에는 존재할 여지가 없다고 말한 바 있다. 따라서 새로운 세계의 건설은 부정적 자유를 개인과 사회의 통일에 기초한 더 높은 형태의 자유로 대체함으로써 시작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정의에 따르면, 프를레타리아트의 열망은 프롤레타리아트 국가에서 실현되는 것인 만큼 새로운 통일에 부합되지 않는 것은 부르주아 사회의 잔재일 뿐이기 때문에 해체되는 것이 마땅하다. 그렇다면 인간의 진보는 항상 개인을 회생시키게 마련이라는 것과 절대적 공산주의가 실현되기까지 그러한 희생 없이는 진보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원리의 의미는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618 이상의 논지를 펼칠 때 통일 · 계급 · 계급투쟁 등과 관련된 마르크스주의적 · 낭만주의적 이론 전체가 가능한 최대의 자유를 실현한다고 공언하는 극단적 전제주의의 확립을 정당화하는데 (물론 이것이 역사적으로 불가피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을지라도) 이용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엥겔스가 가르쳤듯이, 가장 자유로운 사회란 그 사회의 생활조건을 완벽히 통제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그 사회의 자유는 그 사회가 좀 더 독재적으로 지배되고 수많은 규정들에 종속되는 것에 비례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러한 이론을 전면적으로 왜곡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사회주의는 객관적 경제법칙을 넘어서서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생활조건들을 통제할 수 있게 하는 만큼 사회주의 사회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게 한다고 쉽게 말할 수 있다. 요컨대 인민의 의지나 혁명적 당의 의지는 경제법칙을 무시할 수 있고, 그 자신의 창조성에 따라 원하는 대로 경제활동의 환경들을 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마르크스의 통일의 꿈은 과두정치의 형태를 취한다. 그의 프로메테우스적 관점은 경찰을 동원하여 경제활동을 조직하려는 것과 같은 인상을 풍긴다. 사실 레닌의 당온 처음부터 그렇게 했던 것이다. 새로운 사회가 위기에 처하자마자 포기했던 경제적 자주주의는 하나의 응용일 뿐이며, 그것은 마르크스의 프로메테우스적 관점의 한 희화에 불과할 뿐이었다. 중국 공산주의도 동일한 이데올로기에 고무되어 아주 비슷한 시절을 경험했지만 그 결과로 적지 않은 재앙을 감내해야 했던 것이다. 사회주의 하에서 경제적 실패를 유산계급의 저항과 그 결과로 나타난 피지배자의 그릇된 의지의 탓으로만 돌리려는 경우가 허다했다. 

620 사회적 통일을 이루는 어떤 기술이 있다고 생각할 경우, 전제주의는 이런 목적의 실현을 위해 유일하게 알려져 있는 기술인만큼 문제의 자연스러운 해결책이 될 것이다. 완전한 통일은 대의민주주의와 갈등을 완화하는 독립적 기구인 법을 포함한 모든 사회적 중재제도를 폐지하는 형태를 취할 것이다. 부정적 자유의 개념은 갈등의 사회를 전제로 한다. 이것이 계급사회와 동일한 것이라면, 그리고 계급사회가 사적 소유에 기초한 사회를 의미한다면, 사적소유를 폐지하는 폭력행위가 동시에 부정적 자유, 한마디로(tout court) 자유의 필요성마저 없앤다고 한들 비난할 게 뭐가 있겠는가. 

그런데 프로메데우스가 권력이 난무하는 자신의 꿈에서 깨어났을 때는 카프카의 『변신』의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만큼이나 흉측스러운 모습으로 변해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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