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림, 주경철, 최갑수: 근대 유럽의 형성: 16~18세기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13. 9. 24.
근대 유럽의 형성 - 이영림.주경철.최갑수 지음/까치 |
서문
제1장 15세기 말의 세계와 유럽
제2장 근대 유럽의 물질적 조건
제3장 사회문화적 변화
제4장 종교와 정치
제5장 국가 만들기
제6장 계시와 이성의 세계
제7장 세계 속의 유럽
제8장 근대 국가체제의 성립
제9장 신분사회에서 계급사회로
제10장 산업혁명을 향하여
제11장 18세기의 문화와 계몽사상
제12장 정치와 국제체제, 1715-1789
제13장 근대 세계를 향하여: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연표
지도
참고 문헌
인명 색인
38 15세기의 시점에서 세계의 각 대륙은 여전히 비교적 고립되어 발전하고 있었다. 아시아와 유럽, 유럽과 아프리카 간에는 어느 정도 교역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일부 여행자들이 이웃 문명권 깊숙이 들어가 그곳 사정을 본국에 알리는 일이 간헐적으로 일어나고는 있었으나, 각 문명권 간의 대규모 소통은 아직 불가능했다. 그러나 이제부터 세계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긴밀한 소통을 시작하게 된다. 때로는 경제적 교역과 문화적 교류가 평화적으로 진행되기도 하고, 때로는 전쟁과 정복이라는 폭력적인 사태가 벌어지기도 할 것이다.
이 시기에 세계의 상호 교류의 확대와 갈등 정복이라는 세계사의 큰 흐름에서 유럽이 선두를 차지할 가능성은 그리 커 보이지 않았다. 유럽은 역사상 초유의 위기에서 이제 막 헤어나온 상태로서, 비록 역동적인 면모를 보이기는 했지만 향후 500년의 역사를 좌우할 헤게모니의 담지자가 될 정도로 강력하지는 않았다. 차라리 중국과 같은 대제국이나 동남 아시아의 활기찬 해상 세력이 근대 세계사의 선두주자가 될 가능성이 더 커보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유럽이 세게 각 문명권으로 활발하게 팽창하여, 점차 확고한 해상 네트워크를 구축한 다음, 최종적으로 제국주의 지배자로 군림했다. 근대 세계사를 유럽이 전부 만들어낸 것은 아니며 세계의 여러 문명권의 노력이 어우러져서 형성된 것은 분명하지만, 그러한 폭발적인 성장과 발전의 뇌관을 터뜨리고, 또 그 흐름을 가장 유리하게 탄 것이 서구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지도에서 보듯이 유럽은 세계의 다른 지역들과 대단히 활기찬 교역의 교류 네트워크를 발전시켰다.
아래에서는 이런 세계사적인 구조 변화라는 큰 틀 속에서 유럽이 어떻게 그러한 역동적인 세력으로 성장했는지 살펴볼 것이다. 그것은 유럽 내부의 질적 변화와 동시에 유럽과 세계 간의 관계 속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74 자본과 국가의 공동의 노력을 통해서 근대 초에 유럽 경제가 큰 발전을 이룬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이러한 경제 성장이 유럽인들 모두에게 복리 향상을 가져다주었을까? 그에 대한 답은 간단치 않아 보인다. 일부 사람들에게는 더 많은 기회, 더 큰 부를 가져다주었지만 그것은 많은 사람들의 피해 위에서 이룩된 것이었다. 대표적인 현상이 영국의 인클로저처럼 대토지화가 진행되면서 땅을 잃은 많은 농민들이 고향에서 내몰려 도시의 빈민으로 전락한 점이다. 특히 유랑민은 이 시대의 가장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이 시대 이후의 경제 발전은 부와 빈곤을 동시에 창출하면서 이루어졌다. 16세기 이후 유럽 사회는 심각한 빈민 문제에 시달리게 되었다. 교회 혹은 지방 공동체에 의한 자선이 일부 도움을 줄 수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한정된 방식이 넘쳐나는 빈민, 유랑민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는 못했다. 결국 각국 사회는 빈민들에 대해서 가차없는 탄압을 가하게 되었다. 국가와 지방 정치체들이 빈민들을 색출하여 감옥에 가두는 '대감금' 현상이 그 점을 잘 보여주는 특징적인 현상이었다.
부르주아 자본가의 등장과 엄청난 빈민의 증가, 16세기 이후 유럽 사회에서는 이런 극단적인 두 현상이 동시에 나타났다. 장기적으로 도시 및 산업 부문, 다시 말해서 자본의 영역은 갈수록 힘을 더해갈 것이며, 그와 동시에 귀족은 완고한 힘으로 버티면서 자신의 몫을 지키려고 할 것이다. 그 변화의 와중에서 농민들은 분화되었고 그 중 일부는 빈민으로 전락했다.
근대 경제는 역동성을 띠고 있었지만 내부적으로는 위기도 내포하고 있었다.
113 고전 문헌에 대한 숭배와 모방에서 출발한 르네상스는 특유의 활력과 낙관주의로 다방면에서 새로운 시도를 했다. 그러나 르네상스는 독자적인 세계관을 구축하는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으며 오늘날 르네상스의 유산으로 남아 있는 문헌 고증, 고대에의 이해, 교육법 등은 르네상스의 명성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다. 그렇다면 근대 유럽사에서 르네상스가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르네상스의 화두는 끝없는 호기심이다. 이는 사회문화적 변화와 더불어 새롭게 인식하게 된 유럽인들이 이 세상과 학문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고 인식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인문주의는 르네상스인들의 호기심이 학문적으로 승화된 것이다. 종교적 색채가 강하게 남아 있던 북서 유럽에서 이러한 인문주의는 기독교 인문주의로 발전하여 마침내 모든 측면에서 유럽인들을 지배하고 있던 가톨릭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도전으로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인쇄술의 역할은 자못 의미심장하다. 지식을 전달하는 새로운 매체인 인쇄술은 근대 초에 나타난 다양한 현상들과 문제들을 증폭시키고 그 의미를 확대시키며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에 기여했다. 이런 점에서 인쇄술의 발달은 사회문화적 측면에서 중세와 근대를 구분 지을 수 있는 분수령이다.
150 루터의 종교개혁이 전 유럽에 확산되면서 유럽에서는 오랫동안 누적되어온 다양한 갈등이 폭발하고 교회의 무거운 장막에 억눌려온 온갖 욕구와 변화에 대한 갈망이 분출되었다. 20세기 초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개신교와 자본주의의 관계에 대한 가설을 통해서 근대 유럽사 해석의 중요한 측면을 밝혀주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이 근대사에 미친 가장 커다란 영향은 무엇보다도 전쟁이었다. 종교개혁의 시발지인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 각국에서는 종교개혁의 수용을 놓고 정치적 충돌과 내전이 끊이지 않았다. 1555년 종교전쟁을 종결짓기 위해서 체결된 아우크스부르크 조약은 종교의 선택권을 정치 지배자에게 부여했다. 이로써 종교가 정치에 우선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공식적으로 확인되었고 정치 지배층의 세력이 한층 강화되었다. 그러나 아우크스부르크 조약은 종교분쟁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이후 한 세기 이상 유럽에서는 종교와 정치 문제가 복잡하게 얽히면서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가톨릭 측이건 개신교 측이건 간에 종교적 적대감에 불을 붙인 것은 언제나 정치적 야심이었다. 이렇듯 종교의 미명하에 무수한 내전과 전쟁을 치르면서 다양한 정치 단위들의 이합집산이 이루어지고 근대 유럽의 지도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260 18세기 말이 되자 대서양과 인도양만이 아니라 태평양, 남극해와 북극해에 이르기까지 세계 대양의 해안과 섬들에 대한 탐험과 지도제작이 크게 진척되었다. 이제 유럽은 세계의 모습에 대해서 비교적 자세하고 충실한 그림을 가지게 되었다. 이는 곧 15~18세기 동안 진행된 해양 팽창과 지배가 어느 정도 완수되었음을 말해준다. 다음 세기에 들어가면 유럽인들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내륙 지역으로 향해 들어가게 된다. 해상 지배가 결국 내륙 제국 지배로 연결되는 것이다.
459 18세기에 정치는 소수의 독점물이었고, 대부분의 나라에서 루이 14세가 말했다는 근거가 불분명한 '짐이 곧 국가'라는 언명은 여전히 현실적 근거를 가졌다. 공화국이 있었지만 쇄락했고, 반면에 군주제는 도처에서 활기에 차 있었다. 더욱이 약탈적 세력 균형에 입각한 유럽의 국제질서는 군주제, 그것도 절대군주제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듯했다. 그러나 국왕주권에 맞서 새로운 주체가 형성되고 있었다. 이는 상당 정도 군주제의 성과에 입각했다. 오랫동안 같은 왕조의 지배를 받는 가운데 점차 영토적 정체성이 생겨났다. 유럽의 팽창에 힘입어 부르주아지라는 새로운 사회층이 등장했고, 18세기에 여론과 그 주체인 '공중'이 형성되면서 이제껏 통치의 대상에 불과했던 '백성'이자 '신민'이 '국민'이나 '인민'이라는 가상의 새 주권자로 전환할 수 있는 토대가 놓였다. 아울러 18세기 내내 어디에서나 국가의 힘이 커져갔다. 국가는 질서와 전쟁이라는 전통적인 영역을 넘어 경제, 교육, 구빈 등 교회가 장악했던 영역으로까지 더 넓고 깊게 침투해 들어갔다. 국가의 침투력이 커질수록 국가는 추상화되어 군주의 인격성으로부터 더욱 독립적이 되었다. 정치는 궁정으로부터 독립하여 독자적인 근거를 갖춰나갔다. 18세기는 근대 국가 및 정치의 준비기였다.
493 혁명과 제국의 외양을 한 새로운 국가는 모방자와 함께 반대자를 낳았다. 혁명전쟁과 나폴레올의 정복은 18세기의 맹아적인 애국주의를 근대 국민국가를 위한 묘판으로 변형시켰던 것이다. 주세페 마치니는 프랑스 신문을 통해서 이탈리아와 자유를 배웠다. 그는 처음에는 혁명의 보편적 자유에 관심을 가졌다가 곧 단테와 지오토의 고국인 이탈리아 조국의 영광을 운위했다. 마찬가지로 러시아도 나폴레옹의 침공에 맞서 대항하는 가운데 차르 및 정교회의 나라라는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으며, 1812년 전쟁에 참전한 농민들은 애국자가 되었다. 괴테는 1793년부터 신성 로마 제국이 아니라 독일 국민에 주목했다. 심지어 이미 국민적 정체성이 강했던 영국이나 미국도 나폴레옹 전쟁의 여파 속에서 폭넓은 대중적 성격을 갖추었다. 트라팔가르와 워털루의 승리, 그리고 영국 해군에 의한 수도 워싱턴의 방화사건은 양국에서 민족감정을 크게 강화했다.
민족주의의 대두는 이에 그치지 않았다. 유럽에서 폴란드나 아일랜드와 같이 국권을 상실한 인민의 지도자들은 장차 새 국가 건설의 토대가될 민족의 예언자로 자처하기 시작했다. 이런 현상은 유럽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북아프리카, 인도, 실론 등지에서 혁명전쟁과 제국주의는 이제껏 유동적인 애국적 정체성을 강화하고 종종 토착적인 종교와 결합시켰다. 이런 새로운 민족성의 원리는 오직 새 국가의 설립을 통해서만이 충족되는 것이어서 반제국주의 속성을 가지면서도 결국 유럽이 주도하게 되는 근대 국가체제를 강화시키기 마련이었다. 이렇게 하여 인간 해방의 계기가 국민국가를 통해서 작동하게 되는 근대 세계가 명확한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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