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케이건: 전쟁과 인간


전쟁과 인간 - 10점
도널드 케이건 지음, 김지원 옮김/세종연구원



001. 페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404) 

002.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003. 한니발 전쟁:제2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218-201) 

004. 제2차 세계대전(1939-1945) 

005. 쿠바의 미사일 위기






들어가면서

27 다행히 심각한 위기가 모두 전쟁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이 출간될 때쯤이면 그 모든 문제들이 평화적으로 해결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설령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틀림없이 그에 못지않은 심각하고도 위험한 또 다른 문제들이 나타날 것이다. 평화에 대한 위협은 과거와 비슷한 양상으로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미래에도 계속될 것이다. 따라서 핵무기 시대에 있어 이러한 위협에 현명하게 대처해야 할 필요성은 그 어느 때보다 클 것이다.

우리 인류의 성공비결은 경험을 통해서 배우고 그에 맞게 행동을 적응시키는 능력이다. 이 책의 목적은 그러한 노력에 보탬이 될 만한 약간의 유익한 연구를 해보려는 것이다. 순자는 "전쟁의 기술은 국가에 매우 중요한 것이다. 이는 생과 사의 문제로서 안전 혹은 파멸로 나아가는 길이다. 따라서 이는 결코 소홀히 여길 수 없는 탐구대상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전쟁을 피하는 기술 역시 너무나도 중요하다. 따라서 전쟁의 기원과 원인을 파악하려는 시도 또한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제1부 펠로폰네소스 전쟁

116 만일 아테네가 10척의 선박 대신 무적함대를 시보타에 보냈더라면 틀림없이 전투를 막았을 것이고, 코린토스의 코르키라에 대한 복수의 열망을 보류시켰을 것이다. 만약 그것이 전쟁으로 이어졌다면 결과적으로 코린토스 함대는 파괴되고 코르키라에 대한 도전도 종결되었을 것이다. 그런 결과라면 스파르타를 갈등에 끌어들일 필요도 없었다. 그것으로 스파르타의 기를 꺾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든 간에 그 결과는 실제 일어난 것보다 더 나쁠 수는 없었다. 만약 아테네인들이 강력한 군대를 포티데이아에 보냈다고 한다면 그들은 당장에 반란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고, 적에게 활기차고 유망한 반란 대신에 전쟁을 요구하다 포위된 반란군의 절망적인 실상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페리클레스의 온건정책이 코린토스를 저지하지 못했을 때 스파르타에 대한 저지는 더 이상 불가능했다. 아테네는 믿을 만한 공격을 가하기에 인적자원이 충분하지 못했고, 해상공격과 펠로폰네소스의 요새화된 기지에 대해 운운하는 것도 잘 먹혀들지 않았다. 대부분의 스파르타인들은 그런 방법이 자국과 동맹국들에 가할 위협을 예상할 만큼 상상력이 풍부하지도 못했다. 다만 우수한 군대의 강력한 공격만이 스파르타인들을 저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아테네로서는 그런 공격력을 창출해낼 방법이 없었다. 즉, 아테네인들의 정책은 자신들의 전략적 능력과 맞지 않았다. 이러한 점을 좀더 잘 깨달았다면 그들은 메가라 법령을 철회했거나 좀더 회유적인 접근을 시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전쟁저지 능력이 부족했고, 전쟁의 승리를 보장해 주는 어떤 전략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페리클레스와 대다수 아테네인들은 그들의 해군력과 성벽, 자신들에게 제공된 새롭고 한 번도 시험받지 않은 전략에 대해 확신하고 있었다. 이로인해 그들은 적들이 싸움을 단념할 것이며, 설령 그렇지 못할 경우에도 승리를 거둘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리하여 전쟁이 일어났다.


제2부 제1차 세계대전

121 제1차 세계대전은 펠로폰네노스 전쟁처럼 위대한 문명의 역사에 있어서 괄목할 만한 시기에 종지부를 찍었다. 1815년 비엔나 회의가 나폴레옹 전쟁을 종식시킨 후 1세기 동안, 유럽인들은 물질적인 측면에서, 문화적 측면에서, 천연자원에 대한 이해와 조절 및 이용 측면에서, 유럽 이외의 지역에 사는 다른 국가들에 끼친 유럽의 영향력과 통제력 측면에서 큰 발전을 이룩했다.

비록 이에 대한 비판과 반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유럽인들이 주도한 19세기는 전반적으로 자신만만하고 희망적이었다.

당대 사람들이 대전(쟁)이라고 불렀던 것이 이러한 분위기와 함께 그 분위기를 조성한 세상을 파괴했다. 이 전쟁은 네 개의 제국을 붕괴시켰다. 합스부르크가가 이끌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서로 불신하는 여러 약소국가들로 분리되었고, 오스만제국은 소아시아와 유럽의 한 귀퉁이만을 차지한 터키로, 독일은 언제나 혼란스러운 바이마르 공화국으로 그 규모가 줄어들었다. 그리고 로마노프 왕조 대신 소련이 출현했다. 이 전쟁은 유럽의 군주정치와 귀족정치 시대에 마침표를 찍었을 뿐만 아니라 입헌정부와 민주주의 경향 또한 반전시켰다. 결국 이 전쟁으로 러시아에서는 공산주의 전제정치가 등장하게 되었고, 독일, 스페인 그리고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는 독재적인 전체주의 정권이 출현할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되었다.

이 전쟁으로 유럽 이외의 세계에 비해 유럽의 힘이 급격히 약화됐고, 유럽의 경제적 지위가 손상되었다. 또한 유럽의 식민지 정책이 종식되기 시작했으며, 장차 그 전쟁의 운명을 좌우할 거대한 초강대국 러시아와 미국이 출현했다. 이 전쟁은 경악할 정도의 인명피해(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에 의한 전쟁 그리고 미국의 남북전쟁까지 포함하여 이전 2세기 동안 벌어진 모든 전쟁에서 희생되었던 것보다 약 두 배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와 그때까지 경험하지 못한 엄청난 공포를 불러왔다. ... 다시 한번 궁금해 진다. 도대체 어떻게 하여 그런 전쟁이 일어났을까?


제3부 한니발 전쟁: 제2차 포에니 전쟁

313 한니발이 이탈리아 북부에 도착했을 때 그의 군대는 보병 2만 명, 기병 6,000원 선으로 줄어들었는데 , 이는 로마가 동원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군대와 대적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숫자였다. 그렇지만 한니발은 2년 동안 세 번의 대전투에서 로마군을 격파했다. 마지막 칸나에 전투에서는 거의 7만 명의 로마군이 사망했고, 2만 명이 포로로 잡혔다. 칸나에 전투로 인해 이탈리아 남부는 대부분 로마를 배신했고, 공포에 사로잡힌 로마인들은 인간을 제물로 희생했다. 이에 대해 로마의 역사학자 리비는 "로마인의 정신에 어긋난" 것이었다며 한탄했다. 수년 동안 한니발의 군대는 이탈리아의 대부분 지역을 자유롭게 휩쓸고 다녔는데, 그 어느 로마군도 감히 그에게 대항하지 못했다.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일부 사람들은 만약 한니발이 칸나에 전투 후 곧바로 로마로 진군했더라면 큰 승리를 거두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설령 그랬더라도 로마인들은 승리를 차지하기까지 16년 동안 이탈리아, 에스파냐, 그리스, 아프리카에서 엄청난 사상자와 함께 극도의 경제적 피해를 입어가면서 계속해야 했다. 한니발 전쟁은 로마가 지중해를 정복하고 또다시 700년간 지속될 제국을 수립하고자 하는 상태에서 싸워야 했던 가장 크고도 위험한 전쟁이었으며, 제대로 시작하기 전에 그들의 여정을 중단시킬 뻔한 전쟁이었다. 카르타고인들에게 이 전쟁은 그들 세력의 종말을 뜻하는 것이었으며, 유럽이 아닌 아프리카에 기반을 둔 제국이 지중해 전체를 지배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종지부를 찍는 것을 의미했다.

전쟁이 끝나고 반세기가 지난 후, 이 전쟁은 카르타고라는 물리적 존재의 파괴를 의미했다. 한니발 전쟁이 있는지 50년이 채 되지 않았을 때 "포에니 전쟁"(기원전 264~241년, 218~201년, 149~146년에 카르타고와 로마 사이에 벌어진 세 차례의 전쟁으로 로마가 승리하고 카르타고는 무너짐 - 역주)을 연구한 그리스의 역사가 폴리비우스(Polybius)가 말했듯이, "도데체 어떤 방식으로 그리고 어떤 종류의 국가체제가 거의 한 나라 전체를 정복하여 로마라는 단일 도시국가의 통치 아래 들어오도록 만들 수 있었는지, 그것도 43년이 채 안되는 기간 내에 그런 일을 이룩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알고 싶어하지 않을만큼 무관심하고 게으른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제4부 제2차 세계대전

1939년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은 1914~1918년에 일어났던 제1차 세계대전보다 더 무섭고 파괴적인 전쟁의 시작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세계대전이었다. 왜냐하면 유럽뿐만 아니라 아시아 아프리카에서도 심각한 분쟁이 일어났고, 모든 대륙의 사람들이 어느 정도는 관련되었기 때문이다. 전쟁이 가져온 재난은 엄청났는데, 그것은 제1차 세계대전의 손실보다도 훨씬 컸다. 민간인에 대한 공격은 전례없는 것이었고, 도시에 대한 대규모 공중폭격도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결국 이 전쟁은 "핵무기 투하"를 끝으로 종결되었다.

한니발 전쟁처럼 제2차 세계대전은 이전의 평화조약이 지닌 결함에서 비롯되었으며, 아울러 전승국들 스스로 부여한 안정을 변화시키거나 주의깊게 방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러므로 제2차 세계대전의 기원은 제1차 세계대전을 종식시키던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제5부 쿠바 미사일 위기

1962년 10월 22일 밤, 미국 대통령 존 F.케네디는 미국 국민과 전세계인들에게 소련이 서반구에 대한 핵 공격능력을 갖추기 위해 미국 본토에서 90마일 떨어진 쿠바에 "공격용 미사일 기지"를 구축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그는 이같은 소련의 "갑작스럽고 비밀스런" 조치에 불만을 표시하면서, "미국이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현 국제 정세에 대한 의도적인 도전이자 부당한 행위"라고 규정했다. 또한 소련으로 하여금 쿠바에서 미사일과 그 기지를 철거하도록 하는 첫 번째 시도로서 쿠바를 봉쇄한다고 선언했다. 케네디는 "어떤 사태에도 대처할 수 있는 준비"를 하라고 명령했고, 만약 쿠바가 서반구의 어떤 국가에라도 미사일을 발사한다면 미국은 소련에 전면적인 보복조치를 취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소련의 지도자 니키타 S. 흐루시초프에게 이처럼 무모하고도 도발적이며 비밀스럽게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미사일 기지 건설을 즉각 중단하고 미사일을 철거하라고 요구했다. 핵무기를 소유한 초강대국 미국과 소련이 충돌국면에 돌입한 것 같았다. 처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핵전쟁 가능성과 어쩌면 바로 그 날이 임박했다고 믿었다.


에필로그

721 전쟁과 그 원인에 대한 탐구는 진지하면서도 도전적인 행위다. 전쟁의 고통과 공포로 인해 반복해서 파괴되어온 인류의 참담한 역사를 전쟁의 편재성과 영속성과 관련하여 큰 슬픔없이 고찰해 볼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개개의 전쟁에 대한 기원을 분석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많은 전쟁이 불필요한 것이었다는 사실에 틀림없이 충격을 받을 것이다. 인간과 인간이 조직한 사회 속에 존재하는 취약성과 분쟁에도 불구하고 전쟁탐구가는 더 좋은 상황을 만드는 일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목표하는 바는 전쟁의 완전한 제거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725

오늘날은 세계정세에서 주요 세력 가운데 하나가 압도적인 군사적 우세를 유지하면서 더 이상 힘을 확장할 의도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주요 세력간 전쟁을 생각하기란 어렵다. 이러한 상태가 오래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엄청난 경제적 자원을 가진 통일독일은 조만간 그에 필적할만한 군사적 힘을 얻을 것이며, 이러한 현상은 일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중국도 경제적 성공으로 인해 점차 세력을 키워가고 있으며, 국제무대에서의 부차적인 역할을 오래 지속할 것 같지 않다. 현재 소련이 곤경에 처했다고 해서 소련이 지닌 고유한 힘과, 조만간에 다른 나라나 현상태의 욕망 및 목표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 그 자체의 욕망과 목표를 지닌 거대한 강국으로서 세계무대에 재등장할 것이라는 사실을 보지 못해서는 안된다. 더욱이 독일, 일본, 소련이 거대한 강국으로서의 완전한 위치를 확보하는 것이 세계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변화이고 다른 어떤 나라들이 나올지 예견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과거 예측하지 못한 변화들이 종종 평화를 위협했다.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날 것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책에서 고찰한 일화들을 통해 전쟁의 기원과 평화유지에 관해 몇 개의 의견을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독립국가들의 세계에서 힘의 분배를 위한 국가간 대결은 일반적인 것이며, 그와 같은 대결은 흔히 전쟁으로 이어진다. 둘째, 보다 큰 힘을 추구하는 동기들이 종종 안정이나 물질적인 이익만을 얻기 위한 것은 아니다. 그 동기 가운데는 더 큰 위신, 존경, 경의, 요컨대 명예를 위한 요구가 들어 있다. 이러한 요구들은 물질적 이점에 대한 판단보다 훨씬 더 주관적인 판단을 수반하므로 여전히 만족하기가 어렵다. 다른 동기들은 대개 분명치 않고 막연한 공포에서 나오는데, 이 공포는 즉각적인 위협뿐만 아니라 안도감을 얻기가 거의 불가능한 어렴풋한 위협에 대한 것이다.

몇 천 년의 세월에 걸친 광범하고 다양한 국가와 체제를 살펴보면서 전쟁은 아마도 인간 조건의 일부이고 아직은 얼마 동안 우리와 함께 있을 것 같다는 반갑지 않은 결론이 나온다. 그렇지만 전쟁에 관한 대부분의 생각이나 기록에 따르면 평화는 국가관계에 있어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전쟁은 정책결정자들의 인격향상에 의해서, 호전적인 전통 및 제도로부터 벗어나는 사회발전에 의해서, 혼란스럽고 도발적인 행동을 회피함으로써 피할 수 있는 일종의 "일탈상태"임을 알 수 있다. 18세기 이래 제안된 해결책은 주로 "교육"이었는데, 교육을 통해 만족과 그들의 지도자들에게 전쟁이 끔찍할 뿐만 아니라 사악하고 비합리적이며 무익하다는 인식을 심어 줄 수 있었다. 이 해결책은 사람들이 주로 합리적인 목적을 위해, 대개는 물질적인 이익을 얻으려고 전쟁을 치른다는 가정 하에 관련된 사람들의 이권을 보다 적절하고 타당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교육을 중시한다. 교육은 바로 여기까지만 효과적이다. 교육과는 별도로 평화유지를 위해 권장할 또 하나의 주요 방침은 "자제"다. 자제란 자연질서 안에 존재하는 평화를 깨뜨리는 행동을 피하는 것이다.


30 고대 그리스


120 1914년의 유럽


142 합스부르크제국 안의 민족 분포


312 로마제국의 발전 당시 지중해 서부


520 체코슬로바키아와 폴란드의 분할(1938~1939)


584 쿠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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