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렝 핑켈크로트: 사유의 패배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13. 9. 17.
사유의 패배 - 알렝 핑켈크로트 지음, 주태환 옮김/동문선 |
1. 편견에 사로잡힌 정신
2. 관대를 가장한 배신
3. 다원적 문화의 사회를 지향하여
4. 우리는 하나의 세상을 이루고 있으며, 우리는 아이들이다
7 서구 세계 저변에 놓여 있는, 가치에 대한 이러한 위계적 층차의식은 늘 그다지 확고하지 못했고, 끊임없는 반대에 부딪혀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는 가치의 위계성에 동조하는 이들뿐만 아니라, 그 적대자들마저 문화라는 말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오늘날 실제에 있어 문화라는 단어는 두 가지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그 첫째 의미는 사유하는 정신생활의 우월성을 긍정하는 반면, 둘째 경우 이를 인정하기를 거부하는데, 이러한 거부의 논리에 따르면 인간 정신의 위대한 창조적 작업에 바탕을 제공하는 모든 형태의 물리적 요소 역시 문화적이라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논리가 그르지 않다면, 어째서 물리적 요소를 배제시킨 채 순수히 정신적인 창조에만 문화의 의미를 부여한다는 말인가? 또한 뜨개질 기술이나 베텔 배합 요리, 혹은 버터를 잔뜩 바른 빵을 아침 밀크커피에 적셔서 먹는 조상 전래의 습관 등은 제외되고, 정신적인 삶만 유일하게 문화라고 일컬어질 수 있단 말인가?
문화라는 말을 접할 때, 우리는 불안감 섞인 일종의 위기감을 떨쳐 버리기 어렵다. 물론 오늘날에 와서 이 단어를 듣고 아무도 사납게 반발하는 반응을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정신적 사유라는 말에 대해서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그들 자신이 나름대로 부여한 다른 의미의 문화를 그 대안으로 제시하고 나서면서, 정신으로서의 문화의 의미에 대한 저항감을 노출한다. 지금 여러분이 손에 쥐고 있는 이 책은, 바로 이와 같은 사람들의 영향력 확대에 따른 그들의 성공과 승리의 구가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18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이성에 따른 원리를 법으로 삼는, 흔들리지 않는 신념의 입법자"로 스스로를 불렀다. 진리와 정의를 가르치는 교사인 이들은, 전제적 폭정과 권력의 남용에 맞서서 이상적 법의 공정성을 내세웠다. 독일 낭만주의의 입장을 살펴보자면, 모든 것이 이와 반대로 드러난다. '폴크스가이스트'를 수호하는 특권을 소지한 자로서 법리학자와 문필가는 보편적 이성을 내세우는 사상, 혹은 이상적 법을 지지하는 사상을 제1차적인 투쟁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문화라는 이름으로 이들이 투쟁을 벌였다고 해서, 편견과 맹목성을 물리쳤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이들은 달리 환원 불가능한 문화적 특이성을 내세워서, 그들 자신이 보호자임을 자처하는 대상인 국민이 가진 고유의 혼을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53 르네상스로부터 계몽주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근대적 시대 정신의 의도에 따라 인간 정신을 교회의 계시적 진리나 도그마로부터 해방시키는 데 온갖 노력이 경주되었다. 보호체제로부터 자유롭게 된 인간은 이후로는 자신이 가진 이성에 따라서만 행동하면 그것으로 족했다. (칸트의 유명한 표현에 따라 말하자면) 인간은 이제 미성년자적 조건에 처했던 시기를 마감하고, 후견인 없이도 스스로 사고할 수 있음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성년에 다다른 인간을 정의하는 데 있어 르낭은 다른 조항을 하나 첨부시켰으니, 곧 한때 정신생활이 근거를 내렸던 공동체로부터 떨어져 나와 자유롭게 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인간 속에는 이처럼 단절할 수 있는 힘이 내재하고 있다고 르낭은 확신한다. 즉 인간은 그가 처한 콘텍스트로부터 빠져 나올 수 있으며, 국가의 지배영역으로부터 벗어나서 이미 떨쳐 버린 전체성에게서 굳이 근거를 구할 필요 없이 스스로 말하고 생각하며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달리 표현하자면, 인간이 마침내 인간 정신활동의 범위를 협소하게만 하는 부성적 후견인의 강압적 권위에 대항해서 치열한 투쟁 끝에 스스로 자율성을 획득한 것은 닥치는 대로 무엇이든 삼켜버리는 모성, 곧 자신이 속한 문화에 다른 가능성을 모색함 없이 그저 흡수되어져 버리려는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 문화, 독일 문화, 이탈리아 문화에 앞서 인간 문화가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특정 국가의 문화와 인간 문화를 구분시킴으로써, 르낭은 암암리에 괴테에게서 자기 생각의 준거를 찾고 있으며, 또한 독일 민주주의에 근거한 세계관에 대한 대항 개념으로 바로 괴테 사상을 제시하고 있다.
105 단일 정당에 의한 통치행위는 이러한 문화적 정체성 개념에 가장 잘 일치하는 정치적 표현이다. 과거 식민지 피지배국의 정치적 독립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인권 향상을 불러일으키기보다 의식 일반의 획일화 및 단일 정당 단일 정치기구의 이상적 권력 팽창을 야기했다면, 우리는 그 이유를 그들의 반식민 투쟁의 가치관 자체에서 찾아야 할 것이지, 결코 토착 부르주아지의 배반이나 서구 열강의 자국 이익 추구에 따른 경제적 수탈에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뜨거운 혁명주의적 움직임으로부터 냉혹한 관료계급의 지배상태로의 전이는 어떤 악의에 찬 제삼자의 개입이 낳은 결과가 아니라, 이들 국가 자체 내에서 그저 스스로 이루어진 것일 뿐이다.
117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이 거둔 일치된 성과로 말미암아 인종개념이 끝장난 지 이미 오래이다. 오늘날에 와서 인간집단들간의 차이를 근원적 본질의 문제로 돌려 놓으려 하는 것은, 올바른 지식의 세계로부터 스스로 소외되기를 마다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생물학자와 인류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반박할 수 없는 발견 내용에 따르면, 인류가 경계가 분명한 인종적 집단으로 나뉘어서 유전에 의해 전달되는 고유한 사고 방식을 각각 나름대로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는 일은 더 이상 정당화될 수 없다. 선천성과 후천성을 오가면서, 어느 한쪽이든 절대화시키는 일을 자제하기를 우리는 배워 왔고, 실제에 있어 역사나 전통과 관련된 사실을 유전 형질에 새겨놓으려는 짓 따위를 그만둔지 이미 오래이다. 우리가 지적•도덕적 측면에서 동시에 획기적 발전을 이루어 내었다는 결정적인 표시로, 지난날 인간 본성의 영구적 소여 중에 포함되는 것으로 간주했던 여러 특질의 상대적이고도 일시적 성격을 우리가 오늘날 분변해 낸 사실을 지적할 수 있겠다.
135 오늘날에 와서는 이민 문제가 새로이 제기되자 이미 상호 친밀하게 얽혀 있는 우리의 세계를 '다원적 문화 사회'로 전환시키는 일을 정당화하는 데에 또다시 기여하고 있다. '문화의 다원성,' 이 말은 인종적 순수성을 지키려는 움직임에 대항해서 벌이는 싸움의 성격을 보여주는 핵심 단어이며, 동질적 세계상의 단조로움에 대항하여 투쟁하기 위해서 다양성의 매력과 장점을 내세우는 기본 개념이다. 하지만 이러한 말을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 다원적 문화론자와 인종적 순수론자, 이 둘간의 견해 차이가 뚜렷이 드러나 보이며 이 둘간의 관계가 대립적으로 긴장된 것처럼 나타나지만, 실제 이 두 진영은 동일한 상대주의를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종이 위에 씌어진 신조 내용은 서로 반대되는 것 같으나, 그 세계관은 서로 대립하지 않는다. 제각기 자기 입장에서 둘 다 똑같이 문화를 일괄적 전체성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문화의 분열적 다원성이 정당한 것으로 최종 판정을 내린다.
172 물론 비정신적 실재가 정신적 세계와 지금껏 늘 공존해 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비정신적인 것이 정신적인 것과 동일한 명칭으로 불리고, 동일한 가치상의 비중을 가지며, 또한 '고도'의 문화가 지닌 의미를 진지하게 고려하여 '과감하게' 이 문화를 아직도 그 이름대로 부르는 사람들을 인종차별주의자나 반동적 보수주의자로 몰아세우는 일은 유럽 역사 속에서 처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분명히 정리해 보자. 가치의 고하를 인정하는 않는 문화적 총체 속에 전통적 의미의 문화가 해체된다고 해서, 정신활동이나 예술이 당장에 끝장나 버리는 것은 아니다. 걸작품들이 풍성하게 쏟아져 나왔던 문화적 황금시대에 대한 향수어린 애도의 감정에 빠질 필요는 없다. 떨쳐 버리기 어려운 원한만큼이나 오래거나 낡아빠진, 이러한 늘 반복되는 현상은 문화적 창조의 초기부터 인류의 정신적 활동 주변에 나타났던 것이다.
185 현대적 의미에서의 학교는 계몽주의로부터 탄생되었다가, 오늘날에 와서 계몽주의의 의미에 회의가 생기면서 이제는 죽어가고 있다. 정신활동 없이 자율성은 없으며, 자기 스스로에 대한 개발의 노력 없이는 정신활동이 불가능하다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 이념의 지배를 받는 영역(학교)과, 흔해빠진 대중적 도덕 사이에 건널 수 없는 심연이 깊이 파인 것이다.
197 이리하여 결국 야만이 문화를 손아귀에 움켜쥐고 말았다. 문화라는 거창한 이름 아래, 소아병적 증상과 더불어 비관용적 분위기가 확대되어 왔다. 집단적 문화의 정체성이 하나의 인격을 속박시키거나, 반역의 위험을 이유로 개개인에게 회의와 반어적 논법 그리고 보편적 이성 - 즉 문화의 집단적 모체에서 떨어져 나오게 만드는 모든 것 - 에의 접근을 거부하는 일 등이 한 단계 마무리되어 가게 되자, 이제는 기술 시대가 낳은 레저산업이 인간 정신이 이루어 놓은 문화적 유산을 싸구려 상품 상태로 떨어뜨려 버리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그리하여 정신이 주도하던 인간 삶은 마침내 집단의 배타적 가치에 광분하는 인간과 흐느적거리는 무골(無骨) 인간, 이 둘 사이의 무시무시하고도 우스꽝스런 만남에 서서히 자기 자리를 내어 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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