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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서발췌 16세기의 무신앙 문제 - ![]() 뤼시앵 페브르 지음, 김응종 옮김/지식을만드는지식 |
머리말
서론
제1장 삶을 장악한 종교
제2장 무종교의 받침대 : 철학?
제3장 무종교의 받침대 : 과학?
제4장 무종교의 받침대 : 비학(秘學)
결론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19 서구사회는 근본적으로 기독교적이다. 16세기는 더더욱 그러했다. 기독교는 사람들이 숨쉬는 공기 그 자체였다. 그것은 사람이 삶─지적인 삶 뿐만 아니라 다양한 행동으로 이루어진 사적인 삶, 다양한 직업을 가진 공적인 삶, 여러 분야에서의 전문적인 삶─을 살아가는 대기였다. 이 모든 것이 자기의 종교를 받아들이고 실천하려는 명백한 의지와 무관하게 숙명적으로 이루어졌다.
오늘날에는 기독교인이 될 것인가 아닌가를 선택한다. 16세기에는 선택이 없었다. 그리스도로부터 떠나 유랑하는 것은 가능했지만, 오직 생각 속에서였다. 그것은 현실의 지원을 받지 못한 상상력의 게임이었다. 실천을 빠뜨릴 수 없었다. 원하건 원하지 않건 간에, 의식하건 의식하지 못하건 간에,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기독교의 욕조에 몸을 담그는데, 죽음으로도 빠져나올 수 없었다. 왜냐하면 죽음 역시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종교의식에 의해서 기독교적이기 때문이다. 출생부터 죽음까지, 의식, 전통, 관습, 실천의 사슬이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기독교적이건 기독교화된 것이건, 사람들을 그 의지와 무관하게 연결시키고, 비록 그가 자유롭게 되기를 원할지라도 그를 포로로 잡아넣는 그 사슬 말이다. 그것은 먼저 그의 개인적인 삶부터 가두어 놓았다.
20 한 아이가 태어났다. 그러나 태어나자마자 또는 신성한 세례를 받기 전에 죽었다. 그는 해소에 가는가? 그리하여 모든 형벌 가운데 가장 가혹한 형벌인 '신의 영원한 결핍'을 받게 되는가? 부모들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들의 끈질긴 희망에 의해, 그들은 그를 교회로 데리고 가서 제단 위에 올려놓는다. 강력한 신통력을 가진 성인들의 개입으로도, 특별히 간구되는 성모 마리아의 개입으로도, 신은 죽은 아이를 되살리지 않는다. 아무도 감히 그것을 희망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어지신 분은 짧은 순간의 삶을 되돌려 주시는 기적을 행하실지도 모른다. 그에게 약식 세례를 베풀어 해소로부터 구해 내기에 필요한 시간만큼만. 긴장한 어머니와 친척들은 눈과 다리의 움직임, 조그만 시신 위에 땀방울이 몇 개 나타나는지를 초조하게 살핀다. 그것은 세례가 행해지기에 충분한 삶의 표시다. 그러면 교회의 조심스러운 예방책에도 불구하고, 세례가 행해진다.
125 이제 우리는 이 책이 제기했던 문제로 되돌아갈 수 있다. 르네상스기 사람들에 있어서 무신앙, 그것의 범위와 그것의 수단에 대한 문제로….
믿는다 또는 믿지 않는다. 이 문제는 모호함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나이브한 생각, 단순한 생각, 다시 말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제기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16세기 사람들에게도 그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는 반역사적인 생각에 반대해서, 그러한 환상과 시대착오에 반대해서, 이 책의 모든 내용은 구성되었다. 첫 번째 단어인 '믿는다'는 잠시 제쳐 두자. 두 번째 단어는? 믿지 않는다. 이것이 간단한 문제일까? 아무리 순응적이지 않은 사람이라도, 그가 자기가 속한 사회집단의 제반 관습, 관례, 법규 등과 단절하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었을까? 그러한 관습, 관계, 법규 등이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을 때, 그 멍에를 벗어 버리려고 애쓰는 '자유사상가'의 수가 미미할 때, 자기의 지식 속에서나 동시대인들의 지식 속에서 가치 있는 의심을 품거나 실험을 통해서 확인된 유효한 증거들을 가지고 이러한 의심을 뒷받침하는 데 사용할 자료를 발견하지 못할 때.
126 역사적인 이유 때문에 믿지 않는다는 것이 라블레와 그의 동시대인들에게 가능했을까? 그 시대에 어떤 사람이 복음서의 텍스트를 감정하고, 연대를 측정하고, 그들의 상호연관성을 확립하기 위해 고심했는가? 아무도 그럴 생각을 하지 않았다. 또는 설사 그런 생각이 어떤 사람들, 특별히 섬세하고 예리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에게 떠올랐다 하더라도 그런 생각은 확인될 수 없는 생각, 가치 없는 생각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어떻게 달리 될 수 있었겠는가?
128 심지어 라블레의 시대에는, 콜럼버스, 코르테스, 카브랄, 마젤란의 동시대인들이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할 수 있는 논지조차 없었다. 그 정도도 아니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발견한 새로운 땅, 예수를 몰랐고 또 예수가 몰랐던 그 미지의 땅이 어찌 그들의 마음속에 기독교에 대한 심각한 반론, 반박할 수 없는 반론을 일으키지 않을 것인가?" 그러나 그들은? 그 발견들이 그들의 메시아적 영혼 속에 만들어 낸 것은 개종 권유를 위한 구식의 놀라운 열기였다. 무엇보다도 기독교 세계의 경계를 넓히기 위해, 콩고의 왕을 기독교도로 만들기 위해, 인도양 연안, 인도 연안, 말레이 군도, 심지어는 중국, 그리고 조만간 일본 연안 지역을 '신성한 주인'의 가르침에 개방시키기 위해 ....
130 철학적 토대를 가진 무신앙의 경우, 그것은 기독교만을 겨냥할 수는 없었다는 점을 먼저 지적하자. 그것은 기독교 뿐만 아니라 우주와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창조주이며 입법가인 신의 의지를 따른다는 점을 우선적으로 가르치는 모든 종교를 겨냥한다. 그것은 강력한 법칙 개념으로 무장해, 신의 힘을 점진적으로 감소시킨다. 그것은 최초의 동력, 즉 신적 원동력의 원초적 개입이라고 하는 것은 부득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일단 기계가 작동하기 시작하면, 간섭하는 신, 그의 기적, 그의 섭리를 위한 자리는 이제 더 이상 없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 노력했다. 창조주이며 입법가인 신의 최초 행동을 필연적인 것으로 전제하는 모든 종교를 공격하는 과학적 태도를 가진 이 무신앙은, 자율적이고 자신의 고유한 법칙만을 따르는 '자연'의 개념을 그것에 대립시킨다. 그러나 16세기가 가다듬은 개념들 가운데에는 '법칙' 개념도 '자연' 개념도 없다. 그 시대가 필연적인 규칙성의 개념, 세상의 합리적 질서에 대한 호기심 등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선(善)과 연관되어서였으며, 후일에는 미(美)와 연관될 것이었다.
131 무신앙은 시대와 더불어 변한다. 16세기 사람들의 무신앙을 우리의 무신앙과 비교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불합리하고 어리석으며 시대착오적이다. 그리고 라블레를 20세기 자유사상가들의 우두머리에 놓는 것, 이것은 명백한 광기다. 이 책의 모든 것은 이것을 증명했는데, 그렇지 않다면, 이 책은 전혀 가치가 없다. 라블레는 그의 시대로 보아서는 자유로운 정신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굳건한 지성, 활기찬 분별력의 소유자였으며, 그의 주위에 퍼져 있던 많은 편견에서 벗어나 있었다. 나는 이렇게 믿는다. 그러나 나는 "그의 시대로 보아서는"이라고 말했다. 이 말은 그의 정신의 자유와 우리의 정신의 자유 사이에는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 어떠한 정산적인 능력 · 기질 · 행동 등을 제외하고는 공통적인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말한다. 제발 부탁이니, 그의 사상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상의 기원에 놓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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