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틀레프 포이케르트: 나치 시대의 일상사

 

나치 시대의 일상사 - 10점
데틀레프 포이케르트 지음, 김학이 옮김/개마고원

서문
서론

1. 비상사태에 처한 "일상"
2. "민족공동체"와 "인민저항" 사이에서
3. "민족의 동지"와 "공동체의 이방인"

나치즘을 근대의 병리사(病理史)로 경험하기 위한 13가지 논거
역자해설

 


12 독일사의 특수성 이론을 수정한 해석과 나치즘에서 의도와 달리 근대화 동력이 가해졌다는 해석은, 1945년 이후 경악한 세계가 도덕적으로는 정당하지만 분석적으로는 부당하게 뒤집어씌웠던 특수한 악마성으로부터 독일사를 해방시켰다. 그런데 그렇게 독일사를 근대사회의 정상적인 발전 과정에 위치시킴으로써, 한편으로는 1914년까지의 독일사가, 다른 한편으로는 1945년 이후의 독일사가 정상’이었다고 주장한다면 나치즘의 잔혹함과 야만성과 대량 범죄가 도대체 어떤 뿌리에서 나왔는가 하는 핵심적인 물음은 풀리지 않는다. 근대성과 야만성이라는 상호 배타적인 인식 전략의 딜레마를 해소하려면, 그 두 가지 해석에 함축되어 있는 근대성과 진보, 기술적 · 경제적 · 사회적 발전과 인간성의 완성 및 해당의 결합 관계를 해체시키거나 아니면 적어도 비판적으로 논의해야 한다. 서로 다른 역사적 전망에 서 있는 두 가지 해석 모두에서 한사회의 정상성 및 근대성과 파쇼적 야만성이 그토록 밀접하게 맞물려 있다면 나치즘이 현현시켜 대량학살로 고양시킨 그 근대성의 병리와 왜곡 그리고 산업적 계급사회에 함축된 파괴적 경향에 대한 질문이 대두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은가? 

26 "일상과 고향은 가깝고, 소박한 사람에게 적절하며, 직접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것"이라는 식의 전통적인 민중교화적이고 향토애적인 발언의 교육적 주장이 우리가 추구하는 일상사와는 무관하다는 점이다. 그러나 제3제국에서 독서가 위축된 원인을 분석하려면 군수, 고용창출, 행진과 같은 나치당 행사에 대한 "자발적"인 강제적 참여, 자발적 혹은 의무적인 노동봉사, 일반 징집제의 재도입 등을 고려해야 하고, 동시에 에센의 예에서 나타난 현상의 보편적인 적용 가능성에 대해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요컨대 일상 하나가 그 자체로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일상을 들여다보는 것은 오히려 연구자를 사회사, 경제사, 교육사 혹은 문화사 속으로 안내해준다. 요컨대 일상사는 기존의 역사학 저편에 새로운 연구 영역을 개척하는 것이 아니다. 일상사는 다만 새로운 전망이다. 

28 나치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개인사에서는 1933년이나 1945년이 아닌 다른 일과 사건들이 결정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문제 삼으려는 일상은 가능한 최대 의미의 일상이 아니라 제3제국에서의 일상이다. 따라서 우리가 제기해야 하는 질문은, 나치즘의 일상에서 무엇이 정치적이었는가, 혹은 비정치적인 일상에 끈질기게 매달리던 당대인들의 태도는 그들의 나치즘 경험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제기는 체제와 사람들이 조우하는 장(場), 사람들의 기존의 삶의 방식이 체제의 요구에 의해 영향받는 혹은 정반대로 나치 운동이 사람들의 기대와 태도에 의해 채색되는 장, 그리고 국가, 조직, 지역적 · 종파적 · 사회적 하위문화들, 가족, 개인의 영역을 서로 구분시켜주는 그러한 장의 테두리를 정해준다. 일상사의 전망은 그러한 관계들의 미로에서 길을 잃으면 안 된다. 

58 1933년에 수립된 제3제국의 정치구조는 기업가들 및 군부와 같은 구정치 엘리트들 일부가 나치 지도자들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형성되었다 약간 수정은 되지만 그 구조는 제3제국 정치를 규정하게 된다. 그리고 그 구조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경제적 틀에 의해 각인되어 있었다. 나치가 이른바 "민족 혁명"을 통해 다양한 사회적 · 정치적 세력들의 다원주의적 합의에 근거하고 있던 기존의 체제를 대체하고 수립한 체제는, 모든 사회적 피지배 계층을 직접적인 정치적 영향력으로부터 배제시키고, 국가의 이데올로기적 기관들(학교, 노동전선, 대중 조직, 선동수단)을 파쇼의 지배 및 통제 체제에 직접적으로 통합시킴으로써 그들의 자율성을 빼앗은 체제였다. 요컨대 나치즘은 자본주의 구조는 유지한 채 헤게모니 체제를 재편했던 것이다. 

88 독일인들의 수동성은 소위 인민저항이 본질적으로 제한적이었다는 점을 알려준다 "불평불만"은 아무런 결과를 낳지 못했다. 그것은 저항 행위로 연결되지 않았던 것이다. 여론 전체를 살펴보면 정부의 거의 모든 정책이 비판을 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러나 비판은 통상적으로 명료하게 한계 지워진 개별적 측면과 관련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어느 한 분야에서 나치를 거부한다고 해도 또 다른 분야에서는 나치 체제를 지지했다. 거의 모든 주민 집단이 체제에 대한 비판의 행렬에 가담했지만, 그들은 진정으로 저항적인 하나의 전체로 결집하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 고립된 채 수동적 태도에 함몰되거나 특수 이익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99 히틀러는 세계대전을 일으킴으로써만 그 모순을 외부로 돌릴 수 있었다. 나치는 독일에서의 소비재 공급을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에서 유지하기 위해 유럽의 절반을 약탈했다. 그렇듯 제3제국의 독일인들은 처음에는 외상으로 살았고, 그 후에는 타인의 돈으로 살았다.

103 나치 정권이 엄청난 개별적 비판에 직면해 있던 순간에도 아돌프 히틀러의 인기는 변치 않았다. 우리는 이 현상을, 인민 다수가 체제에 대해 근본적으로 합의하고 있었음을 표현해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요컨대 비판은 대부분 중하위 당직자와 같은 하위 권력자에게 집중되었고, 체제에 대한 동의는 아돌프 히틀러 개인에 모아졌던 것이다.

110 인민 사이에 광범하게 퍼져 있었던 수동적 합의 (즉 체제를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일상의 "의무"를 수행하려는 자세)는, 나치 체제가 공격하는 동시에 촉진했던 과정, 즉 공적인 영역으로부터 사적인 영역으로의 후퇴에 기반하고 있었다. 

110 나치즘이 전통적인 사회문화적 환경(milieu)과 협회로 침투하여 그것을 부분적으로는 해체시키고 부분적으로는 강탈하자, 사람들은 사적인 영역으로 후퇴해버렸다. 

164 제3제국 노동자들의 거부적 태도는 다음과 같이 공식화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나치의 정치에 열광적이지 않고 공장 노동에 열성적이지 않은 태도와 다른 한편으로는 사적인 영역 및 자기 주변의 믿을만한 소집단의 연대성으로 조심스럽게 후퇴하는 것이 하나의 흐름 속에서 진척되고 있었다. 이는 카리스마적 지배체제의 회색의 일상에 특징적인 일반적 모습이다. 나치로서는 자신들이 추진하던 전쟁 준비가 노동자들의 지지 부족이라는 암초에 부딪치지 않는 한 그러한 상황을 감수할 수 있었다. 1935년 1월에만 해도 독일보고서는 장기 실업 끝에 일자리를 되찾은 노동지들이 상사들의 눈에 나지 않기 위해 얼마나 겁을 내고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있는지 지적했다. 그런데 1936/37년 이후 노동력 부족 현상이 일반화되자, 노동자들의 자의식은 커졌고 그와 함께 노동자들의 비판하고 항의하려는 의지도 강화되었다. 

413 인종이 다르다고, 유전적으로 열등하다고 생식을 금지시키고 학살하는 것은 반문명적인 것이다. 나치의 인종주의적 실천은 그러했다. 그런데 과연 인종주의가 전근대적인 것인가? 아니다. 인종주의는 근대적인 것이다 그것은 빨라야 계몽주의 시대에 출현하여, 19세기에 들어와 생물학에 뒷받침을 받아 세계관으로 상승한다. 게다가 인종주의는 근대의 핵심적 계기인 진보의 이념을 함축하는 세계관이다. 나치의 인종주의도 마찬가지였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치의 인종주의는 근대 과학적인 것이었다. 유전생물학에 의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전생물학이 무엇인가? 그것은 생식에 대한 통제이다. 나치즘이 대두한 시기는 이미 단순 하등생물에 대한 유전자 지도가 그려지고 있던 때였다. 그러나 그때는 유전형질에 대한 조작은 아직 불가능한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우월한 민족을 생산하여 천년왕국으로 향하기 위한 생식 통제의 방법은 바로 열등한 독일인의 재생산을 막는 것이었다. 나치가 유전병 환자에게 불임수술을 강요하고 학살을 강행했던 것은 바로 그러한 논리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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