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사회지리학 8-1
- 강의노트/책담화冊談話 2021-24
- 2024. 11. 1.
📚 강유원의 책담화冊談話(https://booklistalk.podbean.com)에서 제공하는 「사회지리학」을 듣고 정리한다.
2024.10.30 🎤 사회지리학 8-1
7강 사회적 재생산
• 2024. 10. 30. 오후 7시 30분 - 9시 30분 장소:수원시글로벌평생학습관
• 강의 안내: https://learning.suwon.go.kr/lmth/01_lecture01_view.asp?idx=3914
오늘은 지속가능성과 환경정의를 얘기한다. 토마스 홉스가 쓴 《리바이어던》이라는 책이 있다. 홉스가 이 책을 쓸 때는 잉글랜드라고 하는 나라가 완전 콩가루 상태였다. 홉스의 자연 상태state of nature라는 말을 들어 봤을 것이다. 그리고 대표적으로 홉스와 대립되는 사람이 루소이다. 루소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으로 유명한 사람으로, 프랑스 사람이 아니라 원래 스위스 사람이다. 자기 아버지가 시계공이었는데, 루소는 어려서 스위스를 떠나서 프랑스에 와서 살았다. 홉스와 루소의 자연 상태, 대개 보면 홉스가 말하는 자연 상태는 만인대 만인의 투쟁이 벌어지는 전쟁 상태라고 말한다. 《리바이어던》의 리바이어던은 성서 〈욥기〉에 나오는 아주 굉장히 강력한 힘을 가진 괴물을 지칭한다. 서양에서는 레비아탄이 나오면 인간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위력을 가진, 신의 위력만으로 처치할 수 있는 강력한 어떤 생물체를 가리킬 때 쓴다. 홉스는 자연 상태state of nature를 전쟁 상태라고 한다. 인간이 지금 현재 누리고 있는 사회가 문명상태이고, 그 반대 말이 전쟁상태이다. 인간이 현재 누리고 있는 문명 상태가 있는데, 문명 상태에만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을 싹 제거하고 나면 사람이 어떤 모습을 보이는가를 한번 보면 전쟁라는 얘기를 한다. 그러니까 이 전쟁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모두 다 전쟁 상태에 빠져들면 서로가 죽이기밖에 더 하겠는가. 인류가 멸망에 이른다. 전쟁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레비아탄처럼 아주 강력한 군주가 있어야 된다 라는 것이 《리바이어던》의 기본 주제이다. 루소는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인간의 자연 상태라는 것은 전쟁상태가 아니라 평화로운 상태라고 얘기한다. 평화로운 상태에 있던 인간이 개인적인 소유권이 생기면서부터 갑자기 전쟁상태가 되어서, 그러니까 자연상태에 반대되는 것이 문명상태인데, 루소는 문명상태가 지옥인 것이다. 평화로운 상태, 즉 자연상태에서 문명 상태로 넘어가는 핵심적이 소유권이다. 그러니까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말하는 불평등이라는 게 대체로 소유의 불평등을 가리킨다. 그래서 루소와 마르크스가 비슷한 점이 있다고 얘기한다. 그러니까 루소, 칸트, 마르크스, 이 세 사람을 평등주의 사상에서의 한 계보로 본다. 칸트와 마르크스가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굉장히 깊은 관계가 있다. 실제로 칸트는 굉장한 도덕률을 강조한 사람이니 그렇다. 루소는 평화로운 상태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문명 상태로 넘어가는데 이 문명상태가 전쟁상태라고 한다. 그리고 이것을 넘어가는 데 핵심적인 요건이 소유권이다. 그러면 루소와 홉스는 대비된다는 걸 알 수 있다. 근대 정치 사상에 있어서 양대 산맥이라고 하면 홉스 라인하고 루소 라인이 있다.
동양에서 춘추전국 시대의 사상을 말할 때 유가에서 공자님이 있고, 유가 말고는 중국에서는 정치 사상이라는 게 없다. 묵자가 정치 사상이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실용적인 것이고, 어쨌든 사람들이 본받아서 이렇게 정치에다 써봐야겠다 라고 생각하는 것은 유가밖에 없다. 《논어》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정치에 대해서 제자들과 주고받은 이야기이다. 유가에서 공자님 얘기는 두가지로 생각해 볼 수가 있다. 하나는 맹자 얘기가 있고 하나는 순자 얘기가 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선한데, 둘 다 마찬가지이다, 그 선을 키워줘야 한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 맹자이고 선한데 세상 살다 보면 악해진 것이니 악을 제거하는 것이 더 중요해 라고 말하는 게 순자이다.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성악性惡과 성선性善이 아니라 맹자나 순자나 둘 다 성선性善이다. 성선性善이라기보다는 인간은 마음이 선하다 라고 하는 심선心善이다. 그런데 맹자는 이 마음으로부터 발현되는 게 두 가지 있다. 성性이 있고 정情이 있다. 우리가 성정이 거칠다 라고 하는데 사실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성性과 정情이 합쳐진 말이다. 중국 고대사상은 단어 하나만 가지고 하나를 지칭하지 두 글자로 뭔가를 지칭하지 않는다. 성性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은 밑바탕에 놓여 있는, 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다. 순자는 예라든가 법이라든가 이런 걸 가지고 깨끗하게 해야 된다고 얘기하는 것이고, 맹자는 여기다가 맑은 물을 계속 공급하면 되지 라고 하는 것이다. 더러운 물을 없애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순자, 맑은 물을 많이 넣어서 더러운 물을 희석시키는 게 더 중요하다고 하는 것이 맹자이다. 물이 어디 있어, 없애버리면 되지 라고 하는 것이 법가이다. 그러니까는 공자님 말씀이 법가와 그렇게 멀지 않다.
정치 사상에서 루소 라인으로 타고 내려오는 사람들이, 루소, 칸트, 마르크스를 꼽는다. 홉스 라인으로 타고 내려온 사람들은 홉스 밖에 없다. 루소라고 해서 사람들이 원래 살고 있던 상태가 평화롭지 않았다는 걸 몰랐겠는가. 루소는 일단 평화로운 곳에서 출발해야 사람들한테 이리로 돌아가자 얘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홉스는 처방을 한 번 내기 시작하면 밑도 끝도 없다. 그래서 루소가 더 고도의 술책을, 말하자면 아이디어가 더 뛰어난 사람이라고 말한다. 루소의 책 중에 아주 중요한 것 중에 《인간 불평등 기원론》도 있지만은 《에밀》도 있다. 교육학과에서 교육 철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다루는 2대 원전 텍스트가 있는데 플라톤의 《국가》와 루소의 《에밀》이다. 《에밀》이라는 텍스트가 중요한 게 서양 최초의 유아 백과 책이다. 루소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원래 선한 본성에 대한 신뢰가 엄청난 사람이다. 본인은 학대받고 자랐고 개판으로 살았는데 그게 쉽지 않다. 마이너스 상태에서 출발했는데 스스로 노력해서 제로가 되고 거기서 플러스를 만들어서 《에밀》이라는 책을 쓴 것이다. 오늘날 진화심리학자들이나 이런 사람들은 홉스가 옳았다고 얘기를 한다. 인간은 문명을 제거하면 자연 상태가 되고 거기서 전쟁을 한다 라고 말한다. 그러면 무엇이 문명이고 어떤 것이 자연상태인가. 도덕 규범으로 우리에게 강조되고 있는 것들이 문명 규범이다. 이웃과 다투지 말라 라는 얘기를 듣는데, 그러면 인간은 본래 이웃과 다투는구나, 가령 부모에게 효도해라 라고 하면 인간은 자연 상태에서는 부모에게 효도 안 하는 존재구나, 자녀를 굉장히 사랑해야 된다. 모든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인류 역사 속에서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영아 살해는 엄청나게 많았다. 내버려 두면 알아서 안 하니까 규범이 생긴다. 우리가 보기에 우리 사회에서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통용되고 있는 어떤 도덕 규범들이 있다. 그런 것들이 사실은 인간이 자연 상태에서 안 하던 짓거리이다. 그것을 문명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기본적으로 우리가 정치적인 이념에서 보수적인지 진보적인지를 얘기할 때 보수적인 사람들은 대체로 자연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몸에 배어 있어서 따로 제재를 가하지 않아도 할 만한 것들을 하는 사람들이고, 진보적인 것은 굉장히 문명인들이 해야 되는, 노력해야 되는, 노력해야 되는 것 중에서도 우리 인생은 짧기 때문에, 짧은 인생에서 체감되지 않는 것들은 노력하기도 쉽지 않다. 대표적인 것이 오늘 우리가 얘기하는 지속가능성과 환경정의이다.
오늘날 아주 많은 진화 심리학자들이라든가 또는 경제학자들, 오늘날 경제학이라고 하는 학문은 학문 자체가 성립을 안 할 정도로 무너졌다. 결국 경제학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기본적으로 인간의 욕망을 측정할 수 있어야 되는데 측정이 안 된다. 경제학에서 대표적인 이론이 한계 효용체감의 법칙이다. 예를 들어 피자를 먹을수록 효용이 줄어든다는 것인데, 피자만 그렇고, 인간의 욕망은 그러지 않다. 경제학에서는 인간이 가진 어떤 욕망을 정확하게 측정을 해야 그것에 근거해서 고전파 경제학은 성립을 한다. 사실 욕망이라고 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조건화된 것이다. 지속가능성, 환경정의를 얘기할 때 경제학자들이 뭔가 얘기를 하는데 틀린 얘기라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이라고 하는 것은 이 지구를 완전히 거덜 낼 때까지 욕망은 뻗쳐 나가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통제를 하지 않는 한 이것은 해결될 수가 없는 문제이다. 환경정의나 지속가능성은 경제학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가 되었다. 정치적인 문제라고 하는 것은 공동체에서 특정한 이념에 합의를 하고 그 합의된 이념을 궁극적으로 놓고 나서 그것으로부터 규범을 이끌어내서 그 규범을 지키자고 해야 된다. 환경 문제는 무임승차가 가장 쉽게 일어나는 영역이다. 그러니까 이 문제는 결국엔 정치적인 문제에 해당한다. 공부를 잘하는 것은 우리가 쉽게 넘어갈 수 없는 영역이고, 공부를 쉬지 않고 계속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공부를 지속적으로 꾸준히 하는 것이 결국 인간의 흑화를 막는 아주 중요 방법이다. 45세 이전에 공부하는 것을 습관을 들여놓지 않으면 55세 이후가 되면 지적인 활동이 중단된다. 그러니까 공부를 지속적으로 하는 게 되게 어려운데, 공부를 지속적으로 하는 데 필요한 게 만년필이다. 공부라고 하는 건 눈에 보이지 않는 행동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행동을 계속 이끌고 가려면 겉으로 드러나는, 말하자면 문구나 이런 것에 대한 페티쉬가 있어야 한다.
책 360페이지를 보자.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이라는 말 중간에 있다. "지속가능성은 어떤 과정이나 실천이 지속될 수 없는(can't) 이유를 상세히 설명하려는 용어일 뿐만 아니라", ‘지속될 수 없는’에 can't라고 되어 있다. 그것은 사실fact의 영역이다. 가령 지구를 계속 이렇게 더럽혀서는 지구가 지속되지 않아요 라고 것을 말한다. 그런데 "그 과정이나 실천을 지속하기 위해서 하지 말아야 할(shouldn't) 것이 무엇인지를 함축하는 용어이다." ‘하지 말아야 할’은 shouldn't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도덕적인 영역이다. 지구는 지속될 수 없어, 그러니까 우리는 이걸 하면 안 돼라고 하는 것, 도덕적인 명령을 함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냥 단순한 자연과학의 용어가 아니라 인간은 무엇을 해야만 한다 라고 하는 도덕적 명령이다. 도덕의 명령이라고 하는 것은 개인의 차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규범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367페이지를 보면 행동과 실천이 있다. 우리가 보통 행동이라는 말과 실천이라는 말을 평소에는 아무런 구별이 없이 쓰는데, 거기 보면 "모두 몸의 움직임을 함의하는 용어이지만 중대한 인식론적 뉘앙스의 차이가 있다." "행동이라 함은 개인의 자유의지, 대개는 합리적 사유의 결과로 몸을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뭔가를 할 때를 행동behavior이라고 얘기한다. 그 행동은 개인의 자유의지, 그러니까 개인 차원에서 뭔가를 하는 것을 action이라고 하는데, action이라는 말 아래에 behavior는 개인 차원으로 하는 것이다. 내가 알아서 하는 것이 행동이다. 그래서 "신고전주의 미시경제학이나 논리실증주의 지리학에서 몸의 움직임은 그런 행동으로 사유한다." "반면 실천은 행위자의 관계적 연결망 속에서 나타나는 몸의 움직임이며, 사회적 담론을 수행하는 과정"이라고 되어 있다. 실천practice이라는 단어는 평소에는 이렇게 안 쓰는데 지속가능성이라든가 이런 것을 얘기할 때는 행동과 실천이라는 말을 구별해서 쓴다. 그러니까 실천적 대안이라고 하면 각자가 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합의를 해서 정치적으로 합의해서 규범을 만들어내서 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평소에 쓰는 말인데 행동이라고 하나 실천이라고 하나 그냥 원래 해야 될 것을 하면 되지 라고 하지만 사람들과 서로 커뮤니케이션하는 과정에서는 이 개념들을 써야 되는 것이다. "생수를 피하고 수돗물을 마시는 몸의 움직임"에서 "생수보다 수돗물을 선호하는 개인의 선택에 초점"을 두는데, "시장 가격을 고려한 개인의 합리적 의사결정의 결과로 이해"하고 설명한다. "생수를 거부하고 수돗물을 마시는 행위는 다양한 관계 속에서 형성된 하나의 사회적 실천일 수 있다." 그러니까 같은 어떤 액션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behavior로 보느냐 아니면 practice로 보느냐, 꼭 practice라는 단어를 써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는 이제는 어떤 행동이든 행위자의 관계적 연결망 속에서 나타나는 몸의 움직임을 항상 생각해야 된다. 사회적으로 내가 어떤 연결망 속에 들어있는가 이거를 모르고 살아가서는 안된다.
지속가능성은 그러니까 무엇을 할 수 없는 이유를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함축한다. 당연히 도덕 규범이 들어가는 것이고, 도덕규범이라고 하는 것은 각각의 개인이 결심해서 실천하는 게 아니라 사회적으로 강제되는 것이다. 어떤 사회에서는 그게 도덕규범이고 어떤 사회에서는 도덕 규범이 아닐 수도 있다. "화석연료는 지속 불가능하다." 이것은 화석연료의 연소를 지속하지 말아야 한다 라고 되는데, 이것은 제가 항상 조심해야 된다고 얘기하는 것에 어긋나는 것이다. 저는 자연적 사실로부터 당위를 이끌어내는 것, 즉 자연주의적 오류는 절대로 범해서는 안 된다 라고 얘기하는데,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정의에 관한 한은 자연적 사실로부터 당위를 이끌어내야 한다. 그래서 환경정의에 관한 한 설득하기가 어렵다.
다시 정리해서 말하면 지속가능성이라는 개념은 자연이 가지고 있는 버틸 수 있는 힘에 대해 우리의 객관적인 자료에 근거해서 무엇을 해서는 안 되는 당위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이것이 지속가능성에 포함되어 있는 기본적인 것이다. 그래서 361페이지에 보면 "지구 환경회의", "유엔환경개발회", 그다음에 "유엔기후협약", 사실은 이런 것들은 오래전부터 있었는데 제대로 지금 실천이 잘 안 되고 있다. 362페이지를 보면 "글로벌 수준에서는 교토의정서와 파리 협정과 같은 국제적 협약이 체결되어 왔다." 그다음에 인구와 경제 성장의 문제를 보면 "유럽의 산업혁명 때부터 인간은 수적으로 지구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것을 인류세anthropocene라고 한다. 인류세는 환경공학에서만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류세의 관점에서 국토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 국토 계획을 어떻게 세울 것인가 라는 얘기도 한다. 363페이지에 있는 그래프를 보면 심각한 문제이다. 세계 인구 규모, 세계 인구의 연간 증감 규모가 나와 있는데, 산업혁명이라는 것을 대개 1700년대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데, 산업혁명 이후에 세계 인구 증가, 1950년대까지는 완만하게 올라가다가 지금은 전 세계 인구 규모가 지금은 거의 80억이다. 어렸을 때만 해도 세계 인구가 60억이라는 얘기를 들었는데 지금은 80억이다. "인류세라는 아이디어는 경제의 정치생태에 도전하려는 비판적 에너지를 토대로, 구조적 불평등과 더불어 경관, 해양, 환경, 도시의 취약성과 위험을 드러내고자 한다." 인류세는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다. 인류세 지층의 대표 화석은 "플라스틱, 콘크리트, 닭 뼈", 아주 심각한 문제이다.
왜 기후변화 문제라든가 이런 것들이 심각한가. 한마디로 말해서 성장에 대한 과도한 환상 때문이다 라고 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합의된 것이다. 365페이지를 보면 "국내 총생산(GDP) 통계는 경제적 행복을 제대로 평가할 수 없다." 꼭 기억해 놔야 된다. GDP 통계라고 하는 것은 "무기 거래에서 발생한 소득의 가치", 마이너스적인 것들도 GDP에 포함이 된다. GDP 지수가 가지고 있는 한계가 있다. GDP는 그냥 평균을 내기 때문에 "특정 영토 내에서 장소나 공동체 간 엄청난 불평등을 은폐하는 효과가 있다." 한국은 GDP 대비 제조업 비율이 한 30% 되는데, 이 정도가 되는 나라는 한국, 대만, 독일 정도이다. 그러니까 한국은 제조업 비율이 굉장히 높은 나라다. 여기서 강대국이라는 개념과 선진국이라는 개념을 항상 생각해야 한다. 강대국이 되려면 GDP 중심으로 가면 된다. 그것은 지속가능한 강대국이 되기는 어렵다. 미국처럼 전 세계의 인재를 빨아들이는 강대국이란 모를까 우리는 전 세계 인구가 오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한국 영토 내에서의 장소나 공동체 간 엄청난 불평등 이런 것도 문제를 해결해야 된다. 결국 선진국을 지향하는 강대국이 되어야 하는데 그게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GDP는 좋게 말하면 착각이고, 나쁘게 말하면 성장의 성장을 거듭하기 위해 지속불가능한 경쟁적 충동을 일으키는 중독증이다." 말이 좀 과한 것 같긴 한데 어쩔 수 없이 그 문제는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다.
지속가능성이라고 하는 단어를 많이 들어봤을 것이다. 지속가능성이라고 하는 단어는 사실상 우리가 지구 위에 살고 있는 인간으로서 인간이 문명인으로서 살아가려면 반드시 기억해 둬야 되는 어떤 그런 태도이다. 내가 살 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뭐 이런 것까지 신경 쓰면서 살아야 되나 라고 생각하면 해야 하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368페이지에 사회적 실천으로서의 세탁, 이런 것을 잘 봐야 된다. 어떤 행동을 바꾸기 어렵다고 해서 안 바꾸면 안 되니까 그렇다. "실천은 '느슨하게 사회적으로 공유'된다. 사람들마다 세탁 방법은 다르지만, 사회 집단으로서는 일정한 유사성을 공유한다. 우리는 빨래를 '빨래'라고 부른다. 실천은 '반복되는 사회·공간적 과정을 통해서 재생산'된다. 실천은 매번 '수행'할 때마다 그 이전과는 미묘하게 다르다." 이 얘기를 왜 하는가 하면 우리가 빨래하는 것에 대해서 빨래하는 방식이 그동안 계속 변했다. "세탁이라는 인간의 실천이 지난 수백 년 동안 거쳐온 장기적 변화를 생각해 보자."여러분들이 이 세탁을 보면서, 이것을 외워야 되는 게 아니라 어떤 인간이 세탁이라고 하는 것이 그저 내가 옷을 깨끗이 빨아입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나 다 하는 것이다. 그 부분에서 이제 우리는 과연 지구의 자원을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것을 생각해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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