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시학 강독 3-2

 

2024.05.01 🎤 시학 강독 3-2

드라마의 여섯 가지 구성 요소(1)

• 일시: 2024. 5. 1. 오후 7시-9시  장소:수원시글로벌평생학습관

• 강의 안내: https://learning.suwon.go.kr/lmth/01_lecture01_view.asp?idx=3672
• 강의 자료: https://buymeacoffee.com/booklistalk/20240501-suwon


강의자료 "성격과 사유방식"에서 "사유방식은 이성적인 행동에 포함된 지성적 능력"이다. dianoia는 "적당한 말(the suitable)과 할 수 있는 말(the possible)을 하는 능력"이다. 사유 방식은 두 가지이다. 지성적 능력을 갖고 있다 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가령 성호경을 그린다고 해보자. 십자가라고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우리가 기억하기 위해서 하는 행위, 아주 단순한 행위이다. 그것은 이제 표징sēmeion이고, 이것 뒤에 숨어 있는 많은 스토리를 생각할 수 있는 게 dianoia, 이성의 힘이다. 그러니까 놀라움과 표징 사이에 철학은, 플라톤이 《테아이토스》에서 철학은 놀라움taumazein에서 시작한다고 말했다. 놀라움에서 시작을 하지 거기서 끝나는 건 아니다. 내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태어났구나. 인생이라고 하는 건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해서 시작되는 게 아니구나. 그런데 나는 열심히 살 필요가 있겠나. 내가 스스로 끝낼 수도 없는데 왜 열심히 살아야 하지. 예전에는 기서양에서 기독교가 이렇게 도입되기 전에는 위대한 철학자들은 자살이 자기의 삶을 그나마 절반이라도 완성하는 거라고 얘기한 사람이 많다. 불교의 교리는 우주는 덧없는 것, 항상된 것은 없다는 것, 무상하다는 것이다. 고등 종교들은 생명이 태어나서 죽는 과정을 이렇게, 자기가 아직 죽지도 않았고 살아가고 있는 중간인데도, 태어나서 죽는 과정을 남의 일처럼 보는 것이다. 이렇게 보고 그것에서 sēmeion을 찾아낸다. 그게 고등종교이고, 그것을 하는 것이 dianoia이다.  

일본 사람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덕목이 뭐냐 하면, 원래 한국 사람들은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우리나라에 들어온 일본 식민지 잔재 중에 가장 큰 잔재가 애니미즘이다. 우리나라의 무당들은 성행하지 않았다. 조선시대 때 유교는 무당 억제 정책이 심했다. 우리나라에서 무당들이 횡행하고 사이비 종교가 등장하기 시작한 게 일제 때이다. 나라가 앞날이 어두우니까 그렇다. 두 번째는 원래 한국 사람들은 그렇게 부지런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일본 사람은 마지메まじめ, 성실한 걸 좋아한다. 죽도록 열심히 일하는 거 쉴 새 없이 일하는 것, 열심히 일하는 것을 마지메まじめ라고 한다. 일본 사람들에게 최고의 칭찬이다.  

사유 방식이라고 하는 것은 뭔가 이상적인ideal 것을 파악하는 지성적 능력을 말하는 것이고, ideal한 것을 파악해서 그것을 모방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파악하는 능력에 덧붙여서 the suitable과 the possible을 하는 능력, 적당한 말과 할 수 있는 말을 하는 것이다. 그 두 개를 묶으면 appropriate, 적절하다고 한다. 이것을 희랍어로 metrion이라고 한다. metrion을 대게 중용이라고 번역하는데, 중용이라고 번역하면 틀리고, 적절함이라고 번역해야 한다.  

가령 제가 강의를 하러 올 때 자동차로 운전하는 목적은 편리하고 안전하게 가서 강의를 잘하기 위해서이다. 목적론적으로 생각을 한다. 그러면 이 운전이라는 게 적절한suitable 운전이다.  내가 여기서 광란의 질주를 할 수도possible 있다. 나는 다른 사람이 얘기를 할 때 공부하고 관계가 없으면 아무 생각이 없다. 그런데 저 사람하고 나하고 적절한 관계를 유지해야겠다고 하면 suitable한 말을 해야 한다. 내가 그것에 대해서 아무 관심이 없어도 적당히suitable 그것에 대해서 반응을 하고 그래야 한다. 적당한 말(the suitable)과 할 수 있는 말(the possible)을 하는 능력이 없다는 것은 dianoia가 없다는 것, 생각이 없는 것이다. 생각이 없다는 것은 말을 할 줄 모르는 것인데, 말을 하는 건 행위이다. 고대 드라마는 성격과 행위가 다 연결되어 있다. 가령 내성적인 성격은 사람들에게 연락을 안 하는 행동으로 나온다. 성격과 행위 사이에 거리가 없다. 어떤 성격을 가진 사람이 어떤 행위를 하는지는 성격 목록과 행위 목록의 일대일 대응에서 나올 수 있다. 이 고전 드라마는 성격이라고 하는 것과 그 사람의 행위라고 하는 것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사유방식은 적당한 말과 할 수 있는 말을 하는 능력이고 이는 정치술과 수사술의 과제이다. “말에 의해 산출되어야 하는 모든 효과는 원칙적으로 사유 방식과 관련되어 있다."  생각이 깊으면 말도 잘 된다는 얘기이다. 이 말을 내가 하고 싶지는 않은데 이 상황에서는 이 말을 해야 된다 라고 생각을 해야 된다. 그 말을 하는 건 행위인데, 그 말을 함으로써 그 상황을 자기가 통제를 하든 그 상황을 부드럽게 만들든 하는 것이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아무 행위도 하지 않는 것이다. 말이 행위라는 걸 꼭 생각을 해야 된다. 

"성격은 사람의 선택, 즉 그가 무엇을 선호하고 회피하는지를 분명하게 한다. 선호와 회피가 포함되지 않은 말은 성격을 보여주지 않는다." 선호와 회피가 포함되는 말은 성격을 보여주는데, 그 말이라고 하는 건 발설되는 것이니까 발화행위이다. 그러니까 아리스토텔레스의 드라마론에 따르면 '내가 말은 그렇게 해도 마음은 그게 아니야'라고 하는 건 거짓말이다. 마음이 그러니까 말을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이 사람은 얘기하는 것이다. 이는 선호와 회피를 행위로써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그다음에 "성격은 인간의 운명ēthos anthrōpō daimōn"이라고 하는 말은 헤라클레이토스이다. 성격은 인간의 운명이라는 말은 그 사람의 성격이 행위를 만들어낼 것이고 그 행위가 그 사람의 인생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운명이라는 게 정해진 게 아니라는 것인데, daimōn이라는 말은 인생의 행로, 영혼의 길 그런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그러면 여섯 가지 요소를 얘기했고 비극의 정의로 가보겠다. "비극은 완결되어 있고 일정한 크기를 가지고 있는 탁월한 행위의 모방"이라고 했다. 무엇을 모방하는가, 이상화된 행위를 모방하는 것이다. 비극은 모방인데, 모방이 여러 가지가 있다. 모방의 종류에는 노래도 있고 비극도 있고 희극도 있고 그림도 있다. 행위라고 하는 것은 방금 전에 봤던 것처럼 그 사람의 성격과 사고 방식, 사유 방식이 행위로 나오는 거니까 탁월한 행위라고 하는 것은 성격과 사고 방식의 표출이다. "부분들에서 따로 사용되는 각종 요소로 예술적으로 장식된 언어를 수단으로 하는," 물론 노래가 들어가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비극은 언어적 표현을 가지고 한다. 노래와 언어적 표현이 모방의 수단이다. 초창기 비극은 노래가 많았는데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로 오면서 점차로 비극의 언어적 표현이 많아졌다. 코로스 중심에서 삽화episodion 중심으로 들어갔다 라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언어를 수단으로 한다 라는 점에서는 서사시하고 비슷하다. 그리고 탁월한 행위를 꼭 모방하지는 않는데, 서사시에 보면 못난 놈들도 많이 나온다. 

그다음에 "서술의 방식이 아니라 [등장인물의] 행위를 [무대 위에서] 실행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서술의 방식으로 하는 건 서사시이다.7강에서 드라마와 서사시를 하게 될텐데 서사시와 드라마가 어떻게 다른가는 이런 걸 보고 하는 것이다. 행위를 무대에서 실행하는 방식으로 하는 것은 드라마이고, 서술의 방식으로 하는 것은 서사시이다. 그러면 그것이 언어적 표현이니까 바로 모방의 수단이 된다. 행위를 무대 위에서 실행하는 게 모방의 방식이고, 노래나 언어적 표현으로 쓰는 게 모방의 수단이고, 무엇을 모방하는가가 모방의 대상, 이 세 가지만 가지고 있으면 기본적으로 드라마는 규정이 된다.  탁월한 행위, 언어를 수단, 행위를 [무대 위에서] 실행하는 방식, 이 세 가지만 있으면 드라마는 일단 형식적으로 규정이 된다.  강의는 무엇인가. 탁월한 텍스트를 읽는 행위이다. 그림을 그려서 보여주는 게 아니라 언어를 수단으로 해서 설명한다. 그다음에 행위를 무대에서 실행하는 방식이 아니라 서술의 방식으로 가르친다. 탁월한 텍스트를 여러분들이 읽고 탁월한 텍스트를 언어를 수단으로 해서 서술해서 가르치는 것이 강의이다. 그러니까 사실 이 세 가지만 하면 웬만한 행동은 다 규정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연민과 공포를 통해 바로 이 감정들의 정화淨化를 이끌어내는", 이것이 지금 제6장에서 덧붙여진 내용이다. 그래서 카타르시스를 여섯 번째 시간에 한다. 강의는 탁월한 텍스트를 언어를 수단으로 서술의 방식으로 가르치는 것이다. 그런데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을 통해서 여러분들의 정신을 고급스럽게 만드는 것이라고 하면 강의 듣는 사람을 고려한 목적을 얘기한 것이다. 바로 그것이다. 겁니다. "연민과 공포를 통해 바로 이 감정들의 정화淨化를 이끌어내는 것"이 드라마의 목적이다.  목적을 덧붙임으로써 비극의 정의가 완성이 된다. 

자연물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목적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아도 규정이 끝난다. 인간이 하는 짓은 목적을 덧붙이지 않으면 규정이 안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뭔가를 정의한다 할 때 반드시 그것의 목적을 덧붙여줘야 그것에 대해서 완전한 규정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어떤 것을 받아들이냐는 각자의 선택이다. 인생이 무엇인가를 말할 때 그냥 내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태어났으니 그냥 사는 거지 그리고 나도 모르는 순간에 죽는 거지라고 말하면 aristotelian perspective가 아닌 것이다. 인생의 목적을 계속 규정하려고 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생각이다. 그것을 what is question이라고 한다. 그것은 무엇인가, definition을 묻는 것이다. what is question에 대답하는 방법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항상 telos를 덧붙여야 한다.  지금 이 드라마에서는 관객의 입장에서 telos를 정한 것이다. 

성격은 인간의 운명ēthos anthrōpō daimōn이라고 할 때 다이몬daimōn은 사실 영혼이다. eudaimonia의 daimōn. 성격은 인간의 운명이라고 많이 번역했는데, 항상 좋음이라고 하는 것을, eudaimonia, 좋은 영혼이라고 하는 것은 좋음이라고 하는 것을 전제로 한 목적이 있어야 된다. 드라마를 보고 사람들이 미쳐버렸다 그러면 좋은 드라마라고 보기 어려울 것이다. 여기서 바로 비평의 질적 차원이 성립하는 것이다. 비평을 그냥 '저 드라마 잘 만들어졌네'라고 말하면 형식적인 구성만 따지는 것이다. 그런데 그 드라마가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주었는가, 관객에게 diagōgē, 즉 고급스러운 향유를 주었는가 이런 걸 따지면 질적인 비평이 되는 것이다. 구성만을 따져 물으면 그 드라마에 대한 형식적인 비평이 되는 것이고, 그 드라마가 과연 관객들의 향유diagōgē에 기여하고 있는가 아닌가까지 따져 물으면 그 드라마는 그냥 드라마가 아니라 윤리학하고도 연결된다. 좋은 영혼이라고 하는 것을 생각해 봐야 되고, 그 관객들의 정신을 고양시키느냐 고양시키지 않느냐 이런 것도 따져봐야 되니까 이때부터 질적 비평이 들어가게 된다. 질적 비평이 들어가야 되는 부분들을 문예비평에서 많이 따져 묻기 시작한 것, 서양에서 문예비평이라고 하는 건 비교적 현대적인 그런 것인데, 낭만주의 이후에 일어난 일이다. literary critic이라고 하는 것이 생겨난 것이 프리드리히 슐레겔과 같은 낭만주의자들 이후에 일어난 일이다. 

낭만주의에 있어서 슐레겔은 중요하다. 그런데 낭만주의라는 표현은 널리 쓰이는 만큼 사람들이 알고 있지 않다. 널리 쓰이고 있다고 해서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는 건 아니다 라는 것이 독일의 격언이다. 기독교가 서양 사회를 지배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이런 비평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 무의미하다. 형식적인 완성도 따위는 필요 없고 신에 대한 신앙심만 잘 드러내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색깔을 정해놨다. 흰색은 순결함 그리고 성당에 가면 신부들이 두르는 띠도 시기마다 다르다. 그런 신학의 시대에는 비평이 발전할 수가 없다. 좋은 영혼이라는 게 성서에 나와 있는데 뭐 하러 따지는가, 그냥 외우면 된다.  그런데 근대 이후에 계몽주의 시대에는 자연과학적으로 충족되지 않으면 인정되지 않는다. 인간 정신이 가지고 있는 질적인 풍요로움과 이런 것들에 대한 자극, 슐레겔과 같은 낭만주의자들에게 그런 업적이 있다. 그 사람들이 의지했던 세계관이 바로 이 목적론적 세계관이다. 데카르트라든가 뉴턴이라든가 이런 사람들은 이것을 완전히 부인한다. 데카르트를 그려놓은 유명한 그림 중에 하나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발로 밟고 있는 그림이다. 그래서 근대적 인간의 특징이다 라고 하면 반 아리스토텔레스인 것, 목적이 없는 것이다. 그게 과학주의적인 사고 방식인데, 그런 과학주의적인 사고방식의 세계에서 세계관의 전환을 가져온 사람들이 바로 낭만주의자들이다. 

데카르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들을 몇몇 들자면 혈액순환설의 윌리엄 하비.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피가 도니까 움직인다. 잘 돌기만 하면 되지 왜 도는지를 묻지 않는 것, 이제 의학의 목적이 된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드라마를 잘 만들기만 하면 되지가 아니다.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켜야 된다고 말한다. 잘 만들어진 드라마라고 하는 것과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킨다고 하는 것은 사실 질적으로 다른 영역이다. 그런 것들을 슐레겔이나 이런 사람들이 아리스토텔레스 읽어서 발견한 게 아니라 피히테를 읽으면서 발견했다. 피히테를 읽으면서 인간 정신이 가지고 있는 그런 것들을 생각을 한 것이다. 피히테를 읽으면서 아리스토텔레스를 다시 참조하게 되고 뉴턴의 물리학과 같은 것을 모범으로 삼아서 철학을 한다는 것이 굉장히 인간에 대한 모독일 수 있겠구나 라고 생각해서 철학을 목적론의 세계에다가 가져다 넣고 다시 한 번 아리스토텔레스적으로 해봐야겠다, 그러니까 상당히 반근대적이다, 그런 사람이 헤겔이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읽는 것, 《시학》을 이렇게 열심히 가르치는 이유는 일반인들에게 아리스토텔레스를 읽는 인문서가 《시학》이기 때문이다.  《시학》을 그냥 예술론으로 읽으면 안 되고 세계관으로도 읽을 수 있다. 서구 역사에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 토마스 아퀴나스라든가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라든가 헤겔이라든가 낭만주의자들Romantiker 이런 사람들의 철학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다음 주에는 구성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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