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공권: 중국정치사상사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18. 3. 14.
중국정치사상사 - 소공권.손문호 지음, 최명 옮김/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역자의 말
역자의 일러두기
原著의 凡例
서론
1. 중국정치사상사의 기점
2. 사상발전의 대세에 의한 시기 구분
3. 사상의 역사적 배경에 의한 시기 구분
제1편 봉건천하의 정치사상 - 창조시기
제1장 선진정치사상의 유파
제2장 공자(孔子)
제3장 맹자(孟子)와 순자(筍子)
제4장 묵자(墨子)
제5장 노자(老子)와 장자(莊子)
제6장 관자(管子)
제7장 상자(商子)와 한자(韓子)
제2편 전제천하의 정치사상 - 인습시기
제8장 진·한의 묵가(墨家)와 법가(法家)
제9장 가의(賈誼)에서 중장통(仲長統)까지
제10장 『여씨춘추(呂氏春秋)』에서 왕충의 『논형(論衡)』까지
제11장 왕필(王弼)에서 갈홍(葛洪)까지
제12장 한유(韓愈)·유종원(柳宗元)·임신사(林愼思)
제13장 당(唐)과 오대(五代)의 도가(道家)
제14장 양송(兩宋)의 공리(功利)주의
제15장 원우당(元祐黨)과 이학가(理學家)
제3편 전제천하의 정치사상 - 전변시기(상)
제16장 명대(明代)의 전제사상에 대한 반발과 옹호
제17장 왕수인(王守仁)과 이지(李贄)
제18장 명말청초(明末淸初)의 반(反)전제사상
제19장 왕부지(王夫之)
제20장 태평천국(太平天國)
제4편 근대국가의 정치사상 - 전변시기(하)
제21장 무술유신(戊戌維新)
제22장 양계초(梁鷄超)
제23장 무술 전후의 유신사상
제24장 신해혁명(莘亥革命)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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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도에 배포된 강유원 선생님의 책읽기20분을 들으면서 참고도서로 소공권 교수의 중국정치사상사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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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7 사상발전의 대세에 의한 시기 구분
중국의 문화를 논하는 서양 사람들은 항상 그 보수에의 편향에 관하여 말한다. 그리하여 학자들까지도 간혹 중국의 정치 사상이 오랫동안 정체되어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고 의심한다. 그러나 사실은 중국에서 정치이론의 변화가 심하고 빠른 것이 유럽과는 비교할 수는 없을 지라도, 우리가 조금만 주의 깊게 관찰하면 그것이 대단히 중요한 변화를 겪어왔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그 변화의 기복을 살펴보면 지난 2천여년 동안의 정치사상사를 다음과 같이 네 시기로 대별할 수 있다.
1. 창조시기 : 공자의 탄생(551 BC)에서 진시황의 통일(221 BC)에 이르는 약 3백 년의 기간으로서 춘추 말기에서 전국 시대를 포함한다. 학자들은 보통 이 시기를 선진시대라고 부른다.
2. 인습시기: 진·한에서 송·원(221 BC ~ 1367 AD)에 이르는 약 천 6백 년.
3. 전변시기 : 명초에서 청말(1368 ~ 1898)에 이르는 약 5백 년.
4. 성숙시기 : 삼민주의의 성립부터 현재까지.
선진시기가 창조의 시기인 것은 분명하며, 여기에 대하여는 여러 말이 필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공자가 스스로를 일컬어 "배운 것을 전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고 하였고, 또 그 제자의 하나가 그를 가리켜 "요·순의 가르침을 전하고, 문무를 본받아 밝혔다"고 말하였다 .1또 묵자가 "하의 정사를 이용했다"고 하고, 그는 매양 요·순·우·탕·문·무를 아울러 찬양하는 말을 했다. 도가와 법가도 황제를 추앙하여 존경했다. 또 법가는 때때로 여러 나라의 형서에 의거하여 이론을 세워 이야기했다. 이와 같이 제자의 학설은 모두 그 근원이 있고, 마음에서 그냥 나오거나 공중에서 생겨서 주장된 것이 아니었다. 창조라는 말이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하여도 좋다. 그러나 우리는 창조라는 것이 무에서 유가 생기는 것을 일컫는 것은 아니라고 해석하고자 한다.
춘추 이전의 사람들도 정치 생활을 하였으니, 어찌 정치에 대한 관념이 없었겠는가? 「시경」과 「서경』과 같은 옛 책에 나오는 천명과 민본이나 예악과 병형에 관한 개념들은 이미 모두 선진의 각 학파들이 채용했던 것이고, 그것들은 중국 정치 사상의 기본적인 요소를 이루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옛 개념들은 본래 체계적이 못 되었고, 그 함의 또한 비교적 간단했다. 우리는 그러한 과거의 것과 선진 대가들이 발전시키고 바로 잡은 개념들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그것들은 그 후에 비로소 찬란하게 문채를 이루고 온축이 심원하여져서 각 학파의 학설을 이루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옛 것을 녹여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일은 실로 창조라고 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다. 예컨대, 인부가 집을 지을 때 쓰는 나무들, 벽돌, 기와 등은 모두 그 자체로 기성품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새로운 건축물임을 방해하지는 않는다.
「한서」의 「예문지」에는 제자들이 궁중의 여러 관직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보인다. 공자는 주나라를 따랐고, 「시경」과 「서경」 및 육예에 대한 그의 가르침은 아마도 제자들 가운데 초기의 관학에 가장 가까운 것이었다고 추측된다. 그리하여 장학성은 "육경이 모두 선왕의 정치 경전"이라 하였고, "공자는 주공의 도를 배워서 그것을 끝까지 이행했다"고 말했다. 이러한 것으로 미루어 보면, 선진 시대의 정치 사상은 이미 춘추전국시대 이전에 구체화된 것이고, 유가·묵가·도가·법가의 학문은 전통에의 인습이고 창조가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이러한 주장에도 일리가 있기는 하나, 우리의 견해와 반드시 모순되지 않는다고 하기는 어렵다.
유가를 예로 들어 설명하여 보자. 공자의 정치사상이 비록 성왕과 주공의 제도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해도, 그것이 옛 제도를 그대로 답습한 선 왕의 정치를 가지고 후생을 가르치려고만 한 것은 아니었다. 공자는 옛날의 정치 가운데서 새로운 의미를 반드시 찾아서 스스로 일가를 이루고, 마침내 70제자를 마음으로 설복시켜서 그 자신을 종사로 받들게 하였다. 공자가 주공의 정치 제도와 규범을 그대로 전하기만 하고, 문자 그대로 조금의 변경을 가하지 않았다고 하자. 그러나 「시경」과 「서경」과 육례는 당시에도 아직 관서로 남아 있었고, 문왕과 무왕이 다스린 기록이 아직 진의 분서를 겪지 아니하여서 주나라와 노나라에 소장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읽은 자가 어찌 공자뿐이겠는가? 「좌전」에 기록된 바와 같이 춘추시대의 사대부들의 대화 가운데는 『시경」과 「서경」을 인용할 수 있었던 자가 적지 않았다는 것은 바로 그 예인데, 그렇다면 어찌하여 유학은 공자를 그 조종으로 삼는다는 것인가? 오히려 공자가 문왕과 무왕이 이룩한 법규를 좇으면서, 거기에 그 자신의 창조를 더하였고, 그로써 그의 가르침의 기초를 삼았다고 하는 것이 진실에 가까울 것이며, 그래야만 그의 업적을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선진시대를 창조의 시대라고 인정하였는데, 여기에는 위에서 언급되지는 아니하였으나 마땅히 주의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이유가 아직도 남아 있다. 즉 제자의 학설은 기원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들은 실제로 "나로부터 출발하여 옛 것을 만듦"으로써 후학들의 종파를 열었던 것이다. 진·한에서 송·원에 이르기까지 정치사상은 비록 새로운 의의와 새로운 내용이 없지 않았다고 하여도 그 중요 관점과 기본 원리에 있어서는 결국 선진의 범위를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명·청에 이르러 해상 교통이 열린 이후 서양 학문이 수입되기까지는 사상이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중국의 정치 사상사를 연구하는 자들은 춘추 시대가 시작되기 전에 대하여는 논의하지 않아도 될지 모르지만, 선진시대를 그들의 모든 연구의 기점으로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 시기의 중요성에 관하여는 더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요컨대, 선진사상은 춘추시대 전에 대하여는 옛 것을 녹여서 새 것을 주조한 것이고, 진·한 이후에 대하여는 종파를 열어 그 범위를 세웠던 것이다. 창조라는 말은 이러한 의미로 쓰여진 것인데, 그것이 그렇게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닐 것이다.
선진 시대의 창조가 무에서 생긴 것은 아니었다. 진·한에서 송·원까지도 인습시기라고 하나 단순한 모방만은 아니며, 따라서 발전과 개조가 전혀 없이 답습한 것은 아니었다. 시황제가 육국을 병탄하고 봉건 천하를 군현제도로 바꾸면서, 그는 그 후 2천 년 동안 계속된 전제통일 정치체제를 만들었다. 사회의 환경은 이제 달라졌다. 말하자면, 선진시대처럼 백가가 경쟁하고 각자가 신학설을 만들어내는 것이 유행이던 환경은 더 이상 계속되기 어렵게 되었던 것이다.
환경이 바뀜과 동시에, 그리고 환경이 바뀌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진·한 이후의 사상가들은 비록 전인들의 관념과 용어를 답습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전인들과는 전혀 다른 정치적 현실을 겪게 되었고, 따라서 그들이 지녔던 관념의 내용과 그들이 사용했던 용어의 함의는 고인의 그것과 일치 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엄격하게 말하자면, 진·한 이후의 정치사상은 옛 것의 이름을 변경한 것은 아니지만, 실로 옛 것의 실질을 변경했던 것이다. 우리는 이 시기의 사상이 그 창조 정신에 있어서 선진시대의 풍요로움을 훨씬 따라가지 못하고, 사상가들 또한 창조의 의도를 갖지 않았다고 보기 때문에 '인습'의 시기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천 6백여 년의 정치 이론이 주나라 말의 옛 것을 그대로 지켰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 주의해야 할 것은 선진시대의 제자가 각기 문호를 세우고, 후학 사이에는 논쟁이 생기고 또 서로 간의 공격이 극렬했다는 사실이다. 맹자는 양주와 묵적에 반대하고, 순자는 12명의 제자들을 그르다고 하고, 묵자는 유가를 비난하고, 장자가 제가의 도술을 평가하고 꾸짖은 것은 모두 아주 좋은 예이다. 당시 그들의 목적은 스승의 학설을 존중하고 이단을 없애기 위한 것이지만, 사실은 한 주장이 있으면 다른 주장이 나오고, 각기 옳고 그름이 있으면서 서로 승부를 교환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군웅이 서로 다투어 사냥을 하다가 사슴을 잡기는 하였지만 누구의 손에 의한 것인지를 모를 지경과 같았다. 그러나 진·한에 이르러서는 그 후학들의 서로 다툼이 이미 오래되었고, 접촉도 이미 많았고, 그들 사이의 절충과 조화가 생기게 되어서, 학술은 혼동되는 경향을 나타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문호의 포기를 주장하는 자는 마침내 잡가의 학을 이루기도 하고, 문호를 견지하던 자도 때로는 이단에 가담하기도 하였는데, 그것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스승의 학설에 동조케 하기 위함이었다. 가담과 동조의 정도가 같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한 학설들의 순수성과 혼합성도 일정하지 아니했다. 그 결과로 주말과 진·한의 학술은 항상 다음의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그 하나는 학의 이름은 그대로 남아 있지만 사상의 내용이 변화된 것이고, 그 둘은 한 학파 속에서 가지가 쳐져서 여러 학파가 혼합된 형태로 나타난 것이었다.
그로부터 선진시대의 학파들이 계속 남아있는 곳에서는 비록 학파 사이의 구별이 삼엄하다 해도, 그것은 구학의 주지만을 지키는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 변화가 아주 심한 경우에는 그 겉모습은 변하지 않았을지 모르나 그 정신은 전혀 달랐다. 그러나 항시 서로 다투고 배척하는 것은 이기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으니, 이것은 선진시대의 옛 사람들과 다름이 없었다. 정치적 통일이 이루어진 이후, 전제 군주는 매양 거기에 상응하는 사상의 통일을 꾀하였다. 시황은 "벼슬아치로 하여금 사람의 스승이 되게 하였고", 한무제는 유가의 학술을 추앙하여 존중했다. 그러나 이와 같이 흑백을 구분하여 최고의 것을 결정하는 방법도 제가 사이의 쟁승지심을 능히 없애지 못했고, 서로의 공격을 완화시키게 이끌지도 못했다. 그리하여 진·한 이후는 학술 내용이 조화되던 시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학술이 학파별로 결전하던 시기였다. 진 나라가 망한 후, 천여 년이 지나는 동안 각파 사이의 다툼이 심했고, 역사적 환경의 전변에 따라서 다툼의 기복이 교차되었던 것이다. 어떤 것은 먼저 성하였다가 나중에 쇠퇴하고, 어떤 것은 쇠퇴하였다가 다시 부흥되기도 하고, 또 어떤 것은 한때에 없어지고는 재기하지 못하였다. 어떤 것은 독존적인 지위를 얻었으나 전체적인 국면을 독점할 수 없었던 것도 있고 어떤 것은 지도적인 학문으로서의 힘은 없었어도 주류에 대한 대항세력으로 남았다. 사상의 내용은 비록 시대에 따라 계속 변하였지만, 그 큰 테두리는 선진시대에 발전된 옛 것이었고, 아주 새로이 창안된 요소는 극히 드물게 나타날 뿐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인습시기 동안 정치 사상의 조류가 충돌하는 형세는 중국의 학술이 장기적인 내전에 휘말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교전의 단체는 중국 고유의 학파들이며, 싸움의 날카로운 무기는 선진시대에 이미 창시된 학설이었다. 천 6백 년 동안 이에 대한 예외가 있다면 남북조 시대에 불교와 도교가 임금과 어버이에 대하여 공경을 다하는 것과 오랑캐와 중국인과의 구별에 관한 문제 등을 중심으로 논쟁함으로써 다른 나라의 사상이 그 전쟁에 참가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 기간이 짧았고, 따라서 사상의 발전 추세에 현저하게 중요한 영향을 미치진 못했다.
학술이 내전에 휘말렸던 까닭에 정치 사상도 완전히 정체되었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중국의 전제군주 정치체제는 진·한에서 시작하여 그 후 별로 크게 변한 것이 없다. 선진사상은 사회 환경의 격변과 더불어 갑자기 일어났던 것이고, 진·한 이후에는 사회환경의 변동이 비교적 적었기 때문에 사상도 또한 창조적 요소를 결여하게 되었다. 이것은 실로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리하여 명·청 시대에 이르러 서양의 무력과 문화가 바다를 통하여 중국을 계속 침략하지 않았더라면, 정치 사상의 인습시기가 혹시 송·원에 와서도 끝날 수 없었을지 모르며, 그 전변시기 역시 명·청과 더불어 도래하지 않았을 지 모를 일이다.
중국정치사상이 전변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외세에 의한 격렬한 자극이었다. 불교가 동쪽으로 전래된 것이 이민족에 의한 문화적 침입의 발단이었다. 오호가 중국을 어지럽혔고, 그것은 이민족이 중국에 들어와 지배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인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사건은 비록 정치·사회·종교·철학 등의 각 방면에서 소동과 진보를 촉진하였지만, 정치 사상의 전변을 가져오지는 못했다. 대체로 불교는 종교이며 정치사상은 아니다. 그 소극적인 출세간의 인생관은 노장사상과 유사한 점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사상에 큰 공헌을 하기가 어렵다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진대에 중국을 어지럽게 한 여러 오랑캐들로 말하면, 그 문화가 모두 낮았고, 중원을 점령한 후에 문화는 자연히 "중국적인 것을 채용함으로써 오랑캐의 것을 고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정치라는 것 역시 나라를 세우고, 왕이라 칭하는 전래의 지혜를 넘지 못하였기 때문에 사상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능력을 갖는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명·청 시대에 와서 해상교통이 열림으로써 유럽의 높은 문화가 선교사들을 통하여 중국 땅에 전파되었다. 그로부터 폐쇄적이고 방어적인 상황은 깨어졌다. 지난 날의 위대한 통일 '천하'는 돌연 세계의 열국 가운데 하나가 되고 만 것이다. 또 취약함이 쌓인 나머지, 다시 누차에 걸친 외국의 침략과 모욕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공전의 큰 변화는 자연히 사상의 혁명을 불러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으니, 그것이 사상의 전변시기를 명·청 시대에 와서 맞이하게 된 중요한 원인이 된다.
또 약 백 년(1279~1368)간 계속된 몽고의 중국 지배를 지적해야 할 것이다. 백성들은 모두 이민족에 의한 불공정하고 가혹한 지배를 감수해야 했다. 유가의 이른바 인의와 예악, 법가의 이른바 임금과 국가를 존중 하는 것과 법령을 밝게 지키는 것, 도가의 이른바 흰 것을 알면서 검은 것을 지키는 것과 자연에 따라 인위의 보탬이 없는 것 등의 중국 고유의 정치 이론과 치술이 민족의 자존을 보존함에 있어서 부족하다는 것이 위와 같은 역사적 사실 몽고의 지배와 그 후 서구의 침략에 의하여 증명되었다. 그리하여 결국 변화가 생기게 되었는데, 명·청 시대의 정치 사상은 새 길을 열고,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던 것이다.
전변시기는 비록 명·청 두 왕조의 5백 년을 포함하고 있으나, 명대와 청초에서는 다만 그 전변의 시작만을 볼 수 있음에 불과하다. 옛 것을 제거하고 새 것을 채택하는 큰 변화는 겨우 청말에 와서야 나타나기 시작했다. 명과 청의 초기에는 유민과 지사가 이민족의 정권에 반항하기 위하여 일종의 종족 사상을 발전시켰는데. 그것은 전통 사상 가운데 포함되어 있는 대동주의에 일대 변경을 가져왔다. 명대 중기 이후 양명학파가 송과 명의 이학의 질곡에 반대하기 위하여 자유 사상을 발전시켰다. 이것 역시 그 구속을 깨쳐 버리고, 존고수구의 오랜 습관을 숙청하자는 의도에서였다. 이러한 것들은 중대한 의의를 가졌고, 또 사상이 변화할 방향을 밝혔으나, 그것이 기초로 하였던 관점과 포함했던 내용은 모두 구학이 탈바꿈한 것이었고, 결국은 전인이 만들어 놓은 형식을 벗어나지 못했다. 엣 것이 개혁될 수 있음을 알았으나, 새 것을 세우는 데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마침내 태평천국의 난이 발생하였다. 그것은 본래 기독교의 사상에서 출발한 것인데, 민족 사상이 첨가되어 과거에 없었던 사상의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그후 무술유신(1898)과 신해혁명(1911)이 뒤따랐다. 그 주의가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들은 서양사상의 영향을 직접 받은 것이었고, 따라서 2천여 년의 전통 사상에 대항하였다는 점에서 자연스럽게 합치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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