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S. 루이스: 고통의 문제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18. 2. 20.
고통의 문제 -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이종태 옮김/홍성사 |
C.S. 루이스: 고통의 문제
머리말
제1장 서론
제2장 하나님의 전능
제3장 하나님의 선함
제4장 인간의 악함
제5장 인간의 타락
제6장 인간의 고통 I
제7장 인간의 고통 II
제8장 지옥
제9장 동물의 고통
제10장 천국
제1장 서론
33 기독교는 우주의 기원을 놓고 철학적인 논쟁을 벌인 끝에 도달한 결론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제가 지금까지 묘사한 바, 인간의 오랜 영적 준비에 뒤이어 일어난 격변의 역사적 사건입니다. 이것은 고통이라는 거북한 사실을 끼워 맞춰야 하는 체계가 아닙니다. 오히려 기독교 자체가 우리가 만들어 낸 어떤 체계에든 끼워 맞춰야 하는 거북한 사실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고통의 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만들어 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실제로는 날마다 고통스러운 세상을 경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인 실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의로운 존재라는 믿을만한 보증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그 사람들에게 고통이 문제되는 것입니다.
제2장 하나님의 전능
41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것은 내재적으로 가능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뜻이지, 내재적으로 불가능한 일도 하실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기적을 행하시는 분이지 말이 안 되는 일을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49 하나님이 경우에 따라 물질의 움직임을 수정하실 수 있을 뿐 아니라 실제로 수정하기도 하시며 우리가 기적이라고 부르는 일들을 행하기도 하신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일상적인 세상, 따라서 안정적인 세상에서는 이런 예외적인 일이 극히 드물게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체스 게임을 할 때 자기 재량으로 상대방에게 양보해 줄 때가 있는데, 그것은 마치 기적이 자연법칙에 대립되는 것처럼 평상시 게임 규칙에 대립되는 행동입니다.
51 완전한 선은 추구할 목적을 결정하기 위해 숙고할 필요가 없으며, 완전한 지혜는 그 목적을 성취하는데 가장 알맞은 수단을 결정하기 위해 숙고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자유로우시다는 것은 그분 자신 외에는 어느 누구도 어떤 행동을 하시게 만들 수 없고 어떤 외적인 장애물도 어떤 행동을 못하시게 막을 수 없다는 것, 하나님의 모든 행동 은 바로 그 자신의 선함을 뿌리 삼아 자라며 그 자신의 전능을 대기 삼아 꽃 핀다는 것입니다.
제3장 하나님의 선함
70 인간의 고통과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조화시키는 문제는 우리가 '사랑'이라는 말에 하찮은 의미를 부여하며 인간이 만물의 중심인 양 만물을 바라보는 한 결코 해결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중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 존재하시지 않습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 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우리를 만드신 주된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물론 이 목적도 있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으로써 우리를 그의 사랑이 아주 기쁘게 머물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드시려는 데 있습니다.
74 하나님이 우리를 필요로 하시는 것은 그가 그 필요를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불변하는 하나님의 마음이 자신이 만들어 낸 꼭두각시들 때문에 슬픔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전능함을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겸손으로 기꺼이 그 슬픔에 복종시키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주된 존재 목적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려는 데 있지 않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려는 데 있다는 그 사실은 좀더 깊은 차원에서 볼 때 바로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79 하나님이 우리의 유일한 선이신 것은, 단순히 그가 독단적으로 우리를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보다는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의 유일한 선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각 피조물은 하나님을 실현하되(the fruition of God), 자기 본성에 맞는 종류와 수준으로 실현하는 것에서 자신의 선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 종류와 수준은 피조물의 본성에 따라 다양할 수 있습니다만, 그 외에 다른 선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신론적인 몽상에 불과합니다.
제4장 인간의 악함
86 죄의 옛 의미를 회복시키는 것은 기독교의 본질적인 과제입니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악한 것을 당연히 여기셨습니다. 그의 가정이 정말 맞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사람은 그가 구하러 오신 세상의 일부는 될 수 있어도 그의 말씀을 듣는 청중의 일부는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그리스도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할 수 있는 첫 번째 조건을 갖추지 못한 것입니다.
101 즉 저는 몇 가지 점에서 볼 때 현재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끔찍한 피조물이라는 점, 제대로 보기만 한다면 우리가 보기에도 끔찍한 피조물이라는 점을 믿게 하고자 애 쓰고 있는 중입니다. 저는 그것을 사실로 믿습니다. 그리고 거룩한 사람일수록 그 사실을 더 충분히 인식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여러분은 이런 성자들의 겸손을 하나님이 미소 지으며 바라보시는 경건한 환상 정도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위험한 착각입니다. 이런 생각은 미덕(즉 완전함)과 환상(즉 불완전함)을 동일시하는 터무니없는 짓을 저지르게 한다는 점에서 이론적인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또한 자신의 부패함을 처음 간파한 순간 아둔한 자기 머리 둘레에 후광이 둘리기 시작한 것처럼 착각하도록 부추긴다는 점에서 실제로도 위험합니다.
제5장 인간의 타락
105 타락의 교리에 따르자면, 인간이 지금처럼 하나님과 자기 자신에게 끔찍한 피조물이 된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자유의지를 오용하여 스스로 이런 모습을 초래했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에는 이것이 이 교리가 수행하는 단 하나의 기능입니다.
106 기독교는이 두 가지 입장에 맞서 하나님은 선한 분이시며, 모든 것을 그들 자신의 유익을 위해 선하게 만드셨고, 그가 만든 선한 것들 중 하나 즉 이성적인 피조물의 자유 의지에는 본질상 악의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으며, 피조물들은 그 가능성을 틈타 약해졌다고 주장합니다.
106 저는 오래 전 조상들의 과오를 근거 삼아 각 개인을 벌하는 것이 응보적 정의라는 관점에서 '정의롭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일에 타락의 교리를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121 피조물이 자기 고집대로 하려 든 것은 피조물의 참 신분을 아주 벗어나는 행위로서 '타락'이라 할 수 있는 유일한 죄입니다. 최초의 죄를 생각할 때 어려운 점은, 그것이 아주 극악 무도한 것인 동시에, 타락한 인간이 받는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도 범할 수 있음 직 한 것이어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으로부터 자아로 방향을 바꾼 일은 이 두 가지 조건을 다 충족시킵니다.
125 영혼은 본성을 다스릴 힘이 없는 무력한 왕일뿐 아니라 악한 왕이 되었습니다. 영혼은 심신 유기체가 영혼으로 올려보내는 욕망보다 훨씬 더 악한 욕망을 그 유기체로 내려 보냈습니다. 이런 상태는 유전에 의해 이후의 모든 세대에 전달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물학자들이 말하는 획득 형질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새로운 종류의 인간이 출현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하나님이 결코 만드신 바 없는 새로운 종이 죄를 통해 스스로 생겨난 것입니다.
126 세상은 하나님에게서 내려오는 선이 창조물에게서 올라오는 악에 의해 교란되는, 그러나 악 때문에 고통 받는 자연을 하나님이 떠 맡으심으로써 그 교란으로 인한 갈등이 해결되는 일종의 춤입니다. 인간이 자유의지로 타락했다는 교리는 이처럼 좀더 복잡한 이차적 선의 연료 내지는 원료를 만들어내는 악을 제공한 주체가 하나님이 아닌 인간이라고 단언합니다.
127 인간의 현재 상태는 '우리는 한 부패한 종의 일원'이라는 사실로 설명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필연적으로 지금과 같은 존재가 될 수밖에 없는데도 공연히 벌을 받아 고통을 받고 있다는 뜻도 아니고, 먼 옛날 조상이 저지른 반역에 대해 애꿎은 우리가 도덕적인 책임을 지고 있다는 뜻도 아닙니다.
128 우리는 한편으로 아이가 그런 환경에서 자란 것은 정말이지 불행이라고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마치 아이와 아이의 성품이 별개의 것인 양 그 성품에 대해서도 불행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싸움 잘하고 고자질 잘하며 그런 짓을 즐기는 주체는 바로 그 아이━그 아이 자신━ 입니다. 만약 그 아이가 마음을 고쳐먹는다면 자기가 이제 막 그만 둔 행동들에 대해 수치심과 죄책감을 느낄 것이 틀림 없습니다.
제6장 인간의 고통 I
138 따라서 왜 우리의 치료가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느냐에 대한 첫 번째 대답은 우리가 너무나 오랫동안 자기 것으로 주장해온 의지를 되돌려 드리는 일은 어디에서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든 간에 본질적으로 가혹한 고통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144 만사가 잘 돌아가고 있다는 환상을 깨뜨리는 것이 고통의 효력 중 가장 낮은 단계에 해당하는 첫 번째 효력이라면, 두번째 효력은 지금 우리가 가진 것은 본질적으로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 든 간에 전부 우리 것이며 그 이상은 필요치 않다는 환상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152 순종의 내용뿐 아니라 순종하는 행위 그 자체도 본질적으로 선합니다. 이성적인 피조물은 창조자에게 순종함으로써 피조물 본연의 역할을 의식적으로 수행하며, 우리를 타락시킨 행위를 뒤엎고, 아담이 추었던 춤을 역으로 밟아 감으로써 원래 상태로 되돌아가기 때문입니다.
157 현재의 관점에서 볼 때 분명한 것은, '왜 겸손하고 경건한 신앙인들이 고난을 겪느냐가 아니라'가 아니라 '왜 어떤 이들은 고난을 겪지 않느냐'하는 데 진정한 문제가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행운을 누리는 자들의 구원 문제에 관해 주님 또한 하나님의 헤아릴 길 없는 전능하심을 언급하는 것으로 설명을 끝내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제7장 인간의 고통 II
168 죄를 짓지 않을 수는 없지만, 죄를 지은 사람에게는 화가 임합니다. 죄는 확실히 은혜를 더하게 하지만, 그것을 빌미로 계속 죄를 지어서는 안됩니다, 십자가의 죽음 자체는 역사적 사건 중 최악의 사건인 동시에 최선의 사건이지만 유다의 역할은 여전히 악한 것입니다.
173 시련이 구속의 필수 요소라면, 하나님 보시기에 세상이 이미 구속되었거나 더 이상 구속 할 수 없는 상태가 되기 전까지는 시련이 멈추지 않을 것을 예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우리의 경제, 정치, 혹은 위생 체제가 개혁 되기만 하면 지상에 천국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약속하는 그 어떤 사람의 말도 믿을 수 없습니다.
제8장 지옥
181 앞장에서 우리는 고통만이 만사가 잘 돌아가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악인에게 일깨워 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악인이 끝끝내 자신의 반역을 회개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바 있습니다. 또한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어서 인간에게 주어지는 모든 선물은 이중적인 효과를 갖게 된다는 점도 인정했습니다. 이러한 전제에 즉각 따라 오는 결론은, 세상을 구속하려는 하나님의 수고가 모든 영혼에게서 열매를 거두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구속되지 못할 것입니다.
181 제 마음대로 할 수만 있다면 이보다 더 없애 버리고 싶은 기독교 교리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뿐 아니라 특히 우리 주님 자신의 말씀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교리입니다. 기독교 세계는 언제나 이 교리를 견지해 왔습니다.
187 악을 묵과하는 것은 악을 무시하는 것이며 악을 선처럼 취급하는 것입니다. 용서가 이루어지려면 용서를 베푸는 쪽뿐 아니라 받아들이는 쪽도 있어야 합니다. 자기 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어떤 용서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189 인간의 자유의지 또한 우리가 지상의 생애라고 부르는 그 입체의 기준선을 그리는 데 기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기준선을 비뚜로 그리면 입체 전체가 제자리를 잡지 못할 것입니다. 인생이 짧다는 것, 즉 이 상징을 빌리자면 인간이 전 복합체의 작은 선 하나만을 담당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자유의지에 맡겨진 그 작은 선 하나도 잘못 그려서 전체를 망칠 때가 많은데, 하물며 더 많은 부분을 맡았다면 얼마나 더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겠습니까?
191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은 이 땅에서 살 때보다 더 인간다워진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지옥에 들어간다는 것은 인간성을 박탈당한다는 뜻입니다. 지옥에 던져지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인간의 '잔해'입니다. 완전한 인간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열정을 의지에 순종시키며 그 의지를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입니다. 전에 인간이었던 것이란 곧 전적으로 자아에 집중된 의지와 의지의 통제를 전혀받지 않는 열정으로 구성된 존재라는 뜻일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피조물, 죄인이라고 하기보다는 상극의 죄들이 성기게 뭉쳐있는 덩어리라고 해야 할 피조물의 의식 상태가 어떤 것인지 상상하기란 불가능합니다.
193 지옥은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곳이 아닙니다. 지옥은 결코 천국과 평행선 상에 있지 않습니다. 지옥은 "바깥 어두움", 존재가 비존재로 사라지는 바깥 테두리입니다.
제9장 동물의 고통
199 동물이 겪는 고통의 문제는 더 심각합니다. 그 이유는 동물들의 수가 많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고통에 대한 기독교의 설명을 동물의 고통에 확장시킬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206 또 어떤 이들은 주님이 자기 영광을 비우고 인간이 되셨을 때, 보통 사람들처럼 그 당시에 통용되던 미신들을 공유하실만큼 낮아지셨다고 주장 할 수도 있습니다. 저도 확실히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계셨을 때에는 전지하지 않으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뇌가 전지한 의식의 매개체가 될 수 없다고 할 때, 주님의 사고가 실제로 그 뇌의 크기와 형태의 제약을 받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성육신의 실재성을 부인하는 가현설 신봉자들에게 가담하는 결과를 낳을 것입니다. 따라서 설령 주님이 오늘날 우리의 지식에 비추어 그릇된 과학적, 역사적 진술을 하셨다 해도 그분의 신성을 믿는 저의 믿음에는 전혀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207 제가 믿듯이 그러한 세력이 정말 있다면, 바로 그 세력이 인간이 나타나기 전에 동물 세계를 부패시켰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211 즉 이 도룡뇽이 죽은 후에 지상에서 겪었던 고통의 보상으로 다른 도롱뇽이 즐거운 감각을 누리게 되든 이 도롱뇽의 부활체가 즐거운 감각을 누리게 되든 아무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제10장 천국
234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할 때 기억해야 할 것은 인간의 영혼이란 하나님이 채우시는 빈 구멍이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의 영혼과 하나님의 연합은 거의 본질적으로 인간의 끊임없는 자기 드림(self-giving)━자신을 개방하고 열어젖히며 양도하는 것━ 을 의미합니다. 축복받은 영혼은 자기 속에 부어지는 빛나는 쇳물을 점점 더 많이 감내하는 거푸집이자, 영적인 태양이 정오에 내뿜는 그 강렬한 빛에 자신을 점점 더 많이 드러내는 몸입니다. 우리는 천국에 극기 비슷한 것이 필요치 않다거나 영원한 삶이란 영원한 죽음을 의미하지 않을 것이라고 추측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지옥에 쾌락이 있을 수 있듯이, 천국에도 고통과 전혀 다르지 않은 무언가가 있을 수 있습니다.
235 가장 높은 존재로부터 가장 낮은 존재에 이르기까지 자아는 드려지기 위해 존재하며, 그렇게 드려질수록 진정한 자아가 되고, 그 결과 더 드리게 되는 과정이 영원히 계속됩니다. 이것은 지상에 머문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천상의 법도 아니요, 구원받는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지상의 법도 아닙니다. 이같은 자기 드림의 체계 밖에 있는 것은 이 땅도 아니요, 자연도 아니요, 평범한 삶도 아니요, 오직 지옥뿐입니다. 그리고 그 지옥의 실체도 사실은 이 법칙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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