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기 20분 | 일본 근현대사 | 06 아시아·태평양전쟁 4
- 강의노트/책읽기 20분 2014-15
- 2017. 11. 20.
아시아.태평양전쟁 - 요시다 유타카 지음, 최혜주 옮김/어문학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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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기 작전의 성공: 1942년 5월까지 일본군은 동남아시아와 중·남부 태평양의 광대한 지역을 점령해서 연합군을 압도하였다.
– 전술·전략적 차원들
1) 항공기 평균피탄율 4할 상회로 비행기 손실과 숙련조종사 손실이 동시에 발생, 낙후된 전차
2) 해군작전방식의 변화: 전함끼리 주포공격하는 방식(러일전쟁시기에 성공을 거둔 방식)에서 항공모함 중심의 기동부대 전술로 변화, 제공권과 제해권의 동시 장악의 중요성
3) 유럽전선의 변화: “독일군의 총공격을 좌절시킨 소련군은 [1941년] 12월 상순에는 반격으로 바뀌어 독일군을 되밀기 시작했다. 아시아·태평양 전쟁이 시작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일본의 군사전략의 전제 그것이 조용히 무너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아시아·태평양 전쟁은 장기지구전으로 이행하였다.
– 미드웨이 해전의 패배
– 과달카날 섬의 패배: 육군 전사자 2만 1000명 중 직접 전투에 의한 전사자는 5000-6000명, 나머지는 광의의 아사자. “과달카날 섬의 이 비극은 그 후 각 지역의 전장에서 반복된다.” “아시아·태평양 전쟁의 최대 전환점”
– 일본은 전시체제가 강화되면서 국민 생활의 궁핍화가 병행해서 진행된 반면 미국은 군수생산이 본격화하는 가운데 경이적인 성장을 이루었다. 1940년 국민총생산 997억 달러였던 반면, 1945년에는 2119억 달러를 기록했다. 이로써 미국의 일반국민에게는 전쟁이 ‘수지맞는’ 것으로 각인되었다. “‘좋은 전쟁’이라는 낙관적인 전쟁관”
– 사이판 섬: “사실상 일본 해군의 기동부대에 의한 최후의 전투”
– 전쟁경제의 붕괴
– 사회질서와 관계의 변화: 역설적으로 “사회의 근대화·현대화가 전시하에 진행된다.”
– 전사자의 상당수가 아사·해몰사·특공사라는 특징
《아시아·태평양전쟁》을 읽고 있다. 일본근현대사시리즈는 10권으로 되어있는데, 아시아·태평양전쟁 다음에 점령과 개혁, 포스트전후사회, 고도성장과 9권의 책을 집약한 10권이 있다. 남은 책들은 하지 않고 《아시아·태평양전쟁》까지만 한다고 말한바 있다. 오늘은 《아시아·태평양전쟁》를 마치려고 한다. 지난 시간까지는 왜 개전을 피할 수 없었는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사람의 일이라는 것이 그렇지만 특히 조직의 일이라는 것은 조직이 밀고가는 것때문에 자각적인 개인도 어쩌지 못하고 따라가는 경우가 많이 있다. 개인이 가지고 있는 것과 조직이 엉키면 끝이 없다.
전쟁의 전개과정에 대해서 먼저 보겠다. 처음에 아시아·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은 굉장히 성공을 거두었다. 초반에는 선공을 거둘 수 있을만큼 태평양 지역에서의 일본의 군사력이 우세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1942년 5월까지 일본군은 동남아시아와 중·남부 태평양의 광대한 지역을 점령해서 연합군을 압도하였다 굉장하다. 여기서 핵심은 "광대한 지역을 점령"했다는데 있다. 점령하는 것은 금방이다. 중요한 것은 점령한 지역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가 문제이다. 그게 일본의 결정적인 패인이었다. 그런 것도 있었지만 몇가지 문제점도 생겨났다. 전술적인 문제점으로는 우선 비행기가 굉장히 많이 손실되었다. 항공기 평균피탄율 4할이 넘었다. 그러니까 숙련조종사들이 많이 죽었다. 광대한 지역을 점령했다고 하는 것은 당연히 항공작전이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게 되는데, 이 차원에서 숙련조종사들이 손실되었다는 것은 치명적인 것. 두번째로는 전차가 낙후되어 있었다.
이런 것들이 전술적인 차원에서 일어난 것이라면 전략적인 차원에서 보면 중일전쟁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아시아·태평양전쟁로 넘어왔다고 여러차례 말했다. 전장이 아직 펼쳐져 있어서 일본의 주력군대는 아직 중국에 있고, 그러면서 전쟁이 태평양으로 확장되었으니 일본군의 여러가지 질적인 측면들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유럽전선의 변화가 있었다. 아시아·태평양전쟁만이 아니라 2차세계대전의 국면까지 바뀌는 것이었다. 이것이 무엇인가. 독일이 소련을 공격하러 들어갔으나 좌절했다. 1941년 12월부터는 소련이 반격하기 시작해서 독일군을 밀어냈다. 그때가 아시아·태평양전쟁이 시작된 때이다. 일본은 독일이 소련을 물리칠 것으로 생각하고 전쟁을 시작했다. 그에 따라 당연히 소련과 일본의 전쟁은 생각하지 않았다. 만약에 여기서 독일이 물러나기 시작하면 중국과도 전쟁을 해야 하고, 소련과도 전쟁을 해야 하고, 태평양에서도 전쟁을 벌였으니, 영국, 네덜란드, 미국과도 싸워야 한다는 것이 된다. 다시 말하면 일본에서 벌이고 있는 중일전쟁도 아시아·태평양전쟁도 장기적 지구전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73 이렇게 1942년 5월까지 일본군은 동남아시아와 중·남부 태평양의 광대한 지역을 점령해서 연합군을 압도한 것이다.
78 필사적인 반기에 의해 독일군의 총공격을 좌절시킨 소련군은 12월 상순에는 반격으로 바뀌어 독일군을 되밀기 시작했다. 아시아·태평양전쟁이 시작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일본의 군사 전력의 전제 그것이 조용히 무너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렇게 전략적 차원에서 문제가 생기니까 결전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전망이 완전히 없어지기 시작했다.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수단을 갖지 못하게 된다. 게다가 태평양전쟁의 양상이 변했다. 보통 해군의 전략이라고 하는 것은 전함끼리 만나서 싸우는 것이 아니다. 항공모함에서 비행기를 띄워서 하늘에서 전쟁을 하는 것, 즉 공중전을 제압하고 있는 자들이 해상전도 제압하게 된다. 항공모함 중심의 기동부대 전술로 바뀌는 것. 태평양전쟁에서 이미 미국이 확보한 전법이다. 일본이 못한 이유는 일단 항공모함이 없었다. 러일전쟁에서 전함끼리 대포를 쏴서 이겼다. 그 전술이 계속 먹힐거라 생각하고 그 전술을 계속 개발한 것이 일본 해군의 전술이었다. 오늘날 미합중국이 전지구의 바다를 제압하고 있다. 바로 항공모함 때문이다. 이렇게 전략전술이 변하고 있는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인 도죠 히데키의 독재가 쇠락했다는 것.
해군전술이 변화하면서 태평양전쟁이 끝장을 향해간다. 그게 바로 미드웨이 해전의 패배이다. 그리고 과달카날 섬도 졌다. 특히 초기작전에서 성공을 지탱해온 숙련된 항공기 조종사들을 많이 잃었다. 그리고 광대한 지역을 점령했는데 그러다보니 보급이 길어지게 되었다. 자연히 보급이 힘들게 되고 해상 수송로를 확보하기 힘들게 되니 굶어죽는 사람이 늘어난다. 군 전사자 2만 1000명 중 직접 전투에 의한 전사자는 5000-6000명, 나머지는 광의의 아사자. 과달카날 섬의 패배가 전형적인 패배다. 똑같은 방식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벌어진다. 그래서 아시아·태평양 전쟁에서 해전에서의 전환점은 미드웨이 해전이고, 아시아·태평양 전쟁의 최대 전환점은 과달카날 섬의 패배라고 말할 수 있다. 군대가 약해지고,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한계가 오고, 일본 내지도 생활이 궁핍하게 되었다. 그런데 경이로운 점은 미국은 오히려 국민총생산이 늘어났다. 그래서 이때부터 미국은 전쟁이 수지맞는 것으로 각인이 된다.
108 이 전투에서의 일본 육군 전사자는 2만 1,000명, 미 육군과 해병대의 전사는 1,796명, 지상전에서 일본군의 완패는 분명하다.
109 육군의 전사자 2만 1,000명의 내실이 문제다. 이 가운데 직접 전투에 의한 전사자는 5,000-6,000명에 지나지 않았고, 남은 것은 "영양실조증, 열대성말라리아, 설사 및 각기 등에 의한 것이고, 그 원인은 실로 보급 불충분에 기초한 체력의 자연 소모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즉 전사자 중의 약 70%는 선박에 의한 식량 및 의약품의 보급이 끊어진 상황 아래서 생긴 광의의 아사자였다. 그리고 과달카날 섬의 이 비극은 그 후 각 지역의 전장에서 반복된다.
111 이상 같이 과달카날 섬을 둘러싼 공방전은 아시아·태평양 전쟁의 최대 전환점이 되었다.
144 미국의 경우는 일본과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전시체제로 이행하고 군수 생산은 본격화하는 가운데, 미국 경제는 경이적인 성장을 이루어, 1940년의 국민총생산 997억 달러가 1945년에는 2,119억 달러로 확대되었다. 이에 따라 오랫동안 대공황에 고통받아 온 미국인의 생활 수준은 급속하게 상승한다. "미국은 전시 중에 생활수준을 향상시킨 유일한 나라가 된 것이다. 이것은 미국의 일반 국민에게 있어서도 전쟁이 충분히 '수지맞는' 것이었다는 점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이때 형성된 '좋은 전쟁'이라는 낙관적인 전쟁관은 광범한 국민의 생활 실감에 뒷받침된 것이었던 만큼, 그 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미국인의 전쟁관을 속박한다.
결정적으로 1944년 6월 15일 사이판에서 패배를 하면서 사실상 일본 해군의 기동부대에 의한 최후의 전투가 여기서 끝나게 된다. 아시아·태평양전쟁의 가장 큰 역설적 성과는 학도병들이 여기서 많이 살아남는데 군대나 군인에 대해서 강한 반감을 가지고 전후사회에 복귀하게 된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제2차세계대전 이후에 평화로운 나라로 살아야 한다로 주장하는 것. 아무리 군부 지도자들이 난리를 쳐도 일본의 반전 분위기가 만만치 않다. 그 다음에 아사·해몰사·특공사가 있었다.
166 결국 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은 대형 공모=2척, 소형 공모=1척을 잃어버리고, 기지항공부대도 괴멸했다. 미국 측의 손해는 대형 공모=1척, 소형공모=1척의 손상만 있었다. 사실상 일본 해군의 기동부대에 의한 최후의 전투라고 해도 좋다.
190 그 결과 살아남은 학도병들은 군대나 군인에 대한 강한 반감을 지니고 전후사회에 복귀해 가게 된다. 그것은 경제 회복에서 고도경제성장을 맡은 일본 사회의 엘리트들의 정치 문화에 무시할 수 없는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던 와중에 1945년 5월 8일 독일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문서에 조인하게 된다. 둘째가 오키나와 결정이 실패하였다. 군사적 원인만 보면 전쟁지도부가 분열되어 있었다. 그 다음에 비합리적인 정신주의와 군사 기술의 낙후를 말할 수 있다. 일본이 이렇게 패전을 했으면 책임을 지고 천황도 전쟁책임을 지고 했어야 했는데 그런 것을 안 했다. 그러다 보니 일본의 전후체계가 이상야릇하게 흘러간 지점이 있다.
지금까지 《아시아·태평양전쟁》을 읽었다. 이것으로 일본근대사읽기 《막말·유신》부터 《아시아·태평양전쟁》까지는 일단 일단락을 짓겠다. 이것을 마무리하고 7,8,9권은 현대사부분으로 넘어오는 부분으로 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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