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리타 류이치: 다이쇼 데모크라시 ━ 일본 근현대사 4


다이쇼 데모크라시 - 10점
나리타 류이치 지음, 이규수 옮김/어문학사


머리말-제국과 데모크라시의 사이 


제1장 민본주의와 도시 민중 

제2장 제1차 세계대전과 사회의 변용 

제3장 쌀소동·정당정치·개조의 운동 

제4장 식민지의 광경 

제5장 모더니즘의 사회공간 

제6장 공황 시기의 기성정당과 무산세력 


맺음말-‘만주사변’ 전후 


저자 후기 

역자 후기 

연표 

참고문헌

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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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10 '다이쇼 데모크라시'라는 말은 시기와 내용, 가리키는 대상 혹은 역사적인 평가에 이르기까지 논자에 따라 다양하게 쓰이고 있다.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역사 용어와 역사 개념으로서 확실히 정의되었다고 말하기 힘든 상황인 것이다. 그러나 지표를 어떻게 삼느냐에 따라 양상이 달라지겠지만, 이 시기에 접어들어 '일본' 역사에는 절단선이 생겨 새로운 시대상이 표출되었다는 인식이 조금씩 형성되고 있다.


제1장 민본주의와 도시 민중

21 도시 '잡업층'은 생업 현장에서 중소 상점주와 중소 공장주인 '단나슈'에게 고용되었다. 또 이들은 상점과 단나슈가 경영하는 임대주택이나 가게에 거주했다. 단나슈에게 생업과 거주에서 이중으로 종속되었던 것이다.


44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기 초기의 사상적인 화두는 '민본주의'였다. 민본주의는 '입헌'과 '헌정' 등의 말과 함께 데모크라시를 고찰한 '신조어'로 사용되었다.


45 요시노는 민본주의를 데모크라시의 번역어로 삼았다. 당시 데모크라시에는 '민주주의'라는 또 하나의 번역어가 있었다. 이 뜻은 '국민의 주권은 인민에게 있다'는 것으로 군주국 일본에 어울리지 않는다며 배척당했다. 요시노는 민본주의를 주권의 존재가 아니라 주권 운용의 개념으로 받아들였다.


47 미노베가 주창한 천황기관설은 국가는 헌법상의 인격을 갖고 법인으로서의 국가가 주권의 주체가 되며, 천황은 국가의 최고 기관이 된다는 학설로서, 일종의 자유주의적인 헌법 해석이었다. 이러한 학설에 대해 우에스기는 천황에 의한 통치를 이론상 배척하는 것으로 비판했기 때문에 미노베와의 사이에 논쟁이 있었다.


제2장 제1차 세계대전과 사회의 변용

65 일본은 러일전쟁을 통해 새롭게 남사할린을 식민지로 획득하고, '만주' 철도부설권을 인지시켜 식민지와 진출 지역을 확대시켰다.


66 '만주'에는 러일전쟁 이후 펑톈, 하얼빈, 창춘 등에 영사관을 개설한 다음, 요동반도 조차지를 관동주로 삼아 1906년 9월 뤼순에 관동도독부를 설치했다.


66 일본은 1906년 11월 남만주철도주식회사를 설립하여 만주 경영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67 일본 정부는 1910년 8월 한국 정부에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을 강제하고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여 한반도를 식민지로 지배했다.


68 문명과 근대적 제도를 도입하면서 현지인으로부터 수탈해나가는 것이 식민지 지배의 주요 국면을 이루었다.


70 식민지에는 대일본제국헌법이 적용되지 않았고, 이를 둘러싼 헌법학자들의 의견도 양분되었다.


제3장 쌀소동·정당정치·개조의 운동

113 최초의 본격적인 정당내각인 하라 내각은 쌀소동으로 인해 실현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114 하라 내각의 탄생은 1918년 9월 29일이었다. 외상과 육해군상을 제외한 대신을 모두 정우회 출신으로 임명한 최초의 본격적인 정당이었다.


119 사회운동의 격화라는 '대해'를 피하기 위해 사회에 눈을 돌려 사람들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소통'을 도모한 것이다.


130 1920년 전후 시기에는 네 가지 사회개조의 조류를 확인 할 수 있다. 첫번째는 민본주의자에 의한 논의의 계속과 진전이다.


130 두 번째는 대역사건 이후 활동을 봉쇄당한 사회주의운동이 복권되었고, 또 기존의 차별 받던 사람들 스스로가 목소리를 내면서 개혁을 추구하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세 번째는 일본과 천황을 전면에 내세워 '국체'에 입각한 개조를 추구한 국가주의단체가 결성되었다. 더불어 네 번째는 국가와 시정촌도 종래의 통치 방식을 변경하여 새로운 방책을 통한 사회의 편성을 시도했다.


145 세 번째 조류의 대표적인 논자인 기타 잇키가 1919년 상하이에서 집필한 국가개조안원리대강(国家改造案原理大綱)(이후 일본개조법안대강(日本改造法案大綱))은 '영미의 자유주의'를 비롯해 마르크스와 크로포트킨의 사상도 결국 '민족사상의 개조화'라고 인식하고, 자신의 대강도 '일본 민족의 사회혁명론'으로서 사회개조를 위한 조류의 하나로 위치지웠다.


145 기요하라 사다오가 집필하고 내무성 신사국이 펴낸 국체론사(国体論史)는 쌀소동 이후 동향에 대한 우파로부터의 대응이었다.


145 기요하라에게는 '하나의 중심점(황실)을 향해 국민이 위집(蝟集)하여 견고한 국가를 만든다.'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었다.


146 기요하라는 '근간'인 '야마토 민족'을 '반석'으로 삼으면, 새롭게 '부속된 민족'인 조선과 타이완에 대해서는 '권위와 은혜'로 응대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말했다. 


제6장 공황 시기의 기성정당과 무산세력

265 하마구치 내각에서 산업합리화정책을 추진한 것은 상공성이었다. 1925년 3월 농상무성이 농림성과 상곡성으로 분리 설치되었다. 국장인 요시노 신지와 그의 심복인 기시 노부스케가 중심적으로 정책을 담당했다.


266 이들 관료들은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운동 주체인 '민중'(노동자와 농민, 여성들)의 요구를 포섭하고 국가 주도로 사회개조를 실천할 수 있는 정책을 입안하여 실현하려고 노력했다.


267 다이쇼 데모크라시 그 자체가 사회적인 통합의 논리를 품고 사회를 통제하려는 움직임을 만들어 낸 것이다.


맺음말-‘만주사변’ 전후

285 관동대지진을 거쳐 1920년대 후반의 양상을 개괄하면 민본주의, 마르크스주의와 사회주의, 국수주의라는 세 가지 주장의 정립을 지적할 수 있다.


287 만주사변 이후 사람들의 감정은 일거에 거국적이 되었다.


289 만주사변을 계기로 일어난 일련의 사태를 통해 사회운동과 정당정치 쌍방에 변용과 비판이 제기되었고, 다이쇼 데모크라시는 '종언(終焉)'을 알리기 시작했다.


291 성과를 지키지 못하여 '다이쇼 데모크라시에도 불구하고'라는 국면과 운동의 논리가, 상황 속에서 통합과 타협으로 이행되어 버린 '다이쇼 데모크라시 때문에'라는 쌍방의 요소를 지니면서, 1930년대에는 전시동원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역자 후기

294 다이쇼 데모크라시는 크게 세 시기로 구분된다. 제1기는 1905년의 러일전쟁의 강화에 반대하는 운동부터 1912~13년 제1차 호헌운동까지의 시기이다. 강화반대운동은 번벌 정치 타파 요구를 포함해 '밖으로는 제국주의, 안으로는 입헌주의' 이념에 의거한 전국적인 도시의 민중운동으로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기점이 되었다.


295 제2기는 제1차 호헌운동부터 1918년 쌀소동까지의 시기이다. 제1차 세계대전의 개시에 따른 전쟁경기는 비특권 자본가 계층의 반동화를 불러일으켜 호헌운동으로 인해 위기에 빠진 체제를 궁지에서 벗어나게 만들었다.


296 제3기는 쌀소동부터 1924년의 제2차 호헌운동까지의 시기이다. 안으로는 쌀소동, 밖으로는 러시아혁명 이후 유럽에서 전개된 혁명적 운동과 ILO(국제노동기관)의 영향을 받아 근로대중의 정치적 자각이 고조되었고, 보통선거운동이 전국적 대중운동으로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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