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튜 D.커크패트릭: 디트리히 본회퍼 ━ 평화주의자와 암살자 사이에서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17. 8. 11.
디트리히 본회퍼 - 매튜 D.커크패트릭 지음, 김영수 옮김/비아 |
서문
10 본회퍼의 신앙과 용기를 회의해보지 않고서 어떻게 현실적으로 윤리, 사목적 돌봄, 책임있는 공동체, 그리고 그리스도의 품성과 행위들에 대한 신약성서의 증언을 포괄하는 그의 체계와 그의 행동을 조화시킬 수 있겠는가? 정당한 전쟁 이론이 하나의 답일지 모른다. 하지만 정당한 전쟁과 권한 없는 소수에 의한 정치적 암살은 엄연히 다르다.
11 이 책의 목적은 본회퍼의 신학과 행위 사이에서 일어나는 긴장을 설명하고 그의 삶과 윤리학을 개관하는 데 있다. 평화주의자 혹은 폭력의 보증인이라는 극단적 시각은 둘 다 옳지 않다. 그의 생애와 사상을 살펴봄으로써 우린 그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제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한 도전적이고 논쟁적이며 비판적인 깨달음을 몸소 구현하려 했음을 알게 될 것이다.
1. 본회퍼의 ‘평화주의자’ 윤리
17 루터는 교회가 영혼의 문제를 살필 책임을, 국가는 정의의 칼을 휘두를 권한을 부여 받았다고 믿었다. 양자는 완전히 독립된 역할을 지녔기에 구분되어야 하며 서로 협력해야 한다, 이론적으로는 꽤 깔끔해 보이지만 이는 사실상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과 국민으로 분열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26 교회는 하느님이 지닌 힘을 세상에 드러내는 원천이자 하느님과 세상의 매개다. 본회퍼가 교회 일치 운동에서 발견한 것은 흥미 진진한 대화, 즐거운 교제, 전략적 협력만이 아니었다. 실천을 위한 그리스도의 몸으로의 연합, 그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발견이었다.
29 본회퍼가 생각하기에 그리스도가 원한 것은 숭배자나 열광적인 지지자가 아니었다. 그분이 바란 건 이 세상에서 자신의 진정한 본성과 행위를 모방하며 재현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리스도의 삶을 보면 우린 그분이 세상의 요구나 사고 방식에 순응하지 않고 오히려 철저히 대항문화적으로 살았음을 알게 된다. 그리스도는 세상과 불화하고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29 루터의 '창조질서' 개념이 지닌 위험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창조 질서는 세속 안에서 그리스도인이 지닌 비범함을 약화할 뿐 아니라 교회가 국가의 행위를 그저 승인할 수밖에 없게 만들고 결국에는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삶에 적대적인 일조차 동의하고 동참하도록 조장한다. 본회퍼의 관점에서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리스도인에겐 단 하나의 삶, 오직 그리스도의 삶만이 가능할 뿐이다.
2. 본회퍼와 교회의 실패
36 대부분 두 왕국론, 곧 교회와 국가를 분리하는 논리에 젖어 들었기 때문에, 교회의 권위와 기반 구조를 흔드는 국가의 모든 시도에 저항해야 한다는 데는 뜻을 같이 했지만, 국가가 정치 영역에서 벌이는 일은 비판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본회퍼에게 부정의는 부정의일 뿐이었다. 그는 교회를 향해 응답하라고 요청했다.
39 본회퍼에게는 더 이상 저항을 도모할 공동체가 남아 있지 않았다. 던질 수 있는 건 자신의 몸뿐이었다. 비폭력 저항도 더는 가능한 선택지가 아니었다.
3. 본회퍼의 윤리학
51 윤리 체계란 옳음과 그름에 관한 결정에 근거해 작동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본회퍼는 나치 시대에는 이러한 윤리 체계가 더는 작동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하나의 결정이 윤리적으로 명료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나치가 독일의 구원자를 자처하여 극악무도한 범죄 행위를 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심판으로 포장하는 윤리적 연막작전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53 그러므로 그분만이 그러한 윤리적 불가능성을 가로지를 수 있다. 의롭고자 하는 우리의 욕망을 버리며 선하고 옳은 존재가 되려는 우리의 목적을 철회하고 윤리 체계가 주는 안락함을 포기할 때, 우린 비로소 하느님의 뜻을 찾고 상황이라는 현실성 안에서 행위를 하게 된다.
56 본회퍼의 생각을 정리하면 십자가는 분명 평화의 소식과 모든 형태의 폭력에 대한 규탄을 담고 있지만, 그로부터 보편적이고 원칙론적인 윤리를 산출하지는 않는다. 본회퍼를 단순히 평화주의자라고 부르는 게 충분하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의 윤리는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에 보답한다는 의미에서 평화주의적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하느님께 직접 다가가도록 독려하고 그분이 모든 상황 가운데 당신 뜻을 직접 전할 공간을 남겨 두는 것이어야 한다. 대개의 경우 하느님은 사람들이 평화주의자로 남을 수 있도록 인도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께서 매우 놀라운, 심지어 불합리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명령을 내리실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늘 열어야 한다.
4. 가능한 윤리인가?
61 창조 질서는 정치 윤리를 위한 고정 장치가 아니다. 본회퍼는 무엇이든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질서로 인정 받을 수 있으며 다른 것과 마찬 가지로 우리의 보호와 참여를 요구한다고 믿었다. 그는 '질서' 개념이 인류의 필요를 채우고 타락한 국가로부터 인류를 보호하시는 하느님의 본성을 묘사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64 윤리적 규칙이나 원칙은 궁극 이전의 것의 일부로 하느님이 만드신 질서들 안에서 인간이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다. 하지만 그 궁극적인 목적은 지상의 평화로운 삶에 있지 않다. 그것들은 사람들이 영원에 도달하도록 이끌어야만 한다. 윤리적 규칙이 영원을 향해가는 길에 도리어 방해가 된다면 그것은 폐지되어야 한다.
65 질서들 혹은 윤리적 원칙들이란 본래 하느님의 뜻과 본성이 희미하게 덧입혀진, 한계가 명백한 구성물이며 하느님은 어떠한 개별적 상황도 간과하지 않으신다. 윤리적 원칙들이 실패하고 더는 궁극적인 것에 봉사하지 못하는 순간과 장소가 생긴다면 우리 하느님께 직접 다가가야만 한다.
66 때로는 윤리적 원칙을 따르기 때문에 질서를 위반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말하는 것"보다 거짓을 말하는 게 더 진실할 때, 국가의 본질을 부식시킬 복종보다 차라리 반란이 더 올바를 때, 평화주의가 생명이 지닌 존엄성의 가장 잔혹한 적이 되고 도리어 살인이 그 존엄성을 긍정할 때가 그렇다.
70 본회퍼는 인간은 모든 능력을 다해 하느님이 자신에게 무엇을 명령하는지를 식별하고, 그런 뒤에는 그 분께 은총과 자비를 구한 채 모든 행동을 하느님께 위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72 그리스도교는 윤리적으로든 교리적으로든 체계라는 안전한 틀에 갇히지 않는다. 그리스도교의 뿌리는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고자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하느님의 현실 바로 그곳에 박혀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교는 우리를 그저 안락한 관계에 머물게 하지 않으며 도리어 우리를 안전지대에서 끄집어내 진정한 현실과 「나를 따를 따르라」, 곧 본래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본받는 길로 인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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