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 10점
칼 마르크스 지음, 최형익 옮김/비르투출판사


제2판에 부치는 마르크스의 서문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 칼 마르크스

<논문> 계급투쟁과 보통선거제의 정치적 동학 / 최형익

<논문> 마르크스와 근대성의 문제: 그의  「브뤼메르 18일」에 대한 푸코의 계보학적 읽기 / 이구표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 칼 마르크스

10 헤겔은 어디선가 세계사에서 막대한 중요성을 지닌 모든 사건과 인물들은 반복된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이는 것을 잊었다. 한 번은 비극으로 다음은 소극으로 끝난다는 사실 말이다. 당통에 대해서는 꼬씨디에르가, 로베스피에르에 대해서는 루이 블랑이, 1793~1795년의 산악당에 대해서는 1848~1851년의 산악당이 그러하며, 삼촌에 대해서는 조카가 그러하다. 그리고 같은 모습이 브뤼메르 18일의 재판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 속에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11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 가지만, 그들이 바라는 꼭 그대로 역사를 형성해가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 스스로 선택한 환경 아래서가 아니라 과거로부터 곧바로 맞닥뜨리게 되거나 그로부터 조건 지어지고 넘겨받은 환경하에서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모든 죽은 세대의 전통은 악몽과도 같이 살아 있는 세대의 머리를 짓누르고 있다. 현 세대가 그들 자신들 그리고 만물을 혁명화하고 이제까지 존재한 적이 없는 무엇인가를 창출해 내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는 바로 그 때, 정확하게 그와 같은 혁명적 위기의 시기에 그들은 자신의 목적에 봉사할 수 있도록 과거의 유령을 주술로 초조하게 불러내며, 그들로부터 이름과 구호와 의상을 빌려와 세계사의 새로운 모습을 이처럼 유서 깊은 분장과 빌려 온 용어로 제시하고자 한다.


15 19세기의 사회혁명은 과거로부터가 아니라 오직 미래에서만 영감을 받는다. 과거와 관련되어 있는 모든 미신을 벗어 버리고서야 비로소 19세기의 사회혁명은 시작될 수 있다. 이전의 혁명은 자신의 혁명적 내용에 눈을 감기 위해 지나가버린 세계사의 추억을 필요로 했다. 19세기 혁명은 자신만의 고유한 내용을 얻기 위해 죽은 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시신을 묻어 버리도록 해야 한다. 과거 혁명에서는 언어, 곧 형식이 내용을 압도했다면, 19세기의 혁명에서는 내용이 형식을 압도한다.


21 루이 필립의 부르주아 군주정의 뒤를 이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부르주아 공화정뿐이었다. 지금까지 부르주아지의 제한된 일파가 왕의 이름 하에 지배해왔다면, 이제는 부르주아지 전체가 인민의 이름으로 지배하게 될 것이다. 파리 프롤레타리아의 요구 사항은 이제는 종지부를 찍어야 하는 터무니없는 공상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졌다. 제헌의회의 이런 주장에 대해 파리의 프롤레타리아는 유럽 내전사상 가장 거대한 사건이라 할 수 있는 6월 봉기로 맞섰으나 부르주아 공화정이 승리했다. 부르주아 공화정의 편에는 금융귀족과 산업 부르주아지, 중간계급, 쁘띠 부르주아, 군대, 기동방위군으로 조직된 룸펜프롤레타리아, 우파 지식인, 성직자, 농민들이 서 있었다. 파리 프롤레타리아의 편에는 자신들을 제외하면 아무도 가담하지 않았다. 부르주아 공화정의 승리로 끝난 뒤, 3천 명 이상에 달하는 반란자들이 학살당했고 1만 5천 명이 재판도 없이 추방당했다. 이 싸움의 패배로 인해 프롤레타리아는 혁명 무대의 뒷전으로 퇴각한다.


24 6월 사건 동안 모든 계급과 정파는 질서당으로 결집하여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사회주의, 공산주의 및 무정부주의 당으로 규정하고,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공격했다. 그들은 사회를 "사회의 적들"로부터 구해냈다. 그들은 구사회의 표어인 "재산. 가족. 종교. 질서"를 자기 군대의 암호로 지정했으며, 반혁명의 십자군들에게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이 군호에 따라 적을 정복하리라!"


33 법조문에 의해 도덕적 권력을 창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차치하고라도 헌법은 대통령이 모든 프랑스인들의 직접 거를 통해 선출되게 함으로써 다시 한번 스스로를 폐기시키고 있다. 프랑스의 전 투표수가 국민 의회의 750명 의원들 사이에 나뉘어져 있지만, 반대로 대통령의 경우에는 단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다. 인민의 각 대표자는 단지 이런저런 정파 또는 특정도시, 특정교두보를 대표하고 있을 뿐이며, 심지어는 후보자의 인간 됨됨이나 그의 대의명분을 자세히 검토하지도 못하고 750개의 의석에 누군가를 선출해야 한다는 단순한 필연성을 대표하는 반면, 대통령은 국민 전체에 의해 선출된다. 대통령 선출행위는 주권적 인민이 4년마다 한번 씩 하는 트럼프 놀이다. 선거에 의해 선출 된 의회는 국민과 형이상학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대통령은 국민과 개인적 관계를 지닌다. 사실상 의회는 개별적 대표자들을 통해 국민정신의 다양한 측면을 나타내지만, 대통령 안에서는 국민정신 그 자체의 현신을 발견한다. 의회와 달리 대통령은 일종의 신권을 보유한다. 한마디로, 그는 인민의 은총을 받은 대통령인 것이다.


38 1948년 12월 20일로부터 제헌의회가 해산한 1849년 5월에 이르는 기간은 부르주아공화파의 몰락의 역사에 해당한다. 부르주아지를 위해 공화정을 수립하고, 혁명적 프롤레타리아를 무대 밖으로 밀어내고, 민주파 쁘띠부르주아지들을 당분간 침묵하게 만든 후에 정작 부르주아공화파는 당연하게도 국가를 자신의 재산으로 접수한 부르주아 대중들에 의해 한쪽으로 밀려났다. 그런데 이 부르주아지 대중은 바로 왕당파였다. 이들 일부는 대토지 소유자로 왕정복고 기간에 지배력을 행사했던 정통왕조파였다. 또 다른 일부는 금융귀족과 대산업가로서 7월 왕정 기간에 지배세력이었던 오를레앙파였다. 군대, 대학, 교회, 변호사회, 학술원, 그리고 언론 고위직은, 비록 비율은 다르지만 이 두 왕당파가 모두 차지하고 있었다. 부르주아 공화국에서 그들은 부르봉이나 오를레앙의 이름이 아닌 자본의 이름을 가지고 자신들이 공동으로 지배할 수 있는 국가 형태를 발견했다. 6월 봉기는 이미 그들을 '질서당 Party of Order'으로 통합하게 했다.


72 부르주아지는 자신이 봉건제를 겨냥해 주조했던 모든 무기가 이제는 그들 자신을 향하게 되었으며, 또한 자기가 만들어 놓은 모든 교육수단이 부르주아의 문명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키고, 그리고 그들이 창조한 모든 신들이 그들로부터 떨어져 나갔다는 사실에 대해 진정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소위 부르주아적인 자유와 진보의 모든 기관이 사회기층과 정치의 정상에서 동시에 그들의 계급지배를 공격하고 위협하며, 결국 사회주의적으로 되어간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이해했다.


75 질서당과 대통령의 불화가 이처럼 위협적 성격을 띠게 된 바로 그때, 예기치 않은 사건이 대통령으로 하여금 다시 의회의 품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 사건은 다음 아닌 1850년 3월 10일의 보궐선거였다.


79 1850년 5월 31일의 선거법은 파리의 프롤레타리아가 정치 권력에 어떤 형태로든 참가하는 것을 봉쇄했다. 이 선거법은 모든 투쟁 영역에서 파리의 프롤레타리아를 차단시켜 버렸다. 또한 그것은 노동자들을 2월 혁명 이전과 같은 하층 천민의 지위로 되돌려 놓았다. 파리의 프롤레타리아는 이러한 사태에 직면해 그들 스스로를 민주파 인사들이 지도하도록 함으로써, 그리고 순간적 안락과 위안 때문에 자기 계급의 혁명적 이해관계를 망각함으로써 지배권력이 되는 명예를 포기한 채 운명에 자신의 몸을 떠맡겨 버렸다.


80 3월 10일의 보통선거는 부르주아의 지배에 직접적으로 항거하는 선언이었다. 부르주아는 이에 대해 보통선거권을 불법화함으로써 대응했다. 그러므로 5월 31일의 법률은 계급투쟁의 필연적 산물 가운데 하나였다.


137 "이것은 사회주의의 완전하고도 최종적인 승리다!" 기조는 12월 2일을 이렇게 특징 지웠다. 그러나 의회공화정의 타도가 그 속에 프롤레타리아혁명의 승리의 싹을 담고 있다 해도 그것의 즉각적이고 뚜렷한 결과는 의회에 대한 보나파르트의 승리, 입법 권력에 대한 행정권력의 승리, 구호가 있는 세력에 대한 구호가 없는 세력의 승리였다. 의회에서 국민은 자신의 일반의지를 법으로, 다른 말로 표현하면 지배계급의 법을 국민의 일반의지로 만들었다. 행정권력 앞에서 지배계급은 자신의 모든 의지를 철회하고 외부의지의 우월한 명령, 즉 권위에 복종한다. 입법권력과는 대조적으로 행정권력은 국민의 자율성과 대비되는 국민의 타율성을 표현한다.


138 거대 관료·군사 조직, 광범위하고 정교한 국가기구, 50만의 군대와 더불어 50만을 헤아리는 관료 집단을 보유한 채 프랑스 사회전체를 하나의 그물로 얽어매고 모든 땀구멍을 막아버리는 섬뜩한 기생체인 행정권력은 봉건제가 몰락하는 절대왕정 시대에 등장했다. 지주와 도시의 영주적 특권은 국가권력의 부속물로 변화했다. 봉건가신들은 봉급을 받는 고용관료로, 그리고 상쟁하는 중세적 절대권의 잡다한 양상은 근대 공장에서처럼 분화되고 집중된 작업을 수행하는 국가권력의 정돈된 계획으로 변형되었다.


139 부르봉가가 대지주계급의 왕조였고 오를레앙가가 화폐계급의 왕조였듯이 보나파르트 왕조는 농민, 곧 프랑스 인민대중의 왕조다. 부르주아 계급의 의회에 굴복한 보나파르트가 아니라 부르주아계급의 의회를 해산한 보나파르트야말로 농민들이 선택한 인물이다. 3년 동안 도시들은 12월 10일 선거의 의미를 왜곡하는데 성공했으며, 농민들을 기만해 제정부활을 획책해왔다. 1848년 12월 10일 선거는 1851년 12월 2일의 쿠데타에 의해 비로소 완성되었다.


153 나폴레옹의 대리자로서 끊임없이 놀라운 일을 연출하며 자신에게 대중의 눈길을 고정시켜야하는 필연성, 즉 날마다 소규모 쿠데타를 실행에 옮겨야 할 필연성 때문에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의 모순된 요구에 의해 내몰린 채, 일종의 마술사처럼 행세해야 하는 그러한 존재로서의 보나파르트는 부르주아 경제 전체를 혼란에 빠뜨리고, 1848년의 혁명에서 불가침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모든 것을 침해하며, 어떤 사람에게는 혁명을 묵인하게 하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혁명을 소망하게 하여 질서의 이름으로 실질적인 무정부상태를 만들어낸다. 동시에 그는 모든 국가기구로부터 후광을 벗겨내어 속되게 하고 역겨우면서도 우스꽝스러운 존재로 전락시켜 버린다. 보나파르트는 나폴레옹 1세가 트리어의 성의 숭배를 한 것처럼 황제외투 숭배형식으로 파리에서 재현하려 한다. 황제의 망토가 루이 보나파르트의 어깨에 마침내 걸쳐지는 순간, 나폴레옹 동상은 방돔 광장 전승 기념탑 꼭대기에서 떨어져 산산조각 나게 될 것이다.


<논문> 계급투쟁과 보통선거제의 정치적 동학 / 최형익

157 보통선거제와 계급투쟁의 정치적 동학이 가장 잘 드러나 있는 마르크스의 저작이 바로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이하 「브뤼메르 18일」로 표기)이다. 「브뤼메르 18일」에서 마르크스는 보통선거제를 세가지 수준에서 분석한다. 그 논의를 일별한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 보통선거제는 부르주아 의회 공화정의 출현과정과 역사적 관련이 있다. 둘째, 노동자 또는 프롤레타리아가 독자적 정당을 조직하여 보통선거제를 정치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셋째, 프랑스에서 보나파르트 독재체제의 출현이나 히틀러가 독일에서 집권하는 과정에서 알 수 있듯이, 보통선거제는 정치적 반동의 수단으로도 악용될 수도 있다. 이러한 견지에서 마르크스는 보통선거제 그 자체를 추상적으로 규정하기보다는 보통 선거제와 계급 투쟁의 동학을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165 대통령 선거에서 보나파르트가 당선될 수 있었던 이유는 나폴레옹의 신화를 맹신하는 분할지 소농민의 압도적 지지의 획득과 함께, 6월 학살의 공적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적 공화파로부터 찬양은커녕 아무런 반대급부조차 획득하지 못했던 군부, 왕정 복고를 공공연히 원했던 대자산가계급, 6월 학살의 희생자들인 하층 소부르주아 계급과 프롤레타리아, 특히 이들에게 '적의 적은 친구다'는 속담에나 합당한 심정적 반발, 이런 것들이 모두 합쳐져 우연한 정치적 흐름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168 부르주아 계급의 질서당과 보나파르트는 이러한 선거결과에서 부르주아 지배체제의 위기 징후를 읽어냈고, 그 도전을 봉쇄하기 위해 아예 보통선거제 자체를 폐지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는 앞에서 언급한대로 대통령 권력에 맞서 의회에 힘과 정당성을 부여할 제도 그 자체를 폐기함으로써 의회 스스로의 약화, 곧 그들이 그것을 통해 권력을 행사하는 제도적 기반의 약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질서당은 곧이어 군통수권 유지를 포함해 점차 상실해가는 정치권력을 대통령에게서 환수하기 위해 갖은 시도를 다했으나 그것은 무기력한 논쟁으로 돌변한 채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173 보통선거제는 2월 혁명 과정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마르크스는 2월 혁명 발발을 초래한 주요 원인이 보통선거제의 참정권 확대와 관련되어 있음을 분명히 한다. 다시 말해서, 2월 혁명이 의도한 것은 "선거 제도의 개혁"이었다. 그 개혁을 통해 유산자 계급 자체 내에서 정치적 특권을 가질 수 있는 자의 범위를 확대함으로써 금융 귀족의 배타적 지배를 타도 하는 것이었다.


174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한다. "보통선거가 바보 같은 공화주의자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기적을 일으키는 요술지팡이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뛰어난 장점들을 가지고 있었다. 곧 계급 투쟁을 분출시키고, 부르주아 사회의 다양한 중간층들에게 신속히 환멸과 실망을 경험하게 하고, 모든 착취계급의 분파들을 단 한 번에 국가의 꼭대기로 밀어 올려주며, 따라서 착취계급의 가짜 가면을 벗겨 준다는 것이 그 장점이었다."


176 마르크스는 헌법의 기반인 보통선거제의 폐지를 "질서당과 부르주아 독재의 최후의 언어", 그리고 그러한 보통선거제를 폐지한 1851년 5월 31일의 선거법 개정 법률을 "부르주아지의 쿠데타"로 규정한다.


176 국민의 분명한 주권의지의 행사인 보통선거의 성과와 결과로서의 부르주아지의 통치, 그것이 부르주아 헌법의 의의이다. 그러나 이 선거권, 이 주권의지의 내용이 이제 부르주아 통치가 아닌 순간부터 헌법이 더 이상 어떤 의미가 있는 부르주아지가 선거권을 통제하여 이치에 맞는 것을, 그리고 자신들의 통치를 획책하는 것이 부르주아지의 임무가 아닌가? 보통선거권은 거듭 기존의 국가권력을 폐기하고 거기서 새로이 국가권력을 창출함으로써 모든 안정을 저해하며, 매 순간마다 기존의 모든 세력을 문제 삼으며, 권위를 무시하며, 무정부 자체를 권위 있게 고양시키지 않았는가?


184 「브뤼메르 18일」에서 개진된 마르크스의 계급투쟁의 관점에서 파악된 보통선거제에 대한 입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보통선거제가 그 자체로 민주주의적 정치양식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는 보통선거제를 탈신비화 내지 탈신화화 하여 당대의 정치사회적 맥락에서 다뤄야 함을 의미한다.


184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통선거제는 특정한 주객관적 조건 내지 역사적 맥락에서 혁명적인 정치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185 셋째, 부르주아의 사회경제적 지배가 공고화되면 될수록 노동자는 계급보다는 시민 내지 개별유권자로 행위 할 가능성이 더욱 높아진다. 이럴 경우, 보통선거는 그 제도적 형식이 존속함에도 불구하고 내용적으로는 자본주의적 사회경제구조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형태로 형해화 될 가능성이 높다. 쉐보르스키 등이 강조하듯이, 자본주의 하에서 한 사람의 노동자가 하나의 시민으로 투표하는 것과 하나의 노동자로 투표하는 것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계급투쟁 혹은 자본의 지배에 반한 노동자 계급의 집단적 정치행위의 관점에서 보통선거제와 민주주의를 규정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이론적 의미가 지대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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