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마누엘 칸트: 순수이성 비판 서문


순수이성 비판 서문 - 10점
임마누엘 칸트 지음, 김석수 옮김/책세상



서문(초판) 

서문(재판) 

들어가는 말(초판) 

들어가는 말(재판) 


해제 ― 이성적 능력에 대한 비판적 탐구, 순수이성 비판





서문(초판) 

15 인간의 이상은 자신이 인식하는 어떤 종류에 있어서는 다음과 같은 특별한 운명을 지니고 있다. 즉 인간의 이성은 바로 이성 자신의 본성상 그 자체에 부여되어 있고 그래서 달리 피해볼 수도 없는 물음들로 인해 더군다나 그러한 물음들이 자신의 모든 능력을 넘어서 있어 스스로 답할 수도 없기 때문에 괴로움을 겪게 된다.


18 내가 이 비판이라는 것 아래 의미하고자 하는 것은 책이나 체계에 대한 이성이 아니라 모든 경험과 독립하여 이성이 추구하려는 모든 인식과 관련하여 이성 능력 일반에 대 한 비판이다. 따라서 이 비판은 형이상학 일반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결정하고 그것의 원천뿐만 아니라 범위와 한계를 규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나는 이 모든 것을 원리 에 따라 결정하고자 한다.


20 각각의 목적을 실현할 때의 완전성과 모든 목적을 한꺼번에 실현할 때의 주도 면밀함, 이 둘은 모두 자의적인 기획이 아니라 우리의 비판적 탐구의 소재가 되는 것으로 인식 자체의 본성이 우리에게 부과하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적인 탐구 형식에 관계하는 확실성과 명료성이라는 두 가지 요소는 여전히 아주 위험한 기획을 감행하는 입안자에게 정당하게 행할 수 있는 본질적 요구로 여겨진다.


서문(재판) 

32 논리학이 이렇게 훌륭하게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도 그것이 오로지 자신의 한계를 고유하게 설정하는 제한성 덕분이다. 바로 이러한 제한성으로 인하여 논리학은 정당하게 인식의 모든 객체와 그것들 사이의 차이를 추상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논리학에서 지성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형식 외에 더 이상 다른 어떤 것에도 관계하지 않는다. 그러나 물론 이성이 학문의 확고한 길에 접어든다는 것은 훨씬 더 어렵다.


33 따라서 예비학으로서의 논리학은 단지 학문의 출입구가 될 뿐이다. 그리고 인식에 관계하게 될 때, 우리는 그러한 인식을 평가하기 위하여 논리학을 전제하지만 그러한 인식을 현실적으로 획득하기 위해서는 이른바 고유하고도 객관적인 학문에 주목해야 한다.


33 그런데 이런 학문 안에 이성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한 그 안에서 선험적인 어떤 것이 인식되어야 할 것이며, 이성의 이러한 인식은 두 가지 방식으로 자신의 객체에 관계할 수 있다. 즉 이러한 인식은 한편으로는 객체와 그것의 개념을 규정하는 것에만 관계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것을 현실화시키는 것에 관계한다. 전자는 이성의 이론적 인식이며, 후자는 이성의 실천적 인식이다. 


39 따라서 우리는 형이상학의 과제에서 대상이 우리의 인식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더 성공적이지 않을까 하고 시도해보고자 한다. 이렇게 하면 이미 대상을 선험적으로 인식하는 데 요구되는 가능성과 더 잘 들어맞는 상태가 될 것이다. 이것은 대상이 우리에게 주어지기 전에 대상에 관해 확정짓는 형태가 된다. 이것은 코페르니쿠스의 최초의 사상과 사정이 흡사하다.


39 직관이 대상의 성질에 따라야 한다면, 나는 우리가 대상의 성질에 관해 선험적으로 어떤 것을 알 수 있는지 통찰할 수 없다. 오히려 (감각의 객체로서) 대상이 우리의 직관 능력의 성질에 따라야 한다. 그렇게 될 경우에 나는 이러한 가능성, 즉 대상의 성질을 선험적으로 잘 알 수 있음을 완전히 제대로 떠올릴 수 있다.


40 이런 종류의 인식은 지성의 규칙을 대상이 나에게 주어지기 전에 내가 내 안에서, 따라서 선험적으로 전제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이 규칙은 개념 안에서 선험적으로 표현된다. 따라서 경험의 모든 대상은 필연적으로 이 개념에 따라야 하며, 이 개념과 일치해야 한다.


46 공간과 시간은 단지 감성적 직관의 형식이라는 것, 그래서 현상으로서의 사물의 존재 조건이라는 것, 게다가 개념에 대응하는 직관이 주어질 수 없는 한 우리는 그 어떤 지성 개념도 가질 수 없으며, 따라서 또한 사물을 인식하기 위한 그 어떤 요소도 가질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 자체로서의 대상을 전혀 인식할 수 없으며 단지 그 대상이 감성적 직관의 객체인 한, 즉 현상으로서의 대상인 한 그것을 인식할 수 있다.


49 나는 사변이성에 대해서 그것이 엄청난 통찰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주장하는 권한을 빼앗지 않는다면, 내 이성을 반드시 실천적으로 사용할 수 있기 위해 신, 자유, 영혼불멸 같은 것은 단 한 번도 가정 해볼 수 없다. 왜냐하면 사변이성이 이러한 통찰에 이르기 위해서는 사실상 경험할 수 있는 대상들에만 확장하는 원칙들을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원칙들이 경험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에 적용된다면, 이러한 원칙들은 항상 이 대상을 현상으로 변화시키게 마련이며, 따라서 순수 이성의 실천적 확장을 모두 불가능한 것으로 선언하게 될 것이다. 


50 그러므로 나는 신앙을 위한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지식을 중단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형이상학의 독단론, 즉 순수이성의 비판 없이 형이상학을 진전시키려는 편견은 도덕성 에 반하는 모든 불신의 진정한 원천이 되기 때문이다. 


50 비판이 결여된 이성의 근거 없는 모색이나 경솔한 싸움과 비교 해볼 때 우리는 이제 학문 일반의 안전한 길을 통하여 이성 계발이라는 점에만 주목할 수 있다.


들어가는 말(초판) 

63 경험은 우리에게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말해 주지만, 그것이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어 달리 존재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려주지는 않는다. 바로 그 때문에 경험은 우리에게 그 어떤 참된 보편성도 제시해주지 않는다. 그런데 이성은 바로 이와 같은 종류의 보편성에 관한 인식을 얻기를 열망하며, 경험을 통해서 만족을 얻기보다는 오히려 자극 받기를 원한다. 


63 따라서 우리는 그와 같은 인식을 선험적 a priori 인식이라고 한다. 그와는 반대로 경험에서 얻게 되는 것은 단지 후험적 a posteriori으로나 경험적으로만 인식될 수 있기 때문에 보편적 인식이 될 수 없다.


64 우리가 경험에서 감관에 속하는 것들을 모두 제거할 때도 여전히 어떤 근원적인 개념들과 그 개념에서 산출되는 판단들이 남아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완전히 선험적인 것으로 경험에서 독립하여 존재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감관에 나타나는 대상들에 관해서 단순한 경험이 가르쳐 줄 수 있는 것 이상의 것을 주장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며, 또 적어도 그와 같은 것을 주장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64 즉 어떤 인식은 심지어 가능한 경험의 분야도 모두 버리고 경험에서는 그에 상응하는 그 어떤 대상도 결코 주어질 수 없는 개념들을 통해서 우리의 판단 범위를 경험의 모든 한계를 넘어 확장하려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68 분석적 판단(긍정적 판단)은 술어와 주어가 결합하는 것이 동일성을 통해 생각되는 판단이며, 반면 종합적 판단은 이러한 동일성을 통하지 않고 결합된 것으로 생각되어야 하는 판단이다. 또한 우리는 전자의 판단을 해명 판단이라고 하며, 후자의 판단을 확장 판단이라고 한다. 전자는 술어를 통해 주어의 개념에 아무것도 더 보태지 않고, 단지 주어 개념을 분석하여 이것을 그 자체 안에서 (비록 불투명한 상태이기는 하지만) 이미 먼저 들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었던 부분 개념으로 분해할 뿐이기 때문이다.


69 이제 다음과 같은 것이 명백해졌다. 1. 분석적 판단을 통해서는 우리의 인식이 전혀 확장되지 않으며, 내가 이미 갖고 있는 개념이 분해되어 내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2. 종합적 판단에서는 내가 주어 개념 외에 다른 어떤 것(X)을 가져야 하고, 지성은 주어 개념 안에 놓여 있지 않은 술어를 주어 개념에 속하는 것으로 인식하기 위해 바로 이 X에 의지하고 있다. 


72 그러나 하나의 인식은 그것에 어떠한 경험도 감각도 전혀 섞여 있지 않고, 따라서 완전히 선험적으로만 가능한 경우 순수하다고 명명된다. 그런데 이성은 선험적인 인식의 원리들을 주는 능력이다. 따라서 순수이성은 오로지 선험적으로만 어떤 것을 인식하는 원리들을 포함하는 그와 같은 것이다. 순수이성의 기관은 선험적인 순수한 인식을 모두 획득 할 수 있게 해주고 현실적으로 성립되도록 해주는 원칙들을 총괄한다.


73 우리는 순수이성과 그것의 원천과 한계들을 단순히 조사하는 순수이성이 체계에 대한 예비학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러한 학문은 순수이성의 이론적 학설이 아니라 단지 순수이성을 비판하는 것으로 불려야 할 것이다.


73 나는 대상보다는 대상 일반에 관한 우리의 선험적 개념에 종사하는 모든 인식을 초월적이라고 명명한다. 그러한 개념 체계는 바로 초월철학 Transzendental-Philosophie 이라 불릴 것이다.


76 초월철학은 오로지 순수한 사변이성이 세계에 대해서 갖게되는 앎에 관한 것이다. 실천적인 것은 모두 그것이 일어나게 한 원인이 있는 한 경험적 인식에 속하는 감정에 관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77 다시 말하면 여기서는 감성 Sinnlichkeit과 지성 Verstand이 존재한다는 것만 언급되면 된다. 전자를 통해서 우리에게 대상이 주어지지만, 후자를 통해서는 대상이 사유된다.


들어가는 말(재판) 

81 지성의 활동은 감성에 각인된 이른바 감성적 인상이라는 원재료를 가공해 대상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해준다. 바로 이와 같이 대상을 인식하는 것이 곧 경험이 된다. 따라서 시간상으로 우리 안에 있는 그 어떤 인식도 경험에 앞서지 못하며, 오히려 이 경험과 더불어 모든 인식이 시작된다. 


83 선험적인 인식 중에서 경험적인 것이 전혀 섞여 있지 않은 인식을 순수하다고 한다. 그래서 예를 들어 모든 변화에는 원인이 있다는 명제는 선험적이긴 하지만 순수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변화라는 것은 경험에서만 도출될 수 있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87 순수이성 자체가 피할 수 없는 과제들은 바로 신, 자유 그리고 영혼의 불멸성이다. 그러나 모든 준비를 갖추고 오로지 이와 같은 것들을 해결하는 것을 궁극 목적으로 삼고 있는 학문은 형이상학이라 불린다. 그런데 이 형이상학의 방법은 처음에는 독단적이다. 즉 이성이 이렇게 엄청난 기획을 스스로가 감당할 수 있는지에 관련하여 자신의 능력과 무능력을 사전에 검토해보지도 않고 함부로 그것을 성취하는 일을 도모한다.


해제 ― 이성적 능력에 대한 비판적 탐구, 순수이성 비판

113 내가 두 가지 대상을 여러 차례 그리고 오랫동안 성찰하는데 종사하면 할수록, 그 두 가지 대상은 더욱 새롭고 높아지는 경탄과 외경을 내 마음에 가득 채운다. 이 두 가지는 내 머리 위 별이 총총한 하늘과 내 마음 속의 도덕법칙이다.


123 칸트는 형이상학에는 "왜 확실한 학문의 길이 아직도 발견되지 않았는가? 그 길을 찾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제기하게 되었다. 칸트에 따르면 기존의 형이상학은 이와 같은 질문에 관해 철저하게 답을 찾으려는 노력이 미흡했다.


124 기존의 형이상학은 인간의 사유 작용을, 경험을 넘어서 초감각적인 실재에 적용하여 마치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 것처럼 주장하는데 머물렀지, 그것이 진정 학문으로서의 자격을 갖춘 인식이 될 수 있는지는 더 깊이 묻지 못했다. 그래서 칸트는 사유 능력 주체인 이성 자신의 능력을 비판하지 않고 이성을 월권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독단론이라고 규정했다.


124 이처럼 〈순수이성 비판>은 재래의 모든 형이상학을 비판하고 초월철학을 정립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129 인식은 감각적으로 주어지는 내용과 지성의 사유가 종합되어야만 가능하고, 이러한 종합의 결과가 보편성과 필연성을 지닌 학문의 자격 조건에 적합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이것이 가능할 수 있는가? 칸트는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인식의 문제에서 방법론적으로 일대 발상의 전환을 시도한다. 그는 대상 중심의 인식을 주체 중심의 인식으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학문으로서의 형이상학'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한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대상에서 아무리 끌어 모아도 학문이 갖추어야 할 보편성과 필연성은 나올 수 없다.


129 즉 그는 당대의 제반 과학이 보편성과 필연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왜 그러할 수 있는지를 해명하고 그러한 작업에서 인식 주체 안에 이런 보편성과 필연성을 가능하게 해주는 선험적 형식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정립하고자 했다.


130 칸트가 보기에 이 두 판단의 경우에는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전자의 경우는 우리의 앎이 선험적인 것으로 필연성과 보편성을 갖고 있지만 우리에게 기존의 앎 외에 더 많이 알 수 있도록 확장시켜 주지 않으며, 후자의 경우는 우리의 기존의 앎보다 더 많은 앎을 가능하도록 해주지만 보편성과 필연성을 제공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칸트는 여기에서 보편성과 필연성을 가지면서도 인식의 확장을 가능하게 해주는 제3의 판단을 탐구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선험적 종합판단이다.


131 선험적 종합판단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물음이 '순수이성의 일반적 과제'로 나타나며, 바로 이 과제가 해명되면 과학의 성립 근거와 형이상학의 성립 여부를 밝혀 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인식의 본성과 범위, 한계도 정할 수 있다. 따라서 칸트에게는 선험적 종합판단의 경우 가능성 여부가 가장 중요한 관심사였다.


132 칸트는 이성이 이성 자신을 비판하는 반성 철학을 통하여 학문으로서의 형이상학의 체계를 다시 확립해 보고자 했다. 여기에서 칸트가 말하는, '학문으로서의 형이상학'은, 앞에서 언급된 기존의 형이상학처럼 초감각적인 세계를 인식의 범주 안에 끌어들이는 형이상학이 아니라 대상 일반의 인식가능성의 조건으로 이성을 비판하는 초월철학, 이성의 선험적 개념과 원칙에 대한 체계학이다.


133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세계는 어디까지나 이 주어진 현상 세계뿐이며 주어진 세계 자체, 즉 물자체가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유될 수 있을 뿐이다. 사유된 세계를 주어진 세계와 동일시할 때 허구가 생겨나게 된다.


134 적어도 칸트에 따르면 인간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물자체 없이는 어떤 인식도 불가능하다. 또한 그 물자체에서 내용을 수용하는 감성 능력이 선험적으로 존재해야 한다. 바로 이런 수용 능력, 즉 대상에 의해 촉발되는 한 표상 능력에 주어진 결과가 감각이다.


136 공간과 시간은 경험적 실재성을 지닌다. 비록 공간과 시간은 감성의 주관적 형식으로 실재적이기보다는 관념적이지만 동시에 경험적으로 실재하는 것들을 정립해주기도 한다. 


137 그는 수학이 단순히 개념을 분석함으로써 성립되는 학문이 아니라 외적 감관의 형식인 공간의 표상을 통해 성립된다고 보았다.


138 칸트는 지성을 감성에서 주어진 다양한 내용을 분류 정리하며 개념적 판단을 하는 능력이라고 본다. 감성이 수용적 능력자라면, 지성은 자발적 능력자다. 지성은 자연의 입법자다. 그러나 자연의 입법자로서의 지성이 마음대로 주어져 있지도 않은 세계를 입법할 수는 없다. 적어도 입법의 소재를 감성의 형식으로부터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140 칸트에게서 '초월적'이라는 말은 경험적인 부분이 아니면서도 경험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는 대상을 언제나 생각할 수 있도록 하는 원리들을 다루는 이 '진리의 논리학'을 '초월적 분석론'이라고 부른다.


143 우리는 지성의 순수 개념, 즉 범주를 감성에서 주어진 현상에 적용 할 수 있는 정당성을 어디에서 확보하는가? 사실 이러한 물음은 감성의 형식인 시간, 공간의 경우에는 발생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대상은 감성의 형식을 통하지 않고는 우리에게 주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성의 형식에서는 상황이 달라진다. 왜냐하면 감성의 형식에서 주어진 현상에 범주들이 적용될 때 그것들이 왜곡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적용의 정당성을 해명해야만 한다. 이것은 곧 대상을 무엇인 대상으로 생각하기 위해서는 그 생각을 가능하게 해주는 우리 인식 주체에 선험적인 사유 틀, 즉 범주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며, 또한 그것은 이 선험적인 틀에 의해 여러 가지 내용이 구성되고 결합됨을 입증하는 것이다.


146 '나'라는 것은 구체적인 실체가 아니라 모든 인식 작용과 기능에 반드시 근원적으로 동원되어야 하고 논리적으로 요청될 수밖에 없는 그 무엇이다. 그것이 바로 '순수 통각', '초월적 통각'이다. 이 초월적 통각이 파악된 내용을 통일시키며, 나아가 대상들을 서로 비교할 수 있게 해준다. 이처럼 초월적 통각은 순수하고 근원적이며 불변적인 의식이어서 인식의 결합과 통일을 가능하게 만들어 인식을 우리에게 성립시켜 준다.


166 사실 칸트는 감성과 지성을 통해 이루어지는 인식의 영역과 이성이 추구하는 이념 사이를 규제적 관계를 통하여 조심스럽게 매개하고자 하는데, 피히테 이후 전개되는 독일 관념론에서는 이것들 사이를 합일하고자 한다. 특히 헤겔 G. W. F. Hegel에 이르러 칸트의 '요청'의 태도는, '지양'의 태도로 변경되면서, 물자체가 인식의 범주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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