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한 파묵: 하얀 성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12. 10. 2.
하얀 성 -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민음사 |
하얀 성
『하얀 성』에 관하여
작품 해설
작가 연보
157 우리는 거의 매일밤 기다리며 시간을 보냈다. 바람이나 눈이 그치기를 기다렸다. 늦은 시간 보자장수가 마지막으로 지나가기를, 난로에 장작을 넣기 위해 불꽃이 사그라지기를 기다렸다. 할리치 만 맞은편 해아네서 마지막으로 흔들리는 등불이 꺼지기를, 도무지 오지 않는 잠이 오기를, 사원에서 아침 기도 시간을 알리는 소리를 기다렸다. 서로 거의 말도 하지 않고 상상 속으로 빠져들곤 하던 겨울밤 중 어느 날이었다. 호자는 갑자기 내가 아주 변했으며, 이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고 했다. 나는 갑자기 배가 따끔거렸고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반박하고 싶었다. 그의 말은 틀렸ㄱ, 나는 옛날과 같으며, 우리는 닮았으니, 옛날처럼 내게 다시 관심을 가져 달라고, 대화할 것이 아직 더 많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의 시선은 그날 아침 화가가 가져와 벽에 기대어 놓았던 나의 초상화에 머물렀다. 나는 변해있었다. 잔치 마당에서 끝없이 음식을 먹어 대서 살이 쪘고 목살도 늘어졌다. 몸은 펑퍼짐했고 행동도 둔했다. 게다가 얼굴도 완전히 딴판이었다. 그 세계에서 마시고 입맞춤을 하느라 내 입술 주위는 저속함으로 물들어 있었다.
180 우리는 성을 바라보았다. 성은 높은 언덕 위에 있었다. 깃발이 걸린 탑에 지는 해의 희미한 붉은빛이 반영되고 있었다. 그러나 성은 하얀색이었다. 새하얗고 아름다웠다. 어쩐지 이렇게 아름답고 도달하지 못할 존재는 꿈에서만 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꿈에서 어두운 숲 속의 구불거리는 길로, 언덕에 있는 밝고 하얀 건물에 도달하기 위해서 황급히 뛰어가면 그곳에 참가하고 싶은 축제, 놓치고 싶지 않은 행복이 있을 것만 같았다.
187 거의 칠 년 정도 견뎠다. 좀 더 참을성이 있었다면, 그리고 파디샤 주변 사람들을 또다시 숙청할 거라는 것을 눈치해지 않았다면 나는 끝까지 그렇게 살았을 것이다. 파디샤가 내게 열어주었던 문을 하나하나 지나면서, 잊고자 했던 내 과거의 정체로 포장되었기 때문이다. 처음에 나를 불안하게 했던 내 정체에 관한 질문에 대해 이제는 노련하게 대답했다. "사람이 누구라는 게 뭐가 중요합니까. 중요한 것은 우리가 했던 것과 앞으로 할 것들이지요"라고.
195 나는 '그'를 사랑했다. 꿈속에서 보았던 무력하고 슬퍼 보이는 나의 모습을 사랑하는 것처럼, 그 모습에 수치스럽고 화가나고 죄책감이 들고 슬퍼서 숨이 막히는 것처럼, 아들의 버릇없는 행동에 화를 내는 것처럼, 바보 같은 혐오감과 바보 같은 기쁨을 통해 나 자신을 아는 것처럼 '그'를 사랑했다! 벌레처럼 손과 팔을 무심히 움직이는 데에 익숙해진 것처럼, 머릿속 벽에서 매일 메아리치며 사라지는 생각을 깨닫는 것처럼, 가여운 내 몸에서 나는 독특한 땀 냄새처럼, 생기 없는 머리칼과 못생긴 입과 연피을 쥐고 있는 분홍빛 손에 익숙한 것처럼 그렇게 '그'를 사랑했다.
201 책을 다 읽을 즈음 그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했다. 한두 번 우리의 무기를 삼킨 늪 뒤에 있는 하얀 성의 이름을 소리쳐 말했다. 나와 쓸데없이 이탈리아어로 말하려고 했다. 그런 후 그는 읽은 것들을 소화하고, 놀라움을 진정시키고, 쉬기 위해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나는 그를 즐겁게 바라보았다. 그는 처음에, 이런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흔히 그러는 것처럼, 허공의 끝없는 부분을, 존재하지 않는 초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 내가 기대했던 것처럼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창틀 속으로 시야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아니다. 영리한 독자들은 이해했을 것이다, 그는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멍청이가 아니었다. 그는 내가 기대했던 것처럼 분노하며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그는 찾고 있었다. 나도 즐거워하며 그가 찾기를 기다렸다. 결국 그는 자신이 찾던 것을 찾아 읽었다. 그리고 다시, 우리 집의 뒤뜰이 보이는 창문으로 보이는 것들을 바라보았다. 그가 무엇을 보았는지를 나는 물론 아주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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