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에키 후미히코 외: 대승불교의 실천 | 시리즈 대승불교 3
- 책 밑줄긋기/책 2023-25
- 2025. 4. 11.
![]() |
대승불교의 실천 - ![]() 스에키 후미히코 외 지음, 김재권 옮김/CIR(씨아이알) |
제1장 대승불교의 실천 스에키 후미히코
제2장 계율과 교단 이자랑
제3장 신앙과 의식 하카마야 노리아키
제4장 대승불교의 선정실천 야마베 노부요시
제5장 불탑에서 불상으로 시마다 아키라
제6장 보살과 보살신앙 가츠모토 가렌
제7장 대승계-인도에서 중국으로 후나야마 도루
제8장 중국 선사상의 전개-「평상무사」와 「깨달음」 츠치야 다이스케
10 빌헬트는 '실천'이라는 것에 네 가지 의미가 있다고 한다. 이하에서는 빌헬트의 논의를 부연해가면서, 실천의 종류를 살펴보자.
첫째는 불교도라는 의미로 규정된 가르침을 믿고, 규정된 활동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가장 넓은 의미의 실천이다. 구체적으로는 계 · 정 · 혜 삼학의 실천 등에 해당되고, 출가자와 재가자로 그 내용은 다르다. 유럽과 미국에서는 불교도라는 것은
명상의 실천자라는 의미가 되는 경우도 많다. 일본에서는 승려는 직업적으로 세습되는 경우가 많고 득도 의식이나 규정된 수행을 통해서 불교인으로서의 자각을 하지만, 일반 재가자의 경우 그 정도로 엄격한 불교도의 규정이나 자각은 없는 것이 보통이다.
두 번째 의미는 이론에 대한 실천이라는 의미이다. 경전 등에 규정된 불교의 실천은 '불교인은 무엇을 하는가'보다도 '불교인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정하고 있고, 넓은 의미로는 교리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또한 그 의미로는 실천도 실천론으로서 이론의 일부에 속하게 된다. 그러나 한편 불교의 경우는 이론이 그 자체로 자립하는 것은 아니다. 즉, 이론을 위한 이론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어떻게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는가 라는 구제론적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와같이 생각한다면 역으로 이론을 실천의 일부로 보는 것도 가능하다. 이와 같이 불교의 이론과 실천은 서로 포함하는 관계가 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론과 실천이 확연히 구별되는 것은 아니다.
12 빌헬트는 '불교연구에서 최근의 전환'이 '내가 거칠게 신학적인 접근으로 부르는 것에서 불교의 사회적 · 문화적 실천에 대한 관심이라는 방향으로' 향하는 것으로서 그것은 '시간 초월적인 규범에서 시간적인 현실로 표현할 뿐만 아니라, 엘리트의 표상에서 대중의 표현으로'라는 종교에 대해 보는 방식이 전체적으로 변경된 것에 근거하고 있다. 인도대승불교에 관해서 말하자면, 히리카와 아키리에 의해 제시된 재가기원설은 종래의 교리사상의 전개가 아니라 실제로 그것을 짊어진 사회적 집단에 관심을 옮기는 것으로, 추상적인 이념에서 현실의 역사로 표현되는 흐름을 먼저 취하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최근불교 연구자에게 큰 충격을 준 쇼펜도 실은 동일한 흐름가운데 서 있는 것이다.
쇼펜은 율장의기술에 비문 등의 역사사료를 더하는 것으로, 이른바 대승불교시대의 인도 승원생활의 실태에 대한 해명을 목표로 심았다. 쇼펜에 따르면, 실제의 인도의 승원은 이상화된 수행만의 생횔이 아니라, 승려는 사유재산을 가지고 경제적활동을 행하지 않는다. 거기서는 다양한 노동 이행해졌다. 예를들면 '노동자의 감독을 한다든지, 쓸거나 닦거나, 건축이나 유지의 일을 하기도 하고', '금속세공이나 피혁세공이나 이발 등의 다양한 기술에 종사했다'. 또한 '환자를 간호하는 승려들이나 약국이나, 재가 선남선녀의 신자들이 임종하는 것을 지켜주는 승려들이나 장례를 주관하는 승려들'도 있었다. 이와같이 승원은 다양한 세속적인 활동을 포함하는 집합체로서 생각된다.
25 나는 대승불교를 타자와 죽은 자라는 관점에서 다시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고 있다. 우선 타자론이라는 관점이다. 초기 불교가 타자를 무시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 이론의 중추에는 타자는 들어오지 않는다. 본래 붓다가 깨달음을 얻었을 때, 붓다는 그대로 그 경지를 맛보고, 사람에게 설하지 않고 열반에 들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범천이 나타나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설할 것을 청했다. 이른바 범천이 세 번 청한 것으로, 그래서 비로소 붓다는 가르침을 설할 것을 결의한다. 이 이야기는 붓다의 깨달음과 가르침을 설하는 타자에 대한 행위가 본래 직접적으로는 관계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역으로 말하면 가르침을 설한다는 행위는 깨달음 자체에서는 나오지 않는, 의지하는 바 없는 무상의 행위인 것이다. 그것이 자비의 근본이다.
이와같이 본래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타자와의 관계는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보살의 관념이 생기는 것과 함께 그것이 크게 변한다. 보살은 타자와의 관계를 중추로 두고 있다. 이타가 실천되기 위해서는 본래 타자와의 관계라는 것이 없으면 안된다. 그 보살의 실천을 중심으로 놓은 것이 대승불교였다. 그 때문에 대승불교에는 하는 수 없이 타지관계가 들어온다. 또한 생긱해보면 붓다와의 관계도 붓다라는 타자와의 관계이다.
아무리 싫어해도 타자와의 관계를 면할 수는 없다. 『법화경』의 전반부의 주제는 실로 이런 것이다. 이른바 일승사상은 성문 · 연각도 실은 보살이고, 모든 중생은 보살이라는 것이지만, 그것은 바꿔 말하면 누구도 타자관계 없이 고립되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타자론이 대승불교의 중심이라는 것은 이런 것이다.
또한 대승불교의 기둥으로서 죽은 자의 이론이 하나 더 있다. 또한 죽은 자도 타자이고, 가장 타자다운 타지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산 자는 죽은 자에 대해 산 자를 대하는 것과 같은 커뮤니케이션은 불가능하지만, 더욱이 죽은 자와 관계를 갖지 않을 수 없다. 이해 불가능한타자인 죽은 자와 어떻게 관계하면 좋을까. 죽은 자의 문제는 대승불교의 핵심을 이룬다. 왜냐하면 대승불교는 붓다의 열반 후라는 상황 하에서 형성되어 온 것이고, 죽은 자로서의 붓다가 어떻게 관계할 수 있을지를 큰 과제로서 있었기 때문이다.
정토교가 죽은 자의 영역을 개척한 것은 당연하지만, 일견 죽은 자의 문제를 엿볼 수 없을 것 같은 『법화경』에서도 죽은 자로서의 붓다는 중추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법화경』의 후반부는 붓다의 열반 후에, 즉 붓다가 부재하는 타자가 된 상황 하에서 어떠한 실천이 가능한지를 묻는다. 그 가운데 수량품의 구원의 석가가 현현하는 것이지만, 그때문에 단계적으로 견보탑품에서 보탑여래가 출현하는 것이 중요한포인트가 된다. 왜냐하면 보탑여래는 실로 죽은 자이고, 죽은 자이면서 이 세계에 출현하여 보탑중에 나란히 서는 것으로 석존과 일체화하는 것이다. 이런 것은 석존은 죽은 자인 보탑여래로부터 죽은 자의 힘을 얻는 것으로 비로소 삼세에 통하는 절대성을 획득하는 것을 의미한다. 산 자는 죽은 자의 에너지를 받는 것이 필요하다. 『법화경』은 여기서 실로 산 자와 죽은 자의 일체화의 비밀스러운 의식을 설하는 것이다.
'책 밑줄긋기 > 책 2023-25'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안: 회남자 - 하 (2) | 2025.04.11 |
---|---|
로저 프라이스: 혁명과 반동의 프랑스사 (0) | 2025.03.18 |
폴 틸리히: 19-20세기 프로테스탄트 사상사 (1) | 2025.03.18 |
문시영: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 읽기 (0) | 2025.03.18 |
플로티누스: 아름다움에 관하여 (0) | 2025.03.10 |
로버트 뱅크스: 1세기 그리스도인의 선교 이야기 (1) | 2025.03.10 |
에른스트 카시러: 르네상스 철학에서의 개체와 우주 (0) | 2025.03.10 |
토머스 페인: 상식, 인권 (0) | 2025.03.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