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풀브룩: 분열과 통일의 독일사
- 책 밑줄긋기/책 2023-25
- 2025. 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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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과 통일의 독일사 - ![]() 메리 풀브룩 지음, 김학이 옮김/개마고원 |
- 머리말
1. 독일과 독일인
2. 중세 독일
3. 종교개혁의 시대, 1500~1648
4. 절대주의 시대, 1648~1815
5. 산업화의 시대, 1815~1918
6. 민주주의와 독재, 1918~1945
7. 두 개의 독일, 1945~1990
8. 독일사의 패턴과 여러 문제들
- 옮긴이의 후기
- 찾아보기
29 역사가들 가운데는 그 시기에는 아직 '독일 왕국'이라고 할 만한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길링엄 같은 역가사가 지적했듯이, 하인리히 1세의 통치는 작센과 프랑켄에서만 효과적이었을 뿐, 나머지 지역에서는 매우 취약했다. 사실 '독일 왕국'이라는 말이 사용된 것은 11세기에 들어서였다. 그러나 폴레켄슈타인 같은 역사가들은 견해를 달리한다. 그들은, 독일 왕국이라는 단어가 나타나기 이전에 일종의 '독일 정체성'이 발전했으며, 하인리히 1세와 그의 아들 오토 1세가 새로운 왕국의 성격을 결정적으로 각인시켰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로부터 수백 년의 시간이 지난 중세 말까지도 독일어 지역에 단일한 정치체가 형성되지 않았다고 주장할 만한 근거도 많다. 14세기 중반에도 '독일의 나라들'이라는 복수형이 '독일Deutschland'이라는 단수형보다 훨씬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리고 중세를 통틀어서 독일 지역을 일컫는 명칭은 일관되지 않은 채 변동하고 있었다. 알레마니아인의 왕국, 게르만인의 왕국, 튜튼인 또는 로마인의 왕국 등이 시기에 따라 사용되었던 것이다.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다음에 설명할 왕권과 황제권의 관계이다. 어쨌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독일은 국호가 부족이나 영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언어에서 유래한 희귀한 경우라는 점이다.
50 1500년경 이제 '신성로마독일제국'이라는 정식 명칭을 갖게 된 제국의 정치 형세는, 잡다한 성속 제후의 영토들 속에 자유 제국도시들과 독립적인 제국기시들의 성채가 점점이 박혀 있는, 엄청나게 복잡한 양상을 띠었다. 그것은 7개의 선제후령, 25개 가량의 세속 제후령, 90개의 교회령, 1백 개가 넘는 백작령, 수많은 소영지와 도시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역사가 뒤 불래의 말마따나 "중세 말의 독일은 정치적 파편들의 바다 위에 커다란 덩어리 몇 개가 떠다니는" 형상이었다. 그 파편들은 제국이라는 헐거운 보호막에 의해 느슨하게 결합되어 있었다. 그러나 황제가 제국 내부에 위치한 공국들에만 관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황제의 강력한 힘은 그 자신의 왕조적 소유에서 비롯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99 베스트팔렌 조약은 제국 내부의 두 가지 갈등을 해결한 타협이었다. 하나는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의 갖가지 갈등이었고, 다른 하나는 야심적인 황제와 권력을 지키려던 제후들 사이의 갈등이었다. 그리고 이 조약은 유럽 국가들 사이에 세력균형을 수립하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그러나 독일 문제는 거의 해결을 보았지만, 프랑스와 스페인의 전쟁은 지속되었다. 더욱이 프랑스와 스웨덴은 제국의 헌정질서에 대한 보증인 자격을 얻었다. 이것은 그들이 제국에 간섭할 수 있는 구실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스트팔렌 조약은 제국의 공법과 정치의 기준점이 되었다. 그 질서는 1806년에 신성로마제국이 종언을 고할 때까지, 제국헌정의 기초였던 것이다.
118 국가의 관료화와 군주의 절대주의적 권력의 강화가 동시에 진행된 가장 두드러진 경우이자 동시에 독일사 전개에서 가장 중요한 나라가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이었다. 이 나라는, '유럽의 모래 거푸집'으로 알려진 척박한 토양에 위치한 베를린을 수도로 장래성 없이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몇 세대 만에 유럽의 주요 강대국으로 성장했다. 왕가인 호엔촐레른가는 슈바벤에서 출발해, 몇 번의 행운과 교묘한 결혼외교를 통해 수세기 동안 다양한 영지를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17세기만 해도 그 나라의 중심부는 '선제후' 자격이 주어져 있던 브란덴부르크였다.
134 프로테스탄트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필립 야코프 슈페너의 외침, 즉 직접적인 종교적 체험, 개인과 신 사이의 직접적인 관계, 성경에 대한 개인적 이해에 기초한 적극적인 기독교적 삶 등을 회복하라는 요구에 호응했다. 이것이 바로 경건주의인데, 경건주의자들은 종교개혁이 인간의 삶은 별로 변화시키지 못한 채 신학의 차원에서만 머물렀다고 주장하면서, 이제 종교개혁을 완수해야 한다는 기치를 내걸었다. 그들은 회심과 거듭남의 체험이 각 개인들을 새로운 적극적인 기독교적 삶으로 이끈다고 강조했다. 그들은 소집단별로 비밀리에 모여,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신성한 삶을 영위하는 경험을 공유했다.
135 정확하게 평가하기는 어렵지만, 경건주의의 영향은 다양하고 광범위했다. 많은 학자들은 경건주의에서 독일 문화의 주요한 특징들, 예컨대 감정이입적인 예민함이나 시민적 교양소설의 발전 등의 뿌리를 찾는다. 어떤 학자들은 경건주의에서, 헤르더(1744~1803)에게서 두드러지는 세속적인 문화적 민족주의 내지 애국주의의 기원을 보기도 한다. 분명한 사실이 한 가지 더 있다. 경건주의가 교회와 목사를 우회해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고 이해한 것을 토론하는 모임을 주도했던 사정에서, 이성에 대한 새로운 신뢰와 신분이나 출생과 무관한 새로운 능력주의가 생겨났다. 특히 재능을 촉발시키고 발전시켜야 한다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프로이센 같은 나라에 초등교육과 중등교육이 확대되었다.
147 18세기는 독일에서도 개혁의 세기였다. 프리드리히 2세의 프로이센과 요제프 2세의 오스트리아에서 행정과 경제를 근대화하려는 수많은 프로젝트들이 실천되었다. 일부 역사가들이 주장하는대로 절대주의와 계몽주의는 서로 상치되는 것이고. 그 관계 역시 변화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시기에 절대주의적 군주들과 관리들은 정부 체제의 개선 방법을 연구하고 실천하고 있었다.
151 나폴레옹은 1806 년에 바이에른, 뷔르템베르크, 바덴, 헤센-다름슈타트를 포함하는 16개의 국가들로 구성된 라인동맹Rheinbund을 결성했고, 또한 신성로마제국 외부에 놓여있는 바르샤바 대공국을 창설했다. 라인동맹은 나폴레옹 법전을 수용해 농노제의 폐지를 비롯한 각종의 개혁을 실시했다. 이제 신성로마제국은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했고 제국은 결국 1806년 8월 8일에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155 빈 회의는 22년 동안의 전쟁이 끝난 뒤 열렸기에 축제 분위기 속에서 개최되었다. 무도회도 많았고 호화로운 만찬도 자주 베풀어졌다. 그러나 그 목적은 심각한 것이었다. 장래의 잠재적인 프랑스 팽창주의에 대비해 강력하고 안정된 독일을 건설해야 하는 숙제를 풀어야 했던 것이다. 따라서 느슨하고 비효율적인 제국적 틀 내부에 수많은 군소 군주가 존재하는 과거의 체제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결국 나폴레옹이 재편한 대부분의 조직이 유지되거나 아니면 확대되었다.
161 1815년부터 혁명의 물결이 독일 전역을 휩쓰는 1848년 3월에 이르는 시기는 흔히 '복고주의 시대' 혹은 '3월 전기'로 불린다. 그러나 두 가지 명칭 모두 오해의 소지가 있다. 1815년 이후의 상황은 나폴레옹 이전 독일의 정치적 · 사회경제적 패턴을 단순히 복고시킨 상태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시기를 오로지 1848년 3월에 발생하는 혁명적 격변의 서곡으로 파악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이 시기가 문화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그리고 사회경제적으로나 여러 측면에서 이행기였던 것만은 분명하다.
172 가장 중요한 것은 프로이센이 합스부르크의 오스트리아를 배제한 채 주도한 관세동맹의 결성이다. 관세동맹은 프로이센이 1818년에 내국 관세를 철폐하고 도시와 농촌간의 차이를 제거해 단일한 경제 단위를 창출하면서 시작되었다. 프로이센은 서부 지역과 동부 지역이 다른 국가들에 의해 분리되어 있거나, 프로이센 내부에 독립 소국이 존재하고 있어서, 물자와 상품을 수송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는 점에 주목했던 것이다. 프로이센은 우선 이런 나라들과 관세동맹을 체결했다.
187 1871년의 독일 통일은 움트는 독일 민족주의의 표현이요 그 결과라기보다는, 프로이센이 경쟁국인 오스트리아를 배제한 채 나머지 독일을 식민화하는, 프로이센 팽창주의의 한 형태이자 과정이었다. 오스트리아는 크림전쟁과 이탈리아 문제 등 1850년대에 발생한 일련의 사태로 세력이 크게 약화된 상태였다. 국제정치적 관심이 점점 독일 지역으로 향했지만, 경제적으로 후진적인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에 도전할 능력은 미미했다. 역사적 결과가 미리 예정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1860년대 이 두 경쟁국의 갈등은 비스마르크(그는 국내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자유주의자들로부터 민족주의 카드를 받아들였다)가 지휘하는 프로이센의 승리로 끝났다.
189 의회가 투쟁 수단의 일환으로 예산안에 동의해주지 않자, 비스마르크는 의회를 무시하고 군대 예산을 집행해버렸다. 의회는 이를 1866년의 면책예산에서 사후적으로 승인하게 된다. 1863년부터 1871년에 이르는 시기에 비스마르크가 추진한 정책에 대해서는 평가가 분분하다. 그는 아마 조작의 수괴라기보다 자신이 직면한 상황을 영리하게 이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의 주요 목표는 프로이센의 지위를 지키고 확대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목표를 위해 그는 세 차례의 전쟁을 감행했다.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을 둘러싸고 벌어진 1864년의 전쟁과 1866년의 오스트리아와의 전쟁 그리고 1870년 프랑스와의 전쟁이 그것이다. 이런 전쟁들의 결과 1871년에 독일제국이 창건되었다.
228 1918년 11월 의회주의 공화국이 선언되었다. 새로운 헌법이 제정된 도시의 이름에서 유래한 바이마르 공화국은, 사회복지 관련 법을 제정하는 등 일련의 사회적 타협 위에 건설된 진보적인 정치체제였다. 그러나 공화국은 혼란과 패전의 와중에 내전을 방불케 하는 조건 속에서 탄생했고, 가혹한 평화조약과 불안정한 경제에 의해 제약 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독일인들이 정부 형태로서의 민주주의를 거부함에 따라 좌 · 우파로부터 지속적인 공격을 받았다. 결국 공화국은 태어난 지 14년을 약간 넘긴 시점에, 합헌적으로 총리에 임명된 아돌프 히틀러가 인류 역사상 최악의 체제를 출범시키면서 몰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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