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쓰카타 후유코: 네덜란드 풍설서

네덜란드 풍설서 - 10점
마쓰카타 후유코 지음, 이새봄 옮김/빈서재

한국어판 서문
들어가는 말 
제 1 장 ‘통상’ 풍설서
제 2 장 무역허가조건으로서의 풍설서
제 3 장 풍설서의 관례화
제 4 장 위협은 가톨릭에서 ‘서양 근대’로
제 5 장 별단 풍설서
제 6 장 풍설서의 종언
맺음말
보론 : 통역과 ‘네 개의 창구’
후기와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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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제가 네덜란드 풍설서를 재미있는 테마라고 생각한 이유는 그것이 "인간이 타인을 이해하는 역사"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네덜란드 풍설서가 일본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가를 말하자면 실은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네덜란드 풍설서를 둘러싼 여러 에피소드로부터 인간이 타인을 이해하려고 할 때에 생겨나는 흥정이나 오해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고자 하는 신뢰 관계 등이 읽히기 때문에 매우 흥미롭다고 느낍니다.” 

34 네덜란드 풍설서는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통상' 풍설서와 별단別段풍설서이다. 전자는 1641년에서 1857년까지, 후자는 1840년에서 1857년까지 작성되었다. 그리고 1859년에 작성된 마지막 풍설서는 양자의 절충형으로, 제3유형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것이었다.  1840년에 별단 풍설서가 성립하자 그것과 구별한다는 의미에서 네덜란드인은 그때까지의 풍설서를 '통상' 풍설서라고 부르게 되었다. 

106 네덜란드가 유럽의 정보유통의 중심이었던 시대는 오래 가지 않았다. 18세기에는 영국이 정보 산업의 중심이 되었기 때문이다.

114 회사는 풍설서라는 제도가 있거나 없거나 시사정보를 각 상관에 배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부러 쇼군을 위해서 해야만 하는 일 따위는 거의 없었다. 한편 막부에게 있어서 네덜란드로부터의 정보는 대체할 수 없는 더할 나위 없이 귀중한 것이 었다. 나중의 이야기지만 19세기 아시아에서 유럽인의 정보 세계는 크게 변화한다.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는 1810년에 총독 헤르만 단덜스가 행정개혁의 일환으로 『바타비아 식민지 신문』(『자바신문』의 전신)을 발간했다. 그리고 회사가 해산한 후 19세기의 '통상' 풍설서는 주로 정청 기관지였던 『자바 신문』올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한 번 일본에 들어오고 나면 비밀정보로 취급되기도 한 19세기의 풍설서이지만 일본에 오기 전에는 비밀도 무엇도 아니었다. 저렴하고 간단하게 손에 넣을 수 있는 공공연한 정보였던 것이다. 

166 1840년의 막부 명령이 나올 때까지 일본측에서는 '통상' 풍설서에 네덜란드어 문서가 필요하지 않았다. 네덜란드인의 구술을 일본어문으로 적을 때에 보조적으로 사용할 뿐이었다. 초고는 제공한 정보의 기록을 남기기 위해서 오히려 네덜란드 상관 측의 사정으로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168 정청의 결정 · 결의에 기초하여 바타비아에서 작성된 서면이 일본으로 보내졌다는 사실이 별단 풍설서가 '통상' 풍설서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인 것이다. 그리고 그 정보를 '별단 풍설서'라고 부를 것을 정청이 명령하고 있다. 참고로 네덜란드어의 Apart에는 '별도로'와 '특별한'의 양쪽의 의미가 있다. 이를 두고 별단 풍설서가 성립했다고 말할 수 있다. 정청이 직접 정보를 선택하기로 결정했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이러한 결정이 내려진 과정을 직접 보여주는 사료는 없지만 동인도 정청이 아편전쟁을 막부에 정확하게 전달해야 할 사건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은 확실하다. 

213 자신들의 군사력이 외국에 통용되지 않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것은 다름 아닌 막부였다. 유럽 선박의
공격을 받으면 본격적인 반격이나 추격은 할 수 없다는 인식은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일관된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싸우지 않고도 넘어갈 수 있게끔 사전 정보를 필사적으로 구했던 것이다. 지진에 강한 나라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진 예지에 힘을 쏟는 형국이다.

224 이 글의 과제는 일본이 '네 개의 창구'에 의해 해외와 연결되어 있던 시대, 다시 말해 에도시대 중에서도 이른바 '간에이 쇄국'으로부터 막말기의 개항에 이르기까지 1640-1859년대에 통역이라는 행위가 각각의 '창구'에서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누가 그 일을 담당했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일이다. 특히 18세기 후반까지를 주된 고찰 대상으로 삼는다. 

226 통역은 구어를 매개로 하며, 회화의 속도를 어느 정도 유지하면서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고 업무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양자의 사회적 문맥에 맞춰서 편의상의 발췌 번역이나 고의로 바꿔말하는 일이 현대의 전문 통역가들에게도 오히려 일상적인 것이다. 

230 쓰시마번에는 전문가 집단으로서의 통사가 특별히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다. 부산의 왜관으로 건너 간 많은번사·조닌이 교역 등을 통해 조선어를 말할 수 있었고, 아마도 조선반도 남해안 지방의 사람들도 쓰시마의 말을 얘기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231 쓰시마의 경우 조선 영내에 있는 부산으로의 유학이 가능했다는 점에서 류큐의 가라통사와 나란히 혜택받은 지역이었다. 그리고 교과서로 중국 고전의 입문서인 『십팔사략』을 조선어음으로 표기한 책이 만들어졌다는 점은 다른 언어를 말하면서도 중국 고전이라는 공통의 문화적 바탕을 갖고 있었다는 일본과 조선의 특별한 관계를 보여준다.  

233 '사쓰마 창구'에 관련해서 주목할 점은 오히려 류큐의 가라 통사이다. 류큐왕국에서는 슈리 · 나하 · 도마리의 사족이라면 일본어 · 한어(관화)의 소양이 불가결했으며, 그러므로 왕국의 중추를 차지하는 사람들은 원칙적으로 3개국어 화자trilingual였다고 할 수 있다. 

239 17세기 말 즈음까지는 네덜란드인과의 회화에 매개언어로서 포르투갈어가 사용되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동인도 총독은 때때로 네덜란드인의 일본어 학습을 출원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막부가 정식으로 그러한 포고를 내린 흔적은없다. 통사를 포함한 나가사키 당국이 자신의 독점적인 권익을 지키기 위해서 일본어를 가르치지 않았던 것이리라. 일본어를 어느 정도 할 수 있게 된 네덜란드인이 그런대로 있었던 흔적은 있지만 공식적인 장소에서 사용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공식적인 장면에서의 일본어 사용이 저지된 것은 통사를 거치지 않은 네덜란드인으로부터의 소원을 불가능하게 하고 모든 거래에 있어서의 경쟁원리 배제를 통해 나가사키 당국의 독점 가격을 강요한다는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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