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틴 헹엘: 유대교와 헬레니즘 3

 

유대교와 헬레니즘 3 - 10점
마르틴 헹엘 지음, 박정수 옮김/나남출판

제4부 유대교의 ‘그리스적 해석’과 예루살렘의 그리스어사용 유대인의 개혁시도
제1장 최초의 그리스 증언들: ‘철학자’ 유대인 11
제2장 유대교의 하나님과 그리스적 신 관념의 동일화 29
제3장 예루살렘의 헬레니즘적 개혁시도와 실패 53
제4장 요약: 개혁시도와 좌절, 유대교적 반작용의 방대한 결과 163
제5장 종합적 개관과 결론 179

부 록 189
옮긴이 해제 209
참고문헌 249
찾아보기 331

 


제5장 종합적 개관과 결론

179 팔레스타인에서 유대교와 헬레니즘의 첫 만남에 대한 이제까지의 서술이 어떤 일목요연하면서도 반박할 수 없는 일관된 밑그림은 결코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복잡한 역사적 실상들이 보통 그러하듯이, 하나의 도식적인 통합명제로 요약될 수 있는 사안은 아니기 때문이다. 안티오코스 4세 치하에서 신속히 종결된 과도기적인 사건이었던 예루살렘의 개혁시도를 제외한다 해도, 팔레스타인의 유대교가 헬레니즘시대 동안 이방의 문명에 접촉되지 않은 채 구약적인 전승에 충실하게 서서 자신의 길을 곧게 갔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혼합주의의 과도한 영향 하에서 헬레니즘적 정신이 팔레스타인적 유대교에 완전히 침투하여, 유대교가 자신의 본래적인 임무에 충실하지 못하고 혼합주의에 희생되었다고도 주장할 수도 없다. 진실은 그 양극단 사이에 존재한다. 

180 즉, 이 시기에 동방세계적 · 유대적인 지혜와 그리스 대중철학은 서로가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매진하고 있었다. 양자의 공통점은 이성적 · 경험적인 특징과 보편적인 경향, 우주의 신적 질서에 대한 관심, 현저한 인간학적 · 윤리적인 관심에 있었다. 이는 무엇보다도 유대인들을 '철학자들'로 판단한 초기시대의 그리스적 관점을 통해서 입증된다. 

182 다양하기도 하고 부분적으로는 대립되는 팔레스타인의 유대교에 속한 어느 유형의 그룹도 그런 수용과 대응의 양식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오직 토라만을 지향한다고 생각하는 그곳에서조차, 아니 도리어 바로 그곳에서 이방의 영향이 강력하게 미쳤다. 때로는 받아들인다는 의식 없이 말이다. 그러므로 새 시대의 정신은 다양한 유대그룹이 형성되는 데 영향을 주었고, 다시 다른 형태로 작용했다. 이런 식으로 팔레스타인의 유대교는 기원전 175년까지 비교적 연속적으로 발달하여 헬레니즘 기간 동안에 깊이 변형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인해 전반적으로 흔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바, 팔레스타인의 유대교가 그리스어사용 디아스포라 지역의 이른바 '헬레니즘적' 유대교와 근본적으로 분리된다는 견해 역시 수긍하기 어려운 것이다. 엄격히 말해서 헬레니즘 · 로마시대 동안 팔레스타인 모국의 유대교 역시 서방의 디아스포라 유대교와 마찬가지로 헬레니즘적 유대교'라는 상위개념에 포함되어야 한다. 

183 팔레스타인 내 · 외부의 유대교는 비록 혼란스러우리만큼 다양성을 보임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압도하는 중심은 토라에 있었다. 토라는 다름 아닌 정신적인 자기주장을 위한 투쟁을 통하여 그 절대적인 중요성을 얻었다. 벤 시라가 토라는 지혜와 동일하다고 선언했다면, 예루살렘의 개혁가들에게서 토라는 마침내 가혹한 폭력을 통해서라도 대항해야 할 미신과 어리석음의 구현에 다름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신실한 토라 준수자들을 일깨워 '율법에 대한 열성'을 불러일으켰을 뿐이었고, 이들은 결국 개혁당파를 굴복시켰다. 토라는 이와 같이 헬레니즘과의 대결을 통하여 유대교의 중심점이 되었다. 여기서 물론 토라는 알렉산드리아에서뿐만 아니라 랍비적인 '토라 존재론'에서도 '헬레니즘적 · 합리적' 방식으로 해석되었지만 말이다. 토라는 이제 더욱더 계시의 유일한 독점적인 매개체가 되었다. 모든 다른 형태의 계시는 토라에서 파생되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토라의 해석이 모든 계시형태를 구성했다. 율법의 올바른 해석을 놓고 서로가 심하게 다툰다 할지라도, 그 자체가 도리어 토라의 통일성을 갖는다는 표현이 된다. 왜냐하면 유대민족은 율법을 통해서 모든 민족들과 구별되기 때문이다. 

184 헬레니즘시대 대략 기원전 2세기 후반부에 유대교는 세계종교로 가는 순탄한 길에 올라섰다. 이는 디아스포라의 급격한 확장,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매우 활동적인 선교의 결과였다. 마카베오 시대의 성공 또한 이 점에서 유대교의 자의식을 증진시켰다. 물론 이것과 명백히 대립되는 태도는 세심하고도 열성적으로 토라의 문자에 집착하는 것인데, 이는 우리가 바리새주의에서 발견하는 바와 같다. 율법에 대하여는 그리스어사용 유대교에서도 근본적인 제한이 있기는 했지만 좀 더 자유로웠다. 또 우화적인 해석이라 할지라도 결코 문자적 의미를 제거하지 못했고, 구체적인 계명과 금령은 필로에게서조차 무제한적 권위를 가졌다. 더욱이 하스몬 가문이 통치를 시작한 후 디아스포라에서도 팔레스타인 모국의 영향력이 확대되고, 그 땅에 대한 경건의 의미가 자라났다. 백성들은 종말론적 희망조차 압도적으로 민족적인 유대의 세계왕국이라는 의미로 해석하였다. 

185 하나님 나라가 임박했다는 예수의 예언적이고 종말론적인 소식과, 그것에 기초한 초기 기독교 공동체 선포의 혁명적인 결과는 누구보다도 유대교 선교의 자가당착적인 성격을 잘 알았던 예루살렘의 '그리스어사용 유대인들'이 잘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소식과 선포에 의해서 토라의 위치를 절대화시킴으로 가장 강하게 표현되고, 헬레니즘과의 대결을 통해서 발전되었던 태도, 즉 주변 세계에 대한 유대교의 방어적 태도가 산산 조각이 났다. 

'토라 존재론'의 자리를 대신한 것은 역사 속에서 자유롭고 구속받지 않는 하나님의 구원계시를 표현한 기독론이었는데, 이것은 더 이상 민족적이고 역사적인 경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렇게 초기 기독교는 유대교 자체 내에서 일어난 종말론적이고 혁명적인 운동이었다. 이것은 예루살렘과 그 이후 안티오키아에서 강력하게 활동했던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유대 기독교 공동체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이 운동에서 "때가 찼으며" 종말이 임박했다는 신념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사적' 사명은 온 세상 민족들을 위해 일하는 것이라는 민족적 자기 과업 설정으로 실현되었다(비교. 갈 3:28: 4:4). 당시 유대교의 입장에서 초기 기독교란 유대인으로 하여금 율법을 배교하게 하고 이방세계에 동화되도록 촉구하는 새로운 종파라고 오해하였다는 사실은 간접적으로는 기원전 175-164년에 저 유대 변절자들이 남겨놓은 최후의, 그리고 가장 통렬한 영향이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들은 당시 율법을 폐지하고 "주변의 민족들과 계약을 맺으려고" 시도하였다. 그리하여 이때 일깨워진 '율법에 대한 열성'은, 예언적 정신에 기초하여 유대종교 내부를 개혁하려는 시도들을 만일 유대교의 중추신경인 율법을 건드리는 한, 그 즉시 모든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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