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시학 강독 2-1

 

2024.04.24 🎤 시학 강독 2-1

제2강 모방이란 무엇인가

• 일시: 2024. 4. 17. 오후 7시-9시  장소:수원시글로벌평생학습관

• 강의 안내: https://learning.suwon.go.kr/lmth/01_lecture01_view.asp?idx=3672
• 강의 자료: https://buymeacoffee.com/booklistalk/20240424-suwon


다음 분기에 사회지리학 강의를 한다고 했는데 도시라고 하는 게 urban, 도시성이라고 하는 urbanity라고 한다. 그리고 시골을 rurality라고 한다. 예전에는 urbanity나 rurality를 인구 밀도를 가지고, 몇 명이나 살고 있고 인구 밀도가 어떻게 되고 기반시설이 어떻게 되고 이런 것을 가지고 도시성을 규정했다. 지금은 그렇게 규정하지 않는다. 인구 밀도를 가지고 도시를 판단하지 않은 지도 오래됐다. 그러면 뭘 가지고 하는가. 지금은 문화적인 특성을 가지고 도시성과 촌락성을 구별한다. 사람들이 살고 있는 커뮤니티가 폐쇄적이면 시골인 것이다. 그러니까 그 지역에 있는 사람들이 폐쇄적으로 살고 있으면 간단히 말하면 그것이 촌스러운 것이다. urbanity를 결정하는 것은 네트워크이다. 다음 분기에 사회지리학를 한다고 했는데, 사회지리학은 되게 중요한 현대적인 학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던 옛날에 고등학교 때 배우던 인문지리나 국토 지리와는 종류가 다른, 네트워크의 연결성이라든가 또는 문화적인 개방성이라든가 또는 서양의 경우에는 인종적 다양성이라든가 이런 것이 있다. 나라도 도시적인 나라가 있고 촌스러운 나라가 있다. 가장 도시성이 가장 좋은 나라가 영국이다. 지금 영국의 총리가 인도의 이민 후손이다. 부자건 가난하건 간에 그러니까 그렇게 따지면 김천보다는 제천이 훨씬 더 도시적이다. 서양의 귀족들, 가령 에스파냐의 합스부르크 왕조들은 자기네들끼리 근친 교류를 해서 나중에 다 씨가 말랐다. 자기네들은 굉장히 고급스러운 문화에 살고 있다고는 하지만 말 오늘날은 사회지리학의 개념으로는 그대로 그런 사람들이 사실 촌스러운 것이다. 그러면 도시성 지수가 높을수록 사람이 살기가 긴장 강도가 떨어지고 느슨하다. 그러니까 rurality, 촌스러움의 정도가 강한 나라들이 프랑스나 독일인데, 그런 데 가면 살기 힘들다. 어떻게 훌륭한 도시가 되느냐는 여러분들의 문화적인 다양성에 달려 있다. 다음 분기에 사회지리학 할 때 도시와 촌락 그다음에 일상, 일상의 안전 이런 것들을 연결해서 배우는 게 사회지리학이다. 우리가 복지 그런 말을 들으면 왠지 날로 거저먹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니까 지금은 복지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이런 영역에서는 사회적 재생산 요소라는 말을 쓴다. 

오늘은 "2강 모방이란 무엇인가"를 하는데, 이번에 《시학》 강의하는 것 중에서 오늘 하는 부분이 가장 이론적이고 까탈스러운데 일단 오늘 고비를 잘 넘기면 괜찮을 것 같다. 《시학》 책으로는 1장과 2장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의 이 모방 개념을 알아두면 문학개론 책에 나오는 거의 모든 얘기들을 일단 기본적으로 알 수 있다. 플라톤보다도 아리스토텔레스가 훨씬 더 서양의 구체적인 학문들에 영향을 많이 끼쳤다. 플라톤은 철학자들의 마음에 끼친 영향은 좀 있어도 학문들에 끼친 영향은 별로 없다 오늘 설명하는 아리스토텔레스 부분은 꼭 알아두어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있다. 세계라고 하는 말은 우주라는 말로도, 인간도 그 안에 들어간다, 그러면 전체로서의 세계world as a whole를 얘기하는 것이다. 또는 대우주 소우주 이런 얘기가 있는데, 이 세계와 우주에 대해서 설명할 때, 전체로서의 세계가 있고, 우리가 이 전체를 알고 있지는 못하지만 이 세계 안에 있는 자잘한 부분들은 그 전체로서의 세계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라는 생각이 한 가지 있다. 이것은 아주 오래된 생각이다.  

우리의 몸을 생각해 보자. 우리 몸에 손가락이 하나 있다. 이 손가락이라고 하는 것은 내 몸에 붙어 있을 때 손가락이다. 만약에 손가락이 절단이 되어서 딱 떨어져 나가면 그것을 그대로 갖다 붙여봐야 예전의 기능을 할 수 없다. 내 몸이 전체로서의, 그러니까 body as a whole, 전체로서의 신체의 일부분이다. 그러니까 이 신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몸뚱아리라고 하는 것은 그것 자체로 쪼개놓으면 설명이 될 것 같지만 낱낱이 이것을 부분으로 쪼갠 다음에 그것을 다시 합해봐야 원래의 것이 될 수는 없다. 이것을 세계를 볼 때 이해하는 전체론holism이라고 한다. totalitarian이라고 하는 '전체주의적'과는 다르다. 물론 그것도 관계가 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에서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전체주의적 마인드를 갖고 있으면 안 된다. 민주주의의 반대말은 독재가 아니라 전체주의이다. 민주주의에도 독재 개념을 쓸 수도 있다. 지금 그 얘기는 할 때 아니니까 그러니까 전체주의는 윗대가리가 말하면 일사불란하게 다 움직여야 된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에는 부분들part가 있을 것이다. 손가락은 그것 자체로 하나 떼어 가지고 설명도 할 수 있지만 항상 손가락에 대한 완전한 설명은 신체라고 하는 전체하고 연결지어서만 설명을 할 수가 있다. 사실 그게 아리까리한 부분이 부모는 자녀에 대해서 전체론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 자녀의 어떤 이런 것들은 다 부모와의 연결고리를 끊어 가지고는 설명할 수가 없다. 그런데 부모나 자식이나 어느 한쪽에서 일방이 선을 넘으면 끊어야 되는 지점도 있긴 있다. 그러니까 이런 전체론이라고 하는 생각이 이런 데도 쓰일 수 있다는 얘기이다. 

우리가 설명을 할 때 '이 손가락은 왜 있나요?'하고 물으면 '무엇을 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하기도 하지만 이 손가락에 대해서 우리가 완전한 설명을 할 수 있으려면 신체에 대해서 설명을 해야 된다. 즉 전체론은 전체를 설명하지 않으면 부분을 설명할 수 없다. 그리고 아무리 부분에 관한 설명을 아무리 다 끌어모아도 전체에 대한 설명을 할 수가 없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이 전체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전체론이라고 하는 것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이런 것들을 그냥 이론이라고 하지 않고 이런 것들을 세계관Weltanschauung이라고 한다. Welt가 세계이고, anschauung이 觀를 써서 世界觀이라는 단어를 쓴다. 그러니까 전체론적 세계관을 이론적으로 정리해서 그 뒤로 더 이상 사람들이 손댈 것도 없이 딱 만들어 놓은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전체론적 세계관을 알아야 이 사람의 형이상학도 읽고 자연학도 읽고 이 시학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낭만주의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전체론적 세계관이 조금 있다. 우리가 사는 세계도 그렇다. 어떻게 보면 조금 전에 말한 것처럼 '부모 없이 자식이 어디 있겠니' 이런 것도 다 전체론적 세계관의 흔적을 조금씩 갖고 있다. '나라가 잘 되어야 나도 잘 되는 거지' 이런 것도 전체론적 세계관이다. 물론 그게 쓸데없는 희생을 요구하는 나라에 대해서는 우리가 거부를 해야 되겠지만 내가 속해 있는 집단 속에서 그 집단의 흥망성쇠가 나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라는 점에서 전체론적 세계관은 정치 사상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고, 생물학적 설명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고, 우리가 지금 공부하고 있는 이런 예술이나 시학에도 영향을 미칠 수가 있다. 물론 전체로서의 세계관이 모든 것에 작용하는 건 아니다. 이건 하나의 세계관이다. 그러면 여기서 설명을 할 때는 항상 당연히 전체로서의 세계니까 각각의 부분part이 모두 다 동등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야 마땅하겠지만 더 중요한 가치를 가진 부분들이 또 있다. 예를 들어서 손가락 없어도 살지만 심장 없으면 죽는다. 당연히 우리 몸의 일부에도 위아래가 있다. 이것을 위계질서라고 부른다. 이 위계질서는 아주 당연하게도 비싸냐 싸냐의 문제가 아니라 더 가치 있는 것, value에 따라서, value hierarchy라고 부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우주에 있는 모든 만물을 최상위에 있는 것부터 맨 밑에 있는 것으로까지 hierarchy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이론적으로 있어야 된다고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사람은 이것을 '존재의 대연쇄The Great Chain of Being'라고 불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부른 게 아니라 후대 사람인 아서 러브조이라는 사람이 만들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주 만물을 hierarchy의 chain으로 본 것이다. 몇몇 철없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살고 있던 시대에 계급질서를 갖다 정당하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형이상학 이론에 불과하고 말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렇게까지 계급질서가 엄밀한 사회에 살고 있지는 않았다. 예전에는 세상의 모든 형이상학 이론을 다 이렇게 계급질서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다 라고 하는 속류 마르크스주의가 난리를 부리던 때가 있었다. 어쨌든 value hierarchy가 있고 이것을 Great Chain of Being라고 부른다. 전체로서의 세계관에서 모세혈관을 설명한다고 하면 모세혈관은 왜 있겠는가. 상위에 있는 목적을 더 잘 작동하기 '위해서'이다. 여기서는 설명이 무조건 '~하기 위해서'이다. 영어로 말하면 for the purpose of이다. 즉 전체론적 세계관은 기본적으로 상 위에 있는 것을 목적을 삼고서 작동한다. 그래서 이것을 목적론적 세계관이다 라고 얘기하기도 한다. 이 설명의 영역에서는 목적을 찾아내는 게 굉장히 중요한다. 그 목적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가 이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이 전체론적 세계관 또는 목적론적 세계관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목적이 무엇일까를 찾아내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이고 그 목적을 놓고 다툼이 일어난다. 이 목적을 당신이 설정해놓고 그것이 옳다고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옳은 건 아니다 라고 하는 말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어쨌든 일상적으로 살아가면서 이런 목적이 없는 상태로 삶을 살 수는 없다. 목적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가, 삶이 허무해진다. 어떠한 목적도 우리가 설정할 수 없고 그런 목적을 설정해봤자 그거는 인간이 알 수 없는 영역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오만한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 목적론에 반대되는 말이 니힐리즘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이런 전체로서의 세계, 목적론은 당연히 이 사람이 생각하기에 우리 인간이나 동물과 같은 유기체를 바탕으로 해서 이 설명 모형을 구상했다. 그러면 이 존재의 대연쇄에서 제일 꼭대기에 있는 것이 신이다. 이게 기독교적인 의미에서 인격신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의 원인이 되는 모든 만물의 목적이 되는 신이다. 신을 향하여 가는 것, 밑에서 위로 쭉 올라가는 것이다. 그런데 아까 얘기한 것처럼 세상의 만물들은 이 유기체만 가지고 설명할 수 없는 것들도 있다. 여기 있는 이 탁자의 목적은 그냥 있는 것이다. 이 탁자는 아무 생각이 없고 우리가 우리의 목적에 가져다 쓰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것들은 도구에 불과하다. 어떤 나무나 이런 것들은 부분으로 잘게 쪼갠 다음에 그걸 다시 모으면 전체가 될 수 있다. 그래서 내용상으로 보면 이게 니힐리즘에 반대되는데, 설명 방식으로 보면 이것에 반대되는 것이 기계론적인 설명 방식이다. 그러니까 부분의 합은 전체가 될 수 있는, 부분은 전체로 쪼갤 수 있는, 무생명체는 이게 가능하겠다. 그래서 이 기계론적인 것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 인간 신체 뿐만 아니라 인간이 살고 있는 사회 그리고 우주 자연 이 모든 것 안에 이런 목적이 있다고 생각했다. 자연물들도 목적이 있다고 생각을 했다는 말이다. 하찮은 생물체에도 다, 이것이 자연 세계, 우주 전체를 꿰뚫는 목적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를 잘 보면, 우리가 이렇게 들여다보면 목적을 살펴서 알아낼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을 가장 잘 본받는 것이 사람의 삶에서 훌륭한 삶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본받는다고 말한 부분이 모방이다. 지금 예술에 있어서 모방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과 똑같은 개념은 아닌데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이 모방이라는 개념은 존재의 대연쇄 안에서 숨어 있는 목적을 찾아내서 그 목적에 따라서 삶을 사는 것, 그것이 아리스토텔레스에서 기본적으로 삶의 중요한 목표이다. 그러니까 아리스토텔레스한테 공부를 왜 하는가를 물어보면 우리 자신을 포함한 우주 전체의 궁극적인 목적을 알아내서 그 목적에 부합하도록 살기 위해서라고 말할 것이다. "알아내서 그 목적에 부합하도록" 그렇게 말하면 "부합한다"라는 말이 mimesis라는 말과 같은 내용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서 노자 《도덕경》에 보면 도법자연道法自然이라는 말이 있다. 道은 自然을 본받는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유교에서 보면 하늘의 이치가 이러하니 그것을 우리가 본받아서 똑바로 살아야 된다고 얘기한다. 유교에서는 천도天道라는 말을 쓴다. 천인합일天人合一, 여기서 천天은 하늘의 이치를 가리킨 말이다. 하늘의 이치를 내가 그대로 본받아서 그것과 하나가 되도록 산다는 것이 성리학의 이념이다. 하늘의 이치, 내 마음이 성性이다. 그러니까 이것도 기본적으로는 우주 자연의 이치를 본받아서 잘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본받는다"라고 하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지고 있는 mimesis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을 얘기한다고 그러는데 mimesis라고 얘기할 때는 기본적으로 이런 형이상학을 밑바탕에 깔고 있다. 그러니까 가장 훌륭한 예술 작품은 진리를 잘 본받아서 그 진리를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는 관객이 즐거워야 한다는 것도 말한다. 기본적으로 그 생각은 버리지 않고 있다는 말이다. 

 

이제 지금 강의 자료를 펴보자. "기술은 자연을 모방한다." 희랍어로 hē tekhnē mimeitai tēn physin, tekhnē 가 기술이고, mimeitai는 모방한다이고, tēn physin은 본성 또는 자연이다. 영어로 번역하면 art imitates nature이다. 《자연학》이라고 되어 있는데, 《자연학》이라고 하는 텍스트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가장 중요한 텍스트가 책이 두 권 있는데 하나가 《자연학》이고 하나가 《형이상학》이다. 존재의 대연쇄, 이것들이 자연학의 대상이다. 여기서 자연과학이라고 이해하면 안 되고 사물에 관한 학문이다. 그래서 자연은 우주의 생산 원리이고 "목적이 내재하며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수단을 사용한다." 철학에 있어서 두 가지 종류의 세계관을 얘기한다고 하면 목적론 또는 전체론이라고 하고 그 다음이 기계론이다. 기계론은 설명할 것이 별로 없다. 그러니까 양적으로만 체크하면 되는 것이고, 인과관계만 얘기하면 된다. '이것이 원인이고 이것이 결과이다'라고 설명하면 된다. 무엇이 왜 생겼는지는 따져 물을 필요가 없다. 그러니까 간단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초한, 그전에도 있었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초한 목적론적, 전체론적 세계관을 꼭 생각을 해야 된다. 우리가 뭔가를 설명할 때 '그것을 왜 하는데" 무엇을 위해서 그것을 하는데'라고 했을 때 의외로 깔끔하게 떨어지는 답을 내기가 쉽지 않다. 깔끔하게 떨어지는 답을 내놓으려면 그 위에 있는 것을 설명해야 된다. 가령 '자전거 왜 타고 다니세요?'라고 물을 때 존재의 대연쇄 속에서 설명을 해야된다. 자전거는 어떤 기구인가. 이동 수단이다. 그러면 이동 수단은 어떻게 나눌 수 있는가, 이동 수단의 상위 개념이 무엇인가. 이동 수단은 동력 수단과 무동력 수단으로 나눌 수 있다. 동력 수단은 기계 동력 수단과 신체 동력 수단으로 나눌 수 있다. 자전거는 신체 동력 수단이다. 자전거 왜 타고 다니는지 물을 때 '운전을 못해서 탑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불완전한 설명이고, 무동력 수단에 대한 선호가 있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기 훨씬 나은 설명이다. 그래야 거기서 환경 오염도 줄이고 이런 말도 나오는 것이다. 손해와 이익만 따지는 것은 결국 기계론적 설명이다. 당신이 자전거를 탄다. 그 결과 이것이 나온다 라는 건 안 나올 수도 있는데, 이게 인과적 설명이라서 그렇다. 공부를 왜 하는지를 물었을 때 공부하면 고시 합격에서 안정된 직장을 얻을 수 있다 라고 하는 것은 기계론적 설명이다. 고시 합격에서 안정된 직장, 원인과 결과를 계속 따라게 된다. 위계가 들어있는 설명인 것 같지만 아니다. value hierarchy를 타고 올라가야 설명이 된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서 대다수의 설명은 공리주의적인 인과율에 따라서 설명이 이루어진다. 그러니까 조금만 손해가 나면 설명이 무너진다. 이것을 궁극적 정초ultimate foundation라고 한다. 인과적 설명을 쭉 따라가면 결국에는 '그렇게 해서 뭐가 남는데?'라고 물어보면 답이 없다.

자연은 우주의 생산원리이고 목적이 내재하며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수단을 사용한다. 그러니까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그 목적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수단을 사용한다. 이게 자연 목적론의 설명 방식이다. 철학 공부를 한다, 철학 선생한테 뭘 배웠다 그러면 목적론을 배우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이걸 생각해야 된다. 어떻게 보면 목적론 중에 가장 성공한 목적론이 기독교이다. 하느님의 목적을 위해서 내가 세상을 산다고 얘기들이다. 그러니까 기독교를 가장 미워하는 사람들은 애니미즘이다. 자연만물이나 귀신을 부려서 나에게 이익이 되게끔 뭔가를 해야 되는데 내가 그 신을 위해서 뭔가를 해야 된다고 생각하면 반대가 된다. 일본 사람들이 기독교를 갖다 굉장히 심하게 박해한 것은 그런 사상적인 이유도 있다. 일본 사람들은 자연 만물이 인간을 이롭게 해줘야 된다 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독교라고 하는 이론을 보면 사람이 신을 위해서 순교도 한다.

"형상(eidos)과 질료(hylē)의 결합. 목적론적 우주론의 원리가 예술의 모방에도 적용될 뿐만 아니라 실천학의 영역에도 관철된다.", 형상이라는 것이 목적이다. 어떤 목적을 위해서 그 목적에 소용되는 재료를 질료라고 한다. 그러니까 어떤 것은 하위에 있는 것이 질료이고 그것이 상위의 형상을 위해서 뭔가를 기여하다가 또 위에 있는 형상이었던 것도 자기보다 상위에 있는 형상을 위해서 잘료가 될 수도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불변의 형상 맨 위에 있는 부동의 원동자인 신 밖에 없다. 그리고 "실천하고 영역에도 관철된다"는 것은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도 항상 최고의 선, 최상위의 선을 위해서 뭔가를 우리가 행동을 해야 된다 라고 얘기하는 것이다. 그다음에 "자연의 합리적 의도가 물질의 결함에 의해 좌절될 때에는 인공 기술, 실용 기술이 개입한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실용적인 것 또는 제작학의 영역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과학에도 굉장히 큰 기여를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기본적으로 예술 작품들은 도덕적인 목적에 기여를 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도덕적인 영향력은 우리가 항상 즉각적으로 측정해낼 수는 없다. 즉각적으로 측정해낼 수가 없기 때문에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이 사람은 전체론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세계관 안에서 완성에 기여한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완성에 기여한다고 할 때 우리 인간도 하나의 완결된 존재이니까 이 존재의 내면의 성격, 그 사람의 감정, 그 사람의 행동 이런 것들을 잘 모방하면 우리가 본받을 수도 있다. 

그다음에 "우리는 자연의 구분을 따라야만 한다. 모든 기예와 교육(paideia)은 자연이 남겨놓은 것을 채우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 자연이 온전히 발현되지 않은 곳에서는 이제 뭔가를 아는 선생들이 그 자연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파악해가지고 그것을 기술을 통해서 채워 넣어야 되겠다 하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나온다. "모든 기예와 교육(paideia)", paideia가 교육이고, 그다음에 "❧ 예술의 목적" 부분에 보면 "즐거움(hēdonē) 또는 향유(diagōgē), 저급한 예술은 놀이(paidia)"에는 paidia가 놀이이다. 서양사람들은 paideia와 paidia를 가지고 언어유희를 한다. 예전에 「미학, 예술학, 예술철학」을 할 때 hēdonē와 diagōgē가 차이가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한 구별이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시작이 되었고, 로마 시대에 호라티우스의 시학도 유명한 책인데, 호라티우스에서 시작된 측면도 있다. 그것은 나중에 얘기를 하겠다.

그다음에 네 번째 항목 다시 위에 "우리는 자연의 구분을 따라야만 한다. 모든 기예와 교육(paideia)은 자연이 남겨놓은 것을 채우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얘기가 《정치학》에서 나왔는데, 정치학은 실천학의 영역이 있다. 그러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서 정치의 목적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선한 인간들이 살아갈 수 있는 세계를 만들어서 사람들을 선하게 살게 하는 데 정치의 목적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항상 목적을 묻는 것이다. 그다음에 자연목적론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 설명한 전체론에 대한 가장 집약적인 설명이다. "한 대상의 목적(telos)은 생성(genesis)이나 운동(kinēsis)의 끝이다." telos라고 하는 말은 목적이라는 뜻도 되지만 끝이라는 말이다. 끝에 이르렀다 라고 말하면 그것이 원래 가지고 있었던 목적을 완전히 실현한 것을 끝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알 수가 없는 게 인간이 죽으면 끝이다. 인간의 생명은 죽음에서 끝이다. 그런데 죽을 때 과연 그 사람이 원래 태어날 때 가지고 있던 그 사람의 각각의 개인의 목적을 온전히 실현했는지는 의문이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 중에서 전체론적 세계관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은 극소수였다. 지금 자기가 가장 온전한 상태의 인생을 살고 있다고 여기는 순간 죽었다. 그래서 예전의 철학자들은 자신이 생각하기에 가장 온전한 상태로 자기가 지금 자기 삶의 목적이 실현되었다 라고 생각하면 그때 이제 화산에 빠져서 죽었다든가 그렇게 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끝이라고 하는 것은 그 목적이 완전히 실현된 것이다. 가령 기독교에서는 예수가 다시 와서 이 세상을 평화롭게 만든다는 것이 하느님의 목적이다. 그러니까 끝이 동시에 완성이다. "한 사물의 진정한 본질(ousia)이나 본성(physis)은 그 목적의 달성에서 발견된다." ousia, physis 이런 것들이 다 목적이다. 내재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발전 과정이 질료(hylē)나 잠재태(dynamis)에서 출발하여 형상(eidos)이나 현실태(entelekheia)로 완성될 때 사물이 되는 것이다. 형상을 정신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noēsis이고, 이렇게 파악한 것을 hylē로써 모방하는 행위가 poiēsis이다." 형상을 정신적으로 파악한다고 하는 말이 중요하다. 이념을 파악한 것이 가지고 그게 파악한 것이 noēsis, 지적인 앎이다. 이렇게 파악한 것을 어떤 재료를 통해서 모방하는 행위가 poiēsis이다. 

그러면 건축은 poiēsis일까 아닐까. 이게 사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많이 나온 문제이다. 시인과 건축가는 비슷한 일을 하는 걸까 아닐까. 찬반론이 굉장히 분분하다. 우리가 드라마를 보는데, 요즘으로 치면 감독이고 아리스토텔레스 시대로 치면 소포클레스나 이런 시인들이 어떤 이념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려고 저 시를 지금 하는구나를 우리가 알아차릴 수 있다. 건축물을 보고 건축가가 어떤 이념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려고 저 건물을 지었나를 알아볼 수 있어야 건축도 poiēsis가 된다. 그게 쉽지 않다. 아주 굉장한 유형의 물건이라 그러니까 조각가나 이런 사람들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poiēsis는 사실은 무형의 것일 경우가 많이 있다. 그것은 조금 이따 모방의 종류를 하면서 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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