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시학 강독 1-2

 

2024.04.17 🎤 시학 강독 1-2

[1강. 시학 또는 창작의 기술 개요]

일시: 2024. 4. 17. 오후 7시-9시
장소: 수원시글로벌평생학습관

강의 안내: https://learning.suwon.go.kr/lmth/01_lecture01_view.asp?idx=3672
강의 자료: https://buymeacoffee.com/booklistalk/20240417-suwon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론적인 영역과 실천적인 영역과 드라마라고 하는 영역에 대해서 다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강의자료를 보면 아리스토텔레스에서는 학문 분류라고 하는 것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 분류라고 하는 것은 그냥 철학하는 사람들이 재미삼아 만들어 놓은 게 아니라 이렇게 생각을 하면 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여러 국면이 있다고 할 때 그 국면을 셋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세 가지를 골고루 생각을 해야 된다. thēoria, praxis, poiēsis. thēoria는 대상에 대한 관상적 지식, 얼굴 관상을 본다는 게 아니라 관조한다는 말이다. 순수한 것, 이론적 학문, 여기에 속하는 것은 자연학, 수학, 형이상학 이런 것들이다. 좋은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 좋음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알 수 있는가를 따져묻는 게 이론적 학문이다. thēoria라고 하는 말에서 영어 theory라고 하는 말이 나왔다. praxis라는 말은 많이 들어봤을 것이고, poiēsis라는 말은 "원리는 제작자 안에 있으나 목적의 현실적 실현이 객관적 조건의 충족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래서 poiēsis는 일반적으로 제작이라고 번역을 하는데 창작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실천praxis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착한 일을 해야겠다 라고 마음먹으면 그게 행위의 원인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윤리학과 정치학이 이 영역인데 윤리학과 정치학은 조금 다르다. 아리스토텔레스 시대만 해도 오늘날 우리가 널리 알고 있는 그런 심리학적인 사실들을 알고 있지 않았기 때문인데,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가 원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의도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의도, 그렇게 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이 나왔다 라고 하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생각이다. 물론 세세하게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나 이런 걸 읽고 따져 들어가면 복잡한 얘기가 많지만 일단 행위의 원인은 마음에 있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를 가지고 말하자면 영혼psyche 속에 있다 라고 생각을 한다. 지금부터 2500년 전인 옛날 사람이다. 우리는 '내가 왜 그랬지, 나도 모르게 되어버린 것 같네'하는 일들이 있는데, 현대에는 그런 것들도 용납이 된다. 왜냐하면 심리학적으로 분석이 되니까 그렇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거기까지는 간 사람은 아니니까 이렇게 볼 수 있다. 그다음에 poiēsis는 "원리는 제작자 안에 있으나"는 인간의 행동이 아니라, 가령 이 건물을 짓는다 라고 할 때 설계도는 내가 그릴 수 있다. 그런데 자재가 공급이 되어야 한다. 행동이야 내 마음대로 되지만 자재 공급은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제작이라고 불린다. 그러니까 제작을 잘하려면 객관적 조건의 충족 여부를 잘 살펴봐야 된다.  

흔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학praxis의 영역에 속하는 것을 윤리학과 정치학이라고 보는데, 저는 오히려 윤리학은 몰라도, 윤리학이라고 하는 건 방구석에서 자기 혼자 착하게 살면 되는 것인데, 정치학이라고 하는 건 공공제를 다루는 학문이다. 정치를 하겠다는 사람이 연설 잘 못하면 안된다. 웅변은 남 앞에서 말하기인데, 이건 기술이다. 물론 내가 노력을 하면 잘할 수 있으나 사람들이 이 얘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나, 장소는 잘 되어 있나, 마이크는 갖춰져 있나, 내가 마이크 없이 얘기할 수 있는 여건이 되는가 아니면 마이크를 써야 하는가 하는 이런 기술적인 요건들이 다 되어 있다. 즉 테크니컬한 영역들이 붙어 있다.  정치라고 하는 것은 19세기 말 그러니까 1800년대 후반부에 들어서면서부터 대중민주주의라고 하는 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전파되었기 때문에, 말을 잘하고 태도를 똑바로 가지고 메시지를 잘 전달하고 하는 것도 정치의 중요한 영역이 되었다. 그러니까 지난번 특강에서 수사학과 정치학을 얘기했는데,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정치는 poiēsis의 영역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실천학praxis의 영역에 넣어 놓은 것이 윤리학과 정치학인데, 그 정치학은 원리적인 것, 정치학과에서 배우는 정치학을 말한다. 구체적인 정치술art of politic은 제작학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이것을 잘 식별해낼 수 있어야 된다. 정치도 말하는 기술,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생각을 잘 전달해서 설득하는 기술 이런 기술을 가진 사람이 하는 것이다. 그게 안 되는 사람들은 하면 안 된다. 

poiēsis고 하는 것은 객관적 조건을 고려해서 그것을 충족시키려고 해야 된다. 그러니까 객관적 조건이라고 하는 것, "원리는 제작자 안에 있으나 목적의 현실적 실현", 여기서 목적은 드라마 같은 경우에는 관객의 감동이겠다. 그다음에 어떤 물건을 만든다고 할 때는 그 쓸모, 유틸리티, 그 목적의 현실적 실현이 객관적 조건의 충족에 달려 있는 것이다. 제가 가진 이 가방의 목적은 뽐내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실용적인 목적이 있다. 물론 뽐내기 위해서 가방을 사기도 하지만 이건 부수적이다.  실용적 목적과 뽐내기가 동시에 충족되는 가방도 있다. 그런데 생각을 해보자. 그 목적을 벗어나면 제작의 영역을 벗어나는 것이고, 그런 것을 우리는 허위의식이라고 부른다. 물건에 대해서, 그 물건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영역을 벗어나서 거기에 뭔가를 덧붙여서 다른 걸 이야기하는 것을 허위의식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드라마의 목적은 무엇인가. 관객들로 하여금 감격이 복받쳐 올라가지고 막 이렇게 뭔가 쏟아지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카타르시스라고 말한다. 카타르시스는 연민과 공포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연민이라는 건 나도 그걸 겪을 만한 약간의 경험의 공유가 있어야 되는 것이다. 경험의 공유가 있어야 연민이 일어나는 것이다. 안 겪어본 것을 가지고는 감동 자체가 안 일어난다. 그러니까 드라마뿐만 아니라 제작도 물건을 자기가 만들어서 그걸 소중하게 써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그 물건의 원래 목적이라든가 이런 것을 모른다. 그래서 제작poiēsis이라고 하는 것은 학문적으로는 엄청나지는 않은데, 이론적으로 정교하지도 않고 실천적으로 도덕적으로 선하지도 않는데 인간을 움직이는 힘들에 대해서 생각을 하는 것이다. 

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정말 많이 읽어봤는데, 왜 이 책을 읽었겠는가. 인간에게 감정이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형성되고 어떻게 해서 그런 것들이 배출되어 나오는가에 대해서 연구를 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연구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도 가장 체계적이고 모든 연구자들이 따라 보고 배우는 텍스트가 《시학》이다. 인간을 어떻게 해야 움직이는가, 인간을 움직이는 것 중에 가장 강력한 것이 울게 하는 것이다. 웃게 하는 것보다도 울게 하는 것이 훨씬 어렵다. 사실 아리스토텔레스는 희극도 썼다고 하는데, 웃음이라고 하는 것은 울음보다도 더 고차원의 것이라고는 하지만, 어떻게 해야 인간의 내면 세계를 움직일 수 있는가에 대해서 생각을 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 《시학》을 보는 것이다. 지금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강의를 하는 것도 제작하는 것, 설득하는 것이다. 《시학》을 읽자고 여러분들을 설득하는 것이다. 그다음에 여러분들에게 강의 자료를 나눠주는 것, 강의 자료는 항상 이렇게 생겼다. 제 강의를 계속 듣는 사람은 굳이 여기다 이름을 쓰지 않아도 누가 봐도 강유원 선생님이 만든 강의 자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것들 하나하나가 다 제작이라는 것이다. 강의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는가를 궁리한다. 우리가 공부하는 것도 제작이다. 도구가 있어야, 책이 있어야 되고 공책이 있어야 되고 그렇다. 객관적 조건이 갖춰져야 공부를 하는 것이 성취된다.  공부를 잘해야겠다 라고 마음은 먹었는데 뜻하는 대로 잘 안된다. 제가 이 강의하는 것은, 제 행위의 의도가 있다. 저는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가능한 한 교양 있는 삶을 살아가길 원한다. 그렇게 하는 데 기여하는 것이 강의의 목적이다. 그러니까 제 의도는 그것인데 그러면 객관적인 조건으로 의도를 잘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을 해야 된다. 거기서 이제 좋음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 《시학》을 배울 때는 여러분들은 현실적으로 구현하는 문제를 이 텍스트가 다루고 있구나. 내가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갖고 있다 해도 그것을 어떻게 해야만 잘 실현할 수 있는가를 다루고 있구나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수사학과 시학은 대체로 제작에 속한다고 알려져 왔는데, 시학은 시의 본질을 분석하여 원리를 알아낸다는 점에서는 이론적 학문과 유사하다. 그러니까 시의 원리를 안다면은 시를 창작할 수도 있다 라는 점에서는 제작이기도 하다. 그런데 또 원리를 알아낸다고 해서 보편적 원리를 찾아내는 건 아니다. 보편적 원리라는 건 언제 어디서나 적용되는 것인데, 시의 원리라고 하는 것은 꼭 언제 어디서나 적용되는 것은 꼭 아니다. 그래서 구체적인 인간의 행위를 분석하는 데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시학을 배우면 이론적으로 2 × 3 = 6과 같은 보편적인 원리를 아는 게 아니라 이런 경우에는 이렇고 이런 경우에는 이렇고, 흔히 하는 말로 케바케에 대해서 알게 된다는 말이다. 그다음에 구체적인 인간의 행위를 분석하는 것이며, 보편적 근거로서의 성격ēthos을 분석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위는 마음에서 나온다고 얘기한다. 우리는 아니다. 마음이 꼭 할 의도가 없어도 행위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알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에는 ēthos라고 하는 것을 분석한다. 성격 분석을 통해서 그러니까 전형적인 인물이라고 한다. 영어에서 character는 성격이라는 뜻이 있다. 그런데 character의 뜻을 한 번 더 찾아보면 등장인물이라는 뜻도 있다. 왜 등장인물이냐 하면 그냥 등장 인물 A, 등장 인물 B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character라고 하는 단어를 등장 인물이라는 뜻으로 쓰는 이유는 뭐냐 하면 이런 것을 우리는 전형적 인물이라고 부른다. 특징적으로 A라고 하는 성격만을 드러내는 등장 인물, 이것이 고대 드라마의 특징이다. 마지막 시간에 말할 것인데 고대 드라마와 셰익스피어 드라마의 결정적인 차이가 그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배우고 나면 셰익스피어 드라마를 읽을 수 있는 눈이 확 열린다. 셰익스피어의 드라마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드라마의 차이는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드라마는 등장인물의 행동이 그 사람의 마음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셰익스피어의 드라마는 그가 무슨 짓을 하든 그 마음은 다른 것에 다를 수 있다. 즉 일종의 표어처럼 말을 해보자면 근대 드라마 즉 셰익스피어 드라마의 주인공은 마음에 달려 있는 것이고, 마음을 알아야 읽어야 하는 것이고, 고대 드라마의 주인공은 행동을 읽어야 되는 것이다. 대표적인 경우에 셰익스피어의 드라마에서 근대 드라마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 보여주는 작품이 《오셀로》이다. 공부를 잘하는 방법의 1번은 고급스러운 단어를 알아야 한다. 수학이나 이런 건 모르겠는데 철학이나 이런 것은 고급스러운 단어를 알아야 한다. 그러면 고급스러운 단어를 언제 아는가. 속된 말로 머리에 피도 안 말랐을 때부터 고급스러운 단어를 익혀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다음에 관객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을 의도하므로 실천학의 측면도 가지고 있지만 ‘좋음’(moral good)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므로 윤리학이나 정치학도 아니다. 그러니까 수사학이나 시학이 제작학에 속하는 것도 아니요, 어떤 제3의 학문인 것 같다, 아주 복합적이다. 플라톤은 정통파니까 플라톤은 도대체 상상도 못해본 학문 영역이이다.  그래서 원래 정통파가 아닌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그 사람들이 뭔가 정통적인 것을 배우면 창조적인 것들이 만들어진다. 그게 아리스토텔레스의 비법이다. 창의력을 기르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일단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에서 배우듯이 정통적인 기본을 배워야 된다. 정통적인 기본을 배우되 자유롭게 생각을 할 수 있도록, 전통적인 것만 배우면 창의력이 생기지 않고 전통적인 것 이외의 것들에도 터득을 해야 된다. 그런데 우리가 살면서 전통적인 것 이외의 것을 터득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역사책을 읽는 게 방법이다. 역사책을 많이 읽어야 된다. 


이제 용어를 보자. 용어는 여러분들이 《시학》을 이제 배우니까 이런 용어는 알아둬야 된다 라는 뜻에서 얘기를 한다. poiētikē에서 tikē 가 붙으면 기술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poiētikē는 창작술이다.  그런데 poiētikē라는 것을 지금은 《시학》이라고 번역을 한다. 창작술이라고 번역을 할 수도 있다. 실용 기술과 순수 기술, 예술을 포괄하여 시학이라고 부른다. 그다음에 poiēsis는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제작, 창작 행위이다.  그다음에 poiētēs는 작가이고 시인인데, 여기서 시인은 꼭 서정시인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다음에 poiēma는 작품이다.  

그다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 개념의 차이가 있는데, 일단 고전적 형이상학이라고 하면 불변의 궁극적 실재를 상정하거나 그것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다. 신은 있다라든가 아름다움은 불변한다라든가 이런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플라톤은 형상形相(eidos)이라고 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부동의 원동자라고 말한다. 플라톤은 이제 그런 것이 있다고는 하는데, 그것이 예술로서 승화되고 그런 것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예술학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행위와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것들에 관한 탐구하는 것이다.  작년에 「미학, 예술학, 예술철학」 할 때 얘기를 했던 내용이기도 하다. 

시학에 관련된 탐구 주제들은 무엇이 있는가. 인간의 행위는 어떻게 해서 일어나고 그다음에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어떤 사람들로 나와야 사람들이 거기에 대해서 가장 감동할 것이고 그런 것을 말한다. 그런 것들을 따져 묻기 때문에 그리고 어떻게 해야 감동을 줄 것인가 하는 것이 목표이다. 기본적으로는 《시학》이라고 하는 텍스트가 목적이 무엇이고 그다음에 기본적인 성격은 무엇이고 구성 방식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다룬다. 이건 학문적인 논의들이 많이 있는데 지금 오늘 한 얘기가 다 이 얘기이다. 《시학》의 저술 목적, 기본 성격, 구성 방식은 다음 주에 할 것이다. 그다음에 시의 특징적 원리들을 다룹니다. 그리고 비극이 가져다주는 효과인 카타르시스와 그것을 이끌어내는 감정적 효과들, 즉 연민과 공포, 비극의 주인공들은 어떤 사람들이고, 비극의 감정적 효과들이 가진 윤리적 함축은 무엇인가 이런 것들이 이제 《시학》에서 많이 다루는 주제이다. 

이 주제들을 다루기 위해서 오늘 강의는 소개이고, 다음 번에는 모방이란 무엇인가를 한다. 모방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논의가 많은데, 《시학》의 이론적인 부분이 바로 모방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것이다. 그다음에 드라마의 구성 요소.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야기 구성, 성격, 사상, 언어적 표현, 노래, 장면 요소로 해서 6개의 구성 요소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즉 드라마의 구성 요소 6가지가 무엇이고, 이것들을 강의에서 얘기한다. 이것을 알면 뭐가 좋은가. 가령 글을 써야겠다고 하면, 남을 좀 설득하는 글을 써야겠다 그러면 이렇게 6개 정도를 고려해서 쓰는 것이다. 드라마 작가들은 따로 이제 비법들이 있겠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이 드라마가 잘 짜여진 드라마다 라고 말할 때 이는 구성이 잘 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기본적인 드라마 작법 원칙은 여기 6가지에서 나온다.  

어떤 드라마들은 구성은 엉성한데 언어적 표현이 굉장해서 가지고 말 대사빨로 영화 드라마 끌고 가는 게 있다. 그런 것들도 있는가 하면 또 어떤 드라마들은 장면 요소, 스펙터클만 가지고 승부하는 드라마들도 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캐스팅이다. 그러면 캐스팅은 이야기 구성, 성격, 사상, 언어적 표현, 노래, 장면 요소 중 어디에 속할까. 성격에 속한다. 오늘날은 굉장히 주인공들이 성격이 다양하다. 다양한 종류의 역할을 소화할 수 있어야 되고 다양한 종류의 배우들이 등장한다. 그건 우리가 인간의 행동에 대한 관심이 그만큼 넓어졌고 또 행동에 대한 연구가 늘어났고 직업에 대한 탐구가 작가들이 많이 했다는 증거이다. 한국의 드라마가 잘 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장사가 된다 라고 하는 것은 드라마의 보편성을 확보했다는 것이고, 그만큼 외국 사람들이 보기에도 굉장히 개연성 있게 접근해 간다는 것이다. 그만큼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창작 능력이 보편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다음에 비극과 카타르시스는 굉장히 중요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매우 많이 열심히 강조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다음에 드라마하고 서사시는 어떻게 다른가 그리고 마지막에 고대 드라마와 근대 드라마의 차이, 이렇게 얘기를 해서 이번에 강의를 진행하겠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을 보면 관객에게 감동을 주는 주인공은 너무 잘난 사람은 안 된다. 도덕적으로 탁월한 사람이 나오면 감동 안 느껴진다. 그러니까 아리스토텔레스는 드라마의 등장 인물들은 우리하고 비슷해 보이는 사람이 나와야 되는데, 그 사람이 엄청난 퍼포먼스를 보여줘야 된다고 말했다. 드라마 주인공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우리와 동등해 보이는데 주인공이 겪는 고통이나 파토스, 겪음의 정도가 압도적이라든가 해야 한다. 그러니까 내가 설득을 하려고 하면 평소에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줘야 된다. 엄마가 딸한테 공부해라 라고 하려면 평소에 하루에 7시간씩 다 날마다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공부하라고 해야 설득이 된다. 

사건과 행위 이런 것을 다 묶어서 인간이 겪는 일, 겪음이 있어야 된다. 겪음이라고 하는 말이 희랍어로 pathos이다. pathos가 마음의 상처만이 아니라 겪는 것 일반을 가리킬 때 pathos라고 한다. 그렇게 이 인물이, 관객들theatēs과 비슷해 보이는 사람이 어떤 행위를 하고 어떤 사건을 만들어내서 관객들이 몰입이 되었을 때 툭 터지는 순간이 있이 있는데 그러면 카타르시스가 확 일어난다. 그러니까 드라마 인물과 그 인물의 행위에 의해서 벌어지는 사건 그리고 사건에 의한 효과, 비극 작품 같은 경우는 이제 카타르시스로. 예를 들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장 잘 만들어졌다고 하는 드라마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인데, 스토리는 모두 알다시피 오이디푸스가 자기 아버지 라이오스왕을 라이오스 왕인지 모르고 죽이고 자기 어머니 이오카스테와 같이 살아서 딸을 낳는다. 일부러 그런 거 아니고 모르고 그랬다. 모르고 저지른 죄를 hamartia라고 한다. 그러니까 관객들은 어쩌겠는가. 짠한 것이다. 그리고 자기도 자기 아버지인 줄 모르고 길에서 누군가가 자기에게 시비를 걸고 마차 째찍으로 때리면 나라도 그랬겠다 라고 하는 연민이 생겨버린다. 비극은 원치 않는 결말을 피하기 위해서 행한 짓이 그 원치 않는 결말을 가져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게 비극이다. 그러니까 보는 사람들이 오이디푸스가 짠하고 안 됐네 라고 하고 있는데, 오이디푸스가 그 모든 것을 안 다음에 자기 어머니의 브로치로 눈을 찌르고 나타난다. 그러면 사람들이 오싹해질 것이다. 연민이 일어나고 있는데 공포스러운 장면이 탁 나오니까 사람들에게 카타르시스가 터지는 것이다. 왜 눈을 찌르는가 하면, 고대 그리스에서는 눈이 멀었다 라는 것은 죽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그 시대에 그 동네 사람들에게 통하는 기술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만든 드라마가 전 세계인들이 보고 감동을 한다는 것은 한국의 작가와 제작자들이 전 세계 사람들에게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키는 코드와 행동과 사건을 안다는 것이다. 굉장히 보편화되어 있다는 걸 생각하는 것이다. 한국의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들은 굉장한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철학적으로 보편적인 원리를 알아차린 사람들은 아니지만 어떤 행위들을 화면에서 보여줄 때 사람들에게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키는가, 감동을 불러일으키는가를 안다는 것은 굉장한 것이다.  

오늘날에는 군사적으로 탁월하고 국제적으로 영향력 있는 나라가 강대국이다. 한국은 강대국이기도 하다. 그런데 선진국은 경제적으로 잘 살기도 하지만 문화적으로도 선진국이어야 한다. 그렇게 보면 일본보다 우리가 훨씬 더 선진국이다. 왜 그러한가. 우리가 일본보다도 사상과 문화의 자원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한국은 문화적인 자원이 풍부하고 자산이 충분하고 그다음에 사상의 자유가 있기 때문에 선진국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문화적으로 용인이 된다면 인종차별하지 않는다. 

어쨌든 오늘 여기까지 하고 다음 주에는 모방에 관하여 한다. 
여기까지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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