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길기독사회문화원: 역사적 예수 에큐메니칼 신학 ━ 새길에큐메니칼문고 1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18. 3. 28.
역사적 예수 에큐메니칼 신학 - 새길기독사회문화원 엮음/도서출판 새길 |
제1부 역사적 예수
역사적 예수와 오늘의 교회 | 한완상
역사적 예수 강좌 | 박태식
예수와 여인들 | 김진경
제2부 에큐메니칼 신학
현대 에큐메니즘과 한국교회 | 정지석
한국 에큐메니칼 운동-계승과 창조 | 오재식
세계교회협의회(WCC)와 한국교회: 오늘의 에큐메니칼 운동과 신한 | 채수일
제1부 역사적 예수
역사적 예수와 오늘의 교회 | 한완상
16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예수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엄정한 역사 비평적 연구를 행한 것이 아니라, 연구자의 상상에 따른 전기적 서술을 진행하였다. 그래서 연구자의 가치와 기호에 맞는 예수가 부각되었다. 이러한 경향에 반하여 슈바이처는 본격적으로 역사 비평적 방법을 동원하여 연구에 객관성을 부여하고자 했다. 그는 예수 생애 당시 예수에게 가장 영향을 많이 주었던 유대 후기 묵시·종말론에 주목하였다. 유대 후기의 묵시· 종말론에 대하여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초월자 하나님이 역사에 개입하여, 우주적인 종말 사건을 통한 권선징악의 심판을 이룰 것인데, 그 때가 도래하였다는 사상이다. 예수는 이 신념과 희망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것이다.
17 슈바이처와 더불어 20세기 가장 위대한 신학자로는 불트만이 있다. 불트만은 역사적 예수를 결코 알 길이 없다고 천명하면서, 복음서는 부활을 뜨겁게 경험 한 예수 공동체의 고백이라고 설명하였다. 다시 말하면, 케리그마(kerygrna)를 통해서 역사적 예수를 재구성할 수 없다는 것이다.
19 사실 복음서는 예수 사후의 초기 교회 공동체가 예수를 고백적으로 회상한 것이지만, 문제는 4복음서의 원전이 없다는 것이다. 예수가 기원 후 30년경 사망하고, 사도 바울의 서신을 비롯한 신약성서의 각 권이 기록되기까지 예수 어록은 적어도 20여년 이상 구전되었다. 구전이기 때문에 전승의 주체는 민중이었을 것이고, 자연스럽게 일장 연설보다는, 짧고 선동적이며 자극적이고 청자를 당황스럽게 하는 말들이 전해졌을 것이다. 이러한 판단에 따라 우리는 Q 자료가 다른 복음서의 말씀보다 앞서있는 원형적 본문이라고 추측하게 되는 것이다.
26 예수의 말씀을 들은 청중들이 깜짝 놀랐던 이유는, 예수 자신이 예언자들의 예언을 성취했다고 주장하였으며, 급진적으로는 '잡것들'이 천국에 간다고 선포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예수의 말씀은 혁명적인 수준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였다. 카이사르를 유일한 황제로 여겼던 로마 당국에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예수는 심각한 반체제인사였으며, 종교 지도자들에게 예수의 치유와 밥상 공동체 활동은 당시 성전권력이 가졌던 중개자 역할을 부정하는 행위였다. 이렇게 양자 모두에게 예수는 위험한 존재였던 것이다.
27 케리그마는 중요하다. 부활의 그리스도를 만나서 역사변혁에 앞장선 초대교인들을 기억해야 한다. 역사적 예수 생전의 제자들은 그 당시에는 다른 의도와 목적을 가진 채 성숙하지 못했지만, 부활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에 예수를 바로 따르게 된다. 사도 바울은 역사적 예수와 동시대인이었지만 그를 직접 만나지는 못했다. 그러나 부활의 그리스도를 체험하여 변화된 바울은 빌립보 감옥에서 죽는 것도 유익하다는 고백을 내어 놓는다. 그의 믿음은 케리그마 속 그리스도로부터 왔다고 볼 수 있다.
28 역사적 예수와 부활의 그리스도의 차이를 단절시키면 안된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교회가 담당해야 한다. 이미 와 있는 하나님나라의 수준을 교회가 심화시키는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역사적 예수 강좌 | 박태식
45 예수가 활동하던 때의 유대 땅에서는 종말·묵시 사상이 크게 유행하고 있었다. 당시의 이스라엘은 로마의 압제에 짓눌려 기를 못 펴던 처지였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갖고 있던 자부심은 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진 신세였다. 그 같은 상황에서 묵시 사상가들이 등장해 한 시절을 풍미하게 된다. 그들은 세상을 '이 세상'과 '오는 세상'으로 양분하고, 이 세상은 악의 세력이 지배하느라 인간에게 고통만 안겨줄 뿐이고, 악화일로를 걸어 언젠가는 멸망하게 될 것이라고 예견한다.
45 여기서 종말론과 묵시사상 사이에 약간의 거리를 둘 필요가 있는데, 종말론이 일반적으로 '세상 역사에는 끝이 있다'라는 사고 방식이라고 한다면 묵시사상은 종말의 모습을 구체화시켜 가시적으로 묘사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묵시사상이 문학적인 틀을 입었을 때 비로소 묵시문학이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된다 (다니엘서, 요한 계시록 등).
47 예수의 종말 선포는 심판이 아니라 구원을 지향한다. 기존의 묵시사상에서는 종말의 날이 닥치면 누가 구원 받고 누가 심판을 받을 지에 온통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따라서 묵시문학에 등장하는 하나님은 종종 분노의 신으로, 그리고 자신의 뜻을 어긴 자들을 색출해 무자비한 형벌을 내리는 분으로 묘사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에 등장하는 종말은 그 성격이 전혀 다르다. 예수의 종말 비유는 미래에 벌받을 자들에 대한 악의에 찬 사실 설명이 아니라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어서 회개하라'는 경고의 말씀으로 이해해야 한다.
48 하나님의 다스림은 현재 이 자리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완성되는 때가 바로 미래이다. 따라서 온전히 미래에 멀어진 일에만 관심을 쏟는 묵시 사상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으니, 곧 묵시 사상의 핵심 논리인 '두 세상 체계'의 붕괴를 의미한다.
54 예수는 사람을 하나님으로 보았다. 그랬기에 사람 대할 때 마치 하나님 대하듯 할 것, 곧 사람 사랑이 하나님 사랑이라는 점을 밝혀 놓는 것이다. 예수가 하나님을 설명하는 방식은 독특하다. 당시의 유대교는 성전 제사와 율법을 통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을 알기 원하는 이들에게 오히려 그들 안에 숨어있는 참가치를 알려 주었다. 작은 형제가 하나님이며, 원수가 하나님이며 하나님을 알기 원하는 자 스스로가 하나님인 것이다.
예수와 여인들 | 김진경
66 요한 복음서에서는 예수의 어머니가 마리아라고 소개되지 않고 예수의 사랑하는 제자와 같이 무명으로 소개되는데, 이는 예수의 어머니가 공동체의 대표적 인 인물임을 의미한다. 요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어머니는 곧 기독교 교회, 새 이브 (New Eve) 또는 유대 기독교 등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왔다.
73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는 간음하다 잡혀 돌에 맞아 죽게 된, 부도덕하지만 가련하기 짝이 없는 간음녀를 예수가 지혜로 살려낸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를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와 같이 종교 정치적 면에서 조명해 보면, 이 이야기의 초점은 예수의 지혜로 간음녀를 구해주는 것이 아니라, 간음에 관한 율법 논쟁을 빌미로 하여 바리사이들과 예수가 이스라엘의 참 지도자란 자리를 두고 힘 겨루기를 하는 것임을 알 수가 있다.
78 마르타의 고백은 베드로의 고백에 버금가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많은 학자들은 마르타를 유대교가 기독교로 옮겨 가는데 많은 기여를 하였던 예수의 제자로 보아왔다. 그러나 마르타는 예수를 다시 "선생님"으로 부르며 급기야는 라자로 무덤의 돌을 옮기라는 예수의 명령을 가당치 않다고 여겨 예수에게 라자로가 죽은 지 나흘이 지났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이는 예수가 누구인가에 관한 마르타의 고백과 예수의 능력에 대한 마르다의 신뢰가 아직도 확실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2부 에큐메니칼 신학
현대 에큐메니즘과 한국교회 | 정지석
91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은 여러 교파 교회로 분열된 개신교 교파 교회들간의 일치를 추구하는 20세기 교회 일치운동이라고 규정될 수 있다.
92 교회 일치를 추구하는 에큐메니칼 운동은 로마 가톨릭교회로 되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다. 중앙 집권적인 하나의 교회와 신앙을 만들자는 것도 아니다. 교회 일치 운동에 대한 오해가 여기에 있다. 교회 일치운동은 세계 기독교 단일 교회를 목표로 삼는 것이 아니라 다음과 같이 세가지 목표를 갖는다. 첫째, 교회의 분열을 반성한다. 둘째,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 신앙을 협력하여 증거한다. 셋째, 서로 대화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한다. 이런 점에서 현대 에큐메니칼 교회 일치운동은 신앙적 신학적 대각성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104 종교 다원주의에 대하여 기독교가 취해 온 태도는 세 가지 유형으로 나타난다.
(1) 선민의식과 구원(배타주의 Exclusivism): 기독교가 제일 우월하다는 신념은 이스라엘 선민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구원은 기독교에서만이 가능하다는 계시와 구원에서의 예수 그리스도 중심성을 신봉하는 신앙 전통은 타 종교에 대한 배타주의적 태도를 취한다.
(2) 교회론과 인간론(포용주의 Inclusivism): 타 종교를 포용하는 태도이다. 구원의 문제는 경계 설정의 문제(어디까지가 구원인가)와 멤버십(기독교인이냐 아니냐)의 문제와 직결된다. 이는 제도화된 구원이라 할 수 있다. 종교적 경험의 근본적인 일치라는 선결 조건, 정통 신앙 전통에 서있느냐는 문제가 제기된다.
(3) 상대성과 상보성(다원주의 Pluralism): 타 종교를 인정하고, 대화의 파트너로 삼는다. 사실상의 다원성과 명목상의 다원주의, 종교 안에 있는 상보성의 원리의 가능성, 신앙과 신념의 관계 등이 토론된다.
세계교회협의회(WCC)와 한국교회: 오늘의 에큐메니칼 운동과 신한 | 채수일
148 교회는 왜 하나가 되어야 할까? 보다 효과적인 선교를 위해서 그럴까? 다양한 교파 분열 때문에 받는 세상의 비방을 벗어나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조직적인 세력을 과시하고, 사회에서 발언권을 얻기 위해서일까? 성서가 증거하는 교회의 일치는 실용적 목적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149 일치에서 중요한 것은 획일화가 아니라 정체성이다. 교회의 일치는 조직의 통합이나, 신학의 통일을 통해서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일치는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 참여하는 데서 성취된다. 즉 믿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함으로써 교회는 영광을 받으며, 복종과 겸손을 통하여 그 영광을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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