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도킨스: 만들어진 신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17. 11. 17.
만들어진 신 -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한음 옮김/김영사 |
들어가는 글
1 대단히 종교적인 불신자
2 신가설
3 신의 존재를 옹호하는 논증들
4 신이 없는 것이 거의 확실한 이유
5 종교의 뿌리
6 도덕의 뿌리: 우리는 왜 선한가?
7 '선한' 책과 변화하는 시대정신
8 내가 종교에 적대적인 이유
9 종교로부터의 도피
10 신이 우리에게 주는 것들
문고판 서문
옮긴이의 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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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단히 종교적인 불신자
27 인간의 사유와 감정은 뇌 속의 물리적 실체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대단히 복잡한 상호 연결을 통해 출현한다. 이런 철학적 자연학자라는 의미의 무신론자는 자연적이고 물리적인 세계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관찰 가능한 우주의 배후에 숨어있는 초자연적인 창조적 지성은 없다고, 몸보다 오래 사는 영혼은 없다고 믿는다. 그들은 오직 우리가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자연 현상들이라는 의미로만 초자연적인 현상을 바라본다. 현재 자연계 너머에 놓여 있는 듯이 보이는 무언가가 아직 이해되지 않은 현상일 뿐이라면, 우리는 결국에는 그것을 이해하고 자연계 내에 포함시킬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을 수 있다. 우리가 무지개의 신비를 푼다고 해도, 그 경이감이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33 유신론자는 초자연적 지성을 믿는다. 그 지성은 우선 우주를 창조하는 큰일을 했을 뿐 아니라 여전히 주위를 맴돌면서 자신이 창조한 것의 운명에 영향을 미친다. 유신론적 신앙 체계 내에서 신은 인간사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는 기도자에게 응답하고 죄를 용서하거나 처벌하며, 기적을 이룸으로써 세계에 개입하고 선행과 악행에 시시콜콜 관심을 가지며, 우리가 언제 선행과 악행을 행하는지 안다. 한편 이신론자는 초자연적 지성을 믿지만, 그 지성이 우주를 지배하는 법칙들을 설정하는 일에만 관여할 뿐 인간사에 개입하거나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범신론자는 초자연적인 신을 아예 믿지 않지만 신이라는 단어를 자연이나 우주 또는 그 움직임을 지배하는 법칙을 가리키는 비초자연적 동의어로 사용한다. 이신론자는 신이 기도자에게 응답하지 않고 죄나 고백에 관심이 없으며, 우리 생각을 읽지 않고 변덕스러운 기적을 부리지 않는다고 본다는 점에서 유신론자와 다르다. 이신론자는 신이 일종의 우주적 지성이라고 보는 반면 범신론자는 신을 우주 법칙의 비유적 또는 시적 동의어라고 본다는 점에서 다르다. 범신론은 매력적으로 다듬은 무신론이다. 인식론은 물을 타서 약하게 만든 유신론이다.
2 신가설
76 나는 먼저 불가지론을 두 가지로 구분하고자 한다. TAP 즉, 실질상의 일시적 불가지론(Temporary Agnosticism in Practice)은 이쪽 아니면 저쪽이라는 명확한 답이 실제로 있지만 아직 거기에 도달할 증거가 부족할 때 취하는, 합리적인 중도적 입장이다. TAP는 페름기 절멸을 대하는 합당한 입장일 것이다. 저 너머에 진리가 있으며 우리는 언젠가 그것을 알 수 있겠지만, 당분간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취하는 중도 입장도 있다. 나는 그것을 PAP (Permanent Agnosticism in Principle : 원리상의 영구적 불가지론)라고 부르고자 한다. 그 약어가 내 학창 시절의 설교자가 썼던 단어와 발음이 비슷한 것은 (거의) 우연이다. PAP 형태의 불가지론은 우리가 아무리 증거를 모은다 해도 증거라는 개념 자체를 적용 할 수 없기에 답을 결코 얻을 수 없는 질문들에 알맞다. 그런 질문은 증거가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선 다른 평면 혹은 다른 차원에 존재한다.
77 일부 과학자들과 지식인들은 신의 존재 문제가 영구히 접근 불가능한 PAP 범주에 속한다고 확신한다. 내가 보기에는 너무 열정적으로 말이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그들은 거기에서 출발하여 신의 존재가설과 신의 비존재 가설이 옳을 확률이 똑같다는 비논리적인 연역을 하곤 한다. 내가 옹호하려는 견해는 그와는 전혀 다루다. 다시 말해 신의 존재에 대한 불가지론은 명백히 일시적인 불가지론 즉, TAP 범주에 속한다. 신은 존재하든지, 존재하지 않든지, 둘 중 하나다. 그것은 일종의 과학적 질문이다. 즉 우리는 언젠가는 그 답을 알게 되며, 그동안은 확률적으로 어떻다고 강력하게 말할 수 있다.
81 확률 스펙트럼이라는 개념을 통해 신의 존재에 관한 인간의 판단들을 확실성이라는 양극단 사이에 놓인 스펙트럼 상에 나열해보자. 그 스펙트럼은 연속적이지만, 다음의 7가지 이정표를 이용하여 구분할 수 있다.
1, 강한 유신론자.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100퍼센트 확신함. 카를 융의 말을 빌리면 "나는 믿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이다."
2. 확률이 아주 높지만 100퍼센트는 아님. 사실상 유신론자. "나는 확실히는 알 수 없지만, 신을 굳게 믿으며 신이 있다는 가정하에 산다."
3. 50퍼센트보다 높지만 아주 높지는 않음. 기술적으로는 불가지론자지만 유신론쪽으로 기울어져 있음. "확신하지는 못하지만, 신이 있다고 믿고 싶다."
4. 정확히 50퍼센트. 철저하게 불편부당한 불가지론자. "신의 존재와 비존재는 확률상 똑같다"
5. 50퍼센트보다 낮지만 그리 낮지는 않음. 기술적으로는 불가지론자지만 무신론쪽으로 기울어져 있음. "신이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존재에 회의적인 쪽이다."
6. 아주 낮은 확률이지만 0은 아님. 사실상 무신론자.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신이 있을 것 같지 않다고 생각하고 신이 없다는 가정하에 산다."
7. 강한 무신론자. "융이 신이 있다는 것을 안다고 확신한 것만 큼 나는 신이 없다는 것을 안다."
97 앨리스가 이상한 나라로 떨어지기 전에 언니의 책을 보고 한 말에 빗대자면, 기적도 없고 기도자에게 응답도 하지 않는 신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기도하다'라는 동사에 대한 앰브로즈 비어스의 재치 만점의 정의를 떠올려 보자. "지극히 부당하게 한 명의 청원자를 위해서 우주의 법칙들을 무효화하라고 요구하는 것." 자신이 이기도록 신이 돕는다고 믿는 운동 선수가 있다. 아마 그의 모습은 다른 선수들에게는 자신을 편애해 달라고 신에게 떼를 쓰는 것으로 비칠 것이다. 신이 자신을 위해 주차 공간을 비워 둘 것이라고 믿는 운전자들이 있다. 그렇다면 다른 누군가가 그 공간을 빼앗기는 셈이다. 이런 형태의 유신론은 당혹스러울 정도로 널리 퍼져 있으며, NOMA 같은 (겉으로 보기에) 합리적인 것에 감화될 성 싶지 않다.
3 신의 존재를 옹호하는 논증들
164 나는 교회에 가기로 결심할 수 있고, 니케아 신조를 암송하기로 결심할 수 있고, 성경을 쌓아놓고 그 안에 든 단어 하나하나를 다 믿는다 고 맹세하기로 결심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믿지 않는다면 그 어느 것도 나로 하여금 실 제로 믿도록 할 수는 없다. 파스칼의 내기는 신을 믿는 척하는 것에 관한 논증이 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당신이 믿는다고 주장하는 그 신은 전지한 신이 아닌 편이 더 낫다. 그렇지 않다면 사기를 꿰뚫어볼테니까.
165 그런데 우리는 왜 신을 기쁘게 하고 싶을 때 해야 하는 일 중 하나가 그를 믿는 것이라는 개념을 그렇게 쉽게 받아들이는 것일까? 믿는다는 것에 특별한 무언가가 있는 것일까? 그것은 신이 친절이나 관용이나 겸손함에 대해 보상하는 것과 별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아니면 성실함에 대해? 신이 진리를 정직하게 추구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간주하는 과학자라면 어쩔 것인가? 사실 우주의 설계자라면 과학자여야 하지 않겠는가?
186 1비너스의 꽃바구니의 형태에서 드러나는 통계적 비개연성은 모든 생명 이론이 해결해야 하는 핵심 문제다. 통계적 비개연성이 클수록 우연이 해답일 가능성은 그만큼 적어진다. 비개연성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오해와는 달리, 비개연성이라는 수수께끼의 해답은 설계도, 우연도 아니다. 그것은 설계와 자연 선택이다. 우리가 생물들에게서 보는 높은 수준의 비개연성을 고려 할 때, 우연은 해답이 아니다.
187 다시 말하지만 지적 설계는 우연의 적절한 대안이 아니다. 자연선택은 경제적이고 설득력 있고 우아한 해답일 뿐 아니라, 지금까지 제시된 것들 중 제대로 작동하는 유일한 대안이다. 지적 설계는 우연과 똑같은 반론에 시달린다. 그것은 통계적 비개연성이라는 수수께끼의, 설득력있는 해답이 아니다. 그리고 비개연성이 높아질수록 지적 설계는 더욱 설득력이 없어진다. 잘보면 지적 설계는 문제를 더 악화시킨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다시 말하지만 그것은 설계자 자신(그/그녀)의 기원이라는 더 큰 문제를 제기하기 때문이다.
188 설계자를 설계한 것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우연과 설계는 둘 다 통계적 비개연성의 해답이 아니다. 하나는 그 문제 자체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으로 회귀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해답은 자연선택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제시된 해답 중 유일하게 유효하다. 그리고 그것은 유효한 해답일뿐 아니라, 대단히 우아하고 강력한 해답이다.
4 신이 없는 것이 거의 확실한 이유
214 골디락스 영역에서처럼, 설계 가설의 대안인 인본 가설은 통계적이다. 과학자들은 많은 수에 호소한다. 우리 은하에는 10억~300억 개의 행성들이 있고 우주에는 약 1000억 개의 은하가 있다고 추정되어 왔다. 통상적으로 하듯이 0을 몇 개 떼어내고 보수적인 추정값을 취하면, 우주에 있는 쓸만한 행성의 수는 1해 (10억의 10억배)개가 된다. 이제 생명의 기원 즉, DNA에 상응하는 무언가의 자발적인 출현이 진정으로 있을 법하지 않은 사건이었다고 가정 해보자. 행성 10억 개 중 하나에서만 일어날 정도로 개연성이 없는 사건이라고 가정하자. 연구비를 지원하는 기관은 어떤 화학자가 연구 계획서에 연구의 성공 확률이 100분의 1밖에 안된다고 시인하면 비웃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말하는 것은 10억분의 1의 확률이다. 그렇게 터무니 없을 정도의 낮은 확률일지라도 생명이 출현할 행성은 10억 개는 된다. 물론 지구도 그 중 하나다.
232 사실 거의 모든 것이 더 단순하다. 우주의 모든 입자의 개별 상태를 끊임없이 감시하고 통제할 수 있는 신은 결코 단순할 리가 없다. 그의 존재는 그 자체로 엄청난 설명을 필요로 할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단순성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신의 거대한 의식은 또한 모든 인간 (게다가 우리 은하뿐 아니라 1000억 개나 되는 다른 은하들의 행성들에 있을지 모를 지적 외계인들)의 행동과 감정과 기도를 동시에 살펴야 한다. 스윈번에 따르면, 그는 심지어 우리가 암에 걸렸을 때 우리를 구하기 위해 기적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결정도 내려야 한다. "암이 낫도록 해달라는 기도에 신이 응답한다면 암은 더 이상 인류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닐 것"이기 때문에 신은 결코 응답해서는 안 될 것이다. 신이 응답한다면, 우리에게 무슨 할 일이 있겠는가?
244 이장에는 내 책의 핵심 논증이 들어 있으며 그렇기에 한 말을 또 하는 위험을 무릅쓰고서 그것을 여섯 가지로 요약하고자 한다.
1. 여러 세기 동안 인간의 지성에 도전한 가장 큰 과제들 중 하나는 우주의 복잡하고 있을 법하지 않은 설계처럼 보이는 것이 어떻게 출현했는지 설명하는 것이었다.
2. 우리는 설계처럼 보이는 것을 실제 설계로 보고 싶다는 유혹을 자연스럽게 느끼게 된다. 시계 같은 인공물의 경우, 지적인 공학자가 설계자였다. 같은 논리를 눈이나 날개나 거미나 사람에게 적용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3. 그 유혹은 잘못된 것이다. 설계자 가설은 즉시 "설계자는 누가 설계했는가?"라는 더 큰 문제를 제기하기 때문이다. 처음에 해결하고자 한 문제는 통계적 비개연성을 설명하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스카이 훅이 아니라 기중기가 필요하다. 기중기만이 단순한 것에서 있을 법하지 않은 복잡한 것으로 점진적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4. 지금까지 발견된 것 중 가장 독창적이고 강력한 기중기는 자연선택을 통한 다윈의 진화다. 다윈과 그의 후계자들은 경이로운 통계적 비개연성과, 설계된 듯한 모습을 한 생물들이 어떻게 단순한 것에서 시작하여 서서히 점진적으로 진화했는지 보여 주었다. 현재 우리는 생물에게서 나타나는 설계라는 환각이 그저 환각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5. 우리는 아직 물리학에서는 상응하는 기중기를 찾지 못했다. 특정한 다중우주 이론이 생물학 분야의 다윈주의 같은 설명 역할을 맡을 수도 있다. 그런 종류의 설명은 다윈주의에 비해 덜 만족스럽다. 행운을 더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본 원리는 한계가 있는 인간의 직관이 편안하게 느끼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행운을 가정 할 수 있게 해준다.
6. 우리는 생물학 분야의 다윈주의만큼이나 강력한 기중기가 물리 학에서 나타나리라는 희망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설령 다윈주의와 맞먹는 아주 흡족한 기중기가 물리학 분야에는 없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현재 갖고 있는 비교적 약한 기중기들도 인본원리로 뒷받침되면 지적설계자라는 자멸하는 스카이 훅 가설보다 더 낫다.
5 종교의 뿌리
265 종교적 행동은 빗나간 것 즉, 다른 상황에서는 유용한 혹은 과거에는 유용했던 심리적 성향의 불운한 부산물일지 모른다. 이 견해에 따르면 우리 조상들에게서 자연적으로 선택된 성향은 종교 자체가 아니였다. 그것은 다른 어떤 혜택이었고, 그것이 부수적으로 종교적 행동으로 발현되었을 뿐이다. 우리는 종교적 행동에 새 이름을 붙인 뒤에만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6 도덕의 뿌리: 우리는 왜 선한가?
328 다윈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음이 규명된 또 다른 유형의 이타주의는 호혜적 이타주의다("네가 내 등을 긁어주면 나도 긁어주마"). 로버트 트리버스가 진화 생물학에 처음 도입했고, 게임이론이라는 수학적인 언어로 표현되곤 한 이 이론은 유전자의 공유에 의존하지 않는다. 사실 이런 이타주의는 서로 다른 종의 구성원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로 잘 아마도 더 잘 작용할 것이며, 종종 공생이라고 불린다. 그 원리는 인간의 모든 거래와 교역의 토대이기도 하다.
332 현재 우리는 개체들이 서로에게 이타적이고 관대하고 '도덕적'이 되려는 타당한 다윈주의적 이유를 네 가지 알고 있다. 첫째, 유전적 친족 관계라는 특수한 경우가 있다. 둘째 호혜성이 있다. 받은 호의에 보답을 하고, 보답을 예견하면서 호의를 베푸는 것이다. 여기에서 나오는 것이 셋째, 관대하고 친절하다는 평판을 얻음으로써 누리게 되는 다윈주의적 혜택이다. 넷째, 자하비가 옳다면 과시적 관대함은 속일 수 없는 진정한 광고의 역할을 한다.
7 '선한' 책과 변화하는 시대정신
359 노아 이야기에 깊이 물들고 성서의 가르침 외의 다른 것에는 무지한 그들을 과연 누가 비난할 수 있겠는가? 자신들이 받은 교육 때문에 그들은 자연 재해를 지각판 같은 자연적인 무언가가 아니라 인간의 비행에 대한 응징으로 보게 되었다(즉, 인간사와 얽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신(혹은 지각판)이 관련된 대규모의 지진들이 언제나 인간과 관련이 있다고 믿다니 정말로 주제넘은 자기 중심주의가 아닐 수 없다. 창조와 내세를 생각하는 신성한 존재가 대체 왜 인간의 비행같은 하찮은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단 말인가? 우리 인간은 자신의 하찮은 죄를 우주적인 의미를 지닌 것으로 확대시키면서까지 으스대고 있다!
365 신은 아브라함을 유혹하고 믿음을 시험했을 뿐이다. 현대의 도덕주의자는 그런 심리적 의상을 아이가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는지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다. 현대의 도덕 기준들로 보면, 이 수치스러운 이야기는 아동 학대이자, 비대칭적인 권력 관계에서 발생하는 핍박이자,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때 나오는 것 같은 변명이 처음으로 기록된 사례다. "나는 명령에 따랐을 뿐이다." 하지만 그 전설은 세 유일신 종교의 중요한 기반이 된 신화들 중 하나다.
380 기독교인들은 압도적으로 죄 죄 죄 죄 죄 죄에 초점을 맞춘다. 그런 역겹고 사소한 것에 몰두하느라 인생을 낭비 하다니, 샘 해리스는 《기독교 국가에 보내는 편지》에서 아주 통렬하게 혹평을 한다. "당신들의 주된 걱정거리는 우주의 창조자가 인간들이 벌거벗었을 때 한 일에 여전히 화를 낼 것이라는 점이다. 당신들의 이 소심함이 매일 인간을 더 불행하게 만든다." 그만하고 가학피학증을 살펴 보자. 신은 유전되는 아담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예수라는 인간이 되어 고문당하고 처형당했다. 바울이 이 혐오스러운 교리를 상세히 다룬 이후로, 예수는 우리의 모든 죄의 대속자로 숭배를 받아왔다. 아담의 죄만이 아니다. 미래의 죄도 마찬가지다. 후손들이 죄를 저지르든 그렇지 않든 말이다!
8 내가 종교에 적대적인 이유
470 더 일반적으로 말해서 (이 말은 이슬람교뿐 아니라 기독교에도 적용된다) 진정으로 유해한 것은 신앙 자체가 미덕이라고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행위다. 신앙은 그 어떤 정당화도 요구하지 않고 어떤 논증에도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악이다. 의문을 품지 않는 신앙이 미덕이라고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아이들 ━ 획득하기 어렵지 않은 다른 요소들을 고려할 때 ━ 을 미래의 성전이나 십자군 전쟁을 위한 치명적인 무기로 자라도록 준비시키는 것이다. 순교자의 낙원을 약속받고 두려움이 없어지면, 그 진정한 신앙의 집약체 즉, '인간 폭탄'은 긴 활, 군마, 탱크, 집속 폭탄과 함께 무기의 역사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할 만하다. 아이들에게 의문 없는 신앙이 우월한 가치를 지닌다고 가르치는 대신 자신의 믿음을 통해 질문하고 생각하는 법을 가르친다면, 자살 테러범은 없어질 가능성이 높다.
10 신이 우리에게 주는 것들
545 여론 조사 결과, 미국인의 약 95퍼센트가 죽은 뒤에도 삶이 있다고 믿었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서 정말로 진심으로 믿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궁금하다. 진정으로 그렇게 믿는다면, 왜 그들은 앰플포스 대수도원장처럼 행동하지 않는가? 배즐 흄 추기경이 자신이 죽어간다고 말하자 대수도 원장은 기뻐했다. "축하합니다! 아주 희소식이네요. 당신과 함께 가고 싶었는데."
546 죽는다는 것은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을 것이다. 나는 정복자 윌리엄의 시대나 공룡의 시대나 삼엽충의 시대에 그랬던 것과 똑같아질 것이다. 거기에 두려워할 만한 것은 없다. 그러나 죽는 과정은 운이 나쁘면 고통스럽고 불쾌할 수도 있다. 그것은 맹장을 떼어낼 때처럼 전신 마취제로 고통을 면제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신의 애완 동물이 고통스럽게 죽어 갈 때 수의사를 찾아서 애완 동물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도록 전신 마취제를 투여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잔인하다는 비난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고통 속에 죽어가고 있을 때 의사가 당신에게 똑같은 자비로운 행동을 한다면, 그는 살인죄로 기소될 위험에 처한다. 내가 죽어간다면 나는 병든 맹장을 떼어낼 때 그랬듯이 전신 마취된 상태에서 삶을 마감하고 싶다. 하지만 내게는 그런 특권이 허용되지 않을 것이다.
547 하지만 맹장을 떼어내는 것과 목숨을 제거하는 것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지 않은가? 사실 없다. 즉 당신이 어차피 죽게 되어 있다면 차이가 없다. 그리고 사후의 삶을 믿는 진정한 종교 신앙을 갖고 있다면 차이가 없다. 당신이 그런 신앙을 갖고 있다면 죽음은 단지 하나의 삶에서 다른 삶으로의 전이일 뿐이다. 그 전이가 고통스럽다면, 마취하지 않은 채 맹장을 떼어내고 싶지 않은 것처럼 마취제 없이 죽음을 겪고 싶어 해서도 안 된다. 어리석게 안락사나 조력자살에 저항해야 할 쪽은 죽음을 전이가 아니라 종말로 보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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