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칼: 팡세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17. 11. 1.
팡세 (양장) - B. 파스칼 지음, 김형길 옮김/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머리말
한국의 독자들에게
일러두기
Ⅰ. 1658년 6월의 계획
Ⅱ. 1658년 6월에 제외된 단편들
Ⅲ. 혼합된 단편들 중 마지막 단편들(1658년7월~1662년7월)
Ⅳ. 1658년 7월부터 1662년 7월 사이에 전개된 단편들
Ⅴ. 제2사본에 수록되지 않은 단편들
옮긴이 해설
파스칼 연보
대조표(셀리에 판, 라퓨마 판, 브롱슈빅 판)
일러두기
1) 이 책은 팡세의 제2사본에 따라서 번역된 것이다. 파스칼의 유족들은 이 사본을 가보로서 비에나시 성에 오랫동안 보관해 왔었다. 제1사본이 초판 발행 때 여러 사람들에 의해서 가필 정정이 이루어지면서 손상이 되었던데 비해서, 이 제2사본은 유족들의 정성어린 간수에 의해서 원형을 깨끗하게 보존 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 사본은 미분류된 단편들을 가장 적절하게 보이는 순서에 따라서 배열하고 있다.
2) 이 책의 대본은 셀리에가 편집하여 보르다스 출판사에서 1991년에 발행한 것이다. 셀리에는 소르본 대학의 명예교수로서 파스칼 연구의 권위자이다. 본서에 수록된 주해들은 그의 것이다. 그 외에 번역자가 첨부한 주해들은 역주)라고 표시하였다.
3) 한국의 독자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는 브롱슈빅판은 원저자의 의도를 무시한 채 논리적인 연속성의 원칙에 따라서 편집자가 임의대로 출판한 것이다. 사본들 속에서는 '철학자들'이라는 제목 밑에 7개의 단편들만이 분류되어 있을 뿐인 데 비해서, 이 판에서는 86개의 단편들을 분류해놓고 있다. 게다가 오랫동안 원본과 사본을 연구하였던 투르뇌르의 말에 의하면 이 판은 300 개 이상의 판독상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4) 제1사본에 의해서 라 퓨마판이 출판되었던 것이 이미 60~70년 전의 일이다. 그동안에 새로운 많은 연구 결과들이 쏟아져 나왔을뿐만 아니라 현대과학의 진보에 힘입은 새로운 연구방법들, 즉 종이의 화학분석이나 레이저 분석, 필체의 감정 등이 추가 되었다. 본 셀리에 판의 주해가 그 어느 판보다도 새롭고 풍부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Ⅰ. 1658년 6월의 계획
1.1658년 6월의 목차 묶음, §18
만일에 인간이 신을 위해서 창조되지 않았다면, 왜 그는 신 안에서만 행복 할 수 있는 것일까? 만일에 인간이 신을 위해서 창조되었다면, 왜 그는 그렇게도 신을 거역하는 것일까?
1. 1658년 6월의 목차 묶음, §19
인간은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그는 그의 진정한 위치로부터 떨어져 나와서 그 위치를 되찾지 못한 채 눈에 띄게 방황하고 있다. 그는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어둠 속에서, 곳곳에서 불안스럽게 그 위치를 찾고 있으나 성공하지 못한다.
1.1658년 6월의 목차 묶음, §26
스토아 학파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 자신의 내면 세계로 돌아가시오. 당신이 안정을 찾게 될 곳은 바로 그곳이오." ━ 그런데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밖으로 나가서 오락을 즐기면서 행복을 찾으시오." 그런데 그것도 사실이 아니다. 질병이 찾아온다. 행복은 우리들의 밖에도 안에도 있지 않다. 그것은 신 안에 있고 우리들의 안과 밖에 동시에 존재한다.
2. 순서, §40
제1부 신없는 인간의 비참.
제2부 신과 함께하는 인간의 행복.
달리 말해서
제1부 본성이 타락하였다는 것. 본성 그 자체에 의해서.
제2부 회복자가 있다는 것. 성서에 의해서.
2. 순서, §46
사람들은 종교에 대한 경멸심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종교에 대한 증오심을 가지고 있어서 이 종교가 사실이 아닐까 하고 두려워한다. 그것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먼저 종교가 결코 이성에 어긋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존경할 만하다. 종교에 대한 존경심을 줄 것. 그러고 나서 종교를 사랑스러운 것으로 만들 것. 즉 선량한 사람들에게 종교가 사실이었으면 하고 바라도록 만들 것. 그 다음에 이것이 사실임을 보여줄 것. 존경할 만하다. 왜냐하면 종교가 인간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사랑할 만하다. 왜냐하면 종교가 진정한 선을 약속해주기 때문이다.
3. 허무, §58
인간의 조건
변덕, 권태, 불안
3. 허무, §62
우리는 진리도 선도 소유할 능력이 없다.
3. 허무, §70
세상이 허무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 자신이 매우 허무하다. 그리고 또 소란스러움과 오락과 미래에 대한 생각 속에 온통 빠져있는 젊은이들을 빼놓고는 허무를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하지만, 그들의 오락을 제거해 보라. 당신은 그들이 권태로 인해서 몸이 마르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때에 그들은 허무를 알아 차리지도 못하면서 느끼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오락을 즐기지 못하고 자신을 생각하게 되자마자 견딜 수 없는 고독 속에 빠진다는 것은 몹시 불행한 일이기 때문이다.
3. 허무, §78
인간은 은총 없이는 지울 수 없는, 천성적인 오류로 가득 찬 존재이다.
4. 비참, §102
나의 앞뒤에 놓여있는 영원한 시간 속에 나의 짧은 생애가 흡수되어 버리는 것을 생각할 때, 내가 차지하고 있고 또 내가 직접보고 있는 이 작은 공간이 내가 알지 못하며 또 나를 알지 못하는 저 무한하고도 광대한 공간 속으로 가라앉고있는 것을 생각할 때, 나는 무서움을 느낀다. 그리고 저 곳이 아니고, 오히려 이곳에 있는 내 자신을 깜짝 놀란다. 왜냐하면 그때가 아닌 지금, 그리고 저곳이 아닌 이곳에 있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누가 나를 여기에 놓아 두었을까? 그 누구의 질서와 조종에 의해서 이 장소, 이 시간이 나에게 운명 지어졌을까?
5. 권태와 인간의 본질적인 특성들, §112
오만.
대체로 호기심은 허영심에 불과하다. 사람들이 무언가를 알고싶어 하는 것은 거기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그렇지 않고 사람들이 한번도 거기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고, 한번도 거기에 대해서 마음을 털어놓으리라는 기대가 없이, 단지 구경하는 즐거움만을 위해서 바다 위를 여행하지는 않을 것이다.
6. 현상의 이유, §131
사욕과 힘은 우리들의 모든 행동의 원천이다. 사욕은 자발적인 행동을, 힘은 본의가 아닌 행동을 하게 만든다.
7. 위대, §145
생각하는 갈대
내가 나의 존엄성을 찾아야 하는 것은 결코 공간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의 생각을 조절함으로써이다. 내가 더 많은 땅을 소유한다고 해서 더 우월한자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공간에 의해서 우주는 나를 포함한다. 그리고 나를 하나의 점인 것처럼 삼켜 버린다. 그러나 나는 사고에 의해서 우주를 포함한다.
7. 위대, §146
인간의 위대성은 자기가 비참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점에 있다. 나무는 자기가 비참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자기가 비참하다는 것을 아는 것은 비참한 일이다. 그러나 자기가 비참하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위대한 일이다.
7. 위대, §149
인간의 위대성
인간의 위대성은 너무나도 분명하기 때문에 우리들은 이것을 인간의 비참 속에서도 이끌어 낸다.
8. 모순, §155
비참은 위대함으로부터 결론지어지고 위대는 비참함으로부터 결론지어지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위대를 그 증거로 삼으면 삼을수록 그만큼 더 비참을 결론지었다.
9. 오락, §166
이러한 비참에도 불구하고 그는 행복해지기를 원하고 행복해지기만을 원하고, 행복해지기를 원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그는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잘하기 위해서는 불사신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기 때문에 그는 그런 것을 생각하는 것을 자제하기로 마음먹었다. 사람들은 죽음과 비참과 무지를 치유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런 것들을 결코 생각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10. 철학자들, §178
세 가지 사욕들이 세 가지의 학파들을 만들어 내었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이 세 가지 사욕들 중 어느 한 가지를 따르는 것 외에 다른 것을 하지 않았다.
11. 최고 선, §181
신앙이 없는 인간은 진정한 선도 정의도 알 수가 없다는 것.
모든 인간들은 행복해지는 것을 열망한다. 그들이 아무리 다른 방법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예외가 없다. 그들은 모두가 이 목적을 지향한다. 어떤 사람들을 전쟁터로 나가도록 만들고 또 어떤 사람들을 거기로 나가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은 비록 서로의 관점은 다르다 할지라도 이 두 가지 속에 내포되어 있는 동일한 욕구이다. 인간의 의지는 이 목적을 향해서가 아니면 결코 한치의 발걸음도 내딛으려 하지 않는다. 목매달아 죽으려는 사람들까지도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오랜 세월 전부터 모든 사람들이 끊임없이 노리고 있는 이 목표 지점에 아무도 신앙이 없이는 도달하지 못하였다. 왕자도 신하도, 귀족도 평민도, 노인도 젊은이도, 강한 자도 약한 자도, 학자도 무식한 자도, 건강한 자도 병든 자도, 모든 나라, 모든 시대 모든 연령, 모든 신분의 모든 사람들이 한탄을 한다. 그렇게 오랜 그리고 그렇게도 계속적이며 그렇게도 한결 같은 경험은 우리들이 우리들의 노력에 의해서 선에 도달할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
신만이 인간의 진정한 행복이다. 인간이 그를 떠난 이후로 자연 가운데에는 인간에게서 그의 자리를 대신 차지할 수 없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12. 포르로아얄에서, §182
불가해성을 설명한 후에
인간의 위대와 비참은 너무나도 분명한 것들이기 때문에 참 종교는 반드시 우리들에게 인간 속에는 위대성의 어떤 대원리가 존재하며 동시에 비참의 대원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어야만 한다. 게다가 그 종교는 우리들에게 이 놀라운 모순들의 이유를 설명해 주어야만 한다.
12. 포르로아얄에서, §182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이 종교는 신이 존재한다는 것, 사람들은 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 우리들의 진정한 행복은 신 안에 있으며 우리들의 유일한 악은 신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임을 그에게 보여 주어야만 한다.
13. 시작, §192
세 종류의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신을 발견하고 나서 그에게 봉사하고 있는 사람들, 신을 발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를 찾는 일에 열중하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신을 발견하지 못했을뿐만 아니라 그를 찾지도 않으면서 살고 있는 사람들. 첫 번째 사람들은 분별력이 있고 동시에 행복한 사람들이고 마지막 사람들은 미친 사람들이고 불행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중간의 사람들은 불행하지만 분별력이 있는 사람들이다.
15. 신을 증명하는 이 방법의 우수성, §225
자기의 비참에 관한 지식이 없이 하나님을 아는 것은 오만을 낳는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없이 자기의 비참을 아는 것은 절망을 낳는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은 그 중간을 낳는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거기에서 하나님과 우리들의 비참을 모두 발견하기 때문이다.
16. 인간을 아는 것으로부터 신을 알게 되는 과정, §229
인간의 맹목과 비참을 바라보면서, 그리고 전 우주가 침묵하고 있고 인간은 누가 자기를 거기에 놓아두었는지, 무엇을 하기 위해서 거기에 오게 되었는지, 죽은 후에는 어떻게 될 것인지, 이 모든 것들을 알지 못한 채 우주의 한 구석에서 방황하고 있는 것처럼 아무런 지혜도 없이 자기 자신에게 내맡겨져 있는 것을 보면서, 나는 마치 잠을 자다가 인적이 없는 무시무시한 섬에 실려 와서 그곳으로부터 빠져 나올 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한 채 잠에서 깨어 난 사람처럼 공포에 사로잡힌다. 게다가 나는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이렇게도 비참한 상태를 보고서도 전혀 절망에 빠지지 않는 것인지 놀라움을 느낀다. 나는 내 주위에 있는 비슷한 성격의 사람들을 본다. 그리고 그들에게 그들은 나보다도 더 잘 알고 있는지 물어본다. 그들은 나에게 아니라고 대답한다. 그러고 나서 이 방황하는 비참한 사람들은 그들의 주위를 바라보다가 재미있는 어떤 대상들을 발견하고 나서는 거기에 몰두하고 거기에 애착을 가졌다. 나로서는 거기에 집착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현재 보고있는 것과 다른 어떤 것이 있을만한 가능성이 얼마나 더 있는지를 생각하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에 관한 어떤 표시를 조금이라도 남겨 놓지 않으셨는지를 찾아보았다. 나는 여러 개의 상반된 종교들을 알고있다. 따라서 이것들은 하나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거짓이다. 각 종교들마다 그 나름의 권위에 의해서 믿어지기를 바라고 있고 또 불신앙자들을 협박하고 있다. 따라서 나는 그런 점 때문에 그 종교들을 믿지 않는다. 저마다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저마다 예언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기독교를 보는데 거기에서는 예언을 발견한다. 이것이야말로 아무 종교에서나 발견 할 수 없는 것이다.
16. 인간을 아는 것으로부터 신을 알게 되는 과정, §231
231 인간은 자연 가운데에서 가장 연약한 한 개의 갈대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그를 부러뜨리기 위해서 전 우주가 무장 할 필요가 없다. 한 방울의 수증기, 한 방울의 물로도 그를 죽이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우주가 그를 부러뜨릴 경우라 할지라도 인간은 그를 죽이는 우주보다도 훨씬 더 고상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가 죽는다는 것과 우주가 자기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주는 그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16. 인간을 아는 것으로부터 신을 알게 되는 과정, §232
그러므로 우리들의 모든 존엄성은 생각 속에 존재한다. 우리들이 자신의 품위를 높여야 할 것은 바로 이 생각에 의해서이지, 우리들이 채울 수도 없는 공간이나 수명에 의해서가 아니다. 그러므로 잘 생각하도록 노력하자. 바로 여기에 도덕의 원리가 있다.
16. 인간을 아는 것으로부터 신을 알게 되는 과정, §233
이 무한한 우주의 영원한 침묵이 나로 하여금 공포를 느끼게 한다.
16. 인간을 아는 것으로부터 신을 알게 되는 과정, §234
위안을 받으십시오. 당신이 그것을 기대해야 하는 것은 결코 당신 자신에게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당신은 당신 자신에게서는 아무런 기대도 갖지 않으면서 그것을 기대하고 있어야만 됩니다.
19. 종교의 기초와 반대에 대한 답변, §260
예언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고있는가? 그가 명백하게 하나님일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진실로 숨어계신 하나님이라는 것, 그는 오해를 받을 것이라는 것, 사람들은 결코 이 사람이 그분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 그는 걸림돌이 되어 여러 사람들이 거기에 부딪히게 될 것이라는 등. 명료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해서 사람들이 우리들을 더 이상 비난하지 않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그렇게 주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람들은 애매모호한 점들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이런 점들이 없다면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부딪히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예언자들이 공식적으로 드러낸 의도이다.
19. 종교의 기초와 반대에 대한 답변, §275
하나님께서 숨어 계시기를 원하셨다는 것. 만일에 종교가 하나밖에 없을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그 종교 속에 분명하게 나타나실 것이다. 만일에 우리들의 종교에만 순교자들이 있을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숨어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숨어 계신다고 말하지 않는 모든 종교는 참 종교가 아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 모든 종교는 교육적인 종교가 아니다. 우리들의 종교는 그 모든 일을 하고 있다.
28. 결론 §409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부터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기까지는 얼마나 거리가 먼 것인가?
Ⅱ. 1658년 6월에 제외된 단편들
33.Miscellanea, §469
두 종류의 사람들 밖에는 없다. 자기를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의인들과 자기를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죄인들.
35. 혼합된 단편들(3), §543
악인들이 존재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 살인을 해야 할까? 그것은 선으로 악을 이기지 못하고 두 번의 악을 저지르는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Ⅲ. 혼합된 단편들 중 마지막 단편들(1658년7월~1662년7월)
36. 혼합된 단편들(4), §630
모든 중요한 오락들은 기독교인의 삶에 해롭다. 세상 사람들이 고안해낸 모든 오락들 가운데에서 연극보다 더 두려워해야 할 것은 없다. 연극은 인간의 정념들을 매우 자연스럽고 세련되게 표현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우리들을 자극하여 마음 속에 그와 똑같은 정념들을 불러일으키는데, 특히 사람들이 사랑을 극히 순결하고 교양있게 표현하고 있을 때에는 사랑의 정념을 불러 일으킨다. 왜냐하면 사랑이 순수한 사람들에게 순수하게 보이면 보일수록, 더욱 더 이들은 그 사랑에 감동 받게되기 때문이다. 격렬한 사랑은 우리들의 자애심을 만족시켜주고 우리들의 자애심은 즉시 자기가 본 것과 똑같은 매우 잘 표현된 효과들을 일으키고 싶은 욕구를 품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바로 그 순간에 자기가 연극에서 보았던 교양있는 감정들에 근거한 어떤 자각을 느끼게 되는데, 그가 본 감정들은 순수한 사람들에게서 두려움을 제거해주기 때문에 이들은 그처럼 현명하게 보이는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은 순수성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고 상상하게 된다.
39. 혼합된 단편들(7), §655
신앙을 갖게 되는 방법에는 세 가지가 있다. 이성, 습관, 영감이 그것들이다. 이성을 가진 유일한 종교인 기독교는 영감이 없이 믿는 사람들을 결코 진정한 자녀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것은 기독교가 이성과 습관을 제외시켜서가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증거를 향하여 정신을 열어주고 습관에 의해서 이것을 확고히 하고 겸손에 의해서 영감에 몸을 맡기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영감들만이 진정한 그리고 구원에 도움이 되는 결과를 가져올 수가 있다.
Ⅳ. 1658년 7월부터 1662년 7월 사이에 전개된 단편들
45. 기계의 논설, §680
"나는 그것을 고백하고 인정합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노름의 내막을 볼 수 있는 방법은 전혀없는 것일까요? ━ 있습니다. 성서와 그 밖의 것 등이 있습니다 ━ "좋습니다. 하지만 내 손은 묶여 있고 내 입은 말문이 막혀 있습니다. 사람들은 나에게 억지로 내기를 하라고 하는데, 나는 자유롭지가 않습니다 사람들은 나를 풀어주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나는 믿을 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당신은 내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세요?" ━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적어도 당신이 이성으로는 믿는 데로 향하면서도 당신의 정념들 때문에 믿을 수 없기 때문에 당신이 믿는 일에 무능하다는 사실을 알도록 하십시오. 그러므로 신에 관한 증거들을 증가시킴으로써가 아니라 당신의 정념을 감소시킴으로써 이해하려고 노력하십시오. 당신은 신앙의 길로 가기를 원하시는데 그 길을 모르고 계시지요? 당신은 불신앙을 떨쳐 버리기를 원하면서 그 해결 방법을 구하고 계시지요? 당신과 마찬가지로 묶여 있었다가 지금은 그들의 모든 행복을 내걸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배우도록 하십시오. 이들이 바로 당신이 따라가고자 하는 길을 알고있는 사람들이며, 당신이 치료받고자 하는 고통에서 치료를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시작했던 방법을 따라서 해보십시오. 그것은 성수를 받고, 예배를 드리면서, 마치 그들이 믿고 있는 것과 똑같이 행동하는 것입니다. 자연스럽게도 이런 것은 당신이 믿을 수 있도록 만들어주고 당신을 어리석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46. 신을 찾도록 권고하기 위한 편지, §682
"나는 누가 나를 세상에 놓아두었는지, 이 세상은 어떤 세상인지. 그리고 내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지 못한다. 나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무서울 정도의 무지 속에 빠져 있다. 나는 나의 육체가 무엇인지, 나의 감각이 무엇인지, 그리고 나의 영혼과 내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고 또 모든 것들과 자기 자신에 대해서 성찰하면서도 그 밖의 다른 것들은 물론이거니와 자기 자신조차도 알지 못하는 나의 이 부분 자체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 나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우주의 무시무시한 공간들을 바라본다. 그런데 나는 왜 내가 다른 곳이 아닌 이곳에 놓여있는 것인지, 그리고 나에게 살 수 있도록 주어진 이 짧은 시간이 어째서 내앞에 놓인 모든 영원과 내 뒤에 놓인 모든 영원 속에서가 아닌 바로 이 시점에서 나에게 지정되었는지 알지 못한 채 이 광막한 공간의 한 구석에 붙잡혀 있다.
[…]
결국 그들은 합리적인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두 종류의 사람들 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즉 하나님을 알고 있기 때문에 전심으로 그분에게 봉사하고 있는 사람들, 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전심으로 그를 찾고 있는 사람들. 그러나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 그를 찾지도 않고 살고있는 사람들로 말하자면, 이들은 자기 자신을 돌보기에도 매우 부족한 사람들 일뿐만 아니라 남들의 보살핌을 받을 만하지도 못한 사람들이라고 스스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자기 자신을 어리석은 가운데에 방치해둘 정도까지 자신을 경멸하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들이 경멸하고 있는 이 종교를 사랑해야만 된다고 판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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