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으로 - 가토 요코 지음, 김영숙 옮김/어문학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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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와라 아키라, <<일본군사사(상)>>를 참조하여 만주사변에 이르기까지의 전간기 국제정세와 일본 국내정세를 먼저 살펴본다.
– 국제정세의 측면
1) 유럽대전(제1차 세계대전)의 귀결로서의 총력전 개념: “전쟁은 단순한 무력전에 그치지 않고 정치 경제 문화 등 국가의 총력을 동원한 격렬하고 장기간에 걸친 형태를 띠게 되어, 국민 전체가 전쟁의 주체라는 형식을 취하지 않을 수 없어, 국민의 정치적 사상적 단결력과 국가의 경제력이 전쟁의 승패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는 새로운 단계에 접어든 것”
2) 총력전의 폐해를 극복하고자 하는 국제적인 군축 평화 분위기
3) 워싱턴 회의와 런던조약: 1921년 11월부터 워싱턴에서 미합중국·영국·프랑스·이탈리아·일본에 의한 군축회의에서 건함(주력함)경쟁 문제를 논의하였고, 1930년에는 보조함 경쟁에 제한을 가하는 런던조약이 타결되었다.
4) 군축이 진행되면서 총력전 시대에 대응하는 국가전반에 걸친 총력적인 국력 경쟁이 동시에 시작되었다.
– 일본 국내 정세의 측면
1) 군국주의의 세력 약화: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도달한 하나의 큰 성과… 메이지 유신 이래 천황제 국가 하에서 체계적으로 배양되어, 러일전쟁 후 군부의 정치적 지위 확립과 가족주의적 국가관의 성립을 계기로 하여 거의 확립된 일본의 군국주의는, 여기서 일단 분해의 위기에 처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군축은 이러한 내외의 비판에 대한 방파제로서도 필요했다.”
2) “국가총력전은 고도로 발달된 자본주의 단계에 대응하는 전쟁의 형태이다. 그런데도 미숙한 제국주의 국가 일본이 뿌리깊은 봉건성 및 취약한 자본주의의 기초 위에 군대만의 근대화를 시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 만몽확보를 절실한 문제로 생각하게 된 중간 매개 원인들
1) 오랜 가상적국인 러시아, 그에 이은 “소련과의 전쟁에 대비한 작전상의 고려… 1928년을 제1차년도로 하는 소련의 5개년계획이 수립된 이후… 이 계획으로 소련의 국방력 강화 및 시베리아 개발 등이 행해지는 것을 큰 위협으로 느낀 것… 1929년의 중소분쟁에서 소련군이… 중국군을 격파한 것”
2) “중국정세의 변화”
– 촉발 원인들
1) “탈출구로서 일본제국주의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전쟁 외에는 없었으나, 특히 장교의 불만과 초조감을 부추겨 전쟁에 기대감을 준 것은 감봉과 군축이었다.”
장교들은 자신들의 “생활불안을 의식에 있어서는 국방의 불안으로 치환함으로써 자신들의 행동에 의의를 부여했다.”
2) “천황제의 성쇠가 자신의 운명과 직접적으로 관계된다고 하는 객관적인 현실을, 의식에 있어서는 역으로 자신의 운명에 관계된 것을 국가의 운명에 관계된 것으로 생각함으로써 자신들의 모든 행동을 정당화했다. 이것이 독단에 의한 군사행동도 비합법적인 쿠데타도 국가를 위해서는 정당하다고 하는 사고방식을 낳았다고 할 수 있다.”
《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으로》를 읽는다. 주제 자체가 굉장히 짦은 시기이지만 일본이 국민국가를 성립시킨 다음에 제국주의로 나아가는 과정에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다뤄야 할 주제가 많다. 우선 만주사변이라고 하는 사태를 이해하기 위해서 몇가지 사전에 필요한 이야기를 하겠다. 가토 요코가 쓴 《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으로》 책의 표지를 보면 "만몽권익이란 무엇이었나?"라고 쓰여있다. 만주와 몽고에 대한 특수한 권익을 말하는데 이것을 둘러싼 여러가지 형태의 쟁투가 직접적으로 문제가 되는데 이런 것이 예전에 제1차세계대전 이전에는 어떤 나라와 다투려면 그냥 싸우면 되었다 그런데 제1차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는 침략전쟁이라는 것을 막기 위해서 국제법이 엄격하게 나라들마다 적용된다. 다시말해서 우리가 전범이라는 말을 쓰는데, 어떤 법규가 없을 때에는 살인을 저질러도 살인죄라는 말을 쓸 수 없는 것처럼, 제1차세계대전 이후에야 그런 말들이 의미 있게 된다.
도대체 왜 만주사변을 일으키게 되었는가. 그 사이에 있는 국제정세와 일본 국내정세를 몇가지 얘기를 해보려고 한다. 그런 다음에 중일전쟁과 만주사변을 일본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전개되어 갔는가를 보려고 한다. 유럽대전(제1차세계대전)에 대해서 먼저 보자. 후지와라 아키라의 《일본 군사사》를 참조해서 이야기하겠다. 먼저 1차세계대전이 국제 사회에 남긴 교훈은 전쟁의 측면에서만 말하자면, 전쟁이라는 것이 무력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치 경제 문화 등 국가의 총력을 동원한 격렬하고 장기간에 걸친 형태를 띠게 되고 일부 군인만이 아니라 국민전체가 전쟁의 주체라는 형식을 취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국민의 정치적 사상적 단결력과 국가의 경제력이 전쟁의 승패를 결정하는 새로운 중요한 요인이 되는 단계가 되며, 이를 총력전이라 한다. 더군다나 1800년대 후반 제2차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공업이 발전함에 따라 전쟁무기가 고도로 정밀하게 되고 대량학살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도 함부로 해서는 안되는 것이 되었다. 그래서 전쟁을 막으려는 국제적인 노력이 시작된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총력전 시대에 대비하여 전쟁준비를 고도화하는, 다시말해서 공업이 엄청나게 발전하는, 근대화 산업의 군산복합체가 등장하는 계기가 된다.
서로 반대되는 두 가지가 동시에 진행된다. 제1차세계대전의 비참한 경험으로부터. 국제사회는 반전 평화 기운이 확산되었다. 그리고 전후에 성립된 국제 논의도 목적을 군축에 두고 있었다. 이게 일본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은 웨싱턴체제이다. 날로 경쟁이 심해지는 미국과 일본, 또 영국과 미국 간에 군함건조 경쟁이 각국의 전후 경제에 막대한 부담을 강요하는 것이기도 해서 1921년 11월부터 워싱턴에서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이 군축회의가 개최되었고, 벨기에, 네덜란드, 포르투갈, 중국까지 포함하여 9개국 회의도 동시에 시작되었다. 즉, 전세계적으로는 국제연맹이 있었고 직접적인 목표가 군축에 있다면 이것이 일본과 관련해서는 워싱턴회의가 있었다.
그리고 이때는 아시아 태평양전쟁의 패전 이전에 군부가 공공연히 자유로운 비판의 대상이 되던 시기이도 하다. 제1차세계대전 이후에 세계의 반전 평화 풍조에 의해 이런 것이 일어났다고 하지만 그 이전 시기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도달한 하나의 큰 성과라고도 할 수 있다. 일본 군국주의가 계속해서 배양이 되다가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상당한 정치적 지위를 확립했다.
그런데 군축이 중요한 시기다 라고 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총력전 개념이 생겨났다. 총력전을 하려면 공업이 발전해야 하고 동시에 국민 전체가 전쟁에 가담하는 국민군의 성격을 가져야 하는데 서로 대립되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이에서 일본 군부는 고민을 하게 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저자는 "국가총력전은 고도로 발달된 자본주의 단계에 대응하는 전쟁의 형태이다. 그런데도 미숙한 제국주의 국가 일본이 뿌리깊은 봉건성 및 취약한 자본주의의 기초 위에 군대만의 근대화를 시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후지와라 아키라의 용어를 빌리자면 국민 전체의 지지를 받는 '대중군'을 형성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고 하겠다.
그러던 와중에 일본군부는 전세계적인 군축 평화운동에 영향을 받아 일본에서도 몇 차례에 걸쳐 군축이 시행된다. 직접적으로는 워싱턴회의에 영향을 받아 시행된다. 그리고 일본 내부에서는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거치면서 사람들이 군부의 정치지배에 맞서 정당활동을 활발히 했다. 그런 것들이 결합되면서, 즉 세계적인 추세로 등장한 반국군주의와 일본 국내의 군부비판 이것이 결합되면서부터 군대 내부에서도 개혁을 해야 한다라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게 한편에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총력전 시대를 맞이하여 군수사업이 굉장히 발전해야 하고, 더 나아가서 군대가 특권집단이 아닌 국민의 군대로 거듭나야 하는 그럼 심각한 요구가 함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일본 군부 내에서 상당한 정도로 심각한 문제로 나온다. 이런 와중에 일분 육군 내부에서 혁신운동과 국가개조운동이 전개된다.
그래서 이 운동이 구체적으로 하나의 목표를 띠고 등장하게 된 것이 '만몽특수권익'이다. 모순의 해결책으로 등장하여 절실한 문제로 떠오른 것이 만몽의 확보이다. 만몽문제를 절실한 문제로 생각하게된 첫째 이유는 소련과의 전쟁에 대비한 작전상의 고려 때문이었다. 전통적으로 일본은 러시아를 가상적국으로 생각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아시아 태평양전쟁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미국을 적국으로 삼은 지 오래되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사실 아주 오래된 적국이 러시아다. 아시아 태평양 전쟁이 개전 이후에도 만주에 주둔하고 있는 병사가 아시아 태평양 전쟁에 투입된 병사보다 많았다. 그리고 1928년을 제1차년도로 하는 소련의 5개년계획이 수립된 이후 이 계획으로 소련의 국방력 강화 및 시베리아 개발 등이 행해지는 것을 일본 장교들은 큰 위협으로 느꼈다. 게다가 1929년의 중소분쟁에서 소련군이 중국군을 격파했다. 두번째로는 중국정세가 크게 변화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셋째로 국제적인 문제를 보면 런던조약문제였다. 런던조약은 워싱턴회의 이후 주력함대를 제한을 했는데 그렇게 되니 보조함 경쟁이 시작되고, 그러다가 나중에 런던에서 이 문제를 가지고 타협안이 생겨난다.
항상 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을 얘기할 때는 국제정세와 일본국내정세를 함께 이야기해야 한다. 한쪽만 볼 수 없다. 지금 현대 사회는 1차세계대전 이후로 말 그대로 국제정세와 국내정세가 맞물려 들어간다. 국내적으로는 군부에서 혁신운동과 국가개조운동이 확산되었다. 일본제국주의가 선택할 수 있는 전쟁이었고, 특히 장교의 불만과 초조감을 부추겼다.
만몽특수권익의 먼 원인을 따지면 군축평화조약과 워싱턴회의, 런던조약 이런 것들이 있는가 하면, 직접적으로는 소련의 위협이 크다는 것과 중소분쟁에서의 소련의 위력을 확인한 것이 중간원인쯤 되고, 그리고 그런 것들을 다 묶어서 일본군부에서는 혁신운동운과 국가개조운동이 진행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전쟁으로 나아가는 촉발원인은 장교의 불만과 초조감을 부추겨 전쟁에 기대감을 준 것은 감봉과 군축이었다. 그러면 군인의 존재 의의를 증명해야 하는데 이것은 전쟁이다. 저자의 표현을 보면 "장교들은 자신들의 생활불안을 의식에 있어서는 국방의 불안으로 치환함으로써 자신들의 행동에 의의를 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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