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기 20분 | 일본 근현대사 | 04 다이쇼 데모크라시 2
- 강의노트/책읽기 20분 2014-15
- 2017. 8. 10.
다이쇼 데모크라시 - 나리타 류이치 지음, 이규수 옮김/어문학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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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양한 계층분화: 중소상점주와 중소공장주로서 일종의 중간층을 형성한 ‘단나슈’(旦那衆)와 이들에게 고용된 ‘잡업층’(雜業層)의 등장 — 이들이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밀고간 원동력이었으나 이 운동력은 만주사변 발발을 계기로 소멸되면서 ‘국민’으로 결집된다.
– 제국이 된 일본은 새로운 사회구조를 만들내지 못했고, 그에 따라 새로운 사회분화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였다.
– 천황기관설(天皇機関説): 미노베 다쓰키치(美濃部達吉) “국가는 헌법상의 인격을 갖고 법인으로서의 국가가 주권의 주체가 되며, 천황은 국가의 최고 기관이 된다”
– 천황기관설은 자유주의적인 헌법해석이었으나 결국 우에스기 신키치(上杉慎吉) 등의 국체론(国体論, 天皇主権説)에 제압당하였다.
– 일본제국의 해외식민지 지배: 타이완, 1910년 조선병탄, “문명과 근대적 제도를 도입하면서 현지인으로부터 수탈해나가는 것이 식민지 지배의 주요 국면을 이루었다.”
– 남사할린과 만주, 남만주철도주식회사 설립(1906년)
지난 주에 이어서 나리타 류이치의 《다이쇼 데모크라시》을 읽는다. 《다이쇼 데모크라시》는 챕터에 따라서 읽기보다는 큰 분류에 따라서 중요한 주제들만 가지고 이야기하겠다. 《다이쇼 데모크라시》는 세 시기로 나뉜다고 했는데, 1905년 러일전쟁 강화 반대운동부터 1931년 만주사변까지, 25년 정도의 시기를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기로 본다. 이 시기에는 제국주의, 식민주의, 그리고 내셔널리즘과 모더니즘 이런 다양한 종류의 이데올로기가 겹쳐있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시기에 1차 세계대전이 들어간다. 일본은 물론 아주 조금 가담하기는 했지만 당사자는 아니었다. 그리고 1차 세계대전을 과연 세계대전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런 것에 학자들 사이에 많은 의문이 있어서 요즘에는 유럽대전이 적당하다는 말도 있다. 아시아에서는 직접적으로 전쟁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이 시기에 1차 세계대전이 들어간다는 것만 유념한다면 세계사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뚜렷하게 짐작해낼 수 있으리라 본다.
이 때 주목할 수 있는 하나의 사건으로는 일본에서 '단나슈', 중소상점주와 중소공장주들이 하나의 계층이었다는 것을 유념해둘 필요가 있다. 이들이 이제 일종의 중간층을 형성하고 있고, 그리고 하층 프롤레타리아라고 할 수 있는 '잡업층'이 등장했다. 본격적으로 근대산업사회에서 생겨나는 그런 계급들이 생겨난 것. 단나슈 같은 경우도 중간층을 형성한다고 했는데 마찬가지로 제국이 된 일본은 새로운 사회구조를 만들어 내지 못했고, 그에 따라서 새로운 사회의 분화 상황에 적응하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기에 다양한 계층변화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만주사변이 발발하면서 흔히 말하는 국민으로 결집된다. 그러니까 25년 정도 되는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경제사적으로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른바 근대산업사회가 시작되면서 일본의 산업사회적인 계층분화가 일어났다. 이런 계층에 따라서 일본에서는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는 대외정책이고, 일본 내부에서는 다양한 사회운동이 등장했다. 그런데 이 사회운동들이 20년 가까운 정도로만 진행되다가 1930년 후반에 들어서면서부터 국가총동원 체제가 되고 완전히 뭉뚱그려져서 국민으로 결집되어버렸다.
21 도시 '잡업층'은 생업 현장에서 중소 상점주와 중소 공장주인 '단나슈'에게 고용되었다. 또 이들은 상점과 단나슈가 경영하는 임대주택이나 가게에 거주했다. 단나슈에게 생업과 거주에서 이중으로 종속되었던 것이다.
중일전쟁이 일어나면서부터 발동된 국가총동원체제는 아시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계속 이어졌고 패배로 인해서 와해되었지만, 국민이라고 하는 것으로 총칭되는 것이 내부적으로는 다양한 집단들이 있지만 그것을 전쟁을 매개로 해서만 결집할 수 있는 구조였던 것이다. 근대국민국가라고 하는 것은 국민이라는 존재를 자각적인 개인으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전쟁이라는 위기를 통해서만 결집을 유지할 수 있는 구조였다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 다음에 1912년 7월 29일에 메이지천황이 죽는다. 역사의 분절점을 자각하게 된다. 이때부터 다이쇼 천황이 등장하게 된다. 그때 하나 생겨난 사조가 천황의 지위가 어떤 자리에 있느냐에 대한 논의들이 활발하게 생겨난다. 그게 바로 천황기관설이라고 하는 것이다. 천황에 대한 반성적 사유가 생겨난 것이다. 천황기관설은 미노베 다쓰키치라는 사람이 주장했던 것인데 "국가는 헌법상의 인격을 갖고 법인으로서의 국가가 주권의 주체가 되며, 천황은 국가의 최고 기관이 된다"라는 말이다. 자유주의적인 헌법해석을 하는 것으로 천황이라는 존재가 주권자가 아니라 국가가 주체이고 천황은 국가의 최고 기관에 불과하다, 제도적인 장치에 불과하다는 것. 이에 대해서 반대세력으로 우에스기 신키치라는 사람이 있었고, "천황에 의한 통치를 이론상 배척하는 것으로 비판"했다. 이런 사람들은 국체론이라 했다. 그러니까 천황기관설과 국체론이 서로 대립되었다. 이것은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가 들어서부터 일본 헌법에 대한 자유주의적인 해석이 등장했고, 이러한 해석을 통해서 그전에 메이지 천황시대에는 상상하기도 어려웠던 자유로운 논의들이 전개되었다는 것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것이 천황기관설이 가지고 있는 의의이다. 물론 결국 우에스기 신키치 등의 국체론에 제압당하였고 중일전쟁 이후 천황제 파시즘 시대로 전개가면서부터 완전히 제거되었지만, 자유로운 해석이 나왔다는 것 자체도 이 시대가 가지고 있는 유념할 만한 점이 되겠다.
47 미노베가 주창한 천황기관설은 국가는 헌법상의 인격을 갖고 법인으로서의 국가가 주권의 주체가 되며, 천황은 국가의 최고 기관이 된다는 학설로서, 일종의 자유주의적인 헌법 해석이었다. 이러한 학설에 대해 우에스기는 천황에 의한 통치를 이론상 배척하는 것으로 비판했기 때문에 미노베와의 사이에 논쟁이 있었다.
그 다음에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는 제국주의 팽창이 극대화되던 시대이다. 1차세계대전의 시대를 거치면서 일본 사회가 크게 변한다. 먼저 타이완을 지배하고, 남사할린과 만주에도 세력을 넓힌다. 그래서 1906년에 남만주철도주식회사 설립하고, 1910년 8월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을 체결한다. 조선병탄. 일본에서 가지고 있는 식민지 통치의 기본적인 방침은 문명과 근대적 제도를 도입하면서 그 제도를 통해 현지인으로부터, 즉 식민지 사람들로부터 수탈을 해나가는 것이 식민지 지배의 주요 국면을 이루었다. 그리고 식민지 사람들을 제대로 대접했으면 별도의 법을 적용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일본에서도 논란이 있었다. 별도의 법을 가지고 자치를 펼 것인가 아니면 대일본제국 헌법을 똑같이 적용해서 동화주의 노선으로 갈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우리가 알고 있다시피 대일본제국 헌법이 적용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1915년 무렵에는 1차세계대전에 따른 전시호황이 극에 달해서 경제활성화가 굉장하게 일어난다. 이것이 두번째 국면이다.
65 일본은 러일전쟁을 통해 새롭게 남사할린을 식민지로 획득하고, '만주' 철도부설권을 인지시켜 식민지와 진출 지역을 확대시켰다.
66 '만주'에는 러일전쟁 이후 펑톈, 하얼빈, 창춘 등에 영사관을 개설한 다음, 요동반도 조차지를 관동주로 삼아 1906년 9월 뤼순에 관동도독부를 설치했다.
66 일본은 1906년 11월 남만주철도주식회사를 설립하여 만주 경영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67 일본 정부는 1910년 8월 한국 정부에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을 강제하고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여 한반도를 식민지로 지배했다.
68 문명과 근대적 제도를 도입하면서 현지인으로부터 수탈해나가는 것이 식민지 지배의 주요 국면을 이루었다.
70 식민지에는 대일본제국헌법이 적용되지 않았고, 이를 둘러싼 헌법학자들의 의견도 양분되었다.
첫번째 주제가 다양한 사회계층이 분화되어 나타났다는 것, 천황기관설과 같은 천황 제도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그리고 두번째가 1차세계대전을 거치면서 타이완이나 한반도를 식민지로 지배하게 되고, 1906년에는 남만주 철도주식회사를 설립하게 된다. 그 다음에 본격적인 최초의 정당 내각인 하라 다카시 내각이 성립한다. 1918년 9월 29일 최초의 본격적인 정당내각이 출현한다. 그래서"사회운동의 격화라는 '대해'를 피하기 위해 사회에 눈을 돌려 사람들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소통'을 도모한 것이다." 일본 내부에서는 이런 민주주의 또는 자유주의 개혁이 계속해서 등장한다 해도 식민지 지배가 굉장히 강력하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무시할 수 없다. 식민지 시대인 1900년 초를 지나면서 일본사람들에게는 식민지를 거느린 제국의 시민이라고 하는 제국의식이 만연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식민지 종주국 의식을 갖게 된다.
113 최초의 본격적인 정당내각인 하라 내각은 쌀소동으로 인해 실현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114 하라 내각의 탄생은 1918년 9월 29일이었다. 외상과 육해군상을 제외한 대신을 모두 정우회 출신으로 임명한 최초의 본격적인 정당이었다.
119 사회운동의 격화라는 '대해'를 피하기 위해 사회에 눈을 돌려 사람들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소통'을 도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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