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원: 문학 고전 강의 ━ 내재하는 체험, 매개하는 서사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17. 7. 4.
문학 고전 강의 - 강유원 지음/라티오 |
이 책을 읽는 이들에게
첫 시간
점토서판 기록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
호메로스 《오뒷세이아》
구약 성서 <욥기>
아이스퀼로스 《오레스테이아 3부작》: <아가멤논>,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자비로운 여신들>
소포클레스 《오이디푸스 왕》
에우리피데스 《메데이아》
셰익스피어 《맥베스》
셰익스피어 《오셀로》
파스칼 《팡세》
괴테 《파우스트》
멜빌 《모비 딕》
마지막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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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는 이들에게
인간은 말을 함으로써 인간답게 살 수 있습니다. 인간이 아닌 동물들도 의사소통을 위한 수단을 가지고 있을 터이니 인간만이 말을 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 해도 단순히 기능적인 사용에서 멈추지 않고, 말에 거리를 두고 말에 대해 찬찬히 생각해보고, 말 자체를 꾸미고 말을 더 잘하기 위해 고민하는 것은 적어도 지금까지 알려진 지식에 따르면 인간만이 하는 일입니다.
사람은 말을 통해서라야 뭐든 알 수 있습니다. 말을 해야 자신의 생각을 드러낼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의 생각에 대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소리를 내지 않는 혼잣말이라 해도 그것은 자기 자신을 상대로 하는 대화입니다. 누군가와 대면하여 말을 하든 머리 속으로 혼잣말을 하든, 사람은 끊임없이 말을 합니다. 그런 까닭에 사람이 더이상 말을 하지 않게 되면 그는 더 이상 사람답게 살기가 힘들어집니다. 이를테면 우리는 상대에게 아무런 말도 하고 싶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할 말이 없어서이기도 하겠지만 상대를 상대하고 싶지 않아서 일 것입니다. ‘한 마디도 하고 싶지 않은 상대’란 사실상 우리에게는 ‘꼴도 보기 싫은 상대’보다 훨씬 더 무의미한 존재입니다. 그 사람과 우리 사이는, 마주 앉아 있다 해도 결코 이어질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스스로에게도 말을 걸고 싶지 않은 상태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몹시도 혐오스럽거나 절망스러울 때 그러할 것 입니다. 침묵은 상대를 끊은 상태입니다. 우리는 말하고 싶어서 말을 하는 존재라기보다는 별수 없이 말을 해야만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우리가 문학이라 부르는 것은 특정한 학문 영역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말하기라고 하는 인간 본연의 행위를 포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문학’이 아닌 ‘문학함’이 더 적절한 표현일 테고 이를 달리 말해본다면 ‘이야기하기’라 하겠습니다. 우리는 눈앞에 놓인 것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즐겁거나 괴로웠던 일들을 기억하고 노래합니다. 삶을 아름답게 물들였거나 참담하게 했던 장면을 되살려 그려냅니다. 이야기하고 노래하고 그리는 것의 소재는 이렇게 자신의 삶에서 길어올린 것들일테지만 그것 안에는 오로지 자신만 있지는 않습니다. 다른 사람, 장소, 물건, 사건들이 함께 묻어 들어가서 그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스스로에게 들려주기 위해서든 다른 사람에게 노래하기 위해서든 모든 이야기에는 이야기하는 이가 만들어 넣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의미들이 빈틈없이 담겨 있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만큼 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것은 무척이나 지리하여 다시 듣고 싶지 않기도 하고 어떤 것들은 되새길수록 재미있고 또 다른 의미를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다른 이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또는 스스로의 흥에 겨워서 ‘잘’ 이야기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렇게 잘 이야기된 것, 잘 노래된 것, 잘 그려진 것 중에서 오래도록 사람들이 되풀이하여 이야기하고 노래하고 그리는 것들을 우리는 ‘문학 고전’이라 부를 것 입니다. 이 책에서 우리가 읽게 될 이야기들은 무엇보다도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어디에서나 찾아낼 수 있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잘 이야기된 것들이어서 이야기 속 사람들이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양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런 이야기들을 잘 읽음으로써 우리는 스스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자신에 대해 더 잘 이야기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을 더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처음 쓴 고전 해설서는 《책과 세계》였습니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 걸쳐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강의를 하다가 학교를 떠난 것은 1990년대 말이었습니다. 회사에 다니면서 강의할 일도 없던 터에 혼자 재미삼아 그간 제대로 읽어보지 못하였던 서구의 고전들을 읽던 중, 뜻밖에도 출판사에서 문고판으로 된 고전 해설서를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퇴근 후에, 주말에, 이럭저럭 원고를 써서 2004년에 출간한 것이 《책과 세계》입니다. 회사를 그만둔 다음에는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강의를 하다가 서울시 동대문구정보화도서관에서 2009년 2월부터 11월까지 40주 동안 하게 된 것이 ‘고전 열 권 읽기’라는 강의였습니다. 그때의 강의가 《인문 古典 강의》로 묶여 2010년에 출간되었습니다. 2011년에는 같은 곳에서 역사에 관한 책들을 40주 동안 강의하여 《역사 古典 강의》를 2012년에 출간하였습니다. 이후 서울시 서대문구립이진아기념도서관에서 2014년에 40주 동안 형이상학에 대한 강의를 하여 2016년에 《철학 古典 강의》를 출간하였고, 2015년에 서울시 성북정보도서관에서 문학 고전들을 40주 동안 강의하여 지금 2017년에 《문학 古典 강의》를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2004년부터 지금까지 제가 읽은 책들은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습니다만 고전 연속 강의를 위해 읽은 책들은 문자 그대로 격동적인 2017년의 한국과는 무관해 보이기만 합니다. 도대체 무엇을 했나 하는 회한이 남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고전을 읽음으로써 생각의 힘이 강해지고 깊어졌으리라고, 별것도 아닌 삶을 살면서 우는 소리를 덜 하게 되었으리라고 막연하게 위안을 해봅니다. 앞서 출간한 책들을 다시 읽어보니 ‘이 책을 읽는 이들에게’를 이런저런 멋진 말들로써 맺으려 노력한 듯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그런 말들을 할 염치가 없습니다.10년 가까운 시간 동안 강의를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준 이들, 강의를 들어준 이들, 그리고 제가 알아차리지 못한 도움을 준 이들에게 고맙다는 말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거듭 고맙습니다.
2017년 5월 강유원 적음
첫시간
비평은 자신이 작품에서 얻은 막연한 감동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시인이 드러내고자 했던 '진리 닮은 것'과 그것을 전개하는 방식의 파악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의미의 비평을 수행하는 방식으로 문학 고전들을 읽어나갈 것입니다.
처음으로 읽을 작품은 《길가메쉬 서사시》입니다. 이 작품은 주제에 있어서나 구조, 등장인물에 있어서 훗날 등장하는 영웅 서사시들의 원형과 같은 것입니다. 《길가메쉬 서사시》가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를 상기한다면 우리가 문학의 역사 속에서 만나게 되는 일종의 영웅 서사들은, 반드시 서사시의 형식을 견고하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참으로 오래된 연원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영웅에 대한 선호는 모든 인류의 마음 속에 본능처럼 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까지 해보게 됩니다. 그렇지만 영웅은 사적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온전히 공적인 것에 자신을 던져야만 하는 사람임을 생각한다면 그것이 과연 축복인지는 많이 의심스럽습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뒷세이아》는 새삼스러운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작품입니다. 이 서사시는 전형적인 희랍 서사시의 형식 속에서 다양한 이야기를 펼쳐 보이고 있습니다. 이 서사시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 또한 읽는 이마다 다르게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장대하고도 험난한 모험을 다루면서도 그 안에서 생겨나는 인간 삶의 미세한 국면을 놓치지 않고 있는 거시적인 것과 미시적인 것이 정교하게 교직된 서사의 힘은 참으로 압도적인 위력을 보여줍니다.
세 번째로 읽을 작품은 《욥기》입니다. 구약 성서에 들어 있는 사상서의 하나인 《욥기》를 문학 작품에 포함시키는 것이 의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성서》를 지나치게 엄숙하게 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욥기》를 서사시의 하나로 분류하는 이 시도는 신심 깊은 이들에게는 독신瀆神이라 여겨지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엄숙한 태도를 버리고 찬찬히 읽어나가면 신앙과는 관계없는 삶의 통찰들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희랍 비극의 3대 작가인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의 비극들을 읽는 것은 문학 고전을 읽는 이들에게는 의무와 마찬가지입니다. 이 드라마들 안에는 주제와 형식 모두에 걸쳐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것들이 전부 들어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읽는 것도 그러합니다. 시대의 간격이 넓다 해도 셰익스피어와 희랍의 비극들은 비극이 갖추어야 할 모든 요소들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희랍의 작품들과 셰익스피어의 작품들 사이에서 뚜렷한 차이점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등장인물들의 성격 차이입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는 미리 주어진 삶의 조건들이나 운명이 아닌 인간 자체가 전면에 부각됩니다. 다시 말해서 드라마를 이끌어가는 것은 이제 본격적으로 인간의 행위와 그것에 의해 만들어진 것들, 즉 '인간적인 것들'입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시대의 영향 때문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것을 도외시하더라도 우리는 변화하는 등장인물의 행위 연쇄를 보면서 사람은 어떤 존재인지를 거듭 고민해볼 기회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팡세》와 《파우스트》는 서로 대조되는 작품들입니다. 앞의 것이 인간의 유약함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다면, 뒤의 것은 인간성의 장대함을 거침없이 보여줍니다. 《파우스트》의 결말도 《팡세》와 마찬가지로 신에 귀의하는 것이기는 하나,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살아낸 다음에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주인공이 신이 되는 듯한 장대함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괴테는 그런 점에서 인간이 이를 수 있는 적극적 국면의 최대치를 보여준 시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마지막에 읽는 《모비 딕》은 어수선하고 뒤숭숭한 인간상들을 제시합니다.
이 모든 작품들은 뚜렷한 인간상을 드러내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위대한 것인지, 아니 인간으로서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조차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약간의 위안을 위해서 이 작품들을 손에 잡아본다면 그것이 우리로서는 최선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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