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기 20분 | 일본 근현대사 | 02 민권과 헌법 7

민권과 헌법 - 10점
마키하라 노리오 지음, 박지영 옮김/어문학사


Reading_20min_20140616_7

야스마루 요시오(安丸 良夫), 근대천황상의 형성(近代天皇像の形成) 읽기

– 18세기 말까지의 이데올로기 상황 속에서 질서의 정당화: “막부와 번의 권력과 결합하여 유교적인 仁政觀을 전제로 한 질서상”

– 19세기 이후 등장한 천황숭배론과 국체론으로써 체제(regime)의 통일성을 이루는 기본요소가 전면적으로 교체됨

– 천황권위의 내면화: “학교 교육과 청년단, 재향군인회 등을 통해서 천황 숭배와 국체관념은 점차 깊숙히 국민의식 속에 파고 들어가게 되며, 근대화 과정의 성과는 천황의 권위와 결부되어 국민의 통념적인 부분을 형성”

– “천황에게 권위 중추를 두고 국민국가로서의 통합과 발전을 꾀한다는 지상의 과제에 근대 일본은 전체적으로 포섭되고 있었던 것이며, 생활자로서의 민중도 또한 갖가지 중간지배자 층을 매개로 그러한 과제를 다하도록 규제되고 있었던 것이다.”

– “문제는 근대사회, 특히 일본과 같이 후발형 근대화를 강박적으로 수행하는 사회에서는 여기서 사회적 전체성이라고 부르는 것의 거의 대부분이 국민국가라는 틀을 매개로 존재하고 있으며, 그 이외의 사회적 차원의 자율성이 상실되어 버린다는 점에 있다.”

– “[천황제는] 자유로운 인간이기를 희구하는 우리들의 삶에 대한 굴욕의 기념비다.”

– 천황의례의 성격과 전개에 관해서는 다음 책을 참조할 수 있다.

다카시 후지타니, <<화려한 군주>>, 이산출판사.

– ‘천황의 하루‘도 참조할 수 있다.






다카시 후지타니, 화려한 군주



야스마루 요시오의 《근대 천황상의 형성》을 읽고 있다. 《민권과 헌법》을 다 읽은 다음에 한번 읽어볼 만한 책으로 선정해서 읽는 게 이 책이다. 지난 주까지 제6장의 내용까지 설명을 했다. 지난 주 얘기했던 바를 아주 간단하게 정리를 하자면 일본에서 메이지유신이 일어나면서 천황제라고 하는 것이 고대로부터 내려온 천황제라는 것이 이른바 리바이벌된 셈이다. 리바이벌이라는 것은 있는 그대로 유지한 것이 아니라 일본의 근대국가체제에 걸맞은 하나의 구심점으로 시작된 것이 근대의 천황제이다. 따라서 일본에서는 천황제라는 것이 오래 전부터 내려온 제도이기는 하나이지만 근대국가형성과 깊은 연관 속에서 발전되었고 또 근대국가형성에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한 제도이기 때문에 일본 근대국가 형성사를 이해하는 데에는 이 제도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 근대 천황제라는 것이 나중에 아시아 태평양 전쟁, 만주사변을 겪으면서 일본이 본격적으로 천황제 파시즘이라고 하는, 파시즘의 연구에 있어서도 아주 독특한 사례라고 할 수 있는 천황제 파시즘 체제로 들어갈 때 천황제 가지고 있는 독특한 측면들이 더욱 부각되어 나타난다. 그래서 미리 이것을 봐둘 필요가 있다 하여 이 책을 함께 읽고자 했던 것이다. 오늘은 8장 근대 천황제의 수용기반을 얘기하고 이 책을 마치도록 하겠다.

 

청일·러일전쟁을 거쳐서 이른바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로 들어가게 되면 민권 운동이 가지고 있는 여러가지 함의들이 잘 드러나게 된다. 어떤 역사적인 사건이라고 하는 것들은 한번 그것이 생겨나면 그냥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것이 있는가 하면 어떤 것들은 한때는 시들어 저변에 놓여있다가 우리가 그것이 청산되어 있는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그것을 유지하고 있는 경우가 꽤 많아서 뒤 이은 시대의 전개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경우가 있다. 요즘의 한국사회를 보면 그런 것을 절실히 느낄 수 있다.

 

일본근대화에서 메이시유신이 되면서 고대 천황제가 리바이벌되고 그것이 사람들에게 다시 받아들여지는 데에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다. 나중에는 천황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군인들까지 나왔다. 물론 군대가 천황의 군대이니 그렇게 했지만 천황은 그저 하나의 주술적인 의미로만 받아들이고 있던 일본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천황에 대한 엄청난 숭배에까지 이르렀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이 바로 근대 천황제의 수용기반을 논하고 있는 8장에서 거론되고 있는 얘기들이다.

 

18세기 말까지만 해도 일본에서는 동아시아세계가 전반적으로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하나의 정치적인 이상이 있다. 그것은 막부나 번의 권력이 유권적인 어진 정치, 인정관仁政觀을 전제로 해서 질서를 유지하고 세상을 평화롭게 한다는 유교적인 정치적인 이상이 18세기 말까지는 통용되었다. 막부나 번이 아무리 무사권력이라 할지라도 유교적인 어진 정치를 펼쳐 보인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일본사회를 질서있게 이끌어 갈 수 있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그런데 근대국가로 나아가는 길에서 이것이 폐기되고 19세기 이후부터는 천황숭배론과 국체론이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하나에 체재 이데올로기가, 즉 체제(regime)의 통일성을 이루는 기본요소가 전면적으로 교체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게 근대청황제가 시도했던 바이다.

 

233 일반 민중의 반질서•탈질서적인 에너지에 위협 받으면서 지역사회에 안정된 질서를 수립하려고 노력하는 촌락지배자들은 그들이 실현하려는 질서를 정당화 할 수 있는 더욱 보편적인 권위와 원천을 추구하고, 여기에 의거함으로서 자신의 입장을 권위지을 필요가 있었다. 반질서•탈질서의 에너지는 봉기나 소동에서 집약적으로 표출될뿐만 아니라, 일상적으로는 생활 곤궁의 원인이 되는 낭비나 도박 등의 일탈적인 행위와 제례나 와카모노구미 등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질서란 이러한 다양한 반질서•탈질서에 대항해서 구축되는 일정한 합리화를 말한다. 이 합리화는 아마도 18세기 말까지의 이데올로기 상황 속에서는 막부와 번의 권력과 결합하여 유교적인 인정관仁政觀을 전제로 한 질서상이라는 형태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와 막연하게나마 대외적 위기를 점차 자각하게 되면서 지역사회 측에서 요구하는 질서상은 점차 민족적인 색체를 띠게 되며, 결국은 귄위있는 중심을 추구하여 천황 숭배나 국체론과 결합하게 되었다.

 그래서 일본은 천황을 중심에 놓고 폐번치현, 번을 폐기하고 천황이 통치하는 직할 현으로써 대체하는 행정적인 절차를 거치게 된다. 그렇게 해서 새로운 체제를 구상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벗어나려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면 그런 사람들은 강력하게 제재하는 절차도 있었는데 부국강병의 성공담에 파묻혀 역사의 어둠 속에 사라져갔다고 저자는 말한다. 일정한 정도의 정당화가 계속해서 이어질 때는 그런 성공담과 실패담이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천황제를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 받아들였는가. 일단, 천황의 권위가 절대적인 것이다 라는 것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서구근대사상과 자유민권운동이라고 하는 민권파,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천황제와 반대되는 입장에 놓여있을 것 같지만, 이 사람들이 천황의 권위를 옹호하는데 적극적으로 가담하게 된다. 자유민권운동을 강조한 사람들은 메이지국가가 내세운 천황중심의 전통성 원리를 적극적으로 수용해서 근대국가로 나아가는 것이 일본의 당면한 과제라고 생각했던 것. 그래서 일본에서는 아주 기묘하게도 민권운동파와 천황을 중심으로 하여 나라의 근본을 세워야 한다는 국체론이 결합을 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서 천황의 권위가 사람들 사이에 스며들어가게 된다. 물론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천황의 귄위를 받아들이려는 준비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여기서 일정한 정도 위로부터의 교육이 계속해서 된다. 그렇게 한 결과 저자는 "학교 교육과 청년단, 재향군인회 등을 통해서 천황 숭배와 국체관념은 점차 깊숙이 국민의식 속에 파고 들어가게 되며, 근대화 과정의 성과는 천황의 권위와 결부되어 국민의 통념적인 부분을 형성하게 되었을 것이다."

 

261 학교 교육과 청년단, 재향군인회 등을 통해서 천황 숭배와 국체관념은 점차 깊숙이 국민의식 속에 파고 들어가게 되며, 근대화 과정의 성과는 천황의 권위와 결부되어 국민의 통념적인 부분을 형성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사용된 여러 가지 이데올로기 장치나 의례, 그리고 자질구레한 것들이 있다. 이런 자질구레한 것들을 다룬 것은 다카시 후지타니의 《화려한 군주》가 있다. 《근대 천황상의 형성》는 형성사를 집중적으로 다루기 때문에 읽었으나 메이지유신 이후의 천황을 사람들에게 각인시키기 위해서 파고들어갔던 이야기들은 《화려한 군주》에 잘 나와 있다. 오늘날 우리가 선거운동할 때 정치가들이 하는 것을 떠올리면 된다.

 

이렇게 해서 성립된 천황의 권위는 아시아 태평양 전쟁 시기에 절정을 이루게 된다. 천황폐하만세를 외치며 죽어갔던 사람들이 있다. 아직도 그런 의식 속에 사로잡혀 살고있는 일본인들도 있겠지만 대다수의 일본인들은 천황의 귄위를 중심으로 해서 천황폐하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던 과거의 자신들을 모습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다수의 일본 사람들이 아시아 태평양 전쟁 시기의 식민지를 거느리고 있던 제국시대를 그리워하고 그 당시에 벌였던 미치광이 짓을 그리워하고 있다면 일본이라는 나라는 지금처럼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아시아 태평양 전쟁 이후에 일본 사람들이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 라고 하는 통념들을 몸에 붙이게 되었다 해도 이것은 1945년 패전을 경계로 천황제적인 정통성이 하루 아침에 소멸되어 버린다



유명한 사진이 있다. 쇼와 천황이 맥아더와 함께 찍은 아주 왜소한 사진이 있다. 미국에서 그것을 유포하기도 했지만 천황제의 전통성이 소멸된다. "천황에게 권위 중추를 두고 국민국가로서의 통합과 발전을 꾀한다는 지상의 과제에 근대 일본은 전체적으로 포섭되고 있었던 것이며, 생활자로서의 민중도 또한 갖가지 중간지배자 층을 매개로 그러한 과제를 다하도록 규제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어떤 문제가 있는가를 보면 "일본과 같이 후발형 근대화를 강박적으로 수행하는 사회에서는 여기서 사회적 전체성이라고 부르는 것의 거의 대부분이 국민국가라는 틀을 매개로 존재하고 있으며, 그 이외의 사회적 차원의 자율성이 상실되어 버린다는 점에 있다." 달리 설명해보면 근대국가를 강박적으로 빨리 일으켜야겠다고 할 때 사실 서구에서도 근대국민국가가 전개된 과정을 보면 일단 절대왕정체제에서의 근대화가 있었다. 그런 다음에 자유민주주의가 전면적으로 받아들여 진다. 개인이 가지고 있는 권리를 강조하는 시스템이 있고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부터는 복지국가 체제가 전면적으로 들어선다. 그러니까 각각의 개인이 가진 인권과 가치를 존중하는 체제 위에서 근대화가 성숙되어 가는 것인데 조급하게, 후발형 근대화라고 말한다, 근대국민국가를 이룩하려고 하는 나라에서는 국민통합이라는 것이 강조되고 그 나머지 조금이라도 이의를 제기하거나 개인이 가지고 있는 인권의 가치를 강조하게 되면 학술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시민사회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되면 비애국자로 낙인이 찍혀서 체제에서 배제시키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바로 일본에서 나타났고 어떻게 보면 한국 현대사회에서도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현상이다.




269 지역사회도 군대도 기타 어떤 조직도 근대 일본의 거의 모든 집단은 천황이라는 권위를 매개로 하여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중간지배자를 두고 존재하고 있으며, 거기서는 종종 마루야마가 말하는 '무한책임'의 원리가 작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천황에게 권위 중추를 두고 국민국가로서의 통합과 발전을 꾀한다는 지상의 과제에 근대 일본은 전체적으로 포섭되고 있었던 것이며, 생활자로서의 민중도 또한 갖가지 중간지배자 층을 매개로 그러한 과제를 다하도록 규제되고 있었던 것이다.

 

269 일본과 같이 후발형 근대화를 강박적으로 수행하는 사회에서는 여기서 사회적 전체성이라고 부르는 것의 거의 대부분이 국민국가라는 틀을 매개로 존재하고 있으며, 그 이외의 사회적 차원의 자율성이 상실되어 버린다는 점에 있다.

 현대사회에서 국가를 위해 개인의 목숨을 바친다는 것도 굉장히 중요한데 그 국가가 정부와 동일시 되는 것도 아니고 각각의 개인이 가지고 있는 가치가 국가의 우위성에 위해서 희생되는 것은 참다운 근대국민국가를 만들어 내는 과정도 아닐 것이다. 적어도 일본에서는 근대천황제가 형성되면서 일괄적으로 천황에게 복종하는 과정을 거쳐가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청일·러일전쟁을 거치면서 나중에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에 오면 개인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조들이 등장을 하게 된다. 그러나 천황제가 유지되고 있는 한은 "사회적 전체성이라고 부르는 것의 거의 대부분이 국민국가라는 틀을 매개로 존재하고 있으며, 그 이외의 사회적 차원의 자율성이 상실되어 버린다는 점에 있다"는 것이 핵심이다.

 

지금까지 《근대 천황상의 형성》을 중심으로 해서 일본의 근대 천황제가 근대국가를 형성하는데 어떤 역할을 했는가 그리고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가를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1945년의 패전을 기점으로 해서 천황제가 가진 의미는 완전히 소멸했다. 그렇다 해도 현대 일본에서는 여전히 천황제가 압도적으로 많은 일본인들에게 수용되고 지지를 받고 있다. 그리고 이 천황제는 변형된 황제이며 상징 천황제이다. 그리고 야스마루 요시오는 여전히 그 천황제는 내셔널리즘적인 감각이 있다고 말을 한다. 그리고 근대국가의 편성원리로 천황제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언제든지 부활될 가능성이 있다고 얘기하고 있다. 이것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 그리고 근대국가의 편성원리로 천황제가 등장했다면 천황제를 진정으로 폐기하는 것은 근대국가의 편성원리로 등장했기 때문에 근대국민국가라는 체제를 벗어나지 않는 한 일본에서는 천황제를 완전히 폐기하는 것은 어렵지 않겠나 생각한다.

 

272 근대 천황제는 이러한 국민국가 일본의 형성 과정에 등장한 편성 원리며, 그 성립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아직도 유약한 형성도상의 국민국가에서 살아온 인간들의 정신적 드라마를 잘 이해할 수 있다. 그 원리의 중핵에 있는 것은 천황이라는 절대적인 권위를 내세움으로써 안팎에서 밀려오는 위기에 대응하여 권위적인 질서를 유지하면서 근대화=문명화의 과제를 실현해 가는 일이었다. 유교•불교•기독교와 서양의 근대문명은 어느 정도 보편원리를 내세움으로써 세속적 질서를 상대화하고 있으며, 그런 까닭에 이윽고 일본 사회를 카오스에 빠뜨릴 가능성을 잉태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었다. 따라서 이에 대하여 만세일계의 천황제는 세속적 질서의 불변성•절대성을 표상하는 신권적 권위로 제시된 것이었다. 세속적 사회 질서의 붕괴를 피하면서 근대화=문명화의 과제를 달성해 간다는 점에 대해서는 메이지 정부의 지도자는 물론이고 신도가나 국학자에서 민간의 저널리즘이나 민권파, 지역사회의 갖가지 차원에서의 지도자 등을 포함하여 넓은 사회적 합의가 있으며, 그 반대편에서는 계몽의 대상으로서의 일반 민중이 있었다.

 

284 실제로 쇼와 천황의 죽음에 즈음해서 조기 게양과 묵도를 거부하거나, 천황의 장례식 당일 밤에 신주쿠 가부키초에서 흥청거리며 놀기는 어려웠다. 천황제는 질서와 권위에 따르는 '양민'인지 아닌지를 판별하는 수단으로서 지금도 충분하게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현대 일본에서는 기업이나 각종 단체와 사회나 개인은 자유롭게 욕망이 향하는 대로 행동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자유도 실로 국가에 귀속하여 그 질서 속에 안주하는 것을 교환조건으로 한 자유이며, 국가는 또한 이 자유를 매개로 국민의식의 심부에 닻을 내리고 거기서 활력을 조달하여 통합을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기업이나 갖가지 집단과 국가는 상호 간에 서로 요구하고 보장함으로써 병존하고 있으며, 어떤 일본인도 이러한 틀에서 크게 자유롭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천황제는 이러한 기본적인 틀 속에서 가장 권위적이고 터부적인 차원을 집약하고 대표하는 질서의 요체로서 지금도 기능하고 있다. 따라서 그것은 개별적인 현상에 대한 비판으로는 극복하기 어려운 존재이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심신에 달라붙어 우리들을 얽어매고 있다. 그것은 우리 개개인이 자유로운 인간이라는 외관과 환상의 밑바닥에서 얼마나 깊숙이 민족국가 일본에 귀속되어 있는 가를 비추어 주는 거울이며, 자유로운 인간이기를 희구하는 우리들의 삶에 대한 굴욕의 기념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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