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기 20분 | 일본 근현대사 | 02 민권과 헌법 6

민권과 헌법 - 10점
마키하라 노리오 지음, 박지영 옮김/어문학사


Reading_20min_20140609_6

야스마루 요시오(安丸 良夫), 근대천황상의 형성(近代天皇像の形成) 읽기

– 전통적 권위로서의 천황: “교토를 중심으로 의례적 질서나 우주론적인 차원에서 조정숭배나 신국론으로 경사(傾斜)하여 스스로의 사회적 존재를 권위지우는 경향”

– 현실 권력으로서의 막부의 장군: “장군=국왕설의 입장에서 막부의 전제적 지배권을 명확히 하려는 동향”

– 체제의 위기: “권력이 구성하려는 질서나 질서의식과 사회의식의 다양한 흐름과의 사이에 균열” “여기에 일정한 형태의 새로운 질서관념이 적극적으로 구성되기 위해서는 위기의식이라는 별도의 매개가 필요”

– 대립되는 체제 정당화 기제들의 충돌, 위기의식의 돌출, 새로운 질서를 내재한 체제(regime) 구성 요구

– 현실권력(무력)인 막부에 대립하는 또다른 현실권력인 사쓰마, 조슈(삿초 세력)의 등장

– 삿초 세력이 전통성과 정통성을 지닌 천황의 권위를 등에 업고 ‘국체’로서의 천황을 성립시키고 이러한 상태가 아시아·태평양 전쟁기까지 기본적으로 유지됨

– “메이지 유신이 천황을 권모술수의 수단으로 삼고 ‘玉’이라고 부르면서 ‘옥을 품는다’거나 ‘옥을 뺏는다’ 등의 노골적인 은어를 사용한 지사들에 의해 수행되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근대 천황제는 18세기 말 이래의 존왕론과 국체론의 발전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직접적으로는 이러한 권력정치의 와중에서 성립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노골적인 권모술수를 숨기기 위해서라도 누구도 정면으로 반대할 수 없는 초월적인 권위로서의 천황을 전면에 내세우고, 권위에 가득 찬 중심을 만들어내야 했던 것이다.

– 메이지 정부의 이원성: 초월적 권위의 천황과 ‘원훈(元勳)’의 합의라는 두 축에 의해 움직인 체제. 체제가 이처럼 일원적 절대적 권력으로 형성되지 않은 것은 일본 천황제 파시즘이 가진 특유성이라 할 수 있다.

– “1868-69년 단계에서의 메이지 정부는 아직 삿초 세력을 중심으로 한 배타적인 권력이 아니라, 유력한 번들의 발언권을 중심으로 잡다한 제반 세력이 서로 각축을 벌이는 과도적인 상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다양한 세력의 위에 선 ‘정령일도(政令一途)’에 의한 초월적 권력임을 추구하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천하공론’과 ‘공의여론’을 강조하고 공의소를 세우거나 관리의 공선입찰 등을 통해서 공론·공의에 의한 정당화를 꾀했다.”






지난 주에 이어서 야스마루 요시오의 《근대 천황상의 형성》을 계속해서 읽는다. 지난 주에 했던 얘기들이 제1장 천황제라고 하는 것을 고찰하는데 있어서 사용하는 방법 또는 요구되는 과제가 무엇인가를 다루었다. 오늘은 2장 근세 사회와 조정.천황를 읽겠다. 오늘 할 얘기는 어떤 체제를 구성하는데 필요한 요소들이 있는데 그러한 요소들 중에서도 권위와 권력을 중심으로 한다. 사실 어떤 정치체제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 권위와 권력 이 두 가지가 서로 긴밀하게 맞물려 있어야 한다. 이를테면 현실적으로 사용되는 무력, 폭력은 권력이라는 것으로 개념화 할 수 있다. 마구잡이로 권력을 행사하다 보면 대개 민심을 잃는다 하는데 민심을 잃게 되면 권위가 떨어진다. 그래서 비아냥을 듣게 된다. 그러면 권력이 작동하기는 하는데 권위가 없으니 체제의 안정성이 뒤흔들리게 된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일종의 권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거나 또는 귄위 있는 집단이 있다 해도 아무리 속된 말로 말빨을 좀 확보했다 해도 그것은 현실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강제할 수 있는 넓은 의미의 폭력, 즉 무력이 없다면 권력이 없다면 그 사람들이 체제를 유지해나가거나 체제를 쟁취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러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2014년 한국에서 권력과 권위라고 하는 이 두 가지의 틀을 가지고 한국사회의 틀을 살펴보면 녹음파일을 듣는 사람들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귄위없는 자가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의심하는 수가 늘어나고 널리 알려진 표현대로 민심이 떠나게 되면 어느 순간 권력이 빠져나가고 체제가 붕괴되기 마련이다. 이러한 상황이 18세기 에도막부에 있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일본에서 18세기는 도쿠가와 막부가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막부는 번을 통해서 통치를 하였기 때문에 권위의 문제에 대해서는 특별히 신경쓰지 않았던 것 같다. 막부가 지역의 번들을 누르고 있었던 힘을 가지고 있었던 것. 그러니까 쇼군이 통치하는 체제였는데 이들이 가진 무력은 동시에 권위의 근거가 되었다. 일본은 사실 동아시아 여타 나라들과 다른 체제구조를 가지고 있었는데 전통적으로 권위를 담지하고 있는 천황이 있었다. 그 천황은 권위만을 가지고 있었지만 군대를 가지고 있지 않아다. 그런 까닭에 외국에서 도대체 저 나라는 국왕이 누구냐 할 때 천황이냐 막부의 쇼군이냐 할 때 혼돈하기 쉬웠을 것. 이를 때에는 현실적 권력을 인정하게 된다. 그러니까 외국에서는 쇼군이 국왕이나 다름없는데 굳이 어떤 천황에게 뭔가를 해야하는 상황은 없었던 것. 18세기 초에는 "교토를 중심으로 의례적 질서나 우주론적인 차원에서 조정숭배나 신국론으로 경사(傾斜)하여 스스로의 사회적 존재를 권위"를 가진 천황이 있고 현실적으로 무력을 가지고 있는 쇼군이 있었다. 그런데 이것이 공존하고 있던 상황이 외부로부터 가해진 충격에 의해서 위기의식을 만들어내고 이런 상황에서 권력과 권위를 일치시켜야 한다는 새로운 체제구성의 요구가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또 이면에 숨어있는 상황을 살펴보면 장군이 힘이 떨어져서 그런 것. 오로지 무력만 가지고 있는 사람은 힘 떨어져버리면 꽝. 무력 위에 쌓아 올렸던 권위의 위기가 닥치는 것. 흔히 이것을 혼란의 상태 또는 대립되는 정당화 기제의 충돌 상태라고 말한다. 이렇게 되었을 때 귄위와 권력을 일치시키려는 시도가 바로 메이지유신을 밀고갔던 하나의 힘이다. 메이지유신은 사쓰마번과 조슈번 사람들이 중심이 되서 시도한 것인데 이들도 본래는 막부의 하나의 번이다. 이들이 반기를 들고 일어난 것. 아주 단순하게 정리를 하자면 도쿠가와 막부가 가지고 있던 무력적 지배의 힘이 떨어져 나가니까 그것에 반기를 들고 사쓰마번과 조슈번, 묶어서 삿초세력이라 하는데, 이들이 나선 것. 이때 뭔가의 명분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해서 들고 나온 것이 전통적인 귄위인 천황이다. 그 천황을 옛날 모습 그대로 활용하기에는 낡았으니 개비한 것. 이렇게 개비해서 근대국가의 중심으로 삼는 것.

 

현실권력인 막부에 대립하는 또 다른 현실권력인 사쓰마번과 조슈번이 대립한다. 막부도 천황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다. 그런데 삿초 세력이 전통성과 정통성을 지닌 천황의 권위를 등에 업고 하나의 국체로서의 천황을 옹립한다. 그렇게 해서 천황제가 성립하게 되고 이러한 상태가 아시아·태평양 전쟁기까지 기본적으로 유지됨. 이게 바로 천황제의 형성에 관한 가장 도식적인 설명이라 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메이지유신 당시에 천황이라는 존재가 어마어마하게 존중 받는 존재가 아니었다. 사실은 메이지 유신이 천황을 권모술수의 수단으로 삼고 이라고 부르면서 '옥을 품는다'거나 '옥을 뺏는다' 등의 노골적인 은어를 사용한다. 겉으로는 천황을 높이 사는 듯하면서 사실은 자기들의 이익들을 관철한다. 그래서 "근대 천황제는 18세기 말 이래의 존왕론과 국체론의 발전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직접적으로는 이러한 권력정치의 와중에서 성립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노골적인 권모술수를 숨기기 위해서라도 누구도 정면으로 반대할 수 없는 초월적인 권위로서의 천황을 전면에 내세우고, 권위에 가득 찬 중심을 만들어내야 했던 것이다."

 

167 메이지 유신이 천황을 권모술수의 수단으로 삼고 ‘玉’이라고 부르면서 ‘옥을 품는다’거나 ‘옥을 뺏는다’ 등의 노골적인 은어를 사용한 지사들에 의해 수행되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근대 천황제는 18세기 말 이래의 존왕론과 국체론의 발전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직접적으로는 이러한 권력정치의 와중에서 성립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노골적인 권모술수를 숨기기 위해서라도 누구도 정면으로 반대할 수 없는 초월적인 권위로서의 천황을 전면에 내세우고, 권위에 가득 찬 중심을 만들어내야 했던 것이다.


그러면 메이지유신 이후로 성립된 천황제는 만들어진 전통이요 만들어진 정통이다. 그리고 그 밑에 놓여있는 천황제 성립의 본질적인 원리는 권모술수로 가득 찬 권력정치인 것이다. 사실은 도쿠가와 막부도 그렇게 만만한 세력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1868년의 메이지정부도 완전한 의미에서 아주 완벽하게 자기네들이 현실적인 권력을 손에 쥐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천황이라고 하는 중심을 세워놓고 있으면서도 아직은 삿초 세력을 중심으로 한 배타적인 권력이 아니라, 유력한 번들의 발언권을 중심으로 잡다한 제반 세력이 서로 각축을 벌이는 과도적인 상황이었다. 한편으로는 천황을 내세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각각의 번들이 가진 이해관계를 조정을 해야하니 ‘천하공론’과 ‘공의여론’을 강조하고 공의소를 세우거나 관리의 공선입찰 등을 통해서 공론·공의에 의한 정당화를 꾀했다. 이것이 메이지정부가 가진 중요한 특징이다.


170 그러나 천황의 지고한 권위성을 정면에 내세운다고 해도 그것이 화장을 한 흰 눈썹의 15세 소년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천황의 권위는 개인 카리스마로서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전통 카리스마에 의거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이를 위해서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신성을 계승한다는 점과 제정일치를 통하여 천황의 신권적 권위성이 강조되어야 했다.

 

175 1868-69년 단계에서의 메이지 정부는 아직 삿초 세력을 중심으로 한 배타적인 권력이 아니라, 유력한 번들의 발언권을 중심으로 잡다한 제반 세력이 서로 각축을 벌이는 과도적인 상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다양한 세력의 위에 선 ‘정령일도(政令一途)’에 의한 초월적 권력임을 추구하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천하공론’과 ‘공의여론’을 강조하고 공의소를 세우거나 관리의 공선입찰 등을 통해서 공론•공의에 의한 정당화를 꾀했다.


일본 근대천황제는 천황의 전횡 또는 전제정치가 가능하지 않았다. 그러니 일본이 아시아 태평양 전쟁이 끝날 때까지도 되지 않았다. 일종의 합의제도가 처음부터 시작되었다. 다시 말해서 초월적인 천황의 귄위를 내세우고 국체라고 말하면서도 메이지유신을 단행했던 여러 원래 대신들의 의견조정이 이 정부를 이끌고 갔던 두 가지 중요한 기둥이라고 하겠다. 일본이 나치 독일에서의 총통 히틀러에 의한 일사불란한 독채체제처럼 천황 독재체제였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얘기를 많이 하는데 천황제라는 것이 처음 성립할 때부터 이런 서로 성격이 전혀 다른 두 가지 내용이 동시에 굴러가고 있었던 것. 이렇게 성립한 천황제는 아시아 태평양 전쟁에 패배하면서 와해가 되었다. 그러니까 대체로 50-60년 정도 유지되었던 것.

 

199 국민국가적인 통합의 중심에는 항상 초월적인 군위로서의 천황이 있으며, 천황의 권위는 또한 항상 국체론과 신국론으로 인증되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제각기의 '자유'를 이러한 귄위 있는 중심심과 결부시킴으로서 자신의 욕구나 원망에 정통성과 보편성을 부여하여 스스로를 격려하며, 권위 있는 중심은 또한 갖가지 사회적인 세력으로부터의 '자유'를 매개로 한 헌신을 받아들임으로서 더욱 유효한 통합을 실현해 간다. 대일본제국헌법의 얼핏 애매하게 보이는 '신교의 자유' 규정에는 근대 일본에서 있어서 권위와 자유의 이러한 관계가 거의 집약적으로 표현되고 있었던 것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