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기 20분 | 일본 근현대사 | 01 막말·유신 4
- 강의노트/책읽기 20분 2014-15
- 2017. 2. 7.
막말.유신 - 이노우에 가쓰오 지음, 이원우 옮김/어문학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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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명-미개’라는 상대적이고도 절대적인 이분법의 성립
– “종래의 이미지는 다음과 같았을 것이다. 일본은 쇄국정책으로 폐쇄된 사회였다. 서양인과 만나면 혐오와 경계, 허세와 공포의 감정이 생겼을 것이라며 긴박한 상황을 상정해 버린다. 그러나 사실은 달랐다… 종래의 혐오와 경계라는 이미지는 현대의 문명개화 이후에 생겨난 것이다. 서양문명을 따라가고자 하는 의식이 문화 후진 의식, 문화열등감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에도 후기 사람들은 그러한 열등 의식과는 무연했다.”
– 일본의 식민지화를 막은 요인들이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 ‘탈아시아’로의 길 첫 단계: 열강과의 관계 안정과 이와쿠라 사절단
– 이른바 ‘근대화’: 급진적 개화(서양화), 식산흥업(殖産興業), 군사력 증강
– ‘국민’ 만들기: 국민개병(國民皆兵), 국민개학(國民皆學) 실시
– 천황제에 의한 위로부터의 국민 통합 시도: 전통적인 다섯 명절 ‘노는 날’ 폐지하고 기원절(紀元節)과 천장절(天長節) 신설
– 민중폭동: “민중도 성숙한 전통사회를 권력에 의해 파괴해가는 메이지 정부를 ‘기독교도'(耶蘇宗)라 말할만큼 거부하여, 쌍방이 정면으로 대결하였다.”
참고
– 구메 구니타케(久米 邦武), 특명전권대사 미구회람실기, 소명출판(전 5권).
– 다치바나 다카시 인터뷰: “5살 때 중국에서 패전을 맞은… 잔류 고아가 될 뻔한 상황에서 1956년 일본으로 귀환”
구메 구니타케, 《특명전권대사 미구회람실기》
지난 시간에는 책의 제2,4장을 읽었다. 이제 3,5장을 함께 읽을 것인데 3장은 개항 후 일본 사회를 다루고 있고, 5장은 탈아시아로의 길을 다루고 있다. 3장부터 하겠다. "개항과 일본 사회"라는 이름을 달고 있기는 하지만 여기서 기본적으로 밑바닥에 깔고 있는 일종의 논의구조는 문명세계 그리고 절반쯤 문명화된 또는 미개상태에서 벗어나 있는 반 미개, 그리고 미개상태 이 세가지 척도가 여기서 작용하고 있다. 지난 시간에도 얘기했듯이 서구근대 제국주의 국가들과 일본이 만나면서 일본에서 가지게 되는 하나의 상대적이면서도 절대적인 척도. 서양세계를 만나면서, 상대하면서 만들어진 것이니 상대적인 것이지만 일단 이것이 내부로 들어오게 되면 내부에서는 절대적인 척도로, 불변의 것으로 작동을 하게 된다. 이게 "개항과 일본 사회"에서만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끊임없이 사람들이 자기자신을 문명으로 절대화하고 다른 사람들을 폄하하고자 할 때 또는 그들을 배제하고자 할 때 그냥 난 네가 싫다 말하지 않고 넌 미개하잖아 라는 식으로 얘기를 한다. 편리한 척도이기는 하다. 어쨌든 문명과 미개라는 척도를 가지고 막말•유신사를 생각할 때 일본에서도 저자도 그렇게 말하는데 일본 내부에서는 절대적 척도로 작용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책을 읽어보면 "종래의 이미지는 다음과 같았을 것이다. 일본은 쇄국정책으로 폐쇄된 사회였다. 서양인과 만나면 혐오와 경계, 허세와 공포의 감정이 생겼을 것이라며 긴박한 상황을 상상해 버린다. 그러나 사실은 달랐다." 일본은 폐쇄된 사회였다고 정하는 것. 앞에서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도쿠가와 막부의 말기가 그렇게 폐쇄된 사회가 아니었다. 그리고 서양사람들을 만났을 때 허세와 공포 감정이 생겨나지도 않았다. 그러니 역사적인 맥락을 잘 더듬어 보면 사실이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리고 "종래의 혐오와 경계라는 이미지는 현대의 문명개화 이후에 생겨난 것이다. 서양문명을 따라가고자 하는 의식이 문화 후진 의식, 문화열등감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에도 후기 사람들은 그러한 열등 의식과는 무연했다." 이렇게 되어있다. 다시 말해서 에도 후기 사람들은 자체적인 척도를 그냥 가지고 살고 있었기 때문에 서양을 만나기 전에는 문명, 미개와 같은 외부에서 주어진 척도를 의식하지 않았다는 것. 이게 이제 개항 이후의 일본사회의 절대 척도가 되면서 일본사람들은 자기네가 문명이라고 자부하고 아시아 주면 국가를 미개라고 한다. 그러니까 상대적이면서도 자기네가 일단 문명의 절대적 기준을 갖고 있다 하면 타자를 배제하는데 있어서 절대적인 척도로 작동하는 것이다. 저자는 그래서 일본의 에도 시대사를 연구하는 일본인 학자들이 서구에서 만들어진 아시아적 전제라는 틀을 무의식 중에 수용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118 종래의 이미지는 다음과 같았을 것이다. 일본은 쇄국정책으로 폐쇄된 사회였다. 서양인과 만나면 혐오와 경계, 허세와 공포의 감정이 생겼을 것이라며 긴박한 상황을 상상해 버린다. 그러나 사실은 달랐다.
119 종래의 혐오와 경계라는 이미지는 현대의 문명개화 이후에 생겨난 것이다. 서양문명을 따라가고자 하는 의식이 문화 후진 의식, 문화열등감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에도 후기 사람들은 그러한 열등 의식과는 무연했다.
그런데 저자가 살펴본 바에 따르면 일본은 그렇게 문명, 미개 이런 척도로 따질 수 있는 그런 허술한 사회가 아니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특히 저자는 외국상인들이 일본 내부에 침입해 들어오는 것을 막은 여러가지 시스템이 에도 후기에 갖춰져 있었다고 지적한다. 다시 말해서 서양 세력이 일본의 경제 침략을 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장치들이 있었다는 것. 크게 세가지를 드는데, 첫째가 일본 각지에서 지역상인들이 상당히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에도의 발달한 신용시스템이 있었다. 이 두 가지가 일본 내부적으로 자생적으로 이미 오랫동안 형성되어 왔던 것이라면 여기에 하나의 법적인 형식을 부여한 것이 외국과 조약을 맺으면서 외국인에게 개항장으로부터 10리, 즉 40킬로미터 밖으로는 다닐 수 없게 한 엄격한 조약의 항목들이 있었다는 것. 이렇게 내부의 틀이 갖춰져 있었고 그 틀을 승인하고 외국과 법적인 통제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을 봐도 일본이 문명과 미개의 틀로 설명하기 어렵다는 것을 드러내 보인다. "개항과 일본 사회"를 다루면서 가장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일본이 어떻게 해서 식민지가 되지 않았는가, 식민지화를 막은 결정적인 방책이 무엇인가. 많은 책을 읽고 또는 일본근현대사에 대한 다양한 통찰이 있어야만 이 문제에 대한 답을 낼 수 있을 것이지만 적어도 이 책 한 권만 판단해본다면, 일단 이 책에 나오는 얘기를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는다면 첫째, 당시 외부세력 중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던 영국이 일본의 식민지화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는 것. 일본이 만만치 않은 나라라는 것을 영국이 자각했기 때문에 이런 판단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일본이라는 나라가 영국에서 생각하기에는 당시 영국의 가장 큰 적대세력이었던 러시아와 세력균형을 맞추려면 일본은 어느 정도 동맹으로 가지고 있을 필요가 있지 않나 판단을 했다. 즉, 영국이 일본을 잠재적인 동맹세력으로 생각했다는 것이 중요한 점. 그래서 일본이 영국에서 보기에는 수준 높은 국가 통합의 단계에 있었다고 판단을 했던 것이고, 그리고 일본과의 무역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을 저자는 거론한다.
137 최강 해군국 영국은 일본 주변 해역에서의 러시아와 세력 균형, 대륙 국가 중국을 교두보로서의 해양 국가 일본의 지리적 위치, 일본의 수준 높은 국가 통합과 세 개의 조약과 항 방위의 곤란함, 그리고 순조로운 무역 추이 등을 고려하고 있었으며, 이것들이 영국의 일본 영토 식민지화라고 하는 현실적인 위기를 상당히 작게 만들고 있었다.
《막말•유신》을 읽으면서 가장 관심 있게 본 부분이 이 부분이다. 왜 일본은 식민지가 되지 않았는가. 일본보다 훨씬 큰 중국은 상당한 정도로 서구 열강 세력의 침탈을 받았는데 일본은 어떻게 해서 그것이 불가능했는가. 일본 자체가 워낙 강한 나라였다든가 하는 생각은 전혀 이제 통찰에 도움이 되지 않고, 당시의 외교적인 상황, 국제정세, 일본의 대응 등이 어떻게 작동했는지, 그래서 잠정적으로 내려본 판단은 일본 내부의 응집도, 즉 다이묘들의 합의체가 있었다는 것과 같은, 그리고 국제 정세에 대한 뚜렷한 시각,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서 그것을 정책화해서 시행했다는 점이 일본의 식민지를 막은 내부의 요인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외부의 요인은 영국이 어떻게 판단했는가가 있을 것이다.
근대 이후의 세계는 하나의 나라가 주권을 가지고서 행사하면서 국제사회에서 활동한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판단하기에 막말•유신기처럼 군사력이 취약하다든가 또는 애매하고도 오묘한 위치에 있는 나라들의 경우에는 고려할 점이 많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일본은 풍부한 정보와 내부의 응집도 같은 것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본다. 일본은 어쨌든 무난하게 근대국가로 나아가게 된다. 그것이 지난 시간의 4장에 나오는 부분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일본적인 근대국가의 핵심적인 제도라고 할 수 있는 천황제가 새롭게 개수되어서 등장한 것도 사실이지만 이렇게 해서 근대국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이는 일본 근대국가의 목표가 탈아시아에 있었다는 것은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동아시아 세계에서 일본은 또 하나의 서구열강의 자리에 올라서려는 노력을 하는데 이게 바로 탈아입구.
일단 일본이 개항을 한 다음에 열강과의 관계가 안정되고, 대표적으로는 이와쿠라 사절단이 서구에 간다. 이와쿠라 사절단의 견문록을 보고한 것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기도 한다. 그러면서 급속도로 근대화를 시작하게 된다. 지금 이시기에 일본에서 등장했던 근대화라는 내용은 사실 아직까지도 동아시아 세계에서 근대화라는 말을 쓸 때 사람들 머리속에 떠오르는 개념이다. 첫째가 바로 서양화하는 것. 당시의 용어로는 개화. 구한말에 개화파라고 하는 것이 일본에서 형성된 조류이다. 그 다음에 식산흥업(殖産興業). 경제의 측면에서 산업을 발전시키는 것. 그리고 이것에 바탕을 둔 군사력. 이 세가지가 탈아시아의 길로 가는 첫 번째 부분이고 이것을 묶어서 근대화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두 번째가 중요한데 징병령을 내린다. 일본사회에서 징병령이라고 하는 것은 조선과 다른 측면이 있다. 일본은 에도시대까지만 해도 서구의 봉건사회와 유사하게 무사들은 싸움을 하고 영주들은 다스리고, 천황은 종교적인 의미로 군림하고, 보통사람들은 간단하게 말하면 군인이 되지 않았다. 조선과는 달랐다. 요즘식의 용어로 말하면 국민개병제를 채택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은 전국민에게 징병령을 내린다. 이게 바로 근대국가로 가는 출발점. 서양화하고 공업을 발전시키고 군사력을 확장하는 것을 근대화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 근대화의 또 다른 측면으로는 첫째로는 징병제가 작동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모든 국민이 평등하다는 것. 모두다 세금을 내야하고 군대를 가야 한다는 것. 이 두 가지가 근대국가의 국민이 가지고 있는 핵심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한국은 근대화가 덜 되었다고 할 수도 있다.
223 1872(메이지 5)년 11월, 이와쿠라 사절단이 영국에서 파리로 들어갔을 무렵, '징병고유'와 '전국 모병의 조칙'이 발포되었다.
223 '사민'은 '자유'의 권리를 획득했기 때문에 국가의 재난을 막기 위해서 온 힘을 다해야 한다고 국민개병을 선언했다.
그 다음이 국민 모두가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국민개학제가 실시된다. 이제 이 부분부터 '국민' 만들기가 시작된다. 그전에 일본사람들은 자기가 소속해 있는 또는 생업을 영위하는 영주의 농로 지냈는데 그것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 폐번치현이 단행되었다. 이제부터는 국민으로 거듭나야 하는 것. 그 다음에 국가기념일을 새로 정한다. 간단한 것 같으면서도 굉장히 헤게모니 싸움이 벌어지는 부분. 그래서 "전통적인 다섯 명절 '노는 날'을 폐지하고, 기원절과 천장절을 신설"했다. 국가 건국일을 새로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천황제에 의한 위로부터의 국민통합이 본격적으로 시행되고 있다. 그러면 메이지 초기의 일본사람은 어떠했는가. 사실 아주 오랫동안 에도막부 이전부터 국가라고 하는 의식을 가지고 살지는 않았다. 그냥 우리 영주님이 누구인가 라는 의식을 가지고 살았다. 그런데 메이지 천황이 등장했는데 군대 안가도 되는 사람들이 군대를 가고 세금을 이상하게 내고, 노는날도 없어졌다. 심각한 것. 오랫동안 익숙한 예전 사회가 나름대로 잘 작동했는데 급격한 개조에 의한 근대화가 시작되니 사람들 사이에서 갈등이 불타오르게 된다. 이게 민중폭동으로 드러나게 된다. 이 부분이 근대화 과정에서 생겨나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224 전국에 5만 3,760교의 초등학교를 일시에 설립하는 구상이었다. 프랑스의 학제를 모방하여 '마을에 불학하는 집이 없고, 집에 불하하는 사람을 없게 한다'는 획일적인 국민개학제 구상으로, 개인의 공리주의를 끌어내자는 취지였다.
225 1868년에 전통적인 다섯 명절 '노는 날'을 폐지하고, 기원절과 천장절 등이 신설되었는데, 국경일을 전국적인 법령으로 확정한 것도 1873년이었다.
위정자들이 해외를 침략한 것과는 별개로 메이지유신 이후로 일본근현대사를 읽어보면 일본국민들 또는 일본사람들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국가라고 하는 '괴물'의 부름을 받아서 무기를 짊어지고 아시아 구석구석을 떠돌아 다니게 된다. 살육의 현장들을 다니게 된다. 어떻게 보면 짠하다. 해외침략을 해서 나라의 힘이 부강해지고 그러면 굉장히 멋있는 것 같은데 그것의 속내용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오래도록 지녀온 전통적인 삶이 파괴되고 가족들도 찢어지고, 사실은 동아시아 세계에서 이산가족이 많고 깊은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일본사람'들이다. '일본국민'이 아니다. 예를 들면 다치바나 다카시는 일제시대 때 중국에서 태어났는데 일본이 패전 후 잔류했던 사람. 50년대 들어서야 일본으로 돌아왔다. 우리도 사할린 동포, 제일동포가 있는데 일본도 굉장히 많다.
메이지시대의 사람들은 어떠했는가. 저자는 "민중도 성숙한 전통사회를 권력에 의해 파괴해가는 메이지 정부를 ‘기독교도'(耶蘇宗)라 말할만큼 거부하여, 쌍방이 정면으로 대결하였다."고 말한다. 이런 긴장감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이런 민중폭동을 찍어누르면서 일본 근대국가가 형성되어 갔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억압적으로 형성한 근대국가를 가지고 아시아 침략에 나섰던 것. 그때부터는 엄청난 세뇌가 사람들에게 판타지를 심어주는 것. 그래서 그때 이후로 50년이 1900년부터 1945년까지 따지고 보면 일본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재난의 시기였다는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228 즉 메이지 정부는 폭동 봉기 그 자체를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는 강경 방침으로 크게 전환한 것이다. 민중도 성숙한 전통사회를 권력에 의해 파괴해가는 메이지 정부를 ‘기독교도'(耶蘇宗)라 말할만큼 거부하여, 쌍방이 정면으로 대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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