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 통째로 예수 읽기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16. 10. 24.
통째로 예수 읽기 - 김진 지음/왕의서재 |
들어가는 말 ┃ 4
생각하는 기독교인이어야 산다!
프롤로그 ┃ 8
1장 예수, 어떤 시대를 살았나?
2장 예수 출생에 얽힌 비밀들
3장 예수는 기독교인이 아니라 유대교인이었다
4장 예수, 세상의 무대에 등장하다
5장 예수의 하나님 나라
6장 예수 삶의 양식樣式
7장 예수의 영성
8장 예수의 죽음과 그 이후
9장 예수의 길을 따라서
에필로그 ┃ 358
참고 문헌 ┃ 362
들어가는 말
5 예수가 하나님을 유대교에서 해방했듯이 지금은 기독교에 갇혀 있는 '예수'를 해방시켜야 한다. 그것은 그가 기독교의 창시자도 아니며, 더욱이 "기독교의 예수"로만 남기에는 너무도 소중한 삶을 살다간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상처럼 굳어진 기독교의 예수를 살아 있는 진리로 다시 드러내지 않고서 기독교에 희망은 없다.
6 기독교가 변화하려면 예수에 대한 믿음의 내용이 바뀌어야 하고, 믿음의 내용이 변화하려면 예수에 대한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 예수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책임 있게 판단할 줄 아는 지성이 필요하다.
1장 예수, 어떤 시대를 살았나?
40 예수 시대의 최고 종교 권력층은 '사두개파'라 불리는 사람들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사제 귀족과 예루살렘의 귀족 원로들로 구성되었는데 그들은 신앙의 중심인 동시에 종교적 힘의 상징인 '성전'을 관리하는 사람들이었다.
41 사두개파 사람들은 율법 이외의 다른 종교적 전통이나 전승 혹은 가르침을 일체 따르지 않았다. 그들은 부활이나 천사 혹은 악마의 실존 등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어떤 주장도 인정하지 않았는데, 이런 종교적 현실주의는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정치적 현실주의의 이념적 토대로 작동했다.
46 '바리새'는 '분리하다', '구분하다'라는 뜻의 단어 '프라쉬purasch'에서 유래했다. 어원의 의미대로 바리새파는 다른 사람들과 '구별된 자'로 스스로를 인식하고 또 실제로 구별되게 행동하려고 노력했다.
47 사두개파와 대조적으로 그들은 보이지 않는 영혼의 불멸이나 죽은자들의 부활, 내세 또는 천사가 존재한다고 믿었다. 천사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인간에게 전하는 존재가 있음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이런 신학적 이해 때문에 당시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와서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이다.
55 사두개파가 성전과 예배를 중요시한 반면, 성전의 예배가 오염되었다고 믿었던 에세네파의 중심 주제는 '거룩'과 '성화'였다. 유대교 경전만을 권위 있게 받아들이며 엄격한 공동체 생활을 강조한 에세네파의 정식 공동체원이 되기 위해서는 2년간의 예비 기간을 통해 심의를 거쳐야 했으며, 이처럼 공동체에 들어오는 것을 '새 언약'에 합류한다고 말했다.
58 예수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꿈꾸는 종말론적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에세네파의 신앙과 유사점을 지닌다.
60 '열심 있는 사람', '광신자'들이라는 뜻을 지닌 젤롯당은 로마 지배에 저항하는 유대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행동한 무력 지하조직으로, 이들의 결정과정이 그런 성격을 잘 보여준다.
62 예수 역시 젤롯당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젤롯당의 뿌리가 된 민중 봉기가 갈릴리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2장 예수 출생에 얽힌 비밀들
81 당시 유대교 전통 신앙에 의하면 자신의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죄인은 결코 다른 죄인을 구원할 수 없었다. 그리고 아담 이후 평범한 인간의 몸을 통해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원죄를 지니고 태어나는 죄인이었다. 따라서 하나님이 보낸 메시아, 구원자라면 처음부터 아예 죄에서 자유로운 사람이거나 완전히 죄의 문제가 해소된 존재이어야만 했다.
81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증언하려면 예수가 인간으로 태어났으나 죄없는 사람임을 주장할 수밖에 없다. 이때 예수가 보통사람들처럼 정상적인 남녀의 몸 사랑을 통해 잉태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영으로 잉태되었다는 주장은 매우 합리적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다.
82 예수를 믿었던 초기 신앙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바로 이 세상을 구원하는 그리스도'라는 믿음이며, 동정녀 잉태설은 믿음을 뒷받침하는 도구로써 가치를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동정녀 잉태설을 통해 구원자로서의 예수의 존재를 드러내고자 했다.
88 마가는 다윗 왕의 자손으로 메시아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이라 예언했고, 누가는 메시아임을 증명하기 위해 베들레헴을 주장했던 것이다.
104 예수는 분명 인간이었다. 예수는 '인간'으로서 하나님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른 존재다. '인간'으로 그리 하지 않았다면 그가 왜 굳이 인간으로 태어나냐 했겠는가? 온전한 인간으로서 예수는 하나님을 온전하게 깨달아갔다. 그가 인간으로 살아간 이유는 우리 또한 '그와 같이' 살아갈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3장 예수는 기독교인이 아니라 유대교인이었다
116 예수가 드러낸 하나님과 유대교에서 말한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존재란 말인가? 그렇지 않다. 존재로서의 하나님은 같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품이나 행동에 대한 깨달음을 드러내는 내용과 방식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하나님은 변하시는 분이 아니지만, 변하지 않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의 시각은 변할 수 있다.
118 이제 『구약』의 하나님과 예수의 하나님을 어설프게 조화시키려는 헛된 노력에서 벗어나냐 한다. 예수를 따르는 기독교인이라면 예수가 드러낸 하나님과 배치되는 하나님 이해는 과감하게 폐기 처분해야 한다.
137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나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 「누가복음」 2장 52절
기독교인은 흔히 예수가 성령으로 잉태되었기 때문에 대어날 때 이미 자신들이 믿는 '예수'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는 기성품이 아니다. 예수는 단 번에 '된' 존재가 아니라 '되어가는 존재'였다. 위의 구절은 예수의 변화되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역사 속 예수는 영적으로 육체적으로 자라난 사람이다. 생각도 변화하고, 신앙도 성숙해가는 '과정의 사람'이었다.
4장 예수, 세상의 무대에 등장하다
155 역사적 인물로서의 예수는 철저한 구도자였다. 그의 삶은 도道, 즉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찾아나서는 수행의 여정이었다. 대중 앞에 나서기 전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을 깊게 깨닫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때로는 금식을 하며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는 고행도 했다. 산에서, 광야에서 그는 하나님을 갈망했다. 광야는 시련과 성찰의 공간이다.
5장 예수의 하나님 나라
181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는 구원의 이해와 직결되어 있으며, 예수에 대한 믿음은 곧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이다. 왜냐하면 예수의 말과 가르침, 그리고 실천 활동 등 그의 삶 전체가 하나님 나라에 집약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수의 삶을 이해하고자 할 때 '하나님의 나라' 이해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183 예수는 아주 실재적인 하나님 나라를 말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항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우리를 향해서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190 '하나님 나라는 미래에 도래할 세상'이라고 말하기에 예수가 가르친 하나님 나라는 너무나 현재적이고 실재적이다. 여기에 '하나님 나라의 현재와 미래' 사이에 딜레마가 있다. 그래서 많은 신학자들이 고민 끝에 내놓은 이론이 '이미, 그러나 아직 Already, but not Yet'이라는 논리이다.
191 '하나님 나라가 다가왔다'라는 말과 관련해서 지나치지 말아야할 것은 그것이 시간적인 의미를 넘어 결단을 촉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어느 시점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청중들의 결단을 요구하는 절박함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으며 늦기 전에 결단하라는 예수의 강한 요청이요 도전이다.
208 예수가 말한 하나님 나라는 어떤 지역이나 공간의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삶을 지배하는 정신과 방향성을 의미하며 완성된 '왕국Kingdom'이 아니라 과정으로서의 '삶의 양식'Lifestyle'이다. 그것은 권력이나 폭력이 다스리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가 지배하는 삶과 세계를 뜻한다.
6장 예수 삶의 양식樣式
224 '예수를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것과 '예수가 곧 하나님이시다'라는 것은 그 의미를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다.
224 그들에게 예수는 하나님과 다름 없었다. 이렇게 예수를 실제로 체험한 뒤에 '하나님'으로 믿고 고백하는 것을 일방적인 신격화로 단정 지을 수는 없다.
224 예수에 대한 '하나님' 체험 없이 그저 교리적으로 예수를 하나님이라 표현하거나, 그 교리를 바탕으로 예수의 온전한 인간됨을 망각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것은 잘못된 신격화이다.
225 예수도 자신을 '하나님'으로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당시 유대교 신앙에서 메시아, 그리스도의 본래 뜻인 '기름 부음 받은 자', '구원자'라는 말 속에 메시아가 반드시 하나님 혹은 신이라는 이해나 고백은 있을 수 없었다.
225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를 죽인 이유는 예수가 자신을 하나님이라 말했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를 그리스도로 믿고 따랐기 때문이다.
226 하나의 교리이든 진정한 고백이든 '예수는 성자 하나님이시다'라는 고백은 존중해야 한다. 그러나 그 고백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만 하나님으로는 믿지 않는 사람들을 향한 정회의 칼날이 되어서는 안 된다.
227 역동적인 예수의 삶을 체험하지 못한 채 교리적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만약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한다면 지금도 살아 숨 쉬는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지나쳐서는 안 된다. 예수의 채색된 얼굴이 아니라 맨 얼굴을 맞대야 한다.
243 평화는 예수의 존재의 이유이자 삶의 양식이었다. 그가 태어날 때 하늘의 천사가 '땅의 평화'를 노래했다는 기록은 바로 그의 삶의 시작과 끝이 평화로 이뤄졌음을 나타낸다.
243 그는 신비한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평화를 위해 일하고 자신이 평화가 되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임을 분명하게 말했다. 예수와 평화는 동의어이다.
7장 예수의 영성
254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기도가 무엇이며, 어떻게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을 향한 올바른 기도인지 먼저 체험하신 예수는 이것을 「주의 기도」로 표현했다. 그래서 「주의 기도」에는 예수의 영성이 살아서 꿈틀거린다.
263 예수가 보여준 것은 하나님과 우리가 아버지와 자녀 사이로 변화되는 순간, 우리는 다른 모든 존재와도 새로운 사이로 변화된다는 것이다. 이웃과의 관계, 자연과 우주와의 관계가 전혀 새로워진다. 한 아버지 아래 한 자녀임이 드러난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인간은 '하나님'이 아버지임을 드러내야 한다. 그 아버지는 오직 예수에게 자신을 드러내시는 분이 아니다. 바로 오늘 우리를 통해 아버지로 현현하신다.
278 예수는 어떤 중재자(종교 지도자)나 매개물(희생 재물)없이 직접 하나님께 죄의 용서를 구하라고 말한다. 이처럼 '직접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라'고 하는 것은 예수 공동체가 얼마나 획기적인 신앙 공동체였는가를 다시금 보여주는 대목이다.
8장 예수의 죽음과 그 이후
311 성 만찬을 통해 예수의 죽음을 기억하는 것은 곧 그의 삶을 받아내는 것이다. 그것은 곧 그의 뜻과 말, 행동, 삶 전체를 따르겠다는 결단의 시간이다. 성 만찬은 기독교인이 가장 소중하게 고백하는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내가 있다'는 말씀을 깨닫는 시간이다.
321 예수가 살해당한 이유는 유대 민족의 신앙과 사회의 뿌리를 흔들었기 때문이다. 그 구체적인 예로서 예수는 당시의 유대인들의 종교와 문화, 삶을 지탱하고 있는 율법의 권위보다 자신을 더 높은 존재로 드러냈다. 예수는 '율법은 그렇게 말하지만 나는 이렇게 말한다'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했다.
336 제자들을 변화시키는 예수의 부활은 단순히 기적으로서의 부활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 임재', '예수 현현'의 체험이었다.
336 부활 신앙이란 육체적 부활을 믿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뛰어넘는 생명의 예수와 하나님이 바로 지금 여기에 함께 하고 있다는 믿음이다.
338 예수 부활 체험을 통해 제자들은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시작임을 믿었다.
338 현대의 언어로 표현하면 부활 신앙은 '죽임의 문화'로 대표되는 비인간화와 소외, 폭력과 전쟁, 절망의 문화를 뒤바꾸어 생명의 문화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이다.
9장 예수의 길을 따라서
351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데서 구원은 시작된다. 한편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다는 것은 곧 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는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나의 본래 신분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인간으로서 나의 정체성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사실을 믿어야 비로소 예수가 말한 구원이 시작된다.
355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가 한 말과 그가 보여준 삶에 구원이 있음을 믿고, 그 말씀대로 사는 것을 말한다. 그의 말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하나님이 그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을 드러낸 것이다.
355 예수가 말한 인간 구원의 길은 간단하다. 먼저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나의 본래 모습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믿음을 지녀야 한다. 이 믿음이 출발선이다.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의 본래 성품이 '하나님의 형상'임을 인정하게 된다.
에필로그
360 역사적 예수가 신앙의 그리스도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앎이 결코 '신앙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해치지는 않는다. 오히려 믿음을 올곧고 견고하게 할 것이다.
360 역사적 예수에 대한 올바른 이해 없이 '그리스도'로서의 신앙 고백은 허공의 메아리일뿐이다. 다른 한편 역사적 예수에 대한 이해가 믿음으로 전환되지 않는다면 그 이해는 힘없는 지식에 머무를 것이다. 기독교인의 온전한 예수 신앙은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를 구별하되 분리하지 않으며, 둘이면서 하나로 믿을 수 있는 믿음에 달려있다. 부활 신앙은 이 둘을 연결시켜주는 매개 고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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