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르트: 성찰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16. 9. 29.
성찰 - 르네 데카르트 지음, 이현복 옮김/문예출판사 |
《제일 철학에 관한 성찰》
- 소르본의 신학자들에게 바치는 헌사
- 독자를 위한 서언
- 여섯 성찰의 요약
제1성찰: 의심할 수 있는 것들에 관하여
제2성찰: 인간정신의 본성에 관하여
제3성찰: 신에 관하여: 그가 현존한다는 것
제4성찰: 참과 거짓에 관하여
제5성찰: 물질적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그리고 다시 신이 현존한다는 것에 관하여
제6성찰: 물질적 사물의 현존 및 정신과 물체의 실재적 상이성에 관하여
《자연의 빛에 의한 진리 탐구》
머리말
폴리안데르, 에피스테몬, 에우도수스
《프로그램에 대한 주석》
인간 정신 혹은 이성적 영혼이 무엇이고 또 무엇일 수 있는지에 대한 설명
프로그램에 대한 검토
《주해》
제일 철학에 관한 성찰
자연의 빛에 의한 진리 탐구
프로그램에 관한 주석
《해설/데카르트: 형이상학 성찰의 구조와 이념》
철학과 형이상학
형이상학의 구조
형이상학적 성찰의 이념
제1성찰의 첫째 문단은 《성찰》 전체의 서언에 해당 합니다. 그 안에 《성찰》에 관철되는 데카르트의 목적과 의도가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최초의 토대에서부터 다시 새로 시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찰》이라고 하는 이 텍스트가 제시하는 전 기획의 첫째 목표는 한마디로 "다시 새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데카르트는 자신이 "지금까지 갖고 있던 모든 의견을 진지하고 자유롭게 전복"시키려 합니다. 그가 "지금까지 갖고 있던 모든 의견"은 사실상 자신이 배운 것들, 자신 이전의 모든 철학적 견해들입니다. 묶어서 말하면 지금까지 철학에서 옳다고 간주되어온 모든 것들을 완전히 뒤집어버림으로써 모든 것을 다시 새로 시작하겠다는 것입니다. 《성찰》 전체는 이러한 목표를 관철하기 위한 시도로서 구조화되어 있습니다.
1. 전체의 목적
2. 의심과 혼란, 꿈, 악령 ━ 고백 → 제1성찰
3. 계속되는 혼란, 자연물에 대한 의심 ━ 고난 → 제2성찰
4. 내면으로의 침잠, 자기로의 퇴각, 신의 존재 증명 ━ 신의 빛이 비춤(Illumination) → 제3성찰
5. 대상 식별 → 제4성찰
물질적 사물 → 제5성찰
정신과 물체의 상이성 → 제6성찰
여기서 전제를 분석해 봅시다. 제1성찰에는 현재 자기 자신이 의심의 상황에 처해 있다, 확실한 것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의심되지 않는 것들을 갖고 있지 못하다고 하는 현재 상태에 대한 고백이 들어 있습니다. 게다가 악령까지 등장합니다. 한마디로 "난국의 암흑"에 처해 있습니다. 제1성찰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이 표현은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 나오는 죄수의 상황과 유사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제2성찰에서는 이러한 혼란이 계속됩니다. 고난의 상황입니다. 그러다가 제3성찰부터 본격적인 자기 관조에 들어섭니다. 다시 말해서 내면으로의 침잠, 자기로의 퇴각이 일어납니다. 그런 다음 신존재 증명이 이루어지고, 이 신존재 증명이 끝나는 제3성찰 마지막 부분에서 태양과도 같은 신의 빛이 자신에게 비칩니다. 이로써 나는 난국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난국을 벗어날 뿐만 아니라 세계를 확실하게 알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됩니다. 그럼으로써 참과 거짓을 분별할 수가 있는데, 이것이 제4성찰의 내용입니다. 제3성찰에서 나는 신을 알게 되고, 그러한 사실은 나에게 힘을 줍니다. 제4,5,6성찰은 하나로 묶을 수 있습니다. 참거짓의 식별이 가능해지고(제4성찰), 제2성찰에서 의심하였던 물질적 사물에 대한 의심이 앎으로 바뀌고(제5성찰) "물질적 사물의 현존 및 정신과 물체의 실재적 상이성"(제6성찰)에 관해서도 알게 됩니다. 이렇게 보면 《성찰》의 핵심은 제3성찰입니다.
소르본의 신학자들에게 바치는 헌사
15 신과 영혼에 관한 문제는 신학보다는 철학을 통해 논증되어야 한다고 늘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 영혼은 신체와 더불어 소멸되지 않는다는 것, 신은 현존한다는 것을 우리 신자들은 신앙에 의해 충분히 믿을 수 있지만, 비신자들은 이 두 가지 것이 먼저 자연적 근거에 의해 증명되지 않으면 그 어떤 종교나 도덕상의 덕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17 신이 현존한다는 것, 인간 영혼이 신체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었던 사람이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다는 이유로 이 두 가지를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비신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20 이 논증 역시 다소 길고 서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고, 또 무엇보다도 그것은 선입견에서 벗어난 정신을, 감각의 속박을 쉽게 끊어버릴 수 있는 (subducat) 정신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제1성찰 의심할 수 있는 것들에 관하여
34 유년기에 내가 얼마나 많이 거짓된 것을 참된 것으로 간주했는지, 또 이것 위에 세워진 것이 모두 얼마나 의심스러운 것인지, 그래서 학문에 있어 확고하고 불변하는 것을 세우려 한다면 일생에 한 번은 이 모든 것을 철저하게 전복시켜 최초의 토대에서부터 다시 새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이미 몇 해 전에 깨달은 바가 있다. 그런데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니라 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일을 적절하게 실행할 수 있는 성숙한 나이가 되기를 기다렸다. 이 일을 오랫동안 연기해왔으므로 내 남은 여생을 다른 것에 소비한다면 죄를 짓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오늘 내 정신은 모든 근심에서 벗어나 있고, 은은한 적막 속에서 평온한 휴식을 취하고 있으므로 내가 지금까지 갖고 있던 모든 의견을 진지하고 자유롭게 전복시켜 볼 참이다.
그러나 이를 위해 모든 의견이 거짓임을 증명해 보일 필요는 없다. 이것은 내가 도저히 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성이 설득하고 있는 바는 아주 확실하지 않은 것 그리고 의심할수 없는 것이 아닌 것에 있어서도 명백히 거짓인 것에서처럼 엄격하게 동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므로, 의견들 각각에 의심할 만한 이유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 의견들 전체를 충분히 거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의견들을 일일이 검토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끝이 없는 일이기에 말이다. 이보다는 오히려 토대가 무너지면 그 위에 세워진 것도 저절로 무너질 것이기에, 기존의 의견이 의존하고 있는 원리들 자체(ipsa principa)를 바로 검토해보자.
내가 지금까지 아주 참된 것으로 간주해온 것은 모두 감각으로부터 (a sensibus) 혹은 감각을 통해서 (per sensus) 받아들인 것이다. 그런데 감각은 종종 우리를 속인다는 것을 이제 경험하고 있으며, 한 번이라도 우리를 속인 것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는 편이 현명한 일이다. 그러나 감각이 비록 아주 작은 것과 멀리 떨어진 것에 대해 종종 우리를 속일지라도, 감각으로부터 알게 된 것 가운데는 도저히 의심할 수 없는 것도 많이 있다.
제2성찰 인간정신의 본성에 관하여: 정신이 물체보다 더 쉽게 인식된다는 것
42 어제 성찰로 인해 나는 엄청난 의심 속에 빠져 있고, 그것을 머리에서 지워버릴 수도 없으며, 또 이 의심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지도 모르고 있다. 나는 지금 마치 갑자기 소용돌이 치는 깊은 물속에 빠져 허우적대며, 바닥에 발을 대지도 못하고 또 그렇다고 헤엄쳐서 물 위로 올라갈 수도 없는 난처한 상황에 처해 있다. 그렇지만 힘을 내서 어제 들어선 길을 다시 따라가보자. 즉 조금이라도 의심의 여지가 있는 것을 명백히 거짓된 것으로 확실하게 경험한 것인 양 모두 멀리하자. 그리고 확실한 어떤 것을 만날 때까지, 아니 하다못해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만이라도 확실히 인식할 때까지 계속 나아가자. 아르키메데스가 지구를 그 자리에서 움직이기 위해 확고부동한 일점 밖에 찾지 않았듯이, 나 역시 확실하고 흔들리지 않는(certum & inconcussum) 최소한의 것만이라도 발견하게 된다면 큰 일을 도모할 수 있다고 희망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므로 내가 보는 것은 모두 거짓이라고 가정하자. 저 기만적인 기억이 나에게 나타내는 것은 결코 현존한 적이 없다고 믿자. 나는 어떠한 감각도 갖고 있지 않으며, 물체, 형태, 연장, 운동 및 장소도 환영(chinerae) 이외에 다름 아니다. 그러면 참된 것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아마도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이 한 가지 사실뿐이다.
그렇다면 불확실한 것으로 방금 열거한 것들과는 다른 조금도 의심할 수 없는 것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는 도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일까? 혹시 어떤 신이 있어서, 혹은 어떻게 부르든 간에 이와 비슷한 것이 있어서 내 안에 이런 생각이 일어나도록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나는 왜 이런 가정을 하고 있을까? 나 자신이 이런 생각의 작자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나는 적어도 그 어떤 것이 아닐까? 그러나 나는 이미 내가 어떤 감관이나 신체를 갖고 있음을 부정했다. 나는 여기서 잠시 주춤거리게 된다. 이로부터 무엇이 귀결되어야 할까? 나는 혹시 신체와 감관의 사실에 묶여 이것 없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일까? 그렇지만 세계에는 하늘, 땅, 정신, 물체가 없다고 나 자신을 설득하지 않았던가? 이때 나는 또 나 자신도 없다고 설득한 것은 아니였을까? 그렇지는 않다. 내가 만일 나에게 어떤 것을 설득했다면, 확실히 나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군지는 모르지만 아주 유능하고 교활한 기만자가 집요하게 나를 항상 속이고 있다고 치자. 자 이제, 그가 나를 속인다면, 내가 있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그가 온 힘을 다해 나를 속인다고 치자. 그러나 나는 내가 어떤 것(aliquid)이라고 생각하는 동안 그는 결코 내가 아무것(nihil)도 아니게끔 은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이 모든 것을 세심히 고찰해본 결과, 나는 있다, 나는 현존한다(ego sum, ego existo)는 명제는 내가 이것을 발언할 때마다 혹은 마음 속에 품을 때마다 필연적으로 참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렇지만 나는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내가 무엇인지를 아직 자세히 모르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나는 섣불리 다른 어떤 것을 나로 간주하지 않도록, 심지어 내가 모든 것 가운데 가장 확실하고 명증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저 인식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조심하자. 그러면 이 성찰을 하기 전에 나는 과연 무엇이라고 믿고 있었는지 살펴보자. 그 다음에 이것들 가운데 앞에 제시된 근거에 의해 조금이라도 흔들릴 수 있는 것은 모두 제거시켜 나가자. 이렇게 되면 결국 확실하고 흔들리지 않는 것만 이 마지막에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전에 나를 무엇이라고 믿고 있었는가? 물론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인간이란 또 무엇인가? 이성적인 동물이라고 말하면 되는가? 아니다. 이런 식으로 대답하면 다시 동물이란 무엇이고, 이성적이란 무엇인가라고 묻지 않으면 안 될 것이고, 따라서 한 문제에서 더 곤란하고 더 많은 문제에 직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 이런 진부한 문제들과 씨름할 만한 시간적인 여유도 없다. 여기서 나는 오히려 전에 내가 무엇인지를 고찰할 때 마다 내 생각 속에 자연스레 떠올랐던 것에 주목해보자. 첫 번째로 나에게 떠오른 것은, 내가 얼굴, 손, 팔 및 모든 지체로 되어 있는 기계 전체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 기계는 시체에서도 볼 수 있는 것으로, 나는 이것을 신체라고 불렀다. 또 나에게 떠오른 것은 내가 영양을 섭취하고(nutriri), 걸으며(incedere), 감각하고(sentire), 사유한다(cogitare)는 것이며, 이런 활동을 나는 영혼(anima)과 연관시켰다.
46 그러나 극히 유능한 기만자가,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악의에 찬 기만자가 온 힘을 다해 나를 속이고 있다고 가정하는 지금은 어떠한가? 앞에서 물체의 본성에 속한다고 말했던 것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내가 지금 갖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나는 이것에 대해 주의하고, 생각 하며, 숙고하지만, 그 어느 것도 나에게 나타나지 않는다. 공연히 똑같은 일만 되풀이하며 나는 지쳐버린다. 그러나 내가 영혼에 귀속시켰던 것 가운데 나에게 속하는 것은 없을까? 우선 영양을 섭취하거나 걷는다는 것은 어떨까? 나는 지금 어떠한 신체도 갖고 있지 않으므로, 이것들은 허구적인 것(figmenta)에 지나지 않는다. 감각한다는 것은 어떨까? 이것도 물론 신체 없이는 일어날 수 없고, 나는 또 꿈속에서 많은 것을 감각하고 있다고 믿었지만 나중에 감각하지 않았음을 깨 달은 적이 있었다. 사유한다는 것은 어떤가? 여기서 나는 발견한다. 사유(cogitatio)가 바로 그것이다. 이것만이 나와 분리(diveli)될 수 없다. 나는 있다, 나는 현존한다, 이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얼마 동안? 내가 사유하는 동안이다. 왜냐하면 내가 사유하기를 멈추자마자 존재하는 것도 멈출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필연적으로 참이 아닌 것은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정확히 말해 단지 하나의 사유하는 것 (res cogitans), 즉 정신, 영혼, 지성 혹은 이성이며, 나는 이 용어의 의미를 전에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참된 것이며, 참으로 현존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어떤 것일까? 나는 말했다, 사유하는 것이라고.
50 가장 판명하게 파악된다고 흔히들 믿는 것, 즉 우리가 만지고 보는 물체를 고찰해보자. 그렇지만 물체 일반이 아니라 개별적인 물체, 예컨대 밀랍 한 조각을 고찰 대상으로 삼아보자. 일반적인 지각이란 종종 아주 더 혼란스러운 것이기에 말이다. 이 밀랍은 방금 벌집에서 꺼낸 것이기에 아직도 꿀맛을 간직하고 있고, 꽃 향기도 약간은 지니고 있다. 빛깔, 모양, 크기도 뚜렷하다. 단단하고, 차갑고, 쉽게 쥘 수 있으며, 두드리면 소리를 낸다. 요컨대 어떤 물체가 가능한 한 판명하게 인식되기 위해 요구되는 모든 것을 이 밀랍은 갖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말하면서 밀랍을 불 가까이로 가져갔더니, 남아있던 맛은 사라지고 향기는 날아가고, 빛깔은 변하고, 형체는 사라지고 더 크게 액체로 되었으며, 따뜻해지고 거의 잡을 수도 없으며, 때려도 소리를 낼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동일한 밀랍으로 남아있는가? 그렇다 동일한 밀랍이다. 이것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밀랍에 있어 그토록 판명하게 인식되었던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이 감각에 의해 포착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미각, 시각, 촉각, 청각에 의해 감지된 것은 모두 변했지만 그럼에도 밀랍은 여전히 남아있기에 말이다.
52 그러나 내가 이렇게 상상하는 그것은 정확히 무엇인가? 주의깊게 고찰해 보자. 밀랍에게 속하지 않는 것을 모두 제거해보자. 그런 다음 무엇이 남는가를 살펴보자. 이제 남아 있는 것은 연장성, 유연성 및 가변성뿐이다. 그런데 이런 유연성과 가변성이란 무엇인가? 이 밀랍이 둥근 모양에서 네모꼴로 혹은 네모꼴에서 세모꼴로 변할 수 있다고 내가 상상하는 것일까? 결코 아니다. 나는 밀랍이 이와 같은 무수한 변화를 겪을 수 있음을 이해하고는 있지만 이런 변화를 모두 상상 속에 나타낼 수 없고, 따라서 밀랍에 대한 이런 이해는 상상력에 의해서는 도달될 수 없기 때문이다. [ ... ]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밀랍을 지각하는 작용은 전에 그렇게 생각되었다고 하더라도 시각, 청각, 상상력은 결코 아니며, 오히려 그것은 오로지 정신의 통찰(solius mentis inspectio)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런 통찰은 그 구성 요소에 관한 주의 집중력의 정도에 따라 전처럼 불완전하고 애매할 수 있고, 지금처럼 명석하고 판명할 수도 있다.
제3성찰 신에 관하여: 그가 현존한다는 것
66 내 안에 있는 관념 가운데서 그 표상적 실재성이 대단히 커서 형상적으로 혹은 우월적으로 내 안에 있을 수 없고, 따라서 나 자신이 그 관념의 원인이 될 수 없음이 확실하다면, 이 세상에는 나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 관념의 원인이 되는 다른 사물도 현존하고 있음이 필연적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70 또 나는 무한한 것을 참된 관념이 아니라 유한한 것의 부정으로 지각한다고 생각해서도 안된다. 내가 마치 정지를 운동의 부정으로, 어둠을 빛의 부정으로 지각하듯이 말이다. 이와 반대로 무한 실체 속에는 유한 실체보다 더 많은 실재성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 따라서 무한한 것에 대한 지각은 나 자신에 대한 지각보다 어떤 의미에서 더 앞선다는 것(priorem)은 아주 분명하기 때문이다. 나보다 더 완전한 존재자의 관념이, 다시 말해 나 자신을 이것과 비교하면서 내 결함을 알게되는 관념이 내 안에 있지 않다면, 내가 의심하고 어떤 것을 바라고 있다는 것, 즉 나는 어떤 것을 결여하고 있고 아주 완전한 것이 아님을 내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75 원인 속에는 결과 속에 있는 것과 적어도 동등한 정도의 실재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 따라서 나는 사유하는 것이고, 또 신의 관념을 갖고 있으므로, 내 원인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은 사유하는 것이어야 하고, 또 신이 갖고 있는 모든 완전성의 관념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제 다시 이 원인이 자신에서 유래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것에서 유래하는 것인지 물어 보자.
78 내가 정신의 눈을 나 자신으로 향하면, 나는 불완전한 것이고, 다른 것에 의존하는 것이며, 끊임없이 더 크고 더 좋은 것을 바라는 것임을 이해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또한(simul eiam) 내가 의존하고 있는 것은 이 더욱 큰 것은 모두 무한정적으로, 또 가능적으로만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무한하게 갖고 있으며, 이것이 신임을 이해하게 된다.
78 이런 것을 더 주의 깊게 검토하기 전에, 또 이것에서 도출되는 다른 진리를 고찰하기 전에, 나는 여기서 잠시 머물러 이 완전한 신을 명상하고 그의 속성을 음미하며, 황홀감에 눈먼 정신이 그 힘이 닿는 데까지 이 비할 수 없는 장대한 빛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찬양하며 숭배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된다.
제4성찰 참과 거짓에 관하여
80 나는 지난 며칠 동안 정신을 감각에서 떼어내는 일에 아주 익숙해졌고, 또 물질적 사물에 대해 참되게 지각되는 것은 극히 적지만, 인간 정신에 대해서는 더 많이 그리고 신에 대해서는 훨씬 더 많이 인식된다는 것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 내가 의심한다는 것, 즉 내가 불완전하고 의존적인 존재자라는 것을 매번 주목할 때마다 비의존적이고 완전한 존재자, 즉 신에 대한 극히 명석 판명한 관념이 나에게 나타난다. 그러므로 신의 관념이 내 안에 있다는 것, 즉 이 관념을 갖고 있는 내가 현존하고 있다는 이 한 가지 사실로부터 신은 현존하고, 내 현존 전체는 매 순간 신에 의존하고 있음을 나는 분명하게 결론 짓는다. 따라서 이보다 더 명증적으로, 이보다 더 확실하게 인간 지성에 의해 인식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확신한다. 그리고 이미 나는 지식과 지혜의 모든 보물을 지니고 있는 참된 신을 이렇게 관상하는 것으로부터 나머지 다른 사물의 인식에 이르게 되는 길을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제6성찰 물질적 사물의 현존 및 정신과 물체의 실재적 상이성에 관하여
115 그러므로 이로부터 내가 결론지을 수 있는 것은, 내 자연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렇게 놀랄 일이 아니다. 인간은 제한된 존재자일 뿐이고, 따라서 인간의 본성은 제한된 완전성만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120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신이 그토록 선함에도 불구하고 정신과 신체의 합성체인 인간의 본성은 종종 잘못을 저지른다는 사실이다.
122 내 모든 감각, 기억, 오성을 동원하여 이것들을 검토하고 난 뒤에도, 이것들 가운데 그 어떤 것도 나머지 것과 모순되지 않는다면, 이런 것의 진리성을 의심할 필요가 조금도 없다. 왜냐하면 신은 기만자가 아니라는 것으로부터 이런 경우에 나는 잘못을 범하지 않는다는 것이 귀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생활에 있어 긴박하게 행동해야 하는 우리는 이런 것들을 세심하게 검토할 시간적 여유를 갖지 못하므로 삶의 개별적인 일에 있어 오류를 범하게 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으며, 따라서 우리는 결국 우리 본성이 약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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