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고전강의 | 06 방법서설 3
- 강의노트/인문고전강의 2013
- 2016. 8. 25.
방법서설 - 르네 데카르트 지음, 이현복 옮김/문예출판사 |
강유원, '인문고전강의'
일시: 2013년 2월7일 – 12월 5일, 매주 목요일 오후 7시30분 – 9시30분(총 40주)
장소: 과천시정보과학도서관
* 강의 목차
20130829 27강 방법서설(1)
20130905 28강 방법서설(2)
20130912 29강 방법서설(3)
토마스 L. 쿡시, 《플라톤의 <향연> 입문》
플로베르, 《부바르와 페퀴셰》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
발터 벤야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 사진의 작은 역사 외 l 발터 벤야민 선집 2》
앨런 스피겔, 《소설과 카메라의 눈》
게오르그 루카치, 《소설의 이론》
최정규, 《이타적 인간의 출현》
데카르트, 《정념론》
20130912 29강 방법서설(3)
토마스 L. 쿡시의 《플라톤의 <향연> 입문》라는 책이 있다. 꼭 사서 읽어봐야 하는 책.
데카르트를 생각해보면 주체라는 것은 굳이 심리학의 내용을 빌리지 않는다 해도 굉장히 대단한 것 같이 여겨지기 쉬운데 주체를 곰곰이 따져보면 사실 만족스럽지가 않다. 유가에서 공자가 얘기한 것은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세상에서 형식상으로 나타난 것이 예禮이고, 예의 바탕이 되는 것이 의義, 올바름을 기준으로 삼아서 사회적 행위로 예를 실현하는 액티버티가 인仁이다.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생각해보자. 의를 어딘가에 정초시켜야 하는데 플라톤은 올바름의 기준으로 이데아를 내놓았다. 《국가》, 《파이돈》에서 좋음의 이데아가 무엇인지를 글라우콘이 묻는데 사실 답을 못낸다. 답을 못내니까 신화적인 얘기로 넘어간다. 태양의 비유, 동굴이 비유를 든다. 비유는 증명이 안된다. 객관적으로 있다는 것이 증명이 안된다. 여기서 플라톤이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서사시를 통해서 관습이나 도덕 그런 것들을 폐기시키고 새로운 것을 세팅하려고 했다. 전례된 것을 버렸다. 데카르트가 지난 시간 읽었을 때 다 배웠는데 재미없더라 라고 하는 것이 플라톤과 똑같은 것. 플라톤과 데카르트는 전통적으로 내려온 것을 폐기하는 과정을 거친 것이다. 공자도 마찬가지. 옛 것인 양 말했지만 사실 이데올로기를 만든 것. 사실은 주나라 것이 아니라는 것이 청동기 유물에서 밝혀졌다. 의를 얘기하는데 어딘가에 근거를 두어야 하는데 이데아를 태양에 비유하듯이 그렇게 해서 내놓은 게 역. 공자님이 나이가 들어서 역을 읽었다. 자기가 말하는 올바름의 형이상학적 근거를 어떻게 세팅할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읽은 것. 예가 사회적인 윤리라면 인이라는 것은 인간론이고, 동시에 철학적 윤리학이다. 물론 노자나 공자가 모두다 역에 근거를 든 것은 사실인데 어떤 방식으로 전개했는가는 차이가 있다.
기존의 관습과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고전으로 배운 것들을 확실한 것이 없다고 폐기하면 남은 것이 없다. 아무것도 안 남으니 빈용기 되어버린다. 그러면 확실한 거 하나는 있어야 하는데 데카르트는 수학에서의 명증성이라 말한다. 확실성을 찾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는데 버리고 나니 주체가 비어버린 것. 결국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은 신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방법서설》만 보면 데카르트가 무신론자로 빠질 것 같은데 《성찰》, 《철학의 원리》를 읽으면 엄청나게 경건한 신학을 전개하게 된다. 그래서 《방법서설》를 읽다가 형이상학에 다른 사람 같다. 신 존재 증명에 온통 매달리게 된다. 확실한 것이 신 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주체의 철학을 세우려고 했는데 기존의 그 동안 주체를 채우고 있던 것을 버리니 주체가 텅 비어있던 것. 그럼 뭘로 채우냐. 아예 철학을 폐기하고 우리 눈 앞에서 경험을 통해 얻어낸 증명해낸 것들만을 잠정적인 진리로 간주하고 그것을 인정하고 살아가는 방법이 있고, 과학의 길이 하나 있다. 그 다음에 칸트, 스피노자, 나중에 헤겔에까지 이어지는 주체의 철학으로 가장된 신학이 있다. 그러니까 니체가 신은 죽었다 할 때 기독교 신이 아니라 사실은 주체라는 이름 아래 선행하는 철학자들에게 주체라는 이름 하에 수행해왔던 인간의 관한 논의는 사실은 위장된 의미에서의 신학에 불과한 것이고 그것마저 폐기해야 진정한 인간적 학이 성립한다고 하는 것. 그래서 니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근대 철학자가 되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완전한 의미에서 타자로부터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것을 완전히 배제하고 진공적 상태에서 세팅을 해서 나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데카르트는 사유를 통해서 하려고 했던 것. 그래서 맹점이 많다. 인지 심리학에서 비판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철학의 입장에서 하나의 아르키메데스의 점을 세우려고 했던 시도를 인지심리학적 측면에서 비판하면 핀트가 어긋난 것. 그렇다 해도 근대의 주체를 지나치게 과장된 신뢰를 보내면 안된다. 그 빈자리를 채우고 들어온 것이 근대 과학. 그런 것을 염두에 두고 데카르트가 말하는 《방법서설》에서 하는 얘기를 가만히 살펴보면 앞뒤가 안맞는 부분이 몇 군데 발견된다. 그런 구분을 잘 살펴보면서 비판적으로 읽을 수 있게 된다.
제1부 학문들에 대한 고찰
154 나는 특히 수학에 마음이 끌렸는데, 이는 그 근거의 확실성과 명증성 때문이었다.
확실성과 명증성이야말로 주의를 많이 기울여야 한다. 데카르트가 정말로 원했던 것. 그런데 수학적 확실성, 수학적 명증성이다. 이건 우리의 삶에 있어서 일종의 허황된 뼈대와 같다. 삶의 전혀 실현적인 부분이 아니다. 어쨌든 데카르트는 그것을 향해 나아갔다.
154 그러나 그 당시만 해도 나는 아직 수학의 참된 용도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단지 기계학에만 응용되고 있음을 보고서는, 그 토대가 그토록 확고부동함에도 불구하고 왜 아무도 지금까지 이 위에 더 탁월한 것을 세우지 않았는지를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 다음에 신학얘기가 나온다. 155를 보면
155 철학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것만 말하고 싶다.
이 부분을 간과하면 안된다. 데카르트가 생각한 철학이 무엇인가를 놓쳐서는 안된다.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 말하는데 과연 이 사람이 철학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는가
155 오랜 세월에 걸쳐 뛰어난 정신의 소유자에 의해 철학이 연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철학에는 논쟁의 여지가 없는 것이 하나도 없고, 따라서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음을 보고서,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철학을 더 잘 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없었다.
데카르트는 철학적 지식은 의심스럽다 생각한 것. 전통적으로 내려온 철학은 확실하지 않고 의심스럽다. 이제 이 사람은 확실하다고 믿었던 것은 수학 밖에 없다. 그래서 수학적 학문 위에 확실성을 세우려고 하는 시도가 여기서부터 생긴다. 이걸 가지고 철학에서는 Cartesian Self라고 한다. 데카르트적 자아. 데카르트적 자아라고 하는 것은 세계에 관한 일체의 지식을 배제한 채 수학적 확실성과 명증성만 추구하는 자아. 데카르트에 따르면 수학이야말로 확실성과 명증성을 확보하고 있는데 철학은 그렇지 못하다. 철학을 틀림없는 학문으로 만들려면 수학을 토대로 해서 철학을 그 위에 세워야 하겠다고 생각한 것. 그게 바로 데카르트의 시도이다. 이런 시도가 데카르트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이를테면 현대 철학에서 있어서 후설의 현상학적 방법이라는 것이 있다. 후설이 쓴 주요저작이 《데카르트적인 성찰》이다. 그것을 이어받은 사람이 하이데거의 현상학. 역사적인 사태 일체를 의심의 영역에 밀어 넣어버린다. 그런 부분에서 데카르트의 맥락에서 서 있는 것이다. 데카르트를 조금 더 확장시켜 이어받은 사람이 칸트니까 데카르트, 후설, 하이데거. 데카르트의 방법이 후설한테 현상학적 방법이 되고, 그것을 전수받은 사람이 하이데거의 실존철학이다. 하이데거의 방법이 프랑스 현상학자 메를로 퐁티. 현대 프랑스 구조주의자로 이어진다. Cartesian Self가 근대사에서 큰 흐름으로 형성된다. 그리고 비코에서 이어지는 독일의 교양주의 철학이있는데 괴테에서 나타나고 절정에 이른 것이 쉘링과 헤겔이다. 이것을 이어받은 사람이 딜타이와 에른스트 카시러이다.
156 나는 내 스승들로부터 해방되는 나이가 되자 학교 공부를 집어치워 버렸다.
이 말이 근대 철학의 역사를 만든 말. 학교공부라 되어있는데 고전학 공부를 말한다. 즉 이때부터 데카르트는 Cartesian Self를 향해 가는 것. 물려받은 것 일체를 폐기하는 것이다.
156 그리고 내 자신 속에서 혹은 세상이라는 커다란 책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학문 외에는 어떤 학문도 찾지 말자고 다짐했다.
"내 자신 속에서"가 중요한 말. 여기서 데카르트는 폐기하고 남은 선택지가 2개. 내 자신 속에서 발견하거나 세상이라는 커다란 책에서 발견하거나 둘 중 하나. "세상이라는 커다란 책"이라고 하면 나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외부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 차곡차곡 쌓아 올리겠다는 것. 그러면 그 대신에 확실성과 명증성을 포기할 수 밖에 없다. 데카르트는 Cartesian Self로 갔는데 "세상이라는 커다란 책"에 선 사람이 바로 몽테뉴이다. 몽테뉴의 에세이를 읽어보면 가만히 지켜본다. 굉장히 소극적인 것 같은데 사실은 세상이 흘러가는 것을 보고 관조하는 것. 플라톤 적인 의미에서의 이론적 관조가 아니라 세상을 관조하는 것.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의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은 스토아 철학을 담은게 아니라 몽테뉴의 정신을 담고 있는 것. 근대 문학은 리얼리즘에서 시작하고 리얼리즘에서 끝나기 때문에 문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소설의 이론》을 읽고 공부하는 것이 좋다.
내 자신으로 가느냐 세상이라는 커다란 책으로 가느냐. 여기에 157페이지 그림 위의 설명을 보면
157 1619-1620년 겨울 초입, 프랑크푸르트에서 페르디난트 2세의 황제 대관식을 보고난 후에, 데카르트르트는 연구에 몰두할 조용한 곳을 찾았다. 그곳은 울름 근처였는데, 여기에서 그는 열정에 충만한 채로 '혼자서 난로방에 들어 앉아' 학문의 토대를 발견하는 일에 몰두했다.
세상으로 나간 것 같은데 사실은 방안에 들어갔다. 자기 자신으로 간 것. 그래서 이 지점에서 말 그대로 데카르트적 자아를 발견한다. 그래서
158 내가 다른 사람들의 생활방식을 관찰해 보았을 때 나에게 확신을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앞에서 보았듯이 철학자들의 의견 사이에 큰 차이가 있는 것처럼, 이때도 아주 다양한 생활 방식이 있음을 깨달았다.
158 세상이라는 책 속에서 공부하고 얼마간의 경험을 쌓는 데 몇 년의 세월을 보낸 후에 나는 어느 날 나 자신 속에서 연구하기로, 또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을 선택하는 데 정신의 온 힘을 기울이자고 결심했다.
"나 자신속에서 연구한다"는 280페이지의 주해를 보면
280 "나 자신 속에서 연구한다"는 것은 "나 자신을 연구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심리학이나 내성이 아니라 성찰이나 반성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이게 어떤 의미가 있는 지는 말 그대로 《성찰》을 읽어봐야 한다. 《방법서설》은 데카르트가 나 자신속에서 연구하는 방법을 택했다는 것을 알림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166페이지와 198페이지 그림을 보자.
제 2부 방법의 주요 규칙들
166 토마스 아퀴나스의 초상화. 명대와 뱀이 들어있는 종교배척론자의 책 위에 아퀴나스의 왼손이 올려져있다.
198 데카르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밟고 있다. 데카르트의 자연학은 스콜라 철학이 수용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적 원리를 거부하고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와 데카르트가 아리스토텔레스를 발로 밟고 있는 것이 상직적이다.
166 그러므로 우리를 설득하는 것은 확실한 인식이 아니라 관습이나 선례라는 것.
우리가 어떤 서로 대립되는 두 개의 의견이 있을 때 어떤 것이 참인지를 냉정하게 판단하기 보다는 관습이나 선례에 따라 사람들의 의견을 따른다는 것이다. 이것들을 데카르트가 문제 삼은 것. 그래서 스스로 자신을 이끌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167 그러나 나는 어둠 속을 홀로 걸어가는 사람처럼 천천히 나아가고, 모든 것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자고 다짐했다.
참된 방법을 찾아보려고 노력했다. 바로 이어서 논리학, 해석학, 대수학을 얘기한다. 그런 것들을 얘기하고 나서 데카르트가 이른바 《방법서설》의 규칙이라고 하는 것을 말한다.
168 논리학의 그 많은 규칙들 대신에 다음의 네 가지 규칙만으로 충분하다고 믿었다.
첫째, 명증적으로 참이라고 인식한 것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참된 것을 받아들이지 말 것, 즉 속단과 편견을 신중히 피하고, 조금도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명석 판명하게 내 정신에 나타나는 것 외에는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판단을 내리지 말 것.
둘째, 검토한 어려움들을 각각 잘 해결할 수 있도록 가능한 한 작은 부분으로 나눌 것.
셋째, 내 생각들을 순서에 따라 이끌어 나아갈 것, 즉 가장 단순하고 가장 알기 쉬운 대상에서 출발하여 마치 계단을 올라가듯 조금씩 올라가 가장 복잡한 것의 인식에까지 이를 것, 그리고 본래 전후 순서가 없는 것에서도 순서를 상정하여 나아갈 것.
끝으로, 아무것도 빠뜨리지 않았다는 확신이 들 정도로 완벽한 열거와 전반적인 검사를 어디서나 행할 것.
첫째가 명증서의 규칙, 두번째가 분배/분석의 규칙, 세번째가 합성의 규칙, 네번재가 열거의 규칙이다. 핵심적인 것은 2,3번 규칙. 그래서 이 네가지 규칙을 묶어서 분석-종합의 방법이다 라고 말한다.
3부를 보자. 지금 데카르트가 말하는 도덕격률이라고 하는 것은 학문적으로 엄밀하게 세워지지 않았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도덕은 인습 관습으로 풀이된다. 곧 학문적으로 엄밀하지 않다. 관습을 학문적으로 세우려고 노력해봤자 경제학의 개념이 된다. 도덕철학을 공부 하고 싶으면 《이타적 인간의 출현》을 읽는게 좋다. 엄밀하다는 것은 수학적 엄밀성. 도덕의 영역에서는 엄밀성이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데카르트도 그렇게 말을 한다.
제 3부 몇가지 도덕 격률들
173 내 행동이 우물쭈물하지 않기 위해 또 가능한 한 계속 행복하게 살기 위해 서너 가지 격률로 된 도덕을 잠정적으로 마련했는데, 이것을 독자들에게 말해 보겠다.
잠정적이라는 말은 달리 말해서 필연성이 결여되었다는 것이다. 데카르트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자신에서 얻어진 것도 아니고 그냥 잠정적으로 얻어진 것이라는 말인데 그냥 전통적으로 내려온 것들을 받아들였음 뿐이겠다. 이 부분은 학문적으로 따져물을 건 별로 없다. 이 부분이 나중에 발전해서 《정념론》으로 귀결된다. 최근에 번역되어 나왔다. 서양 책을 읽을 때 정념으로 번역되는게 passion. 즉 pathos이다. 이것은 학적인 엄밀함을 결어하고 있는 것. 그리고 데카르트는 이것을 정념으로 서술하고 있다. 데카르트 이 사람에게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윤리학이 없다. 윤리학의 역사와 같은 개론서에도 보면 데카르트가 없다.
그 다음에 177페이지를 보면 데카르트와 서신교환을 한 엘리자베스 왕녀가 있다. 《정념론》을 엘리자베스에게 바쳤다.
177 1643년부터 데카르트와 서신교환을 한 엘리자베스 왕녀. 데카르트는 엘리자베스와 인간의 행복한 삶과 도덕 격률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데카르트 최후의 저작인 《정념론》에는 엘리자베스 왕녀에게 바치는 헌사가 들어있다.
그 다음에 181페이를 보면 성찰에 몰두 할 수 있는 곳으로 네덜란드를 택했다. 실제로 데카르트의 중요한 저작들은 네덜란드에서 만들어졌다. 유럽 프로테스탄트들의 사상이 자유롭게 펼쳐진 라이덴 대학. 사실 프랑스 철학이라고 할 것도 없다.
181 17세기 암스테르담의 전경. 데카르트는 성찰에 몰두 할 수 있는 곳으로 네덜란드를 택했다.
4부를 보면 몽테뉴의 초상화가 나온다.
제 4부 형이상학의 토대
185 데카르트는 몽테뉴와 샤롱의 회의론을 벗어나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절대 확실한 지식을 추구했다.
그냥 몽테뉴를 회의론으로 그냥 함부로 매도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관조론으로 봐야한다. 일단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사실 서양 근대철학의 주류는 데카르트, 칸트주의자들이 잡고 있기 때문에 그 밖의 사람들은 비주류로 보아서 배제한 측면이 있다. 무시할 수 없다. 몽테뉴 같은 사람들도 사실 배워야 하는데 철학과 커리큘럼에서 빠져나가 버렸다.
185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도 이렇게 생각하는 나는 반드시 어떤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이 진리는 아주 확고하고 확실한 것이고, 회의론자들이 제기하는 가당치 않은 억측으로도 흔들리지 않는 것임을 주목하고서, 이것을 내가 찾고 있던 철학의 제일원리로 거리낌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
다시 말해서 내가 명증한 것과 확실한 것을 찾기 위해서 모든 것을 의심하고 있는데 이 의심하고 있는 나마저 의심해버리면 의심의 펀더멘탈마저 없어져 버린다.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라고 말했다. 라틴어로는 cogito ergo sum. 원문 그대로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이 명제를 데카르트의 cogito 명제라고 한다 .이게 바로 데카르트의 자아를 집약하는 것. 생각하는 내가 진리를 인식하는 근거가 되는 것. 일단 내가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 이게 굉장한 것이다. 중세에는 내가 생각할 필요도 없이 진리는 신의 계시로 있었다. 데카르트의 사유는 굉장히 주체적이고 자각적인 사유이다. 문제는 이전 시대에서 채워 넣었던 것을 다 배제했기 때문 이제 뭔가를 채워 넣어야 한다는 것. 이 cogito가 가진 힘은 주관과 객관을 분리한다. 주객분리의 사유라고 얘기하는데 여기서 객이라고 하는 것이 바깥에 있는 것만 가리키는 게 아니라 사유하는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을 가리킨다. 전통적으로 받은 것, 인습적인 것들 모두 의심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굉장히 용감한 발상이고 이 자체로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다음에 5부는 자연학적 문제인데 자연학이라고 한 것은 오늘날 용어는 자연과학이라고 보면 된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윌리엄 하비의 혈액순환설을 데카르트가 받아들였다는 것이 포인트. 이 사람이 했던 생각은 인간의 육체는 철저하게 기계적으로 움직인다는 것. 그리고 정신은 철저하게 비기계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신체와 정신은 작동방식이 전혀 다르다는 것. 심신이원론. 그러니까 방법서설 이 책은 데카르트의 저작이지만 전반적인 개설서의 역할도 하고 한다고 하겠다.
그럼 이 모든 것들을 무엇을 얻을 수 있느냐. 6장을 보면
제 6부 자연탐구를 더욱 진척시키기 위해 요구되는 것 및 이 책의 집필동기
220 인간의 전체 복리를 도모하라는 율법
데카르트가 자연학과 철학을 하는 모든 것을 하는 목적이다. 데카르트에게 철학이라는 것은 인간의 전체 복리를 도모하는 학문이다.
220 우리는 삶에 아주 유용한 여러 지식에 이를 수 있고, 강단에서 가르치는 사변적인 철학 대신에 실제적인 것을 발견할 수 있으며, 이로써 우리는 불, 물, 공기, 별, 하늘 및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물체의 힘과 작용을 판명하게 앎으로써 장인처럼 이 모든 것을 적절한 곳에 사용하고, 그래서 우리는 자연의 주인이자 소유자가 된다는 것이다.
데카르트가 말하는 형이상학은 모두다 사변철학을 대신하는 실제적인 철학이고, 그것의 목적/목표는 삶의 유용한 여러 지식을 통하여 인간 전체 복리를 도모하는데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물체의 힘과 작용을 판명하게 알아야 한다. 데카르트는 자연과학과 철학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알게 되면 우리는 자연의 주인이자 소유자가 된다는 것이다. 즉, 학문을 통해서 자연의 주인이자 소유자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데카르트 철학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그러면 여기서 데카르트에 의해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서열이 달라진다. 이때부터 지식의 나무를 새로 그리는 것이 근대적인 학을 사람들에게 굉장히 중요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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