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고전강의 | 03 단테 신곡 6
- 강의노트/인문고전강의 2013
- 2016. 2. 23.
신곡 : 천국 - 단테 알리기에리 지음, 김운찬 옮김/열린책들 |
강유원, '인문고전강의'
일시: 2013년 2월7일 – 12월 5일, 매주 목요일 오후 7시30분 – 9시30분(총 40주)
장소: 과천시정보과학도서관
* 강의 목차
20130502 13강 단테신곡(1)
20130509 14강 단테신곡(2)
20130523 15강 단테신곡(3)
20130530 16강 단테신곡(4)
20130613 17강 단테신곡(5)
20130620 18강-1 단테신곡(6)
20130620 18강-1 단테신곡(6)
특정한 교회에서 목사님들이 말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본래의 가톨릭 교회와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가지고 있는 교의를 학적인 맥락에서 구분해보도록 하자. 가톨릭은 토미니즘, 토마스주의라고 할 수 있다. 토마스주의의 핵심은 무엇인가? 이성으로써 신앙을 증명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성과 신앙의 조화이다. 중요한 포인트가 여기 있다. 이성과 신앙의 조화가 가톨릭 정통교리의 핵심 내용이다. 그래서 가톨릭에서는 기적에 의한 치유는 용인하지 않는다. 이성과 신앙의 조화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일상적인 실천성으로 집어 넣어보면 반드시 공부를 해야한다는 것. <천국편> 24곡 52행을 보면 베아트리체가 베드로에게 단체를 시험 해보라고 부탁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시험을 보는데 질문 5개다. 여기의 질문 들이 바로 토마스주의의 오리지날을 가져다가 <신곡>으로 각색해서 내 놓은 것. 천국에 왔는데 시험봐야 하는 것. 객관식도 아니라 인터뷰다. 그것도 선생이 업계 최고인 베드로.
이성과 신앙의 조화를 이루어서 광신에 빠져드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 광신은 어떻게 생기는가. <장미의 이름>을 보면 윌리엄 수도사가 하는 말이 있다. 바로 정결함을 얻으려는 조급함이 광신에 이른다는 것이다. 개신교의 광신, 가톨릭의 광신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광신은 바로 정결해지려고 하는 조급함에 온다. 그런데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정결함에 이를 수없다. 그 당시 토마스주의가 완성됨과 동시에 중세에는 이단이 확 생겨난다. 역사의 아이러니. 그래서 끊임없이 공부를 해야한다. 하지 않으면 광신에 들어가는 것. 그래서 24곡에 문답이 나와 있는 것이다. 자신의 말을 조화로운 언어와 훌륭한 말들로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프로테스탄트에는 다섯개의 Sola가 있다. Sola는 유일하게, only라는 뜻의 라틴어이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Sola Fide, 오직 믿음이라는 뜻이다. (Sola Scriptura 오직 성경, Solus Christus 오직 그리스도, Sola Gratia 오직 은혜, Sola Fide 오직 믿음,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 루터의 신조는 오직 믿음이다. 이성과 신앙의 조화라고 할 때 이성이 빠져나갔다. 프로테스탄트가 가지고 있는 핵심교리가 Sola Fide. 오직 성경으로만 그 말이 사실은 오직 믿음 아래로 내려간다. 성서 공부를 안해도 되는 것이 된다.
그러면 여기(가톨릭)에서는 學이 요구되는 것이고, 여기(프로테스탄트)에서는 敎가 요구되는 것. 학과 교의 차이가 여기 있다. 철학에서도 절대적 존재에 대해서 얘기한다. 또 플라톤의 좋음의 이데아도 절대적인 것, 유일하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감싸는 슈퍼 보자기같은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학의 영역에서 다룬다. 왜 그런가. 에로스의 사다리를 보면 이성적인 탐색이 선행되었을 때 그것이 튀어올라갔을 때 '갑자기' 나타나는 것. 처음부터 모든 텍스트를 폐기하고 '갑자기' 올라가지 않는다. 그러면 좋음의 이데아로 올라가기 위해서 하는 것 중에 처음에 잘못 알고있는 것도 있을 것이다. 이게 중요한 포인트인데 정결함에 이르러는 조급함을 염두해 보면 달리말하면, 조급함을 가진 사람은 거짓과 사소한 악을 용납하지 않는다. 절멸시키려는 것. 이성이라는 것은 어느날 갑자기 진리가 갑자기 파고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이성이라는 것이 가지고 있는 가장 강력한 위력은 거짓에 우리가 직면했을 때 일단 그것이 거짓인 줄 모르고 받아들였다가 그것이 거짓인 것들을 알아차리는 그 지난한 과정을 끊임없이 조급함 없이 견뎌내는 것이다. 그게 바로 이성이다. 이런 개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허위를 허위로써 판별해내는게 하루이틀에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계속해서 마음 한구석에 대단한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접근하면서도 다른 마음 한구석에는 대단한게 아닐 수 있다는 의식을 갖고 있는 것. 정신적으로 자아가 분열된 상태인데 이걸 견디어내는 힘이 이성이다. 이성은 어떤 판별이 아니라 힘. 한국이 이런 걸 못견뎌하는데 오답을 못견디게 만들어놔서 그렇다. 배운 사람들이 쉽게 옴진리교에 들어가는 것도 바로 그 때문. 이성이 없기 때문이다. 하루키 <약속된 장소에서>를 보면 과학자들이 옴진리교에 빠진다. 왜 그런 것인가, 이성이 없는 것일까. 맞다. 이성이 없는것이다. 물리학의 어려운 방정식을 푸는게 이성이 아니라 이성은 허위를 받아들인 후에도 계속해서 그것이 허위일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안고 살면서 그것을 결국에는 또 다른 허위로 대체될지언정 계속해서 개선해나가려는 버티려는 참을성이다. 그것을 이성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정결함에 이르려는 조급함에 대립되는 단어가 이성이다. '이성을 찾으세요' 이렇게 말하면 합리적인 거 좋아하나보다 이런게 아니다. 이성의 필연적인 짝은 불안이고, 이 불안을 순식간에 잠재워는 것이 퓨리티다. 이성을 가진 자가 그 이성을 평생을 유지핮하지 못하면 순식간에 그 불안(angst)이 이성을 잠식해버린다. 파스칼의 <팡세>를 보면 불안에 대해서 나온다.
파스칼, <팡세>
391 인간은 자연에서 가장 연약한 한 줄기 갈대일 뿐이다. 그러나 그는 생각하는 갈대이다. 그를 박살내기 위해 전 우주가 무장할 필요가 없다. 한번 뿜은 증기, 한방울의 물이면 그를 죽이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우주가 그를 박살낸다 해도 인간은 그를 죽이는 것보다 더 고귀할 것이다. 인간은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그리고 우주가 자기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주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존엄성은 사유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가 스스로를 높여야 하는 것은 여기서부터이지, 우리가 채울 수 없는 공간과 시간에서가 아니다. 그러니 올바르게 사유하도록 힘쓰자. 이것이 곧 도덕의 원리이다.
파스칼은 하느님을 믿는 쪽으로 갔다. 어떤 점에서 보면 파스칼을 현대 실존철학의 비조(鼻祖)라고 할 수 있다. 끊임없이 불안하고 이겨내기 위해서 탐구를 하고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완전한 진리에 이를 수 있으리라는 희망. 계속하는 것. 이게 어쩌면 참된 신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참된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신앙이 아니다. 과연 내가 선하게 살고 있는지를 매일같이 체크하는 사람이 선한 사람인 것. 이성주의를 이야기한다해서 허위와 사소한 악을 용납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뗄 수 없다는 것. 우리 몸에 그냥 떼처럼 붙어 있는 것.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일거에 해소할 수 있다고 하는게 아니다. 이성의 뒷면에 있는 불안이라는 문제는 이성으로서만 해결할 수 있다. 일거에 해결하고자 하여 퓨리티로 가버리면 이성을 버리는 것. 그랬을 때 우리는 반지성주의다라고 부른다.
노자의 도법자연(道法自然). 여기서 법은 동사로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는 말이다. 플라톤이 말하는 paradeigma, 성리학에서 중요텍스트인 천명지위성( 天命之謂性). 주희가 예기(禮記)에 수록되어 있었던 대학과 중용을 엮어 논어, 맹자와 함께 사서(四書)를 만들었다. 여기서 중용의 첫머리가 천명지위성이다. 하늘의 명을 일컬어 성이라 한다는 뜻. 천명은 하늘이고, 성은 인간영역에 있는 것이다. 천명을 천도라 하기도 하고 천리라고 하기도 한다 .하늘의 이치, 하늘의 올바름, 명을 내리 받아서 인간의 성으로 삼는다. 이게 지금 도법자연과 똑같은 의미. 이때 자연이라는 말은 천을 가리키는 말. 한글자로 쓰면 천이고, 두글자로 쓰면 자연인 것. 객관적으로 저 세계에 존재하는 올바름 일반을 가리킬 때 쓰는 말. 그런데 그러니까 이걸 그대로 밀고가면 주자의 도학(道學)이다. 천이나 천명, 천도는 자연을 숭배하는게 아니라 paradeigma 본으로써 받아들이는 것이다. 플라톤 <국가> 9권에서 글라우콘에게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것과 같은 얘기다.
플라톤, <국가>
592b 그렇지만 그것은 아마도 그것을 보고 싶어하는 자를 위해서, 그리고 그것을 보고서 자신을 거기에 정착시키고 싶어하는 자를 위해서 하늘에 본(paradeigma)으로서 바쳐져 있다네. 그러나 그게 어디에 있건 또는 어디에 있게 되건 다를 게 아무것도 없으이. 그는 이 나라만의 정치를 하지, 다른 어떤 나라의 정치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네.
그런데 후대로 가면서 이 도법자연에서 노자에 나오는데 도교가 된다. 지금 주희는 道學이라고 했는데 노자 이후에 이 분야가 道敎로 불린다. 敎와 學은 어디 차이인가. 이때가 되면 천이 숭배의 대상이 되는 것. 똑같은 절대자, 좋음의 이데아인데 그것을 숭배한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가르침의 주체가 하느님인 것. 學은 하늘이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배우는 것. 도교와 도학은 내용상은 같지만 인간이 어떤 짓을 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이 차이가 그냥 차이가 아니라 엄청난 차이. 불교는 본래적인 의미에서 불학이다. 가르침의 주체가 없고 수행하는 불자만 있기 때문이다. 본래적인 의미에서 교가 성립이 안된다. 그것을 이름은 불교라 하지만 끊임없이 학의 입장에서 서서 나아가는 것. 가톨릭은 학의 성격을 많이 가지고 있는 교다.
그런데 재밌는 얘기를 하자면 퇴계 이황 제자들이 좌파와 우파가 있는데 좌파가 남인이다. 퇴계가 중요하게 여긴 텍스트가 심경(心經)이다. 마음을 날마다 닦고 간다. 갈다보면 천에 이를 것이다라는 것이 있는데 남인은 천이 우리를 가르친다 까지 간다. 그러면 주자학을 넘어가 버리는 것. 주자학은 학의 입장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면 왜 남인들 중에 천주교로 개종한 사람이 많이 나왔는지 알 수 있겠다.여기는 도학인데 교의 수준까지 간 것. 기독교와 유사점이 생기는 부분이다. 우리나라 가톨릭은 천주교. 천주가 가르친다. 천주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버리면 그때는 학을 넘어가는 것. 퇴계의 좌파 남인들이 천주교와 만나는 지점이다. 처음에는 천주학인줄 알았는데 교가 되는 것. 그리고 동학을 보면 처음에는 동학이라고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천도교가 된다. 조선시대에 교를 쓰면 종교영역으로 가는 것. 동학은 최재우인데 최재우는 유가가 원류. 거기서 하늘이 우리를 가르친다고 가버리면 천도교가 되는 것.
한국에서는 퓨리티에 대한 다양한 집착들이 있다. 그래서 이성주의가 번성하기 어렵다. 허위를 허위로써 분명하게 허위라는 것이 판명날때까지 견디는 힘, 그 힘이 약하다. 그 힘을 견디자고 하는 게 필사를 하라는 것. 교와 학의 차이를 항상 마음에 두어야 한다. 오늘 특히나 기억해 두어야 하는게 이성이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것. 이 불안을 이겨내는 힘이 이성이다. 이것이 결국 학을 만들어 내는 것. 그래서 '학적 인식에 대하여' 부제를 달고 있는 헤겔 <정신현상학> 서문을 보면 학적 인식이라는 것은 절대적 진리에 이르는 절망과 회의의 과정이다 라고 나온다. 그 절망과 회의를 견뎌내는 것이 이성. 이성주의라고 하면 오로지 이성만이 참된 인식과 진리를 가져다준다는 태도인데 그 것은 결국 허위가 허위로써 밝혀질 때까지는 일단 붙들고 앉아서 잠정적으로 견뎌내는 것. 그 힘을 견디는 것이 학적인 태도이다. 이성적인 태도들을 갖추기가 어렵다면 학문적인 성취를 이루기가 어렵다.
송나라 도학의 성립을 뒷받침한 여러가지 맥락들이 있다. 불교에서 들어온 전통도 있고, 도교의 음양오행설도 있다. 도학을 설명할 때는 이런 전체를 설명해야 도학이라는 사상이 설명되는 것. 그러나 일단 성립된 후에는 이걸 다시 불교로, 도교로 다시 환원시킬 수 없을 만큼 변용과 변형이 일어나서 고유한 학설로 정립된 부분이 있다. 그러면 사상이나 시대로 환원되지 않은 보편적인 학설이 하나 남는다. 그걸 학이라 하고 다르게 말하면 철학이라 한다. 사상사의 맥락에서 읽는다라고 하면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이다. 플라톤의 사상이라 하면 펠로폰네소스 전쟁시대에 살았다던가 소크라테스의 방법론이라고 하는 것들도 말하고는 하는데 완전히 플라톤만의 것들, 좋음의 이데아, 이런 것들. 성립 시킨 것들을 다 털어내고도 충분히 성립할 수 있는 남는게 철학이다. 철학고전강의를 할때는 플라톤이 언제 살았느냐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순수한 의미에서의 철학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버지가 의사인지는 궁금할 필요가 없는 것. 그들이 내놓는 것들을 시대적인 맥락을 모두 끊어내고서도 성립하는 그 형이상학, 그 부분만을 우리가 문제삼아 읽어볼 수도 있는 것이다. 오로지 나라고 할 수 있는 그 무엇. 내가 이 세계에서 일시적으로 우연적인 존재로서 존재하였으나 내가 죽을 때 관 뚜껑에 써달라 하는 것. 나의 고유한 무엇이다 하면 시간과 공간과 상관없이 성립되어 있는 그것. 그것이 철학. 그래서 철학을 공부하는 것이다.
이제 <천국편> 24곡을 보자. 베르로와의 문답.
첫번째 질문.
Dante, Divina Commedia, Paradiso.24.51
「착한 그리스도 신자여, 믿음이 무엇인지
밝혀 보아라.」 그 말이 흘러나오는
빛을 향하여 나는 고개를 들었다.
Dante, Divina Commedia, Paradiso.24.64
믿음이란 바라는 것들의 실체이며,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의 확증이니,
그것이 믿음의 본질이라 생각합니다.」
믿음이란 바라는 것들의 실체이며,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의 확증, 즉 믿음이란 소망이고, 구원이라는 뜻이다.
두번째와 세번째 질문이 89행에 나온다.
Dante, Divina Commedia, Paradiso.24.89
「모든 덕성이 토대로 삼는
그 귀중한 보석은 어디에서 그대에게
왔는가?」 이에 나는 「옛날 양피지와
새로운 양피지 위에 널따랗게
퍼져 나간 성령의 풍족한 비가,
나에게 그토록 날카롭게 결론짓게 한
논증이며, 그것과 반대되는 모든
증명은 나에게 빈약해 보입니다.」
그러자 나는 들었다. 「그렇게 결론짓게
만든 옛날 명제와 새로운 명제를
그대는 왜 하느님의 말씀으로 여기는가?」
나는 「나에게 진리를 열어 주는 증거는
뒤따른 기적들인데, 그 앞에서 자연은
쇠를 달구거나 모루를 치지 못합니다.」
여기서 보석은 믿음을 말한다.
옛날 양피지와 새로운 양피지, 옛날 명제와 새로운 명제는 구약과 신약.
네번째 질문을 보자.
Dante, Divina Commedia, Paradiso.24.103
「그 기적들이 있었다고
누가 그대에게 장담하는가? 다름 아니라,
증명해야 할 진리가 그렇게 말할 뿐이다.」
나는 「만약에 기적들이 없는데도 세상이
그리스도교를 향했다면, 그것이 기적이니
다른 것은 백분의 1도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가난하고 배고픈 채, 지금은
가시나무가 되었지만 전에는 포도나무였던
좋은 나무를 심으려고 밭에 들어갔지요.」
처음에는 믿음의 본질을 묻고, 성서를 물었는데 네번째 질문을 보면 이제 기적을 묻는다.
5번째 질문.
Dante, Divina Commedia, Paradiso.24.122
「그대의 마음과
사랑을 속삭이는 은총은 지금까지 당연히
필요한 만큼 그대 입을 열어 주셨으니,
나는 그대가 밖으로 표현한 것을
인정하지만, 이제 그대의 믿음이 어디서
왔는지, 그대가 믿는 것을 밝혀 보아라.」
나는 말했다. 「오, 거룩한 아버지, 더 젊은
발보다 먼저 무덤에 들어갈 정도로
당신이 믿었던 것을 보는 영혼이시여,
당신은 망설임 없는 내 믿음의 본질을
내가 명백히 밝히길 원하시고, 또한
그런 믿음의 원인에 대해 물으셨지요.
Dante, Divina Commedia, Paradiso.24.130
대답하겠습니다. 나는 사랑과 뜻으로
움직임 없이 온 하늘을 움직이시는,
유일하고 영원하신 하느님을 믿습니다.
나는 그런 믿음에 대한 물리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증거들은 없지만,
모세와 예언자들, 시편들을 통해,
복음서들과, 성령이 그대들을 밝혀 주신
뒤에 그대들이 썼던 것들을 통해
하늘에서 내려온 진리가 나에게 전해 줍니다.
'움직임 없이 온 하늘을 움직이시는' 주석의 주석부분을 보자. 모든 하늘을 움직이게 만들지만, 자신은 전혀 움직이지 않는 이라는 뜻이다. 지금 여기 주석이 '사랑과 뜻으로'에 붙은 주석이 아닌 '움직임 없이 온 하늘을 움직이시는' 이 부분에만 붙은 주석이다. 부동의 원동자, 이 부부은 아리스토텔레스다. '유일하고 영원하신 하느님' 이 부분은 다시 기독교. 다시말해서 '사랑과 뜻으로 유일하고 영원하신 하느님'은 기독교 교리에 들어있는 것인데, 그 사이에 '움직임없이 온 하늘을 움직이시는'을 붙어서 여기서 토마스 주의를 드러내 보인다. 이성과 신앙의 조화라고 할 때 이성의 구체적인 사료의 원천은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가 12세 기독교에 들어왔을 때는 무지하게 고통스러운 수용 과정을 거쳤다. 이 부분에서 단테가 중세 토마스주의의 핵심내용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러고 나서 단테는 베드로와의 문답을 통해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천국에는 10개의 하늘이 있다. 10번째 하늘이 최고천이고, 그 최고천에 가면 성삼위일체가 있다.
26곡을 보자. 24곡에서 베드로와 문답을 하면서 무엇이 천국의 기본자격인지 깨달았다. 그리고 여기서부터는 단테의 배신, 신비주의의 샛길로 빠진다. 그렇다고 다 신비주의는 아니다. 처음부터 신비주의였다면 이 텍스트는 읽을 필요가 없는 것. 그런 것이 아니라 신앙 문답을 24곡에서 하면서 이성적 단계가 분명히 있었다. 거기까지 하고 단테가 플라톤 식 용어로 하자면 '갑자기' 아름다운 것을 만나는 영역을 집어넣어버린 것. 그리고 여기서 베르나르두스가 개입되어 들어온다.
우리는 가톨릭교도가 아니니까 별로 심각하게 느껴지지 않는데 그 당시는 가톨릭교도들이 독자였다. 베드로와 5개의 문답을 하는 장면을 읽었다고 생각보자. 굉장히 소름이 끼치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꺼져 버린 시력'이 나온다. 눈이 맛이 간 것. 왜 갑자기 이렇게 되었는가. 서구사상사, 서구 텍스트의 맥락에서 '꺼져버린' 이러면 바로 오이디푸스를 떠올려야 한다 . 저 세상사람이 되는 것. 여기서부터는 인간의 이성적인 대화로서 해명될 수 없는 영역에 들어간다는 것을 '꺼져 버린 시력'을 통해 얘기하는 것이다.
Dante, Divina Commedia, Paradiso.26.1
꺼져 버린 시력 때문에 걱정하는 동안
내 눈을 꺼뜨렸던 눈부신 불꽃에서
목소리가 들려와 내 관심을 끌며
말했다. 「나로 인해 소진된 시력이
다시 회복될 때까지 이야기를
하며 보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럼 그대의 영혼은 어디를 겨냥하는지
말하라. 또 그대 시력은 잠시 꺼졌을 뿐
완전히 죽지 않았음을 명심하여라.
'잠시 꺼졌을 뿐 완전히 죽지 않았음을 명심하여라' 그러면 여기서부터 단테의 시력이 어떠한 방식으로 회복되는지, 그 시력을 회복하게 해주는 그런 요체들은 무엇인지에 대해 논의를 할 필요가 있겠다. 단테가 이 시력을 다시 회복하는 데 그 시력은 인간의 눈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신적 봄'이다. 본다는 것. 신적인 입장에서 본다는 것. 이 본다는 것은 테이레시아스의 맥락을 떠올리면서 읽어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이제 30곡.
30곡 설명부분.
원동천 천사들의 빛이 서서히 사라지고 베아트리체는 더욱 아름다운 모습으로 빛난다. 단테와 베아트리체는 최고의 하늘 엠피레오로 올라간다. 그곳은 눈부시게 빛나는 빛의 강물 같고, 거기에서 생생한 불꽃들이 튀어나온다. 한가운데의 빛을 중심으로 천사들과 축복받은 영혼들이 장미꽃 같은 형상으로 둘러싸고 있다. 베아트리체는 단테를 그 안으로 데려간다.
여기서부터 33곡까지는 뽀사시의 절정.
Dante, Divina Commedia, Paradiso.30.39
「가장 커다란 물체에서
우리는 순수한 빛의 하늘로 나왔으니,
사랑으로 가득한 지성의 빛이요,
기쁨으로 가득한 진짜 선의 사랑이며,
온갖 달콤함을 능가하는 기쁨이지요.
여기에서 그대는 천국의 양쪽 무리를
볼 것인데, 하나는 최후의 심판 때
보게 될 모습들로 되어 있답니다.」
최고천에서 만나는 것.
Dante, Divina Commedia, Paradiso.30.52
「이 하늘을 평안케 하는 사랑은
당신의 불꽃에 초를 준비시키려고
저런 인사로 당신 안에 맞이하십니다.」
이렇게 간략한 말이 내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나는 금세 내 능력보다
훨씬 위로 상승하는 것을 깨달았고,
새롭게 되찾은 시력으로 불탔으니,
제아무리 눈부신 불꽃이라 해도
내 눈이 견디지 못할 것은 없었다.
'간략한 말' 처음에 베아트리체는 베르길리우스에게 '훌륭한 말'이라는 표현을 했는데, 여기서 베아트리체는 지금 '간략한 말'이라 한다. 왜냐하면 이제 여기는 훌륭한 말이 더이상 통용되지 않는 곳. 훌륭한 말이 필요없는 게 아니라 이를 거치고 난 후 나중에 훌륭한 말의 최고의 절정이인 베드로와의 문답 이후. 그 다음에는 이제 말을 넘어가는 차원에 이르렀다. 그래서 '간단한 말'이다.
'새롭게 되찾은 시력' 이제 단테는 다시 시력을 되찾았다. 아까는 '꺼져버린 시력'을 걱정했는데 이제 단테의 능력이 상승했다. 잠시 22곡으로 되돌아가보자.
Dante, Divina Commedia, Paradiso.22.124
베아트리체가 말을 꺼냈다. 「그대는
마지막 구원에 가까이 있으니,
맑고 날카로운 눈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 안에 들어가기 전에
저 아래를 바라보고, 이제 그대의
발아래 어떤 세상이 있는지 보아요.
'맑고 날카로운 눈'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Dante, Divina Commedia, Paradiso.22.152
우리를 무척 난폭하게 만드는 꽃밭은
언덕에서 강어귀까지 샅샅이 드러나 보였다.
그리고 나는 아름다운 눈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눈'
꽃밭은 지구를 가리킨다.
베아트리체의 눈. 베아트리체의 눈이 아름답다는 것과 맑고 날카로운 눈. 아름답다는 것은 플라톤 적인 의미의 아름다움의 이데아와 같은 의미. 이걸 갖춰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다시 30곡에 와서 단테의 눈이 밝아졌다. 그러다 보니 시력이 상승되기 전에는 볼 수 없었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Dante, Divina Commedia, Paradiso.30.88
그렇게 내 눈이 그 빛의 물결을
마시자마자 처음에는 기다랗게
보이던 물결이 둥글게 보였다.
또한 가면을 쓰고 있던 사람들이
자기 것이 아닌 모습을 벗으면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보이듯이,
그렇게 꽃들과 불꽃들이 나에게는
커다란 축제로 바뀌었으며, 나는
하늘의 두 궁전을 분명히 보았다.
오, 진정한 왕국의 높은 승리를
나에게 보여 주신 하느님의 빛이여,
내가 본 대로 말할 힘을 주소서!
이제 진정한 의미에서의 마지막 구원을 만나는 것, 신을 만나기 위해서는 지식도 요구된다. 그 동안 거쳐온 모든 과정, 학의 여정을 거쳐왔다.
31곡 설명 부분
축복받은 영혼들은 새하얀 장미 모양으로 하느님을 에워싸고 있으며, 그 사이로 천사들이 날아다니고 있다. 단테가 넋을 읽고 바라보는 동안 베아트리체는 자기 자리로 올라가고, 성 베르나르두스가 나타난다. 단테는 베아트리체에게 감사의 말을 올린 다음, 베르나르두스의 권유에 따라 장미 사이에서 성모 마리아를 본다.
성 베르나르누스가 나타는 지점이다. 왜 베아트리체가 자기 자리로 가느냐. 여기서부터는 베아트리체도 안되는 곳. 그래서 막판에 베르나르두스가 나온다.
Dante, Divina Commedia, Paradiso.31.56
내 여인에게 질문하기 위해, 나는
다시 불붙은 의욕으로 몸을 돌렸다.
그런데 내가 찾는 것과는 달랐으니,
베아트리체를 보리라 믿었는데, 영광의
사람들처럼 옷을 입은 노인을 보았다.
그의 눈과 뺨에는 너그러운 기쁨이
넘쳐흘렀고, 자애로운 아버지에게
어울리는 경건한 몸가짐이었다.
「그녀는 어디 있습니까?」 나는 곧바로
말했고, 그는 「그대의 바람을 채워 주려고
베아트리체는 나를 내 자리에서 불렀으니,
최고 높은 계단으로부터 셋째 둘레를
바라본다면, 그녀의 공덕으로 정해진
옥좌에 앉아 있는 그녀를 다시 보리라.」
나는 대답도 없이 눈을 들어 올렸고,
자신에게서 영원한 빛을 반사하며
후광을 만들고 있는 그녀를 보았다.
'영광의 사람들처럼 옷을 입은 노인'이 나온다. 베르나르두스이다.
노인이 베아트리체를 보라고 하자 '눈을 들어올렸고' 그녀를 보았다. 이제 단테는 자기가 그동안 어떠한 여행을 해왔는지 노인에게 얘기한다. 79행부터 87행까지가 단테 스스로가 정리하는 지옥과 연옥과 천국에 이르는 과정이다. 여행의 의미랄까.
Dante, Divina Commedia, Paradiso.31.79
「오, 내 희망에 활력을 부여하고,
나의 구원을 위해 지옥에 발자취를
남기는 것을 감내했던 여인이여,
지금까지 내가 본 모든 것은 바로
그대의 능력과 너그러움에 의한
은총이자 힘이라 생각합니다.
그대는 그대가 할 수 있었던
그 모든 길, 모든 방법을 통하여
나를 하인에서 자유로 이끌었습니다.
그대의 너그러움을 나에게 간직하여
그대가 건강하고 좋게 만들어 준
내 영혼이 육신에서 풀려나게 해주오.」
'하인에서 자유로', 영혼의 자유, 의지의 자유이다. 지금까지 모든 여행의 성과는 노예로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영혼, 지성의 자유룰 얻었다는 것. 그것이 인간으로서 학으로 하여 이룰 수 있는 최고의 자리이다. 공부를 도대체 왜하는가, 바로 지성의 자유를 얻기 위함이다. 단테 입장에서 '상승'시키는 것이고, 우리들 입장에서는 학과 교의 결합이 일어나는 지점이 이 부분이다. 그런데 단테가 95행에서
Dante, Divina Commedia, Paradiso.31.95
그러자 성스러운 노인이 말했다.
「기도와 성스러운 사랑이 나를 보낸
그대의 여행을 완벽하게 마치도록,
이 정원을 그대의 눈으로 날아 보아라.
이것을 보면 그대 눈이 하느님의 빛으로
높이 오르는 데 적합하게 될 것이다.
내가 온통 사랑으로 불타는 하늘의
여왕께서 모든 은총을 베푸시리니,
나는 충실한 베르나르두스이기 때문이다.」
'그대의 여행을 완벽하게 마치도록, 이 정원을 그대의 눈으로 날아 보아라.' 노인이 보기에는 단테가 여행을 완전하게 마치지 않았다. 교로 올라가야 한다. 신비주의. 학을 넘어서는 것. 단테입장에서는 넘어가는 것. 우리는 결합인 것.
'이것을 보면 그대 눈이 하느님의 빛으로 높이 오르는 데 적합하게 될 것이다.' 앞에서는 눈이 밝아야 맑아야 아름다운 것을 볼줄 알아야 된다고 했고, 단테도 어느정도 눈이 좋아진줄 알았는데 베르나르두스는 아직 안된다고 한다. 눈을 연마하고 또 연마해야 한다.주석 18을 보면 하느님의 빛을 반사하는 축복받은 영혼들을 바라봄으로써 시력이 더욱 강화되어야 하느님을 직접 바라볼 수 있게 된다고 나와있다.
'내가 온통 사랑으로 불타는 하늘의 여왕께서 모든 은총을 베푸시리니' 베르나르두스는 성모 마리아 숭배를 널리 확산시킨 사람이다. 중세사상의 세가지 흐름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안셀무스는 정통교리, 페트루스 아벨라르두스(Petrus Abaelardus)는 이성파, 베르나르두스는 신비주의파이다. 성모 마리아를 통하여만 진정으로 하느님을 뵐 수 있다는 것.
Dante, Divina Commedia, Paradiso.31.103
가령 크로아티아에서 우리의
베로니카를 보려고 오는 사람이
옛 명성으로 보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그것이 공개되는 동안 마음속으로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 진정한 주님,
당신의 모습이 이랬습니까?> 말하듯이,
이 세상에서 명상하며 그런 평화를
맛보았던 그분의 생생한 사랑을
바라보며 나 역시 그러하였다.
'이 세상에서 저 세상의 평화를 맛보았다.' 이게 신비주의. 현재 내가 육신을 가지고서 살고 있는 이 세계 안에서 육신을 버리지 않는 한 피안의 영원함을 알 수 없다. 영원한 평화라는 것을 육신 안에서 맛본다는 것 자체가 신의 입각점에서 보면 하루살이 불과한 것. 형이상학은 신적 입장에 올라선다고 말하는데 인간이 업신 여겨지는 것. 하루살이로 보인다. 하지만 하루살이도 삶이다. 하루살이도 하루만큼은 충실한 삶. 그래서 업신 여길 수가 없는 것이다.
32곡을 보자.
Dante, Divina Commedia, Paradiso.32.1
자기 기쁨의 원천에 몰입해 있던
그 명상가는 스승의 임무를 맡아,
이렇게 거룩한 말을 시작하였다.
이제 훌륭한 말이 아닌 '거룩한 말이다'.
Dante, Divina Commedia, Paradiso.32.148
그대를 도울 수 있는 여인의 은총이다.
그러니 그대는 정성껏 내 말을 따르고
마음이 내 말에서 떠나지 않도록 하라.」
그리고 이렇게 거룩한 기도를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33곡은 베르나르두의 기도로 시작한다. 베르나르두스가 기도를 마치고 이제 단테의 눈이 맑아졌다.
Dante, Divina Commedia, Paradiso.33.49
베르나르두스가 위를 보라고 눈짓하며
나에게 미소를 지었으나, 나는 벌써부터
그분이 원하는 대로 하고 있었으니,
나의 눈은 점차 맑아지면서
그 자체로서 진리이신 고귀한 빛의
빛살 안으로 조금씩 조금씩 들어갔다.
그런데 이때부터 단체가 보는 것은 언어를 초월하는 것.
Dante, Divina Commedia, Paradiso.33.55
이때부터 내가 보았던 것은 언어를
초월했으니, 그 광경에는 언어도 굴복하고,
그 엄청남에는 기억도 굴복해야 하리라.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관조하는 것. 앞에서 '명상'으로 번역된 것은 다 철학적인 맥락에서는 관조를 말한다.
Dante, Divina Commedia, Paradiso.33.142
여기 고귀한 환상에 내 힘은 소진했지만,
한결같이 돌아가는 바퀴처럼 나의
열망과 의욕은 다시 돌고 있었으니,
태양과 별들을 움직이는 사랑 덕택이었다.
'환상'이라고 하는 이 단어가 언뜻 부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는 데 영어판을 보면 비젼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덕택'이라는 표현보다는 '사랑과 함께' 라고 번역해야 한다.
이렇게 됨으로 해서 단테는 신의 의지와 합치되는 단테의 의지와 열망은 '태양과 별들을 움직이는 사랑과 함께' 간다.
그러면 여기서 단테가 처음에 의도하였던 deificātiō 신성화가 완결된 지점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까지가 천국편 마지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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