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고전강의 | 02 안티고네 2
- 강의노트/인문고전강의 2013
- 2014. 7. 11.
오이디푸스왕 안티고네 외 - 소포클레스 외 지음, 천병희 옮김/문예출판사 |
강유원, '인문고전강의'
일시: 2013년 2월7일 – 12월 5일, 매주 목요일 오후 7시30분 – 9시30분(총 40주)
장소: 과천시정보과학도서관
* 강의 목차
20130418 11강 안티고네(1)
20130425 12강 안티고네(2)
20130425 12강 안티고네(2)
소포클레스 비극작품을 간단하게 말하면 아테나이 최전성기의 가장 prominent한 지배적인 양식, 이 양식에 영향을 받지 않은 텍스트가 없을 정도이다. 가장 영향을 받은 작품이 플라톤 초기 대화편. <크리톤>, <소크라테스의 변론>, <파이돈>.
소포클레스의 비극 3부작인 안티고네고네(Antigone), 오이디푸스왕(King Oedipus), 콜로너스의 오이디푸스(Oedipus at Colonus)의 구조가 그대로 플라톤 초기 대화편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 대화편을 보면 코로스도 없고 막간도 없는 것 같은데 자세히 살펴보면 코로스가 있다. 플라톤 당시에는 이 대화편과 비극작품의 장르 구분이 없기 때문에 더 대중적이고 지배적인 비극을 공부하고 이어서 플라폰을 초기대화편이 이어서 할 수 잇다.
그런 과정에서 지금 <오이디푸스 왕>에서도 뚜려하게 들어나오 <안티고네>에서도 드러나는 것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크레온으로 대표되는 국가의 위력 앞에서도 굽히지 않고 계속 내세운다. 물론 그것의 정당화의 근거를 신의 법이라고 하는 것에 두고 있기는 하지만 굉장히 대단한 것. 또 중간에 보면 이스메네가 바뀐다. 언니편을 든다. <일리아스>에서는 나타나지 않던 특징들. <일리아스>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캐릭터가 변하지 않는다. 이런 것들이 소포클레스의 작품들에서 나타나는 미묘한 변화지만 대단히 강력한 것. 아테나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자기를 발견하는 과정들을 드러내는 텍스트들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 말들이 집약이 되어 소크라테스에 오면 '너의 영혼을 돌보아라'라는 말이 나오는 것. 너의 영혼이라는 것은 호메로스 서사시에서는 푸시케라는 것이 살아있는 사람의 소마, 몸뚱아리에다가 생동감을 불어넣어주는 것에 불과했는데 <파이돈> 편에 와버리면 소크라테스는 나의 소마가 죽는다해도 영혼은 불멸한다고 말한다. 내 육체와는 무관하게 한 인간의 고유한 정체성을 형성하는 핵심적인 요소로서 푸시케가 재구성 된다. 그래서 그때부터 서구의 정신철학이 시작되는것.
소크라테스가 서양철학의 아버지라고 할 때 서양의 모든 철학의 아버지는 아니다. 바로 정신 철학의 아버지. 부르노스넬 <정신의 발견>을 보라.. 정신이 무엇인가.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육체하고는 무관하게 정신적인 것으로서 그 사람의 모든 것을 표상할 수 있다고 하는, 캐릭터라이징할 수 있다고 하는 생각, 그것이 정신이다. 그 생각이 플라톤에 와서 이데아로 표상되고, 그리고 신플라톤주의로 이어져서 기독교로 이어진다. 죽은자의 영혼이 천국에 간다는 말. 예수는 지극히 프랙티컬한 얘기만 하였는데 바울 신학에 들어오면서 하나의 신비주의적이고 정신주의의 흐름이 생긴다. 서양사람들이 동양사람들보다도 훨씬 더 정신주의적이다. 몸을 업신여기는 경향이 더 강하다.
<안티고네>는 국가가 규정한, 크레온이 여기서 참주는 아니다, 크레온으로 대표되는 국가의 명령에 어디까지 시민들은 복종할 수 있는가의 문제. 지금 우리가 살고있는 시대가 허술해 보이기는 하지만 만약에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이승만 당시의 보도연맹 학살되던 시기라고 해보자. 예를 들어서 빨갱이로 몰려서 죽었다고 하면 파수꾼이 지키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선생님 시신인데 묻어야겠다 라고 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60년이 지나기 전에 겪었다. 실제로 경상남도 지역을 취재한 이야기, 기사화할 수 없는 비극들이 많다. 그런 것들이 기사화되면 그 당시에 토벌대 쪽에 섰던 사람들과 빨갱이로 몰려 죽은 사람들의 자손들의 새로운 원한관계가 생기기 때문.
이게 지금 transitional justice 이행기적 정의라고 부른다. 이게 우리나라에서는 심각한 문제인데 주제화해서 다루고 있지는 않고 있다. 반민족 처벌법. 이렇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잘못하면 끝없이 소급되기 때문. 왜냐하면 우리가 해방이 된 다음에 한반도에 조선왕조를 복권시키려고 했다면 문제가 간단하다. 일본에 들러붙었던 놈들을 족치면 끝난다. 그런데 전혀 새로운 종류의 민주 공화국을, 이 땅에 한번도 새워진 적이 없는 체제를 세우려했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생기는 것.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세웠는데 민주공화국 전통도 투표를 해본적도 없다. 한마디로 맨땅이다. 그러니까 관료도 만들어야 하고, 친일파를 옹호하는 논리가 여기서 나온다. 그리고 어느 선까지 처단 할 수 있는가의 문제, 체제 이행기의 문제이며 동시의 레짐의 문제다.
그렇다면 왜 이 문제가 여기서 그 당시에 제기 되었는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헬레니카를 읽어보면 그것이 아테나이의 당면 문제였기 때문. 민주정 1년, 참주정 1년 체제가 왔다갔다 했다. 참주정 시기에도 참주에게 완전히 붙어서 헤택을 입은 자들, 수동적으로 옆에서 구경한 자들, 희생자들 이렇게 셋으로 나뉜다. 희생자는 어떻게 보상해줄 것인가. 또 민주정에서 참주정에서 바뀌었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또 죽일 것인가. 내전을 겪는다. 아테나이에도 당면했던 문제가 그 문제가 극단적으로 추상화되어서 드라마에 나타난 것. 그래서 그냥 읽으면 안되고 이것은 분명히 정치적으로 격렬한 쟁투에 관해서 추상화해서 나타낸 것임을 유념해야 한다. 그것을 극단적으로 어떤 체제에서든지 올바름이 관철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입장을 가진 사람은 사실 제정신으로 살기 어렵다. 모든 사람이 다 변절자가 되는 것.
<안티고네> 코로스를 보자. 등장가인 100행부터 읽는다.
322 100행 코로스(등장가 100~161행)
햇살이여, 일찍이 일곱 성문의
테바이에 떠오른
가장 아름다운 빛이여,
여기 코로스는 현재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려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323 110행 코로스장: 말썽 많은 다툼 때문에 폴뤼네이케스가
폴뤼네이케스란 이름은 '많이 다투는 자'란 뜻이다.플라톤 <국가>를 첫머리를 보면 페이라이에우스 항구에서 폴레마르코스가 소크리테스를 잡고 얘기한다. 30인 참주정 때 죽는다.
코로스의 등장가는 테바이의 역사와 그때 일어났던 일들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코로스의 역할 중 첫번째가 굳이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그러나 반드시 맥락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이야기들을 하는 것이다. 이제 크레온이 등장한다.
328 170행 크레온: 그런데 그분의 아들들이 서로 치고 맞는 가운데
서로 형제의 피로 물든 채, 이중의 운명에 의하여
같은 날 죽고 말았기 때문에,
지금은 내가 고인들의 가장 가까운 친척으로서
왕좌와 그 모든 권한을 갖게 되었소.
그런데 통치와 입법으로 검증받기 전에는
한 인간의 영혼과 심성과 생각을
완전히 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오.
크레온이 처음 등장해서 하는 이 말이 기본적적으로 크레온의 입장을 잘 드러내는 말이다.
한 인간의 영혼과 심성과 생각을 완전히 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오. 영혼, 심성, 생각은 희랍어로 psyche 프쉬케, pneuma 프네마, gnome 그노메 이렇게 된다. 이 세가지는 각각 조금씩 다르다.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마음에 관한 여러가지 생각들을 접어두고 희랍사람들이 인간의 마음을 어떻게 나누었나 보자. 플라톤 같은 경우는 인간의 영혼을 셋으로 나뉜었다. 절제의 영역과, 욕망하는 부분, 용기를 내는 튀모스가 있고, 이성적으로 헤아리는 이성적 부분이 있다. 그 세부분 각각에 대응하는 생산자계급, 군인계급, 통치자계급 오늘날보면 틀린 얘기인데 그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인간의 몸뚱아리인 소마, 생기를 불어넣어주는 것이 프시케다. 이러한 단순한 생각에서 소포클레스 당시에 오면 벌써 프시케, 프네마, 그노메 이런 정도로 나뉜다. 인간의 영혼과 심성, 생각을 다 묶으면 정신이다. 프시케는 가장 밑바닥에 놓여있는 것. 오늘날의 용어로는 캐릭터 쯤되는 것. 프네마는 기백, 의지. 그노메는 지성적 판단력. 이 세가지를 완전히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데 이것을 묶어보면 영혼,심성, 생각 = 품성과 기백과 판단력을 다 묶으면 넓은 의미에서의 정신이라고 할수 있다.
인간의 정신은 통치와 입법이라고 하는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 즉 인간의 정신은 통치와 입법으로 표상된다고 할 수 있다. 크레온은 완전히 합리적인 통치체제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겉으로 드러나는 표상으로서 통치와 입법으로서 모든것을 판단해야 말한다. 그리고 그 다른 어떤 것도 거기에 거슬리는 거라면 정리해야한다는 입장. 또 인간이 통치와 입법으로 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막아야한다는 입장에 서있는 사람. 규범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지금 크레온이 가지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입각점. 조금 더 확장시켜서 생각하면 나라에 충성을 맹세하는 국가주의로도 볼 수 있따.
너스본의 <나라를 사랑한는 것>을 읽어보면 좋겠다.
328 182행 크레온: 그리고 누구든지 자기 조국보다 친구를 더 소중히 여기는 자 역시
나는 조금도 존중하지 않소이다.
크레온은 나라를 사랑하는, 그러니까 크레온의 입각점은 국가주의자. 그러면서
329 184행 크레온: 만물을 굽어보시는 제우스께서 내 증인이 되어 주소서
여기에 지금 그 어떤 드라마에서도 나타나지 않은 <안티고네>가 가지고 있는 최고의 멋진 포인트가 여기서 드러난다. 이게 지금 한마디로 파르티잔, 당파적 드라마인데 크레온은 조국, 뒷배경은 제우스에게 백을 쓴다. 이 구도가 하나 선다.
329 185행 크레온: 나는 안전 대신 파멸이
시민들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게 되면 침묵하지 않을 것이며,
조국의 적을 나의 친구로 여기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오.
우리를 지켜주는 것은 조국 땅이며,
조국이 무사히 항해해야만
우리가 진정한 친구를 사귈 수 있음을 내가 잘 알기 때문이오.
이런 원칙에 따라 나는 이 도시를 키워나갈 작정이오.
우리가 지금 21세기 한국과 투영해서 읽으면 반국가주의자와 반정부주의자를 구별해야는데 우리는 반정부주의자를 반국가주의자라고 얘기한다. 또 설령 반국가주의자면 어떤가, 테러만 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반국가구의자라고 말하는 순간 또 애국자가 아니라고 말하는 순간 완전히 매당한다. 나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그 자리에서 종북이라고 이름 붙인다. 거짓 딜레마의 오류다. 나는 까만색을 좋아하지 않아요, 그럼 사람들이 너는 흰색을 좋아하는구나. 사실은 그 사이 회색도 있다. 모순이 아닌데 모순인 것처럼 몰아붙이는 것. 중간항이 있는 것은 모순이 아니다. 크레온이 사실 거짓 딜레마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지금 크레온이 자기 입장을 원칙을 천명하고 나서 192행을 보면 그것에 이어지는 세부 규칙을 말하는데
329 192행 크레온: 그리고 내가 오이디푸스의 아들들과 관련하여
시민들에게 알린 포고도 그와 합치되어.
에테오클레스는 우리 도시를 위하여 싸우다가
모든 면에서 뛰어난 창수로서 전사하였으니,
그를 무덤에 묻어주고 지하의 가장 훌륭한
사자들에게 어울리는 온갖 의식을 베풀 것이오.
그러나 그와 형제 간인 폴뤼네이케스는, 내 말하노니,
추방에서 돌아와 조국 땅과 선조들의 신들을
화염으로 완전히 불사르고,
친족의 피를 마시고, 나머지는
노예로 끌고 가려고 하였으니,
그와 관련하여 나는 도시에서 알리게 했소이다.
아무도 그에게 장례를 베풀거나 애도하지 말고,
새 떼와 개 떼의 밥이 되고 치욕스런 광경이 되도록
그의 시신을 묻히지 않는 채 내버려두라고 말이오.
이제 우리가 최대한 양보해서 크레온의 입장을 받아들인다해도 이미 폴뤼네이케스는 죽음으로써 조국을 배신한 벌을 받는 것. 안티고네의 입장을 잘 봐야하는데 조국을 반대한다는 것이 아니라 조국 이전에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밑바닥에 놓여있는 친족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 친밀감, 또는 자애로움. 이런 것들을 가지고 있으려는 입장. 안티고네도 자기 오빠가 반역자라른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서 그 벌을 받았으니 최소한의 장례를 치르자는 입장. 뒤에 안티고네 입장을 보면 제우스는 천상의 신이 아닌 지하에 있는 하데스 신에게 호소를 한다. 이렇게 당파가 나뉜다.
330 208행 크레온: 그것이 내 뜻이오. 나에게는 결코
사악한 자들이 올바른 사람들보다 더 존중받지 못할 것이오.
그런데 '사악한 자들이 올바른 사람들보다' 여기서 올바른 사람들은 the just. 크레온이 말하는 것이 저스티스, 정의. 이 정의는 보편적 정의가 아니다. 즉 언제 어디서나 적용될 수 있는 올바름이 아닌 국가적 정의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크레온과 안티고네의 입장이 서로 다투고 있는 문제는 저스티스의 문제. 올바의름의 문제. 기준을 어디에 다가 둘 것이냐를 가지고 싸우는 것이다.
<안티고네>는 우리는 무엇을 올바르다고 할 것인가에 대한 전혀 화해할 수 없는 두 당파의 대립을 드러내는 드라마. 그러면 우리는 인지상정으로 멀쩡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니까 안티고네 입장에 선다 라고 말하지만 반면에 안티고네 입장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고 반드시 응징하려는 사람들을 우리는 현실에서 보고 있다. 그래서 이 드라마가 끔직한 것.
이 드라마의 핵심주제가 올바름인데 이 주제는 소포클레스만이 아니라 소포클레스와 동시대를 살았던 플라톤 철학의 제일주제도 올바름에 관한 것이었다. 국가에서의 올바름이 중요한 것인지 안티고네가 생각하는 보편적인 올바름이 중요한 것인지. 그래서 플라톤은 이보다 더 보편적인 올바름이 과연 무엇이 있을 것이가에 대해서 생각해 본 것이다. 이 문제는 단순히 드라마에 나오는 문제가 아니다.
<쉰들러리스트>에서 쉰들러를 찬미하는 이유가 더 올바른 것을 찬미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조국의 배신자이지만 동시에 분명히 인류에게는 아니다. 그래서 나치 전범들이 뉘렌베르크 법정에서 그리고 일본의 점범들이 동경재판에서 기소된 죄목이 인류애를 어긋장 낸 죄이다. 인류애라고 하는 것은 사실 죄형 법정주의에서는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법학자 사이에서도 논란이 있었다. 그 논란이 바로 올바름의 문제. 이런 것에 대해서 계속 생각해봐야 한다.
330 213행 코로스장: 그대에게는 물론 죽은 자들과 살아 있는 우리들 모두와 관련하여
어떤 법령이든지 마음대로 적용할 수 있는 권한이 있지요.
죽은 자들과 살아 있는 우리들 모두 라고 지금 코로스장이 확인해 준다.
330 215행 크레온: 그대들은 내가 내린 명령의 수호자가 되어주시오
330 216행 코로스장: 그런 짐이라면 더 젋은 사람에게 지우시지요.
이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도 않고 만만하지도 않은 얘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죽은 자들과 살아 있는 자들, 그런데 지금 안티고네는 죽은 놈은 놔두고 살아있는 놈만 건드리라고 한다. 대한민국의 국가권력도 죽은 자들을 건드렸고, 그렇게 살아왔다.
331 223행 파수꾼: 나는 숨이 차도록 급히 달려왔다거나,
발걸음도 가벼이 열심히 걸었다고 말씀드리지는 않겠습니다.
여기서 파수꾼이 누군가 매장하기 위해 시신을 치웠다고 한다. 고대 희랍인은 매장되지 않은 시신을 보고도 그 위에 흙을 덮어주지 않는 것을 죄를 짓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희랍사람들의 생각이 크게 시행되지 못한 시기가 펠로폰네소스 전쟁 2년차 역병이 일어났을 때이다.
334 278행 코로스장: 나리, 마음속으로 항상 생각해보았는데,
이번 일은 신께서 하신 일이 아닐까요?
신께서 하신 일. 이 말이 포인트. 이건 조금 깊게 해석을 하면
이 문제가 이렇게 간단하게 해결될 수 없는 문제, 이러한 문제는 어느 한쪽에 선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사실 크레온의 입장을 본인의 사적인 처지에서는 동의하지 않지만 레짐을 유지하는 핵심적인 입장임은 맞다. 다시말해서 크레온의 입장이 되었건 안티고네의 입장이되었건 각각이 각각의 논거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 크레온은 자신의 입장을 강력하게 밀고 나간다.
334 280행 크레온: 입 닥치시오, 그대의 말에 내가 분통을 터뜨리기 전에.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노인에다가 바보임이 드러나게 될 것이오.
334 286행 크레온: 법규들을 말살하러 온 자를
선행을 베푼 자로 존중하실 거이란 말이가요?
335 304행 크레온: 아직도 제우스께서 나의 존경을 받으신다면
조국이라는 말에 한가지를 덧붙인다면 명문화면 규범. 이 규범을 크레온은 말하는 것이고, 이 실행자로서 자기가 제우스의 지지를 받고 있음을 뚜렷하게 보여준다.그래서 크레온은 다시한번 자기 입장을 밝힌다.
그 다음에 파수꾼 퇴장하고 코로스의 첫번째 정립가가 나온다. 유명한 말. 희랍 문학에서 유명한 문장이나 시가들을 뽑아놓은 다이제스트, 앤솔로지를 만든다면 거기에 꼭 들어가는 것. 바로 인간에 대한 찬가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전체 내용과는 관련이 크게 없을 수도 있다.
코로스(첫번째 정립가(332~375행)
337 332행 좌1: 무시무시한 것이 많다 해도
인간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다네.
무시무시한으로 번역이 되었는데 원문을 보면 경이로운이 가장 적절한 것 같다. 경이론운 것이 세상에 많다해도 인가보다 더 경이로운 것은 없다네. 인간에 대한 경이로움을 드러내어 보인다. 인간에 대한 찬가라고 한다. 이러한 생각은 호메로스 서사시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것. 인간이 필멸의 존재라는 얘기만 나온다. 아무리 탁월하고 꽤가 많은 오뒷세우스라 할지라도 결국 그 사람도 같은 마음을 확보하는 것은 자기 아내인 페넬로페, 아들인 텔레마코스, 아버지 라에르테스다. 결코 신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는 인간보다 더 경이로눈 것은 없다네라고 말한다.
인간에 대한 송가가 이렇게 소포클레스 드라마 안에 삽입될 정도로 인간에 대한 자존심이 한껏 드러나는 시대였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바로 이러한 맥락속에서 소피스트 철학자들이 말한 '인간은 만물의 척도' 라는 것이 이해되어야 한다. 각자 각자가 궁극적인 판단의 기준을 만들어 낼 수있는 존재다라고 말하는 것. 그래서 소피스트 철학, 소크라테스, 플라톤 철학 이런 것들이 나오는 맥락들을 비극드라마와 같은 맥락속에서 읽어야 한다.
339 365행 우2: 발명의 재능이 있어
바라던 것 이상으로 영리한 그는
때로는 악의 길을 가고
때로는 선의 길을 간다네.
그가 국법과, 신들께 맹세한 정의를 존중한다면,
그의 도시는 융성할 것이나
무모함으로 인하여 불미스런 것과 함께하는 자는
도시를 갖지 못하는 법.
무모함으로 인하여 불미스런 것과 함께하는 자는 가 바로 크레온. 불미스런 것이 바로 과실, 즉 무모함으로 인하여 하마르티아를 저지르는 자는 과실을 저지를 것이다. 445행에서 크레과 안티고네가 주고 받은 대화가 끝나면 사실상 이 드라마는 끝난 것이다. 더이상 화해가 안된다는 것이 나온다.
344 446행 크레온: (안티고네에게) 너는 장황하게 늘어놓지 말고 간단히 말하도록 하라.
너는 그렇게 하지 말라는 포고가 내려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느냐?
344 448행 안티고네: 알고 있었습니다. 공지 사실인데 어찌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344 449행 크레온: 그런데도 너는 감히 법을 어겼단 말이냐?
이 문장을 <안티고네> 독어판을 보고 직역하면 '그런데도 너는 나의 법을 밟았단 말이냐?' 천병희교수는 굉장히 부드럽게 번역한 것인데 사실상 굉장히 세게 나온 것.
344 450행 안티고네: 네. 그 포고를 나에게 알려주신 이는 제우스가 아니었으며,
하계의 신들과 함께 사시는 정의의 여신께서도
사람들 사이에 그런 법을 세우시지는 않았기 때문이지요.
나는 또 그대의 명령이, 신들의 확고부동한 불문율들을
죽게 마련인 한낱 인간이 무시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하다고 생각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그 불문율들은 어제 오늘에 생긴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살아 있고, 어디서 왔는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지요.
안티고네의 첫마디에서 벌써 정의의 여신이라는 말을 꺼냈다. 크레온도 자기가 정의라고 말하고 안티고네도 정의라고 말한다. 정의와 정의가 부딪쳤으니 답이 없다.
또 당신이 말한건 필멸의 인간이 만든 명문화된 규범일 뿐인데 안티고네가 말하는 건 불멸의 신이 만든 불문율. 불문율이라는게 글로 쓰여지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뭘 그걸 쓰냐는 뜻의 불문율. 말로 할 필요가 없는 규범.
'왜냐하면 그 불문율들은 어제 오늘에 생긴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살아 있고, 어디서 왔는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지요.' 이것이 바로 안티고네가 말하는 올바름이다. 올바름과 올바름이 부딪쳤으니까 화해할 수 없는 것 모순이 생긴다. 모순이란 말은 서로 대립되는 상황을 가리킬때 일반적으로 사용되지만 가장 뚜렷하고 명료하게 사용할 때는 모순은 서로 중간입장을 공유할 수 없는 것을 가리킬 때 써야한다.
안티고네와 크레온의 모순, 신의 법과 인간의 법의 모순이라 말하는데 이렇게 말하면 사태가 명료하게 드러나지 않는 조금 단점이 있다. 그런 점에서 두개의 저스티스가 대립되고 있다고 하는게 가장 정확하다.
631 하이몬 등장
하이몬은 크레온의 아들이면서 동시에 안티고네의 약혼자. 여기서 하이몬과 아버지 크레온이 주고 받는 얘기에서 크레온에게 한번의 기회를 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크레온은 하이몬의 간청을 무시한다.
358 666행 크레온: 누구든지 도시를 세운 자에게는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옳은 일이든 옳지 않은 일이든 마땅히 복종해야 한다.
359 681행 코로스장: 우리가 노망이 든 것이 아니라면 그대의 말씀은
우리가 듣기에 현명한 말씀 같소이다.
코로스의 말이 간사한 것 같지만 그렇다고 비난할 수 없는게 크레온의 말이 맞기 때문. 코로스장의 얘기가 줏대가 없어서가 아니라 이 두개가 화해할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을 보여주는 것. 하이몬은 자기 아버지에게 계속 비난을 한다.
360 692행 하이몬: 그러나 저는 그 소녀를 위하여 도시가 이렇게
비판하는 소리를 어둠 속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도시는 폴리스. 폴리스의 여론은 크레온을 비판하고 있음을 알린다.
361 723행 코로스장: 나리, 그의 말이 적절하다면 그에게서 배우는 것이 온당할 것이오.
그리고 하이몬, 그대도 아버지에게서 배우시오. 두 분의 말씀이 다 옳기 때문이오.
여기서부터 크레온과 하이몬의 말이 짧게짧게 스타카토로 논쟁을 주고 받는다. 안타고니스트와 프로타고니스트. 드라마가 긴박감을 향해간다. 비꼬는 말도 나온다.
362 736행 크레온: 나는 이 나라를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뜻에 따라 다스려야 하나?
362 737행 하이몬: 한 사람에 속한 국가는 국가가 아닙니다.
363 738행 크레온: 국가는 그 통치자의 것으로 간주되지 않느냐?
363 739행 하이몬: 사막에서는 멋있게 독재를 하실 수 있겠지요.
한 사람에 속하는 폴리스는 더이상 폴리스가 아니다. 여기서 크레온이 참주를 향해간다. 그러니까 크레온이 마지막으로
363 740행 크레온: 보아하니, 이 애는 여자들 편인 것 같소.
정의의 문제인데 크레온은 이 문제를 하이몬 여성이 가지고 있는 나약함에 빠져있다고 생각하고 끝내버린다. 그래서 제대로 화해가 안되는 것.
374 880행 안티고네: 가련한 나에게는 더는 허용되지 않건마는,
내 운명을 위하여 울어줄 눈물도 없고,
슬퍼해줄 친구도 없구나!
안티고네가 퇴장하면서 대화는 끝나고 크레온도 결국에는 오만함 때문에 뒤통수를 맞는다. 즉 크레온이 잘못한 것은 대립구도에서 크레온이 가지고 있는 권한의 영역은 지상에 있는 것. 즉 살아있는자들이었음을 깨닫지 못하고, 이미 죽은 자들에게 권한을 행사하려고 했던 것이 오만함. 휘브리스.
희랍드라마는 오만함인 휘브리스, 모르고 저지르는 죄인 하마르티아. 이 두개만 알면 다 읽은 것. 크레온이 자기가 제우스에게 위임을 받았으면 하데스는 건드리면 안되는 것이었다. 영역을 넘어선 것. 불의. 내가 관장하는 영역을 넘어선 것이 불의, 정의롭지 못한 것이다. 국가의 왕이어도 죽은 자들의 시신은 관할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것을 몰랐다. 그래서 여기에 이제 테이레시아스가 또 나타난다.
384 1024행 테이레시아스: 인간은 누구나 다 실수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실수를 하더라도, 자기가 저지른 실수를
고칠 줄 알고 고집을 피우지 않는 자는 더러
조언과 행복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이 아니오.
고집만이 어리석음의 죄를 짓게 되는 것이오.
그러니 그대는 사자에게 양보하여, 죽은 자를 찌르지 마시오.
죽은자를 또 죽여보았자 그게 무슨 용감한 행위가 되겠소?
하계의 신들을 욕보이는 장례를 치르지 않고 매장도 하지 않은채 붙들어 놓은 것이 크레온의 죄. 그래서 나중에는 크레온은 자기 아들이 죽은 것을 알게되지만 너무 늦었다.
406 1337행 코로스장: 이제 더는 기도하지 마시오.
인간은 정해진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까요.
맨마지막에 나오는 말은 <오이디푸스 왕>에서도 <안티고네>에서도 해당되는 모두를 아우르는 멋지고도 멋진말.
407 1349행 코로스: 지혜야말로 으뜸가는 행복이라네.
그리고 신들에 대한 경의는
침범되어서는 안 되는 법.
오만한 자들의 큰 소리는,
그 벌로 큰 타격들을 받게 되어,
늙어서 지혜를 가르쳐준다네.
지금 내가 오만한지를 어떻게 알 수 있나. 내가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의 범위를 넘어가고 있는가, 내가 과연 그 범위를 넘어서 오만함을 보이고 있지는 않는가를 생각해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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