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인하르트 코젤렉,크리스티안 마이어: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2 - 진보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13. 3. 22.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2 - 라인하르트 코젤렉 외 지음, 라인하르트 코젤렉 외 엮음, 황선애 옮김, 한림대학교 한림과학/푸른역사 |
번역서를 내면서
Ⅰ. 서문
Ⅱ.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의 '진보'
Ⅲ. 중세 시대의 '진보Profectus'와 근대 종교 영역에서 사용된 '진보Fortschritt'
IV. 근대적 진보 개념의 형성
1. 고대적 은유의 퇴장과 무한한 진보 개념의 개진
2. '완성perfectio'에서 '완성perfectionnement'을 거쳐
'완성 가능성perfectibilite'으로
3. 칸트: '완성Vervollkommnung'과 '완성상Vervillkommlichkeit'
4. '전진Progressen'에서 '진보Fortshritt'로
5. 진보적 경험과 이론의 정립
a 과학의 기술
b 예술과 철학
c 도덕과 사회
d '진보'와 인류
e '진보'와 사회계층
f '진보'의 가설적 주체와 '진보'의 가속화
6. 헤겔: '과정'의 의미로 사용된 '진보'
V. 19세기의 중심 개념 '진보'
1. 사전적 의미
2. 표어가 된 '진보'
3. 경험적 토대
4. 대체 종교적 범주가 된 '진보'
5. 역사적 관념 개념이 된 '진보'
6. 이데올로기적 강제 점유
7. 마르크스와 엥겔스
VI. 전망
옮긴이의 글
읽어두기: 주석에 사용된 독어 약어 설명
주석
참고문헌
찾아보기
Ⅰ. 서문
12 역사와 관련된 표현들은 대체로 각 시대마다 우위를 차지하는 경험 영역에서 유래한다. 자연과 신화, 교회와 신학, 법제, 문학과 과학, 경제와 기술이 그런 중요한 분야의 예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역사 용어들은 본질적으로 비역사적인 요소들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오로지 역사적 사실에만 국한되는 개념은 드물고, 펠렐만이 보여준 것처럼 그것들은 대체로 '르네상스', '종교개혁' 혹은 나중에 보게 되겠지만 '진보'와 같이 시대들이 스스로를 규정하는 데에 사용된다.
13 다양한 행위 주체들의 활동과 경험이 끊임없이 변화하며 서로 관계 맺는 현상은 모든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이를 암시하는 용어가 멀리까지 소급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물론 '진보'라는 표현 자체는 18세기 후반에 와서야 비로소 개념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14 진보 이전에 쓰이던 '전진'과 '진전'은 이제 성장 메타포로, 자연적이고 순환적인 사건의 진행을 이해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반면 '진보'는 그렇지 않다. 진보는 순수하게 역사적인 어떤 시간을 개념화해야 했다. 물론 이 '시간화'는 이론적 어려움을 초래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정치적 언어 사용에서 이데올로기 개념으로 해결되었다.
이 새 개념은 근대Neuzeit에 와서 순차적으로 혹은 홍시에 나타나는 일군의 움직임을 포착한다.
1)'진보'는 스스로 역사의 주체가 된 보편적 인류와 관련된 개념이 되었다. 역사철학의 보편적 개념이 된 것이다.
2)하지만 '진보' 개념은 종종 개별적인 영역 혹은 구체적 행위 일체와 관련되었다. 이때 이들은 시간적으로 앞서고 뒤처지는 긴장 관계에 있었다. 옛 것은 언제나 뒤처짐을 의미했고 따라서 뒤좇고 만회하여 추월할 것이 요구되었다. '진보'는 당파적, 집단적 행동이라는 개념이 되었다.
3)'진보'자체가 주체적 개념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역사적 운동이 스스로를 진보의 주체로 생각하게 된다. 이렇게 될 때 진보 개념은 이념화될 수 있다. 또한 이데올로기의 비판의 대상이 된다.
4)'진보'는 가끔 더 나빠지는 것을 표현할 때도 있지만 보통 개선을 향한 움직임을 의미한다. '진보'는 거의 종교적 색채를 띤 희망의 개념이 된다.
5) '진보'는 반복성을 전제로 하는 고대의 연속성 모델과는 달리 비순환적인 진행을 가리킨다. 용어상으로 '후퇴'는 '진보'의 반대 개념이다. 하지만 현대의 진보 이론에서 후퇴는 항상 진보보다 더 짧게 지속된다. 이때 '진보'는 단절을 허용하긴 해도 언제나 직선적 방향 개념이다.
6)'진보'의 목표는 유한한 범위 내에서 완벽을 추구하는 것(이것은 도달할 수 없다)과 그 목표를 무한하게 연기하는 것 사이에서 동요한다. 왜냐하면 후자의 경우 진보가 달성해야 하는 목적 자체가 항상 새롭게 제시되기 때문이다. '진보'는 임시적인 관점의 개념이 되며 좀 더 좁은 의미에서는 계획의 개념이 된다.
7)'진보'는 종종 가속화Bechleunigung을 가리킨다. 이때 물리적 가속과 다른 점은 그것이 역사적 동력에 의해 촉발되거나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한 동력이 '발전적progessiv'이라고 정의되면 '진보'는 역사적 정당화를 위한 개념이 된다.
16 '역사'처럼 '진보' 개념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이루어지는 행위와 경험의 여러 영역을 이론적으로뿐만 아니라 실천적으로 규정하려는 근대적 개념이다. 따라서 앞에서 언급한 모든 기준들은 특정한 사회적, 정치적 맥락을 갖는다. 아래에서는 이들이 서로 어떤 관계를 갖는지 고찰하게 될 것이다.
Ⅱ.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의 '진보'
19 '진보'는 순전히 기술記述적이고 사실적인 것을 판단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제한적 사회 변화 속에서 진보는 경험적 사실과 밀접한 경우에만 지각되었고 대체로 미래보다 과거나 현재와 관련되었다. 기독교들 사이에서 비로소 경험적 사실과의 밀접한 연관성이 느슨해 지기 시작했다.
36 활동의 진행, 즉 모든 인간적 행위들이 변화하는 것에 상응하여 기독교적 중세에도 진보라는 것이 분명히 있었다. 라틴어의 접두사 pro, 독일어의 ver-, vor- 혹은 fort-와 결합된 운동 범주에 속하는 비 전문 용어들 외에 근대의 진보 개념을 예고하는 경험들과 입장들에 대한 발언도 눈에 띤다.
예수가 출현한 이후 인간들은 종말에 대해 알게 되었고 이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일이 일어날 수 없음을 의미했다. 따라서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 총체적으로 표기하는 역사적 상위 개념으로서의 '진보'는 생각할 수 없었다.
38 위에서 개략적으로 서술한 초역사적인 진보 개념은 서로 상반된 두 가지 요소를 내포한다.
첫째, 현세의 움직임은 시간적으로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확실하게 종말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진행은 직선상에서 이루어지고 동시에 끝이 있지만 그 자체가 개선될 수 없다. 오히려 세상은 나이가 들 뿐이다.
둘째, 진정한 진보profectus는 세상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것의 목표는 신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다.
48 처음에 초역사적 개념으로 사용되었던 기독교의 '진보profectus' 개념은 미래가 개선될 수 있다는 의미로 이해되었고, 세속적으로 해석된 후에 다시 거꾸로 신교 신학에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이러한 전환은 전혀 단절로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지속성 속에서 진보가 증명되었다.
IV. 근대적 진보 개념의 형성
50 근대의 진보 개념과 이전의 종교적 진보 개념의 차이는 세상의 종말에 대한 기대가 이제 열린 미래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용어상으로는 종교적인 '진보profectus'가 세속적인 '진보progessus'에 의해 밀려났다고 혹은 대체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근대 초기 전반에 걸쳐 이루어졌다. 르네상스는 새로운 시대에 대한 의식이 생기게 했지만, 더 나은 미래를 향한 진보의 의식은 가져다 주지 못했다. 특히 중세가 어두운 중간 시기로 인식되고 이를 뛰어넘어 저 멀리 고대가 여전히 모범적 전형이 되는 동안은 그러했다.
59 과거에 다양한 진보 개념을 불러일으킨 '완성perfectio'이라는 목표는 18세기에 와서 그 자체가 시간성을 띠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튀르고는 <보편사>의 초안에서 과거를 되돌아보며 "인류는 점진적으로 완성을 위해 노력해왔다"고 쓴다.
1725년 이후에는 완벽성을 실행에 포함시킨 특수한 운동 개념인 "완성perfectionement'이 나타난다.
콩도르세는 인류가 선천적 능력을 바탕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한계 영역에 대해 자주 언급한다. 완벽성, 즉 인류의 완성perfectionement은 목표인 동시에 무한하다고 주장하면서 우리는 도달하지는 못하더라도 최고의 행복인 목표에 끊임없이 접근하고자 하거나 시간성이 배제된 이 행복의 상태에 진입하려 한다고 말한다.
60 루소는 1755년 완성을 추구하는 능력, 즉 완성 가능성perfectibilite을 개별적 인간뿐 아니라 인류 전체를 동물과 구별하는 기준으로 보았다. 루소에게 '완성 가능성'은 경험적이고 역사적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초역사적인 범주였다. 그것은 역사가 가능할 수 있게 하는 근본 조건이었다. 물론 완성을 추구하는 능력은 자연적 순수성의 상실을 보상했다.
70 우주론적 진보는 비판적 문제제기를 통과하면서 역사철학적 진보로 진화했다. 또한 도덕적 의무로서의 진보는 이에 대응하거나 이를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 현실을 근거로 삼게 되었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 그 자체보다 혁명에 대한 의식이야말로 진보가 원하는 대로 실현된다는 확신을 주었다.
71 지금까지 알려진 자료를 보면 '진전Fortgang', '지속Fortdauer', '밀기Fortucken' 혹은 '전진Fortschreitung'과 같은 표현들이 '진보Forschritt'보다 훨씬 이전에 사용되었고 이 용어들이 모두 완성Perfectio과 완성의 시간성이라는 맥락에서 지속적으로 역사가 개선한다는 의미를 지녔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양태를 "세속화"로 해석할 수 있다. '진보'는 무엇보다 칸트의 영향을 받아 18세기의 마지막 20년 동안 특유의 역사적 개념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이제 용어의 역사를 통해 살펴볼 것이다.
82 '진보'라는 완벽이라는 이상에 시간을 부여함으로써 역사적 개념이 되었고, 또한 앞에서 본 대로 기대 지평의 변화를 가져왔다. 이제까지 초월적 목표로 설정되었던 것이 이제 역사적 실천 안으로 편입된 것이다.
96 인류는 처음엔 진보의 가설적 주체였지만 발전의 괴리라는 관점에서 서로 나뉘게 되었고, "뒤쳐진" 민족들이 지배의 대상이 되었다. 진보의 단계에서 어쩔 수 없는 지리적 차이를 해결하기 위해 마르크스는 블룬칠리보다 3년 먼저 미래에는 경제적으로 앞서가는 민족들이 생산을 감독하고 그것을 세계에 배분하는 역할을 떠맡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111 헤겔이 진보를 실제 역사 속으로 편입한 방식은 자유의 자의식이라는 목적이 모든 움직임을 촉발하고 이끌어나가는 것이었다. 이렇게 자유를 향한 길 위를 전진해나가는 것으로 이해되는 역사 개념이 바로 '과정Prozeb'이다. "정신의 무한성은 자체 내의 진행 과정에서 온다. 즉 쉬지 않으며 항상 생산적이고 그 생산성을 통해 존재하는 것이다." "정신으로 하여금 자신에게, 자신의 개념에 도달하도록 돕는 이 같은 진행 과정이 바로 역사다." 여기에서 진행은 결국 스스로를 생산하고 이를 통해 현실 속에 정의를 가져오는 정신의 변치 않는 특징이다. "정신의 존재는 절대적 진행 과정이다."
112 역사는 진보하는 역사로서 언제나 일회적이다. 개별 역사뿐만 아니라 전체 역사도 그러하다. 두 경우 모두 중요한 것은 동일하다. 즉 자유가 스스로 "이행해야 할 목적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이로부터 하나의 방향이 제시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니라 자유 의식을 증대시켜 세계를 제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헤겔의 용어로 말하면 이 길은 가능성에서 현실로 가는 진행 과정이다. 즉자적 정신Geit an sich이 대자적 정신Geit fur sich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헤겔은 이전까지 가설적이었던 진보가 미래 역사의 실천 양식이 될 수 있도록 시간성을 부여했다. 다만 헤겔은 처음엔 일회적으로 생각했던 이 같은 전환을 역사의 영속적 양상으로 확대했다. 쉽게 말해서, 역사적 흐름에서 중요한 것은 항상 가능성으로 존재하는 자유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헤겔은 1800년을 전후한 시대 전환점을 역사의 유연성이라는 원칙으로 승격시켰다. 진보는 역사에서 정신이 스스로 노력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다. 그 때문에 헤겔이 생각하는 정신의 진행 과정은 가속화를 모른다. 역사의 과정에서 진정한 역사는 권리의 실행으로 이해되었고 이는 오로지 진보하는 자유 의식을 통해서 실현될 수 있었다.
V. 19세기의 중심 개념 '진보'
116 '진보'가 특정한 주제나 객체와 뚜렷하게 연결되지 않고 독립적으로 사용되자 곧 표어의 성격을 띄게 되었다. 1830년대 이후로 이러한 표어 사용이 확산된다. 이것은 산업화 시대의 사회 문제를 헌법을 통해 해결해야 하는 시대적 요구를 반영한다. 시대에 발맞추어 앞으로 나아가고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거나 요구를 불러일으키는 것, 이것은 이미 프로이센의 개혁파 관리들의 입에 박힌 어법이었으며 나중에 이들의 비판자들 - 예를 들어 한제만 - 역시 같은 어법을 사용하게 된다. 마르크스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1843년에 역사적 흐름을 조종하는 민주주의를 요구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진보 그 자체가 헌법이다."
117 '진보 자체'가 삶의 모든 영역을 - 마인홀트는 이를 종교적, 도덕적, 학문적, 예술적, 사회적, 정치적 진보로 구분한다 - 포괄함으로써 '진보'라는 말의 의미는 희석되었고 상투어가 되었다. 이제 동시대인 누구도 세상이 진보한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학문, 기술 그리고 산업에서 특히 그러했다. 진보는 언제나 경험적 근거를 제시할 수 있었고, 이로 인해 표어가 어떤 식으로 사용되더라도 충분히 감당해낼 수 있었다.
124 "본질적으로 국가도 시대에 맞는 개혁을 통해 개선을 향해 진보하는 기구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진보 아니면 퇴보"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도덕성은 정치에 직접 영향을 준다. 즉 법적인 진보가 국민의 삶 속에서 제지되거나 중단되면 그 때는 "필연적으로 퇴보할" 수밖에 없다. "개선을 향한 이러한 진보를 의도적으로 방해하는 것을... 반동Reaction이라고 부른다."
126 '진보'는 다양한 사회적,정치적 관점에 따라 서로 다른 진보의 방향을 지시하는 관점의 개념이 되었다. 그것은 혁명을 의미할 수도, 법의 변화를 통해 혁명을 저지하는 입장을 의미할 수도 있다. 어떤 경우든 변화를 강요하는 성격은 최소한 담겨 있었다. 이로써 객관적 필연성과 주관적 해석이 서로 얽혀 있음이 명확해졌다. 모두가 진보에 참여하고 있지만 각각 다른 방식으로 그렇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128 진보 개념이 관점의 개념임을 보여주는 또 다른 이유는 그것이 다양한 경제적 혹은 정치적 계획안에 따라 다르게 평가되는 경험적 자료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현실의 진보적 경험은 당파적으로 해석되고 시간 차원에서 상대화되었다.
129 당파와 결합된 일시적 관점에서 진보 개념의 또 다른 특징인 이념화 현상이 초래되었다. 각각의 사회적 진영 또는 정치적 입장은 각기 다른 미래를 전망했다. 하지만 추구하는 미래의 모습이 아직 경험으로 증명될 수 없었으므로 각각의 관점에서 제각기 다른 미래를 전망하는 것이 가능했다. 이로써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입장을 제각각 고수할 수 있었고 이를 근거로 다른 관점의 미래가 잘못되었다고 공격할 수 있었다. 진보 개념은 이제 이데올로기라는 무기가 되었다.
135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생각한 역사적 진보가 남다른 것은 경제를 이론의 기초로 삼고 연속적인 계급투쟁을 진보의 역동적인 형태로 본 점이었다. "반대가 없으면 진보도 없다. 그것이 문명이 오늘까지 밟아온 법칙이다."
136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의해 폭넓게 사용된 진보 개념은 이 개념을 이념적 무기, 역사철학적 공리 그리고 이론적 범주로 사용하도록 가르쳤고, 이후에 마르크스주의를 따르는 국가나 정당에서 '진보'가 계속해서 중심 개념이 되어 영향을 미치도록 했다. 이는 물론 오늘날의 경험과 기대가 여전히 19세기 유럽의 경험에 비추어 잘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비서구 세계는 서구 세계와 차이를 보인다. 후자의 경우 진보에 대한 확신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미 오랫동안 준비되어온 진보에 대한 비판은 1900년 전후에 그리고 늦어도 1차 세계대전 이후에 폭넓게 확산되었다.
VI. 전망
140 승리를 확신하던 진보에 대한 믿음은 19세기 후반부에 다윈의 진화론이 대중화되면서 도 한 번 추가로 지원병을 얻게 된다. 자연이 역사성을 띤 이후에는 자연도 진보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었고, 따라서 문명의 진보를 자연사를 통해 확인시킬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이 열렸다.
143 모두는 아니지만 시민 계층의 많은 이들이 진보 개념을 혐오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적으로 생각하는 자들이 진보를 강조하면서 이 개념을 독차지하려는 것이 혐오스러웠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물론 니체의 영향이 컸고, 특히 생철학 진영에서 이런 경향이 강했다.
144 '진보'를 "명예로운 개념"으로 구원하고자 하면 - 에른스트 블로흐의 글 제목처럼 - "진보 개념에서 역사 이론적 차별화"가 필요하다. 진보 개념의 양가적 의미뿐만 아니라 "삶의 질"과 관련된 성찰이 가져온 기술적 진보의 한계에 대한 인식이 정치의식에 영향을 끼치게 된 이후로, 다시 말해 진보성의 경험적 핵심이 침해되기 시작한 이후로, 특히 미국에서 진보 개념에 대한 긍정적 의미들을 깎아내리는 많은 비판적 분석이 이루어졌다. 세기 전환 이후 증가한 역사적 연구는 이러한 관점의 교체를 미리부터 준비해왔다고 할 수 있다. 진보 개념을 역사적으로 뒤돌아보는 이 작업들은 부분적으로는 개념의 정당성을 옹호하긴 하지만 개념의 중립화에도 기여했다. 이미 지나간 진보 시대의 윤곽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 윤곽은 기술화, 현대화, 산업화에 대한 학문적 연구 작업을 기반으로 해서 그려졌다. 과거에 있었던 진보를 통해 이제 우리는 우리들의 새 시대를 향해 질문을 던지게 되지만 과거를 돌아보면서 그 답을 얻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어떤 관점이든 관계없이 진보 개념에는 예측의 잠재력이 내재하고 이것은 언제나 정치적 입장을 띨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옮긴이의 글
147 여러 개념들의 시대적 추이를 총괄적으로 집대성한 코젤렉 사전은 유럽 역사에서 정치·사회·경제·문화적 변혁이 대대적으로 일어나는 근대 이행기(1750~1850)를 집중 조명하면서 이때 역사적 주도 개념들의 의미가 어떻게 근대성을 띠며 변호하는지를 밝히고 있다. 이 책 <진보>항목 역시 근대 이전 시기 '진보'의 의미가 해당 시기를 통해 새롭게 탈바꿈하는 과정을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이는 코젤렉이 서문에서 밝힌 집필의 목적, 즉 "'진보'라는 유동적 범주의 생성과 유래를 해명하여 이전에는 없었던 '진보'의 근대적 의미를 부각시키는 것"이라는 언명에서 명료하게 드러난다.
코젤렉은 '진보'의 근대적 의미를 밝히기 위해 근대 시기에만 주목하지는 않는다. 근대 이전에 '진보'가 어떤 의미를 띠며 사용되었는지도 함께 추적한다. 18세기에 '진보'가 근대적 개념으로 성립되기 전에도 시간과 공간적 의미에서 '앞으로 나아간다'는 의미를 지닌 다양한 용어들이 있었다. 멀리 그리스·로마 시대를 시작으로 중세를 거쳐 근대에 이르기까지 '앞으로 나아간다'는 의미의 다양한 용어들은 시대적 맥락에서 다양한 의미망을 형성하면서 사용되었다. 또한 이 용어들은 유럽 문명사를 관통함으로써 그리스어, 라틴어, 불어, 독일어, 영어 등을 망라하고 있고 따라서 각 언어가 갖는 고유의 의미와 그것이 다른 언어로 번역되면서 재해석되는 복잡한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에 '진보'는 '전진', '향상', '진행', '경과' 등 다양한 용어로 표현되는데 이 경우 그 의미는 적용되는 범위나 시간적 차원에서 제한되었다. 이때는 주로 기술적인 것의 향상을 통해 삶이 개선된다는 구체적 의미가 강했다고 볼 수 있다. 이 같은 경험적 사실과의 밀접한 연관성에서 벗어나 좀 더 폭넓은 의미에서 인류가 진보한다는 인식을 갖게 되는 것은 기독교의 확산 이후였다. 이는 로마 제국의 확산과 같은 역사적 맥락에서 힘을 얻기도 했다. 한편 기독교 사상의 지배적 영향 아래 있었던 중세 시대에는 기독교의 종말론으로 인해 역사의 '진보'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진보를 허용하는 경우 그것은 신과의 합일 목표로 하는 내면적 성장 내지 심화 과정으로 이해되었다. 이것은 시간과 역사를 초월한 과정이었다. 이 같은 초역사적 이해도 결국 현세적 삶의 태도에 영향을 미쳤고, 그 결과 역사 자체에 변화를 가져온다.
근대 초기의 과학 혁명은 종교적 '진보' 개념이 세계사적인 '진보' 개념으로 편입되도록 만든다. 따라서 세상의 종말에 대한 기대는 이제 열린 미래를 향하게 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도 기독교의 영향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진보'와 관련하여 '완성', '완성가능성'이 중요한 개념으로 등장한 것은 이를 잘 보여주는 징표다. 그러다가 칸트에 와서 '진보'는 단순히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것, 신이 의도한 계획이 아니라 인간에게 영원히 주어진 하나의 과제로 파악된다. 그리고 그것은 이성을 통해 윤리적 계명을 좇을 때 가능하다고 본다. 이 때 이후로 독일어의 '진보Fortschritt' 개념은 이제 일반적 의미를 띠게 되고 역사 개념으로 정착하게 된다.
집합적 개념으로서의 '진보'가 역사적 주도 개념이 되면서 진보의 주체는 이제 더 이상 개별 영역이 아니라 인류 자체가 된다. 또한 '진보'가 주도적 역할을 위임 받아 스스로 역사의 동인이 되고, '진보' 그 자체가 주체가 되어 독립한다. 후자의 경우 '진보'는 무엇보다 19세기에 들어와서 '정치적 표어로 사용되면서 일반화된다. 19세기에 산업혁명이 본격화 되면서 '진보'는 이제 삶의 여러 영역에서 가시화되고 세상이 '진보'한다는 생각은 보편화된다. 동시에 '진보'는 비동시적으로 진행되며 가속화된다는 인식이 생겨나고 이와 더불어 '진보'의 주체는 인류 전체가 될 수 없음이 자명해진다. 따라서 '진보'를 실천하는 가설적 주체의 설정이 불가피해진다. 헤겔은 '진보' 개념을 역사철학적으로 성찰한 마지막 사상가로 그에게 '진보'는 자유를 향해 전진해나가는 '과정'의 개념이 된다.
19세기에 다양한 정치 당파들이 서로 다른 '진보' 방향을 제시하는 정치적 표어로서 이 개념을 사용하게 되고 이로써 '진보'는 당파적 개념이 된다. 좌파, 중도파, 우파를 막론하고 모두가 '진보' 개념을 나름대로 해석하면서 이를 표방한 것이다. 또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진보'를 경제 이론을 토대로 한 계급투쟁의 역동성으로 파악한다. 20세기가 되면 서구 사회에서 '진보'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가 확산된다. 무엇보다 두 차례의 세계 대전, 삶의 질에 대한 성찰 등이 이러한 비판적 입장을 가져왔다.
위에서 간략하게 살펴본 대로 '진보' 개념은 서구 역사에서 근대적 개념으로 형성되기 까지 시대별로 다양한 용어를 통해 복잡적인 의미를 함축하면서 변천되어왔다. 하지만 이 개념의 비서구 세계로의 전이는 무엇보다 19세기 마르크스주의 '진보' 개념을 통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19세기에 서구가 본격적인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진보'는 정치 사회적 욕구를 반영하는 개념이 되었고, 이후 시간 차이를 두고 근대화, 산업화 과정을 거치게 되는 비서구 사회에서 서구로부터 유입된 사상과 함께 '진보' 개념을 차용하게 된 것이다. 한국에서 '진보' 개념의 역사적 변천은 아마도 서구 개념의 이식과 함께 한국의 특수한 역사적·정치적 상황을 거치면서 이루어졌으리라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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