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크하르트: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13. 3. 13.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지음, 이기숙 옮김/한길사 |
유럽 근대 문명의 기원에 대한 역사적 탐구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 시론
일러두기
편집자의 말
제1부 인공물로서의 국가
제2부 개인의 발전
제3부 고대의 부활
제4부 세계와 인간의 발견
제5부 사교와 축제
제6부 윤리와 종교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연보
문화사로 풀어낸 한 시대의 장엄한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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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인공물로서의 국가
60 교황과 호엔슈타우펜 가의 황제들이 벌인 투쟁으로 인해 이탈리아는 서유럽의 다른 나라들과는 본질적으로 판이한 정치적 상황에 놓여 있었다. 프랑스•에스파냐•영국은 봉건제도가 끝나면서 통일된 군주국으로 바뀌어 있었고 독일에서는 봉건제도가 외형적으로나마 제국의 통일성만큼은 유지해주었지만, 이탈리아는 이 제도와 완전히 동떨어져 있었다. 14세기의 신성로마제국 황제들은 더 이상 최고의 봉건군주가 아니라 잘해야 기성의 권력을 강화해주는 지도자 정도로 대접받았고 또 그렇게 인식되었다. 그러나 교황권은 그 스스로 통일을 이루지는 못하면서도 그를 좇는 추종자들과 지지세력을 가짐으로써 미래의 어떠한 통일도 방해할 만큼 강력했다. 그 둘 사이에 도시국가와 전제국 같은 수많은 정치형태가 이미 생겨났거나 새롭게 부상하고 있었는데, 그 존재는 실질적인 권력에 기반하고 있었다.
* 프랑크 왕국의 카롤링거 왕조로 거슬러 올라가는 역대 독일 황제와 교황의 협력 및 알력 관계는 11세기 후반 성직서임권을 둘러싼 투쟁에서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가 황제 하인리히 4세를 굴복시켜 교황권의 우월을 확인시킨 뒤에도 계속되었다. 그 후 1152년 독일에서 왕위에 오른 호엔슈타우펜 가의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는 로마 제국을 부흥시키려는 야심을 품고 황제권을 회복하고자 이탈리아 원정에 나섰으나, 교황권의 우위를 주장한 교황과 자치권의 상실을 우려한 북부 이탈리아 도시들과 충돌을 일으켰다. 그는 북부 이탈리아 도시들이 맺은 롬바르디아 동맹군에 패하고 결국 1183년의 콘스탄츠 강화조약에서 이 도시들의 자치권을 인정해주면서 황제의 지상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호엔슈타우펜 가의 이탈리아 지배는 프리드리히 1세의 아들인 하인리히 6세가 노르만 왕국의 상속녀와 결혼하면서 공고해지는 듯이 보였고, 하인리히 7세도 아버지의 계획을 이어받아 이탈리아 원정에 나서서 시칠리아 왕위를 얻었으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이탈리아의 남과 북으로 황제의 지배권에 둘러싸인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이 같은 포위상황을 뚫고 교황권의 우위를 다시 확립하고자 했지만, 하인리히 6세의 아들 프리드리히 2세의 왕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시칠리아 왕국의 지배자로 절대왕권을 장악하면서 중앙집권적인 독재정치를 폈고 북부 이탈리아에서의 지배권도 확대하려 들었다. 그러나 그 역시 교황과 몇 차레 갈등을 빚고 파문된 뒤 사망했으며, 그가 통치한 노르만 왕국도 샤를 앙주 공에게 정복당했다. 이 같은 교황과 신성로마제국 황제들의 대립은 이탈리아에서 교황당과 황제당의 분열을 야기하여 지속적인 정치적 혼란의 요인이 되었다. 또 북부 이탈리아에서도 자치도시들이 난립하고, 중부에서는 교황을 중심으로 한 교회국가가 있었으나 그 휘하의 여러 귀족세력이 분열해 있었으며, 남부에서는 나폴리와 시칠리아 왕국이 외국세력의 간섭과 침략으로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이런 분열과 혼란은 유력한 당파 지도자나 용병대장에게 강력한 전권을 위임하여 내부의 안정을 찾으려는 소망으로 이어졌고, 그에 따라 서서히 전제군주들이 등장하여 자치를 누리던 도시공화국들은 군주국으로 변해갔다.
141 피렌체의 역사에서 우리는 고도의 정치의식과 풍부한 발전형태가 어우러져 있음을 보게 된다. 이런 점에서 이 나라는 세계 최초의 근대국가라는 이름을 얻어 마땅하다. 군주국에서 일개 가문이 담당했을 일을 이 나라에서는 국민 전체가 수행하였다. 예리한 지성과 예술성을 겸비한 놀라운 피렌체의 정신은 정치와 사회를 끊임없이 개혁하고 지속적으로 기술하며 평가해갔다. 따라서 피렌체는 정치적 학설과 이론, 실험과 도약의 산실이며, 베네치아와 더불어 통계학의 발상지이고, 지구상 모든 나라에 앞선 근대적 의미의 역사 기술의 선구자였다.
149 마키아벨리는 <피렌체사>에서 1492년까지의 자기 조국을 하나의 생물체로 보고 그 발전과정을 개체의 자연적인 과정으로 파악하였다. 이러한 견해를 가진 사람은 근대 인간 중 그가 최초였다. 그가 카스트루초 카스트라카네의 전기에서 전제군주의 전형을 멋대로 윤색해 놓았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만 혹 그가 <피렌체사>에서도 자의적인 곡필을 가했는지, 또 그랬다면 어느 부분이 그러한지를 연구하는 것은 우리의 논제를 벗어난다. <피렌체사>의 각 행마다 어떤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겠지만 전반적으로 수준 높은 이 책의 독자적인 가치는 그것과 상관없이 엄연히 존재한다.
150 이 같은 불행과 함께 피렌체 사람들이 외국 군주에게는 교황파의 입장에서 치명적인 호의를 보였고 그로 인해 외국의 간섭에 익숙해졌다는 것도 뒷날 이어진 불행의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과거의 모든 역사는 복수와 말살만 가르쳤어도, 성스러운 사제의 지도 아래 정복한 적을 언제나 당당히 관용으로 대하는 선례를 이탈리아 최초로 남긴 피렌체 사람들을 누가 찬미하지 않겠는가?
애국심과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갱생을 하나로 녹아들게 만든 불꽃은 멀리서 보면 이내 사그라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가장 찬란했던 마지막 불꽃은 1529~30년의 기념비적인 농성기간 중에 다시 새롭게 타올랐다.
* 자치도시인 피렌체에는 황제당과 교황당의 싸움뿐 아니라 귀족, 도시의 부유층인 포폴로 그라소, 소시민인 포폴로 미누토 사이에 지속적으로 갈등과 투정이 있었다. 1378년 '치옴피의 난'이 발생하여 한 때 하층 노동자들이 자치도시의 대표직을 맡아 시정에 참여했으나 곧 수공업자와 대상인층에 의해 무렵으로 진압되었다. 그 뒤로 부유 상인층에 의한 과두정치가 이어져 알비치 가문이 지배했고, 1434년부터는 노(老) 코시모 메디치가 실권을 잡았다. 피렌체는 형식상으로는 자치도시를 유지하면서 실질적으로 메디치 가문이 통치하는 체제였다. 노 코시모의 손자 로렌초 대에 이르러 피렌체는 다른 이탈리아 국가들과 세력균형을 이루며 대내적으로 전성기를 맞았으나, 1492년 샤를 8세가 침입하면서 프랑스 군에 점령되었고 메디치 가는 추방당했다. 시민들은 국가를 재건하기 위해 도미니쿠스회의 수도사인 사보나롤라의 지도 아래 단합했다. 그러나 피렌체에 신정정치를 도입하려던 사보나롤라는 1498년에 화형 당하고, 메디치 가는 1512년에 다시 복귀했다. 이후 메디치 가 출신의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에 대항하여 1526년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 베네치아, 밀라노 등과 코냑동맹을 맺어 전쟁을 개시했고 메디치 가는 다시 추방당했다. 공화국 정부를 재건하려던 피렌체는 교황과 대적하던 황제 카를 5세의 군대에 포위되어 항전하다가 1530년에 항복했다. 그 결과 메디치 가의 알레산드로가 카를 5세에 의해 피렌체 공작에 봉해지면서 피렌체는 공국이 되었고, 공화제를 수립하려던 피렌체인들의 희망은 물거품이 되었다.
152 국가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 가운데 타의 추종을 불허한 사람은 마키아벨리였다. 그는 현존하는 세력을 언제나 생명이 있는 활동적인 것으로 파악했고, 선택해야 할 길을 정확하고 훌륭하게 제시했으며, 자신은 물론 타인도 속이려 하지 않았다. 그에게서는 허영이나 분식의 흔적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마키아벨리는 민중을 위해서가 아니라 관리와 군주와 자신의 친구들을 위해 글을 썼다. 그의 위험성은 결코 그의 잘못된 천재성이나 잘된 개념 창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도 애써 억제했던 강렬한 상상력에 있었다. 물론 그의 정치적인 객관성은 공포스러울 만큼 솔직하다. 하지만 그 객관성은 인간이 더 이상 정의를 신뢰할 수도 없고 공정성도 기대할 수 없는 지극히 위험한 시기에 생겨난 것이었다. 여기에 도덕적인 분개를 퍼붓는다고 그것이 좌우에서 여러 세력이 활동하는 것을 보고 있는 지금의 우리에게는 별다른 감동을 주지 못한다.
제2부 개인의 발전
201 공화국이나 전제국을 막론하고 이탈리아 국가들이 처했던 상황은 그 국민들이 일찍부터 근대 인간으로 성장해갈 수 있는 - 유일한 바탕은 아니더라도 - 가장 든든한 기반이 되어주었다. 이탈리아인이 근대 유럽인의 장자(長子)가 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중세에는 인간 의식의 양면 - 바깥 세계를 향한 인식과 인간 내면을 향한 의식 - 이 하나의 공통된 베일을 쓰고 꿈을 꾸거나 반쯤 깨어난 상태였다. 그 베일은 신앙과 어린애 같은 집착과 망상으로 짜여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통해 바라본 세계와 역사는 기묘한 색체를 띠었다. 그리고 인간은 자기 자신을 인종•민족•당파•단체•가족 따위의 보편적인 범주로 이해하였다.
그런데 이탈리아에서 처음으로 이 베일이 바람에 날려갔다. 국가를 비롯한 이 세계의 모든 사물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다루는 눈이 싹튼 것이다. 더불어 주관적인 의식도 강하게 고개를 들면서 인간은 정신적인 개체가 되었고 스스로를 그렇게 자각하였다.
제3부 고대의 부활
245 유럽 세계를 정복한 것은 고대 하나만이 아니었다. 고대와 함께 병존하며 끈끈한 유대를 맺고 있던 이탈리아의 민족정신도 서구 세계를 사로잡았다. 우리는 바로 이 점을 이 책의 핵심명제로 주장하려고 한다. 이 가운데 이탈리아의 민족정신이 지켜간 독자성은 한결같지 않았고, 일례고 근대의 라틴어 문학만 보더라도 그 힘의 발휘는 상당히 미미했지만, 조형미술을 비롯한 다른 분야에서는 눈에 띄게 큰 힘을 발휘하였다.
263 고대 유물 가운데 건축을 비롯한 미술품보다 훨씬 중요했던 것은 당연히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씌여진 저작물이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모든 지식의 절대적인 근원으로 생각했다.
이탈리아는 오래 전부터 고대 작가들의 영향을 받았고 특히 14세기는 그 영향력이 대대적으로 미친 시대였지만, 그것은 새로운 것을 발견한다기보다는 예부터 익히 알려져 있던 것들이 많은 사람에게 전파된 것이었다. 인기 있는 라틴 시인, 역사가, 연설가, 서간문학가들의 저작을 비롯해 라틴어로 번역된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루타르코스와 몇몇 그리스인들의 저술이 보카치오와 페트라르카의 세대를 열광시킨 지식의 보고였다.
273 피코는 일방적인 고대 숭배에 반대하여 모든 시대의 학문과 진리를 강조하고 소리 높여 옹호한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는 아베로에스와 유대 학자들뿐 아니라 중세 스콜라 학자들의 사상도 존중했다. 그리고 그들의 말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며 이렇게 얘기했다. "우리는 자구에 얽매이는 사람들의 학교가 아닌 현자들의 사회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그곳은 안드로마케의 어머니나 니오베의 아들들을 논하는 곳이 아니라 신과 인간의 심오한 근원을 얘기하는 곳이다. 그곳에 가까이 다가서는 자는 야만인에게도 지혜가 있음을, 그것도 혀가 아닌 가슴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힘차고 아름다운 라틴어를 구사하면서 명확한 서술력을 자랑했던 피코는 편협한 언어 결벽주의를 경멸했고 빌려온 형식이 과대평가되는 풍조를 멸시했다. 특히 그 빌려온 형식이 일방적이거나 사물에 담긴 커다란 진리를 훼손할 때에는 더욱 그랬다. 만일 가톨릭 종교개혁이 이 차원 높은 정신적 삶을 방해하지 않았다면 이탈리아 철학이 얼마나 당당하게 방향 전환을 했을지 우리는 피코를 통해 감지하게 된다.
277 이탈리아도 그 밖의 유럽 나라들도 다시는 단체와 같은 인물을 배출하지 못했다. 이로써 단테는 처음으로 고대를 문화생활의 전면에 힘차게 밀어넣은 인물로 남게 되었다. <신곡>에서 그는 고대 세계와 기독교 세계를 동등하게 다루지는 않았어도 줄곧 나란히 놓고 논의했다. 중세 초기에 사람들이 어느 한 유형과 그 반대되는 유형을 구약과 신약의 내용과 그 인물들에서 따와 모아놓았듯이, 단테도 어느 한 가지 사항과 관련하여 기독교적인 사례와 이교도적인 사례를 나란히 연결시키고 있다.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곧 기독교적 상상의 세계나 이야기는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친숙한 세계였지만, 고대 세계는 상대적으로 미지의 세계였고 많은 것을 약속해주는 흥미진진한 세계다는 것 그리고 이제 두 세계의 균형을 잡아줄 단테와 같은 인물이 더 이상 나오지 않게 되자 필연적으로 고대가 더 일반인의 관심을 끌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페트라르카는 오늘날 우리들 대다수의 마음속에 위대한 이탈리아 시인으로 살아 있다. 그러나 그가 당대 사람들 사이에서 명성을 얻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온몸으로 고대를 대변했고, 모든 종류의 라틴시를 모방했으며, 고대의 제반 문제를 다룬 논문 형식의 서간문을 썼다는 데에 있다. 지금의 우리는 이해가 안 될지 모르지만 이 서간문들은 고대 관련의 안내서가 없던 당시에는 매우 귀중한 가치가 있었다.
제6부 윤리와 종교
645 그렇다면,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사려 깊은 사람들의 굳건한 종교심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것은 사람에 따라 유신론일 수도 있고 이신론(理神論)일 수도 있었다. 이신론은, 기독교 교리는 내던졌으나 그것을 대신해서 종교심을 투사할 다른 대리물을 찾지 않는. 또는 찾지 못한 사고방식에 합당한 이름일 것이다. 반면 유신론은, 신적인 존재에게 고귀하고 절대적인 믿음을 바치는, 중세에는 볼 수 없었던 신앙에서 발견된다. 이 신앙은 기독교를 배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언제라도 죄악과 구원과 영혼의 불멸성 같은 기독교 교리와 화합할 수 있다. 하지만 유신론은 기독교가 없더라도 사람들 마음속에 존재할 수 있다.
648 중세 사람들은 이 세계를 적그리스도가 출현할 때까지 교황과 황제가 지켜주어야 하는 비탄의 골짜기로 보았고, 르네상스기의 숙명론자들은 힘찬 역동의 시대와 우울한 체념 또는 미신의 시대를 오가며 방황했으나, 여기 이 선택된 정신들의 모임에서는, 우리 눈에 보이는 세계가 하느님에 의해 사랑으로 창조되었고 하느님 안에 이미 존재하는 원형의 모방이며, 하느님은 이 세계를 영원히 움직이고 지속적으로 창조해가는 분이라는 사고가 일어났다. 개인의 영혼은 먼저 하느님을 인식함으로써 하느님을 자신의 좁은 한계 속으로 끌어들일 수 있지만, 또한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통해 자신을 무한대로 확대할 수 있는바, 이것이 곧 지상에서의 축복인 것이다.
이것은 중세 신비주의의 여운이 플라톤의 학설과 근대 고유의 정신과 맞닿은 부분이며, 어쩌면 바로 이 지점에서 세계와 인간의 인식이라는 가장 값진 열매가 꽃핀 것인지도 모른다. 또한 이것 하나 때문이라도 이탈리아의 근대 르네상스는 우리 시대의 지도자로 불려 마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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