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 D. 로스: 아리스토텔레스 그의 저술과 사상에 관한 총설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13. 2. 12.
아리스토텔레스 그의 저술과 사상에 관한 총설 - W. D. 로스 지음, 김진성 옮김/누멘 |
서문
머리말 - J. L. 아크릴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 목록
일러두기
1장 생애와 저술
2장 논리학
3장 자연철학
4장 생물학
5장 심리학
6장 형이상학
7장 윤리학
8장 정치학
9장 수사술과 작시술
참고 문헌
참고 문헌 보충
아리스토텔레스의 후계자들과 주석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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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논리학
43 아리스토텔레스는 학문을 이론적인 학문, 실천적인 학문, 제작적인 학문으로 나눈다. 각 종류의 직접적인 목적은 앎이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각각 앎, 행위, 유용하거나 아름다운 물건의 제작이다. 논리학이 만일 이런 분류의 틀 속으로 들어간다면, 이론적인 학문에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론적인 학문은 수학, 자연학, 신학 또는 형이상학뿐이고, 논리학은 이런 것들 중 어느 것에도 포함될 수 없다. 그것은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실체를 다루는 학문이 아니라, 누구든 어떤 학문을 학습하기 전에 받아야 할 교양 일반의 일부이다. 그리고 이것만이 어떤 종류의 명제들에 대해서 증명을 요구하고 어떤 종류의 증명을 그것들에 대해 요구해야 하는지를 알게 해 준다.
44 논리학적인 논문들은 크게 세가지로 부분으로 구분된다. <앞 분석론>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가 모든 추리에 공통된 것으로 여기는 구조 - 삼단논법 -를 드러내고, 다루는 주제의 성격과 무관한 그것의 다양한 형태를 제시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이것을 형식 논리학이라든가 무모순의 논리학이라 불러도 괜찮을 것이다. <뒤 분석론>에서 그는 추리가 단지 모순이 없을 뿐만 아니라 완전한 의미에서 학문적이기 위해서 갖춰야 할 추가의 특징들을 논의한다. 이것은 그저 무모순성에만 관심을 갖지 않고 진리에도 관심을 둔 논리학으로 강조된다.
47 범주들은 이름을 들 수 있는 다양한 존재들에 대해 본질적으로 서술될 수 있는, 즉 우리에게 그것들이 근본적으로 어떤 종류의 존재인지를 말해 줄 가장 폭넓은 술어들의 목록이다. 첫 번째 범주는 실체이다. 이것은 다른 모든 범주들에 의해 전제되는 기체이다. 실체를 아리스토텔레스는 (1) '어떤 주어에 대해서 서술되지도 않고 어떤 주어 안에 있지도 않은'. 예를 들어 특정 사람들이나 말들과 같은 으뜸(제일) 실체들과 (2) 버금(제이) 실체, 즉 으뜸 실체들을 포함하는 종들과 유들로 구분한다. 뒤의 것들은 '어떤 주제에 대해서 서술되지만, 어떤 주어 안에 있지 않다.' 여기에서 '어떤 주어에 대해서 서술된다'는 보편자와 개별자의 관계를 언급하고, '어떤 주어 안에 있다'는 속성과 이것을 소유한 것의 관계를 언급한다. 실체 외의 다른 모든 범주들은 '어떤 주어 안에 있다.' 그것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예를 들어, 지식은 또한 '어떤 주어에 대해서 서술된다.'
50 <명제에 관하여>는 앎에 관하여 순수 '재현적인' 견해를 표방한다. 혼이 겪은 것들은 '사물들을 닮은 것들'이다. 이런 견해에 따르면, 판단은 실재에서 이루어지는 결합들에 대한 파악으로서 기술되지 않고, '개념들'이라고도 불리는 혼이 겪은 것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결합들의 정립으로서 기술된다.
57 삼단논법 이론은 전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에 기인하다고 말해야 마땅할 것이다. syllogismos란 말은 플라톤에도 나오지만,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그 말에 부여한 의미로 쓰인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전에는 추론 과정에 과한 일발적인 설명을 제공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에 가장 근접한 것은 아마도 플라톤이 논리적인 분할 과정을 정형화한 것일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약한 삼단논법'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것은 추론 과정 일반에 관한 최초의 밑그림도 못 된다. 무엇이 정확히 아리스토텔레스로 하여금 그 문제에 착수하도록 이끌었는지 묻는다면, 아마도 그의 일차적인 관심은 학문적인 지식의 조건들을 세우는 데에 있었다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58 아리스토텔레스가 내리는 삼단논법에 대한 정의는 아주 일반적이다. 그것은 '어떤 것들이 전제된 상태에서 그것들과 다른 어떤 것이 그것들이 참이라는 것으로부터, 외부로부터 어떠한 개념도 필요함이 없이, 필연적으로 따르는 논증이다.'
86 <변증론>의 목적은 '제시된 문제에 대하여 개연적인 전제들을 바탕으로 논증 할 수 있게 해 주고, 우리가 자신의 생각을 검토할 때 자기 모순에 빠지지 않게 해 줄 방법을 찾는 것'이다. 다시말해, 온갖 변증술적인 토론에 관여하는 양쪽 - '질문하는 쪽(이쪽의 사람은 상대방에게 질문을 던지고 그가 받은 모든 답변들을 바탕으로 논증하며 주도적으로 말을 한다)이나 '응답하는 쪽' - 을 성공적으로 지지할 수 있을 방법을 찾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우리의 목적은 변증술적인 삼단논법을 연구하는 것이다. 변증술적인 삼단논법은 그것의 전제들이 참인 것도 직접적인 것도 아니고 개연적인 것, 즉 모든 사람들, 대부분의 사람들, 또는 지혜로운 사람들의 마음에 끌리는 것일 뿐이라는 사실에 의해 학문적인 삼단논법과 구분된다.
3장 자연철학
94 아리스토텔레스가 분류한 것을 보면, 학문들은 앎 자체를 겨냥하는 이론적인 학문, 행위의 안내자로서의 앎을 겨냥하는 실천적인 학문, 유용하거나 아름다운 것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앎을 겨냥하는 제작적인 학문으로 나뉜다. 이론적인 학문들은 '신학'(또는 형이상학), 자연학, 수학으로 세분된다. 자연학은 분리되어 존재하지만 변하는 사물들을(즉, 안에 운동과 정지의 근원을 갖는 '자연적인 물체들'을) 다루고, 수학은 불변하지만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사물들을(즉, 실체들을 제한하며 부가적으로 존재하는 수와 공간적인 도형들을) 다룬다. 신학은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불변하는 사물들을(즉, 재료와의 어떠한 연관으로부터도 벗어나 존재하는 실체들을) 다룬다. 그것의 이름을 이러한 순수한 실체들의 우두머리가 신이라는 사실에 기인한다. 앞에서 정의한 대로의 '자연학'은 길게 연속된 저술들에서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해설된다. 이 저술들이 단일성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는 점은 <기상학>의 머리말 부분에 의해 지적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여기에서 (1) 자연의 으뜸 원인들(즉, <자연학> 1권,2권에서 모든 변화에 관련되어 있다고 보여주는 구성적인 요소들)을 다뤘고, 자연적인 운동 일반(<자연학> 3권-8권)을 다뤘고, (2) 별들의 질서와 운동(<천제에 관하여> 1권, 2권), 물체적인 요소들의 개수와 본성 및 상호 변형( <천체에 관하여> 3권, 4권)을 다뤘고, (3) 생성과 소멸 일반( <생성과 소멸에 관하여>)을 다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4) '자연 - 그렇지만 으뜸가는(또는 천체를 이루는) 요소의 자연보다는 못한 자연 - 에 일치하여, 별들의 운동에 가장 근접한 지역에서 발생하는 것들을' 다룰 것(<기상학>)을, 그리고 (5) 동식물을 일반적으로 그것들의 종에 따라 다룰 것(생물학적인 작품들)을 제안한다.
117 운동은 '잠재적으로 있는 것이 그것인 한에서 현실화'이다. 다시말해, 현실태로 x이고 잠재태로 y인 것이 있다면, 운동은 이것의 y-임을 현실적인 것으로 만듦을 뜻한다. 예를 들어, 건축이라는 운동은 집으로 지어질 수 있는 것들인 벽돌과 모르타르를 집인 상태로 끌고 감이다.
운동은 일반적으로 잠재적인 것을 현실화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잠재적인 것이 아직 완전히 제 잠재성을 잃지 않고 현실적인 것이 된다는 점은 운동의 본성을 이루는 일부다. 그 점이 운동과 활동의 차이다. 활동의 매 순간에, 잠재태는 완전히 취소되고 현실태로 변형된다. 운동에서 그 변형은 움직임이 끝날 때까지 완성되지 않는다. 바꿔 말하면, 미완의 것이 완성된 것과 다르듯, 운동은 활동과 다르다. 아니, 보다 느슨하게 말하자면, 운동은 미완의 활동이고 활동은 완성된 운동이다.
128 아리스토텔레스는 확답은 주지 않지만 한 가지 중요한 물음을, 즉 혼이 있지 않으면 시간이 있을까? 라는 물음을 제기한다. 그는 세는 사람이 없다면 세어질 수 있는 것도 없을 것이고, 따라서 수도 없을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 수도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렇게 되면, 오로지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시간의 기체인 운동일 것이다. 다시말해, 운동은 여전히 있을 것이지만, 그것에 측정될 수 있는 측면이 있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 그것의 수인 운동은 생성이나 소멸, 성장, 질적인 변화, 장소이동일 수 있다. 그러나 운동은 그 가운데 으뜸가는 종류인 장소이동에 의해 자연적으로 측정된다. 그리고 장소이동 가운데 으뜸가는 종류는 원운동이다. 이로부터 시간을 천구의 운동과 동일시했던 이전의 견해가 나왔고, 인간사, 모든 변화, 시간 자체를 순환적인 것으로서 기술하는 견해가 또한 나왔다.
4장 생물학
153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에서는, 생물학과 심리학은 두 가지 별개 학문이 아니다. 그의 심리학적, 생물학적 저술들은 단일한 그룹을 이룬다. 이것을 그는 아마도 다음과 같이 나누었을 것이다. <동물탐구>는 동물들의 삶에 나타나는 주요 사실들을 기록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예비 저술이다. 나머지 논물들은 기록된 사실로부터 이론을 이끌어내는 데에 목표를 두고 있다. 이 이론은 살아있는 것들의 재료를 다루기도 하고 (<동물의 몸에 관하여>, <동물의 나아감에 관하여>), 그것들의 본질적인 형상을 다루기도 하고(<혼에 관하여>), 그것들에 수반되는 속성들을 다루기도 한다(<자연학 소론집>,<동물의 움직임에 관하여>,<동물의 발생에 관하여>). 그러나 이후 학문들의 전개에 비추어, 그의 생물학과 심리학을 따로 다루는 것이 편할 것이다.
166 동물들의 특성을 두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요한 구분을 한다. 어떤 성질들은 어떤 종 전체의 특성이고, 다른 어떤 성질들은(예를 들어, 특정한 경우들에서 색깔은) 그 종 내에서 가지각색이다. 이 두 가지 성질 그룹은 달리 설명되어야 한다. 앞의 것들은 목적인, 또는 바꾸어 말하자면 형상인에 의해 설명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눈을 가진 동물들은 감각이 자신들이 존재하는 목적들 중 하나이기 때문에, 동물의 본질적인 특성들 중 하나이기 때문에 그것을 갖는다. '자연의 정돈된 일정한 산물들을 다룰 때에는 우리는 산물들 각각이 그렇게 되기 때문에 일정한 성질의 것으로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그것이 이러이러한 것으로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된다고 말해야 한다. 왜냐하면 생성의 과정이 존재에 따르고, 그것이 존재를 위한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일정하지 않은 특성들은 재료인이나 작동인에 의해 설명되어야 한다. '동물은 눈을 필연적으로 가져야 하지만(왜냐하면 동물의 근본적인 개념은 그러한 종류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다른 의미에서 필연적으로 특정 종류의 눈을 가질 것이다.' 이렇게 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목적인들을 사용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그는 기계적인 원인들로 설명될 수밖에 없는 자연적인 변이들을 의식하고 있다.
5장 심리학
172 심리학의 대상은 '혼의 본성과 본질, 그리고 그것의 속성들을 알아내는 일'이다. 이 속성들을 다루는 방법은 증명이다. 이에 대응하는 본질을 발견하는 방법이 있는지를 아리스토텔레스는 묻는다. 그는 분할을 가능한 방법으로 제안하고, 실제로 이를 채택한다.
176 혼과 몸과의 관계에 대한 이런 일반적인 이론으로부터 따르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아의 개념을 몸이 다른 물리적인 사물들만큼이나 외부 세계의 부분으로서 관계하는 순수한 정신적인 존재로서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그에게는 혼과 몸은 단일체를 이루고, 이것은 유지되는 한 완전한 것이고, 이 안에서 혼과 몸은 철학적인 눈에 의해 구분될 수 있는 측면들일 뿐이다. 혼의 존재가 가장 확실한 것이고 물질의 존재는 나중에 추론되는 것이라는 데카르트의 것과 같은 생각을 아리스토텔레스는 불합리한 것으로 대했을 것이다. 자아 전체, 혼과 몸은 주어진 어떤 것이지, 그렇게 주어진 것인지 의심되는 것이 아니다. 물리적인 세계도 그렇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때대로 관념론을 시사하는 듯한 말을 사용하지만, 크게보아 그는 소박한 실재론자로 불릴 수 있을 것이다. 관념론을 시사하는 말은 그가 사유를 그것의 대상과 같은 것으로 기술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바탕에 깔린 견해는 대상이 사유에 의해 구성된다는 것이 아니라, 정신이 '형상들의 자리'이거나 '형상들의 형상'이라는 것이다.
180 아리스토텔레스 이전 사람들은 대부분 감각이 본질적으로 감각기관들이 대상에 의해 질적으로 변하는 수동적인 과정인 것처럼 다루어 왔다. 이런 견해에 반대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만일 감각이 질 변화라고 불릴 수 있으려면, 두가지 종류의 질 변화를 구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감각은 단순히 한 상태가 이에 반대되는 상태에 의해 교체되는 것과 같은 종류의 질 변화가 아니다. 그것은 잠재태의 실현, 즉 어떤 것이 '자신을 향해, 현실태를 향해' 나아가는 것, 또는 <자연학>의 표현을 빌자면 완성함이다.
6장 형이상학
202 <형이상학> 전체에 걸쳐 아리스토텔레스를 분발시킨 동기는 지혜의 이름에 가장 걸맞는 형태의 앎을 얻고자 한 바람이다. 그는 알고자 하는 욕구가 인간에게 타고난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것은 가장 낮은 단게에서 감각을 사용하면서 우리가 얻은 즐거움에서 보인다. 보다 완전한 앎의 방향으로 이것 위에 있는 첫 단계는 기억의 사용에 관계된 단계이다. 이것은 우리를 하등의 동물로부터 구분해 준다. 다음 단계 - 그리고 인간만이 이를 수 있는 단계 -는 '경험'이다. 이것으로써 같은 종류의 대상에 대한(예를 들어, 특정한 병을 앓고 있는 칼리아스와 소크라테스 등에게 도움을 주었던 것에 대한) 여러 기억들의 연합을 거쳐 우리는 그것의 이유들은 알지 못한 채 실천의 규칙을 얻는다. 이보다 한 단게 높은 것은 일반적인 원칙들에 기대어 실천의 규칙들을 아는 '기술'이다. 모든 것들 중 가장 높은 단계에 원인들에 관한 순수한 앎인 '학문'이 있다. 이것은 기술처럼 장래의 높은 단계에 원인들에 관한 순수한 앎인 '학문'이 있다. 이것은 기술처럼 장래의 어떤 실천적인 목적을 가짐으로써 관심이 한정되지 않고 앎자체를 위해 아는 것이기 때문에 가장 높은 단계의 것이다. 이것은 문명의 최초의 산물이자 최고의 산물이다.
215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서 범주들 전체를 다루지는 않는다. 실체 이외의 범주들은, 말하자면, '있는 것에 덧붙은 것, 딸린 것'일 뿐이다. 실체는 그것들에 세 가지 방식으로 앞선다. 먼저, 그것들은 따로 존재할 수 없지만, 실체는 따로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실체 없이 존재할 수 없지만, 실체는 그것들 없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질이 없는 실체는 실체를 전제하지 않는 질과 마찬가지로 불가능하다. 실체는 그것의 본질을 이루는 질, 관계 등을 포함하는 전체적인 사물이고, 이 본질은 따로 떨어져 존재할 수 있다. 실체는 질을 함축하지만 질은 실체가 자신에 더하여 필요로 하는, 실체 밖의 어떤 것이 아니다. 질은 다른 한편으로는, 실체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추상물이다. 분명히, 이것이 그가 의도하는 바라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체를 개별적인 사물로 생각하고 있다. 보편자들인 버금 실체들(즉, 유와 종)은, 그의 이론에 따르면, 따로 존재할 수 없고, 그것들에 속한 개별 구성원들의 특수한 성질들에 의해 보충되어야 한다.
238 아리스토텔레스가 신을 세계의 창조자로서 생각했느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분명히 그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어야 한다. 그에게 재료는 생성되지 않은 것이고 영원한 것이다. 그는 명시적으로 세계의 창조에 반대되는 주장을 펼친다. 이것은 재료가 영속적으로 줄곧 존재하는 신이 그렇게 지켜주기 때문이라는 견해를 반드시 배제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그런 이론의 흔적은 없다. 더 나아가, 지성적인 존재들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창조되지 않은 존재들인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개별적인 인간 존재 각각의 이성은 개인이 태어날 때 신에 의해서 창조된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려는 브렌타노의 시도는, 이성이 영원히 주어져 있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주장되고 있는 구절들에 걸려 무너진다.
7장 윤리학
241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그것이 그 자체를 위해 추구되는지, 행동에 이르는 수단인지, 아니면 쓸모 있거나 아름다운 것을 만들기 위한 수단인지에 따라 크게 세 가지 - 이론적인 앎, 실천적인 앎, 생산적인 앎 - 로 나뉘다. 최고의 실천적인 학문 - 다른 모든 학문들이 그것에 종속되어 봉사하는 학문 - 은 정치학이다. 인간이 국가 이외의 다른 공동체들의 구성원이기도 하다는 점을 보다 충실하게 의식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사회 과학이라고 부르는 쪽으로 더 끌릴 것이다. 윤리학은 이 학문의 일부 일뿐이고,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결코 '윤리학'을 분리된 학문으로 말하지 않고, '성격에 관한 탐구' 또는 '성격에 관한 우리의 논의들'로만 말한다.
'정치학'이라는 학문 전체는 편의상 윤리학과 정치학이라 불릴 수 있는 구개의 분야로 나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확실히 사회적이고, 그의 정치학은 윤리적이다. 그는 개인은 본질적으로 사회의 구성원이라는 점을 <윤리학>에서 잊지 않고, 국가의 좋은 삶은 시민들의 좋은 삶들에서만 존재한다는 점을 <정치학>에서 잊지 않는다.
246 인간을 위해 좋은 것이 갖춰야 할 두 가지 특징이 있다. 그것은 목적이어야 한다. 바로 그것을 위해 항상 선택되고, 결코 다른 것의 수단으로서 선택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자족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것만으로도 삶을 선택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 두 가지 특징은 잘삶에 들어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행복이 무엇인지를 물어야 한다. 이 물음에 대답할 수 있도록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역할 또는 기능 개념을 끌어들인다.
260 플라톤의 네 가지 주요 탁월성 중 정의와 지혜에 관한 논의가 남았다. 정의에 관한 논의에는 5권(E)가 바쳐져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먼저 그 말의 두 가지 의미를 인정한다. '정의로운 것'은 (1) 합법적인 것이나, (2) 공정하고 공평한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이것들은 각각 '보편적인' 정의와 '특수한' 정의이다.
267 첫 번째 의미는 우리가 '정의로운 것'이란 말에 자연스럽게 부여하는 의미는 아니다. 이 점은 원래 dikaios가 일반적으로 '관습이나 규칙(dike)을 준수하는 사람'을 의미했다는 사실에 의해 부분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 그 후 그리스어에서 정의는 올바름의 전체와 동일시되는 경향이 있다. 특히 adikein은 아테네 법에서 법을 어기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쓰인 단어였다. 민사소송에서 피고는 한 개인에게 해를 끼친 죄로 고소당하지만, 형사소송에서 죄인은 도시국가에 해를 끼친 죄로 고소당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법이 인간 삶의 전 영역을 통제해야 하고, 정말로 도덕성이 아니라 - 왜냐하면 이것은 사람들이 '고귀한 것을 위해' 행동하는 것을 보장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 모든 탁월성들에 적합한 행위들을 강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일 특정 국가의 법이 이러한 것을 부분적으로만 실행하고 있다면, 그것은 법이 갖춰야 할 모습이 거칠게 쉽게 흐릿해진 결과일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의 정의, 즉 법에 복종한다는 의미는 이렇게 해서 탁월성과 외연이 같지만, 두 용어의 의미는 같지 않다. '정의'라는 말은, 모든 도덕적 탁월성에 포함되어 있으면서도, '탁월성'이란 말이 주목시키지 못하는 사회적인 성격에 관계한다.
268 분재적 정의는 두 명의 사람과 두 가지 사물에 관계한다. 그것의 과제는 분배될 특정의 선(善)이 주어졌을 때 A와 B 사이에서 그걸 나누어야 한다면 이 두 사람이 진가(眞價)의 비율과 같은 C:D의 비율로 나누는 일이다. 그러나 진가는 국가마다 다르게 평가된다. 민주정에서는 자유가 기준이고 모든 자유민들은 동등하게 생각된다. 과두정에서 기준은 부나 혈통이고, 귀족정에서는 탁월성이다.
269 시정적 정의는 (1) 물건을 팔고 빌려주는 것과 같은 자발적인 거래에서 성립하는 것과, (2) 사기를 수반하거나 강탈, 폭행과 같은 폭력을 수반하는 비자발적인 거래에서 성립하는 것으로 세분된다. 자발적인 거래와 비자발적인 거래의 차이는 앞의 경우에 '거래의 시작이 자발적'이라는 점에, 즉 나중에 해를 입은 사람이 애초에 자발적인 계약에 들어갔다는 점에 있다. 부정의의 두 종류는 계약파기와 범죄나 불법행위 간의 차이에 부합한다. 두 경우에서 위해는 개인에게 가해진 것으로 간주되고, 두 경우에는 재판관의 목적은 처벌이 아니라 시정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언급하는 '비자발적인 거래들'은 사실 대부분 범죄행위들이기도 하다. 그래서 현대의 법체계에서는 보통 형사소추에 의해 다뤄질 것들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가끔 민법에서도 기소할 수 있고, 이 점에 비추어 볼 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의 관례에 따라 그것들을 고찰하고 있다.
294 우리는 잘삶은 상태나 습성이 아니라 활동, 그리고 그 자체로 욕구할 만한 활동이어야 한다는 점을 1권(A)으로부터 보았다. 그런데 그 자체로 욕구되는 것들은 (1) 탁월성에 따른 활동들과 (2) 놀이들이다. 놀이는 삶의 목적일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것 자체를 위해 욕구되지만, 그것 자체 때문이 아니라 진지한 활동을 위해 우리에게 힘을 넣어주는 휴양으로서 귀중한 것이기 때문이다. 잘삶은 탁월성에 따른 활동이어야 한다.
295 관조의 삶은 우리에게 너무 높다. 우리들은 인간들, 즉 몸과 비이성적인 혼과 이성으로 복합된 존재들인 한에서 그런 삶을 살 수 없고, 우리 안에 있는 신적인 요소 덕분에만 그런 삶을 살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이니까 인간사에만 신경 써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을 우리는 따라서는 안된다.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아무리 작더라도 우리 안에 있는 최고의 것이고 가장 진실로 우리 자신인 부분에 따라 삶으로써 '영원한 삶을 붙들어야 한다.' 이렇게 사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8장 정치학
298 <정치학>의 권들에 본래의 순서가 있다든가 적절한 순서가 있다고 하는 것은 아마도 잘못된 생각일 것이다. 각 권들의 시작 부분들에 관한 연구는 저술이 다음과 같은 다섯 개의 독립된 논문을 융합해 놓은 것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1) 가족에 관한 논문 - 국가는 가족에서 발원하기 때문에 가족은 국가에 관한 연구의 적절한 예비 단계이다(1권). (2) 이상 국가로 제시된 것들과 가장 높이 평가받은 현존의 정치체제에 관한 논문(2권). (3) 국가, 시민 그리고 정치 체제들의 분류에 관한 논문(3권). (4)열등한 정치체제들에 관한 논문(4권-6권). (5) 이상 국가에 대한 논문(7권과 8권). 전체적으로, 5권을 6권 다음에 읽는 것이 좋다는 점을 제외하면, (적어도 기원후 1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전통적인 순서가 가장 연속적인 사유 노선을 제공한다.
300 국가가 '공동체'라는 유에 속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것의 종차(본질적 차이)는 그다지 분명하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금껏 생각해왔던 것처럼 종차가 그것의 크기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는 일에 착수한다. 그가 국가의 종차를 발견하는 방법은 국가를 그것의 부분들로 분석하는 것이고, 그것을 그것의 출발점들에서 연구하는 것이다. 인간 존재들을 교제로 이끄는 본능은 크게 두 가지다. 남자와 여자를 모으는 생식의 본능과 서로 돕도록 주인과 노예 - 앞을 내다볼 줄 아는 정신과 튼튼한 신체 - 를 모으는 자기보존의 본능이 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세명의 개인으로 된 최소한의 사회 - 가족 - 를 얻는다. 이것은 '일상에 필요한 물건들을 공급하기 위해 자연적으로 확립된 결사체'이다. 다음 단계는 마을이다. 이것은 '일상에 필요한 물건들 이상의 것들을 공급하기 위해' 여러 가족이 결합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이상의 것들이 무엇인지를 특정하지 않지만, 우리는 그가 마을은 적과 짐승을 보다 완전하게 방어하는 것뿐만 아니라 대규모의 노동 분업을, 이에 따라서 보다 다양한 요구들의 만족을 가능하게 만들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301 '사회의 초기 형태들이 자연적인 것이라면, 국가도 그렇다. 왜냐하면 국가는 그것들의 종착점이고, 한 사물의 본성은 그 사물의 종착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분명히, 국가는 자연의 산물이고, 인간은 본성상 국가를 이루고 사는 (정치적인) 동물이다. 사회에서 살 수 없는 사람이든가 자기 스스로 충분하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 없는 사람은 짐승이거나 신임에 틀림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국가는 관습에 의해서만 존재하지 않고 그것은 인간의 본성에 뿌리박혀 있다고, 자연적인 것은 가장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 삶의 근원이 아니라 그것이 향해 가는 목적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개화된 삶은 고상하다고 가정되는 야만의 삶으로부터의 타락이 아니라고,그리고 국가는 자유에 대한 인위적인 제약이 아니라 자유를 얻는 수단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정치학의 사유에 상당히 기여했다.
314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는 시민에 과한 여러 가지 고찰로부터 정치체제의 분류로 나아간다. 정치체제는 한 국가 내의 공직들, 특히 고위 공직들에 관한 편제로서 정의된다. 정치체제의 본질은 권력을 누가 갖느냐에 달려 있다. 그런데 국가의 형성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공동의 관심사에 의해 함께 모이는 데에 기인한다. 이 경우는 주인과 노예가 결합하는 경우와 다르다. 뒤의 경우에서는 본질적으로 주인에게만 관심이 쏠리고, 노예의 질이 저하되어 주인이 영향을 받는 경우에 한해서만 노예에게 관심이 집중된다. 그러므로 공동의 관심사를 겨냥하는 정부들만이 진정한 정부들이다. 통치자들의 관심만을 고려하는 정부들은 왜곡된 형태들이다. 이렇게 해서, 정부의 동기는 우리에게 정부들에 대해 핵심적인 구분 기준을 제공한다. 두 종류 각각에 일인, 소수, 다수에 의한 통치가 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다음을 얻는다.
323 참주정은 최선의 정부가 왜곡된 것으로서 최악의 것이고, 과두정은 그 다음으로 나쁜 것이고, 민주정은 결코 왜곡된 형태와 다르지 않으면서도 세 가지 왜곡된 형태들 중 가장 참을 만한 것임에 틀림없다는 점이 공리와 같은 것으로서 주장된다. 그 다음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더 나아가 논의의 계획에 대한 윤곽을 그린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탐구해야 한다.
(1) 얼마나 많은 다양한 정치체제들이 있는가?(4권 3-6장)
(2) 어던 정치체제가 정상적인 상황에 적합한 최선의 것이고, 이상적인 정치체제 다음으로 차선의 것인가?(4권 11장)
(3) 열등한 종류의 정부들 중 어떤 것이 각 종류의 주민에 적합한가?(4권 11장)
(4) 이러한 형태들은 어떻게 조직되어야 하는가?(4권 14-16장, 6권)
(5) 정치체제들은 어떻게 파괴되고 유지되는가?(5권)
9장 수사술과 작시술
338 그리스인들은 정치적인 기질의 민족이었고 논쟁을 좋아하는 민족이었다. 그리고 연설의 기술은 현대의 민주사회에서 그렇듯이 그들에게는 남에게 영향을 미치는 유용한 수단이었다. 그들이 지닌 끊임없는 지적인 호기심의 정신에 힘입어, 말하기에 관한 이론은 그것의 실행이 못지않게 중요한 현대의 공동체들에서보다 더 그들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몇가시 '연설의 기술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대 이전에 쓰였다. 하지만 그는 그것들이 모두 연설의 논증적인 요소를 소홀히 했고, 청중의 감정을 유발하는 것과 같은 외적인 문제들에 공을 들였다고 불평한다. 그 자신도 감정에의 호소가 맡은 역할을 인정하지만, 감정은 연설 자체에 의해 산출되어야지, 그리스 법정에 흔한 값싼 우발적인 장치들에 의해 산출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그는 수사술에 관한 이전의 작가들이 지닌 결함을 그들이 더 고귀한 정치적인 수사술 분야보다는 법정 연설에 몰두한 것과 결부시켜 생각한다. 이런 두 가지 측면에서 그는 이전 사람들에 대한 개선에 착수한다. 연설의 논증적인 요소는 처음부터 줄곧 강조된다. 수사술은 변증술과 짝을 이루는 것이거나 변증술의 분과이다. 그것은 과학적인 증명보다는 변증술에 관련되어 있다. 변증술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특정 학문의 지식을 전제하지 않은 논증들을 다룬다.
339 수사술은 '주어진 주제에 대하여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방법들을 보는 능력'이다. 설득 수단에는 두 가지가 있다. - 이미 존재해서 사용하기만 하면 되는 (증언, 고문, 문서상의 증거와 같은) 수사술 바깥의 수단과 말하는 사람이 발견해내야 하는 수사술적인 수단이 있다. 뒤의 수단에는 세 가지가 있다. 말하는 사람의 성격에 달려 있는 수단, 청중을 일정한 감정에 빠뜨리는 수단, 그리고 바로 논증의 힘으로써 어떤 것을 증명하거나 증명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수단이 있다.
345 <작시술>은 다른 한편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들 중 가장 생명력있는 축에 든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어떤 저술도 그것보다 뛰어난 일련의 해석자들의 주목을 이끌지 못했고, 어떤 저술의 의미도 그것보다 선명하게 논쟁되지 않았다. 그리고 만일 - 그의 주요 관심사와 동떨어진 주제이기도 한 - 이 조그만 조각글 외에 그의 저술이 아무것도 우리에게 남아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그것의 작가를 가장 위대한 분석적인 사상가들 중 한 명으로 인정할 것이다.
346 가락은 리듬 없이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해서 세 가지 수단의 일곱가지 가능한 조합은 5개로 감소한다. '작시술'에는 따라서 다음과 같은 부문들이 있다. 시를 산문으로부터 구분하는 것은 운율이 아니라 시가 '모방'이라는 것이라는 점이 지적된다. 소극(笑劇)처럼 성격과 태도에 관한 허구적인 소품들은 운율은 없지만 시(詩)이고, 엠페도클레스는 운율을 넣어 글을 쓰지만 시인은 아니다.
358 최고의 비극은 앞서 규정된 의미로 복잡할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세가지 플롯은 피해야 한다. '선량한 사람이 행복에서 불행으로, 또는 나쁜 사람이 불행에서 행복으로 옮겨가도록 보여서는 안 된다. 앞의 상황은 두려움도 동정도 불러일으키지 않고, 우리에게 불쾌감만 준다. 뒤의 상황은 모든 것들 중 가장 비극적이지 못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인간적인 감정이나 두려움이나 연민에 호소하지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 극악한 사람이 행복에서 불행의 상태로 떨어지도록 보여서는 안 된다. 그러한 스토리는 우리의 인간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는 있지만, 우리를 두려움이나 동정으로 움직이지는 못할 것이다. 동정은 부당한 불행에 의해 일어나고, 두려움은 우리 자신과 같은 사람의 불행에 의해 일어난다. 그렇다면, 비극은 적절한 주인공은 '중간 유형의 인물이다. 그는 남달리 탁월하거나 정의롭지는 않은 사람이지만, 악덕과 악행 때문이 아니라 판단상의 실수 대문에 불행의 상태에 빠지게 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큰 명망과 행운을 누리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러한 구성을 선호한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부분적으로 <오이디푸스 왕>에 근거하고 있다. 이것은 <안티고네>가 헤겔이 애호하는 극이었던 것만큼이나 그가 애호하던 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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