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우스 B.잰슨: 현대 일본을 찾아서 2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13. 1. 17.
현대 일본을 찾아서 2 - 마리우스 B. 잰슨 지음, 김우영.강인황.허형주.이정 옮김/이산 |
12장 메이지 국가의 건설
13장 일본제국
14장 메이지 문화
15장 전간기의 일본
16장 다이쇼 문화와 사회
17장 중일전쟁
18장 태평양전쟁
19장 요시다 시대
20장 독립 이후의 일본
지은이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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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4 메이지 천황은 응석부리기나 좋아할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처음에는 기도 다카요시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을 걱정시켰으나, 성년에 이르러서는 지도자 집단의 일원이 되어 당당히 제몫을 해냈다. 그토록 격동적인 변화를 겪은 일본의 통치자는 아무도 없었다. 메이지 천황의 삶은 외부세게와 철저히 차단된 궁중의 어두운 음영 아래 그림과 시문에 심취한 기품있는 전통의 후계자로 시작되었다. 또한 시끄러운 현실정치와 담을 쌓고 조상과 혈통에 기초한 엄격한 위계 속에서 조정의 무력함을 한탄하거나 세상을 혐오하는 사사로운 감정을 억누르고 정해진 틀에 맞추어 생활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상황이 급변하여 메이지 천황은 전레없이 자신의 영토 전역을 순행하게 되었고, 그의 아우라는 어려운 합의를 이끌어내는 구심점으로 활용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관 전통의 후게자였던 그가 어느때부턴가 원수의 제복을 입고 어색하게 칼을 찬 채 사진을 찍게 되었다. 사적인 공간에서 우아한 시문을 짓던 그가 이제 호방한 필치로 국가라는 한자를 휘호했고, 인민은 그와 국가를 동일시했다. 그는 근대식 군주이자 통수권자로서 자신의 의무를 묵묵히 수행했고, 외국의 고관들을 위해 황후를 대동하고 가든파티에 참석할 때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메이지 지도부 내에서 그가 선호하는 인물들도 점차 분명해졌다. 야마가타보다는 이토를, 모리가 주장하는 근대식보다는 전통적인 수신(修身) 교육을, 모험적인 인물보다는 신중한 인물을 더 좋아했다. 그 후 메이지 체제가 뿌리를 내리고 번영하자 성공은 그의 몫이 되었으며, 일본군이 청조의 군대와 러시아군을 차레로 격파하자 그는 일본인이 이룩한 모든 업적의 상징이 되었다. 그의 초상화는 산간벽지의 가정에도 걸려 있었고, 그가 내린 [교육칙어]는 어린 학생들의 입에서 암송되었다.
698 메이지 시대의 일본제국(1910). 일본은 1875년에 쿠릴 열도에 대한 영유권을 확보했고, 1879년에는 류큐제도를 통합했으며, 청일전쟁 후인 1895년에 타이완을 얻었고, 1905년에는 랴오둥 반도에 대한 조차권을 획득했으며, 끝으로 1910년에는 한국을 병합했다.
926 1937~1945년의 중국 내 일본군 점령지역
933 한 시대를 어떻게 명명하느냐에 따라 그 시대에 대한 해석이 달라지곤 한다. 따라서 보통 '제2차 세계대전'이라고 언급되는 역사적 사건이 일본인의 저술에서 다른 명칭으로 불린다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일본의 전쟁은 구미의 여러 나라가 치른 전쟁과는 어느 정도 동떨어진 것이었다. 또 동아시아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더라도 연합국이 독일과 이탈리아에 대항해 싸웠던 전쟁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다. 하지만 서양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언급하지 않고 일본의 전쟁에 관해 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일본의 지도자들이 그 소란스러운 사건들을 어떻게 해석했는가에 따라 너무나 많은 것이 달라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1936년 독일과 일독방공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장차 일어날지도 모를 소련과의 전쟁에 든든한 대비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히틀러와 스탈린이 상호불가침조약을 맺자 일본의 내각은 책임을 통감하고 물러났다. 새 내각은 새로운 국제정세에 적응하기 위해 애썼고, 외무대신 마쓰오카 요스케는 과감하게 스탈린과 협상을 벌여 일소중립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히틀러는 자신의 약속을 깨고 소련을 침공했다. 마쓰오카는 대담하게도 이제 일본이 참전해 소련을 동쪽에서 공격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내각 총사퇴와 함께 그 역시 물러났다.
일본은 1940년 독일 및 이탈리아와의 3국동맹을 영국이나 미국의 간섭에 대한 억제책으로 보았을 뿐, 나치와 행동을 같이 할 계획은 별로 없었다. 이런 점엥서 3국동맹은 독일과 프랑스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체결한 1902년의 영일동맹의 현대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결과는 그 반대였다. 민주국가들이 독일과 일본을 싸잡아서 위협세력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한편 독일이 서유럽에서 승리를 거두자 네덜란드와 프랑스가 지배하던 동남아시아 식민지들이 무주공산이 된 듯했고, 이는 자원이 풍부한 그 지역에 대한 공격욕구를 자극했다. 분명히 양측 모두 오판을 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태평양함대를 하와이에 주둔시키면 일본을 견제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일본은 그것을 빌리로 선제공격을 가하면 전쟁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높아질 거라고 보았다.
대서양전쟁과 태평양전쟁을 하나의 전쟁이라고 볼 수는 없다. 추축국과 일본은 최소한의 협력관계만을 유지했고, 일본에 파견된 독일 공관원은 개를 산책시키던 중에 일본의 진주만 침공소식을 들었다. 점차 제해권을 상실하고 있던 일본은 독일의 기술을 전수받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핵실험을 위해 잠수함으로 우라늄을 들여오는 것도 그 중 하나였다. 하지만 두 나라 모두 제해권 장악을 위한 합동작전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았다. 설령 그랬다 하더라도 지리적 거리와 영미의 강력한 해군력 때문에 수포로 돌아갔을 것이다.
전시의 일본정부의 대변인들은 '대동아전쟁(太平洋戰爭)'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 과장된 용어에 담긴 뜻은 일본이 아시아를 서양의 억압적 지배로부터 해방시킨다는 것이었다. 식민지들은 자신들을 위해 수행되는 이 용맹한 성전에 긍정적으로 호응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중국이 이를 거부하고 저항을 택했다는 사실은 서양의 운이 다했다는 일본의 신념이 잘못된 것임을 예증해준다. 일본은 중국이 항일투쟁을 계속하는 것은 영국과 미국의 도움을 받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책임을 규명하기 위해 도쿄에서 개최된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검사들은 일본이 새로이 패권을 쟁취하기 위해 시종일관 의도적으로 아시아를 침략했다고 주장했다. 일본의 역사서술에 보이는 또하나의 용어는 '15년 전쟁' - 1931년의 만주사변에서 시작되어 1945년의 항복으로 끝나는 전쟁 - 이다. 이 용어에는 일본의 중국 침공에 초점을 맞추려는 저의가 깔려 있다. 해전을 평가절하하고 지상군의 활약을 강조하려는 이 용어는 문제를 안고 있다. 1933년의 탕구 정전협정과 루거우차오 사건 사이에는 4년이나 되는 비교적 잠잠한 휴지기가 있었다. 일본군 수뇌부는 당시 중국과의 전쟁을 원했다기보다 만용을 부리다 전쟁에 휘말려 들어갔고, 1941년 이후 미국 제14공군 주둔을 위해 개발된 기지를 공격하는데 전력을 기울임에 따라 중국전선은 부차적인 것이 되었다. 또 다른 명칭인 중일전쟁은 엄밀히 말해서 1937년의 전면전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일본정부는 '동아 신질서'를 건설하는 데 매진했고,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를 협상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나는 이 장에 '태평양전쟁'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 용어는 시데하라 기주로가 1951년 사망 직전에 펴낸 회고록에서 처음 썼던 말로, 그 후 일본의 주류 사학자들이 선호하는 표현이 되었다. 5권의 책으로 영역된 바 있는 권위 있는 공동작업물 [태평양전쟁에 이르는 길]은 만주사변부터 시작되지만, 이는 태평양에서의 참혹한 전투를 촉발한 진주만 공격의 서곡에 지나지 않는다. '태평양전쟁'이란 명칭에도 문제는 있다. 그것은 대체로 서양열강, 특히 미국과의 전쟁에 초점을 두기 때문에 중국과의 전쟁을 등한시하게 된다. 하지만 중국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태가 미국과 일본의 갈등을 초래했다는 사실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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