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하위징아: 중세의 가을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13. 2. 5.
중세의 가을 - 요한 하위징아 지음, 이종인 옮김/연암서가 |
옮긴이의 말
네덜란드어 판 서문
독일어 번역본 서문
영역본 서문
제1장 중세인의 열정적이고 치열한 삶
제2장 더 아름다운 삶에 대한 갈망
제3장 영웅적인 꿈
제4장 사랑의 형식들
제5장 죽음의 이미지
제6장 성스러운 것의 구체화
제7장 경건한 퍼스낼리티
제8장 종교적 흥분과 판타지
제9장 상징주의의 쇠퇴
제10장 상상력에 대한 불신
제11장 일상생활 속에서 실천되는 사고방식
제12장 생활 속의 예술: 반에이크의 예술을 중심으로
제13장 이미지와 말: 그림과 글의 비교
제14장 새로운 형식의 등장: 중세와 르네상스의 비교
주석
참고문헌
용어.인명 풀이
작품 해설 | 중세의 아름다움은 어디에
요한 하위징아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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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어 판 서문
23 우리가 과거에 대해서 눈길을 돌리는 것은 주로 새로운 것의 근원을 찾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후대에 와서 찬란하게 빛나는 새로운 아이디어와 생활 형식이 어떤 경로로 생겨나게 되었는지 그 근원을 알고 싶은 것이다. 우리는 대체로 보아 후대의 시대를 밝혀 주는 데 도움이 되는 관점에서만 과거를 살펴본다. 그리하여 근대 문화의 새싹들에 대한 권원을 찾아내려는 목적 아래 중세 시대가 철저하게 연구되었다. 얼마나 철저하게 연구되었는지 "중세의 지성사는 곧 르네상스의 이정표이며 그 것 말고는 설명되지 않는다"라는 견해까지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한때 경직되고 죽어 버린 시대로 여겨졌던 중세의 도처에서, 우리는 미래의 완성품을 가리키는 새싹들을 보고 있지 않은가? 새롭게 발전하는 생활양식을 탐구하다 보면, 역사나 자연이나 죽음과 탄생의 영원한 순환 과정이라는 사실을 손쉽게 잊어버린다. 낡은 사상의 형식들은 죽어 버리지만, 그와 동시에 같은 토양 위에서 새로운 싹이 움터 나와 꽃피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책은 14세기와 15세기라는 중세 후기를 조망하고 있지만, 그 시대를 르세상스의 안내자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중세의 마지막 시기, 중세 사상의 마지막 단계라는 관점에서 살펴보고 있다. 나무로 친다면 이 시대는 열매가 농익어서 완전히 만개하고, 또 땅에 막 떨어지려는 그런 시대이다. 과거의 주도적 형식들이 화려하게 개발되어 사상의 핵심을 제압하고, 또 예전의 타당했던 사상들을 경직시켜 고사시키던 그런 시대이다. 중세 후기를 하나의 독립된 시대로 파악하는 것, 그것이 이 책의 주된 내용이다.
이 책을 쓰면서 저자의 시선은 깊어가는 저녁 하늘을 자주 응시하였다. 그 하늘을 진홍색으로 침윤되었고, 납빛의 구름들 때문에 위협하는 듯이 보였으며, 구리 같은 가짜 광채가 가득하였다. 이렇게 이 책을 모두 집필하고 나서 되돌아보니, 이런 질문이 저자에게 떠오른다. 만약 나의 시선이 그 저녁 하늘에 좀 더 오래 머물렀더라면, 그 침침한 색깔들이 완전한 투명 속으로 용해되지 않았을까? 내가 이제 중세 후기라는 시대에 구체적 윤곽과 색깔을 부여하고 보니, 당초 내가 이 책을 집필하면서 구상했던 것보다 더 음울하고, 더 평온한 이미지를 그 저녁 하늘에 입힌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도 든다. 늘 이 지상의 것들에 시선을 두고 있는 사람에게는 이런 일이 쉽게 벌어진다. 가령 그가 인식한 것이 금방 무기력해지거나 조락해 버리고, 또 죽음의 그림자가 그의 작업에는 늘 깊은 그림자를 던지는 것이다.
제1장 중세인의 열정적이고 치열한 삶
37 세상이 지금보다 5백 년 더 젊었을 때, 모든 사건들은 지금보다 훨씬 더 선명한 윤곽을 갖고 있었다. 즐거움과 슬픔, 행운과 불행, 이런 것들의 상호간 거리는 우리 현대인들과 비교해 볼 때 훨씬 더 먼 것처럼 보였다. 모든 경험은 어린아이의 마음에 새겨지는 슬픔과 즐거움처럼 직접적이면서도 절대적인 성격을 띠었다. 모든 사건과 모든 행위는 특정한 표현을 가진 형식으로 정의되었고 엄격하고 변함없는 생활양식을 엄숙하게 준수했다. 인간 생황의 큰 사건들인 탄생, 결혼, 죽음은 교회의 성사 덕분에 신성한 신비의 광휘를 그 주위에 두르고 있었다. 이보다 중요도가 떨어지는 사건들, 가령 여행, 노동, 순례 등도 다수의 축복, 의식, 격언, 규약 등을 동반했다.
하지만 불행이나 질병 같은 사건들에는 이런 구원의 손길이 별로 없었다. 불행과 질병은 보다 무섭고 보다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찾아 들었다. 질병은 건강과 아주 강력한 대비를 이루었다. 겨울의 얼얼한 추위와 을씨년스러운 어둠은 악이 보다 구체적인 형태로 드러난 것으로 여겨졌다. 명예와 부유함은 보다 적극적으로 보다 탐욕스럽게 향유되었는데, 중세인들은 현대인에 비해 그런 것들을 한심스러운 이름 없음과 개탄스러운 가난에 더욱 강력하게 대비시켰다. 모피로 안감을 댄 관복, 아궁이 속의 환한 장작불, 음주와 농담, 부드러운 침대 등은 인생의 향락이라는 측면에서 높은 가치를 지녔다.
38 간단히 말해서, 중세의 모든 사건들은 그 주위에 잔인하다고 할 정도로 번쩍거리는 공공성을 띠고 있었다. 심지어 문둥이들도 그들의 딸랑이를 딸랑딸랑 흔들어대고 행렬을 이루어 지나감으로써 그들의 질병을 공개적으로 전시했다. 모든 신분, 지위, 조합은 그 의복으로 알아볼 수 있었다. 과시용 무기를 들고 제복을 입은 종복들을 앞세우지 않으면 대중 앞에 나타나지 않는 귀족들은 경외와 선망을 불러일으켰다. 법정의 선고, 물품의 판매, 결혼식과 장례식 등은 행렬, 고함소리, 탄식 소리, 음악 속에서 이루어졌다. 남자 애인은 여자 애인의 기장을, 조합원은 형제조합의 휘장을, 당파는 영주의 깃발과 문장을 높이 쳐들었다.
제2장 더 아름다운 삶에 대한 갈망
81 모든 시대는 지금보다 더 아름다운 세상을 동경한다. 혼란스러운 현재에 대한 절망과 우울함이 심각하면 할수록 그 동경은 더욱 더 강렬해진다. 중세가 끝나갈 무렵 삶에 내재된 기본적인 가락은 씁쓸한 절망의 음악이었다. 르네상스와 계몽시대를 수놓았던 적극적인 삶의 환희와 개인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은 15세기의 프랑스와 부르고뉴 세계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그때의 삶은 평균보다 훨씬 더 불행했던 것일까? 실제로 사정이 그러헀던 것처럼 보인다. 그 시대의 사료들, 가령 연대기, 시가, 설교집, 종교적 소논문, 심지어 관용 문서 등 그 어디를 살펴보아도, 몇몇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갈등, 증오, 원한, 탐욕, 가난의 흔적만이 가득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묻고 싶어진다. 과연 이 시대는 잔인함, 뻔뻔스러운 오만, 무절제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즐기지 못했단 말인가? 그렇다. 확실히 이 시대는 기록상 행복보다는 고통의 흔적을 더 많이 남겨놓았다. 이 시대의 불행이 곧 이 시대의 역사이다. 하지만 우리는 다음과 같은 본능적인 확신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그 시대의 한 개인이 향유했던 행복, 평온한 즐거움, 달콤한 휴식의 총합은 다른 시대에 비하여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중세 후기에 사람들이 누렸던 찬란한 행복은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단 그것은 민요, 음악, 풍경화의 고요한 지평선, 초상화 속의 진지한 얼굴들 속에서 살아남았다.
제3장 영웅적인 꿈
127 중세의 문화적 형식들이 새로운 가치로 흡수되었던 18세기 말에, 그러니까 낭만주의 시대가 시작되던 무렵에, 중세는 무어보다도 기사도의 세계로 인식되었다. 낭만주의자들은 '중세'라는 말을 '기사도가 만발했던 시대'로 생각하려 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중세에서 깃털 달린 투구의 끄덕거림을 보았다. 오늘날 이러한 낭만주의자들의 태도는 역설적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낭만주의자들은 여러 면에서 정확하게 사태를 파악했다. 그러나 20세기 현대에 이르러, 좀 더 정밀한 연구가 수행되면서, 기사도는 중세 문화의 일부분이었을 뿐, 당시의 정치적•사회적 발전은 기사도의 형식과는 무관하게 발생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진정한 봉건주의와 난만한 기사도의 시대는 13세기 중에 끝났다. 그 후에는 중세의 도시적•군주적 시대가 도래했고, 이 시대 동안 국가와 사회의 중요한 요소는 부르주아의 상업적 힘이었고, 그 힘을 바탕으로 한 군주들의 화폐 권력이었다.
143 아름다운 삶을 지향하는 기사도의 이상은 독특한 형식을 갖고 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미학적 이상이고 다채로운 환상과 고상한 정서들로 구축된 것이다. 동시에 윤리적 이상이 되기를 열망한다. 중세 사상은 그것을 경건과 미덕에 연결시킴으로써 생활의 이상으로 만들었다. 기사도는 이러한 윤리적 기능에서 언제나 실패했다. 그것은 늘 원죄에 발목이 붙잡혀 있었던 것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기사도 이상의 핵심은 아름답게 장식된 오만함(pride)이라는 얘기이다. 샤를랭은 이것을 잘 보여주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군주들의 영광은 오만함과 아주 위험한 일을 수행하는 것에 있다. 군주들이 자신의 권력을 표현하는 것은 단 하나의 점으로 결집되는데 우리는 그것을 오만함이라 부른다."
제4장 사랑의 형식들
221 12세기의 전원풍 음유시인들이 욕구 불만의 목소리를 처음 낸 이래, 사랑의 바이올린은 점점 더 높은 음조로 노래하다가 마침내 단테에 이르러서 비로소 그 악기를 순수하게 연주하게 되었다.
중세인들은 사상 처음으로 사랑의 곡조에 부정적 기조음을 개발했을 때 아주 중요한 한 고비를 넘게 되었다. 물론 고대인들도 사랑의 동경과 고통을 노래 불렀지만, 그 동경은 실현의 지연을 암시했을 뿐만 아니라 실현의 불확실성마저도 슬쩍 드러내고 있었다. 슬프게 끝나는 고대의 러브 스토리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품안에 얻을 수 없다는 것이 주제가 아니라, 예전에 충족된 사랑이 죽음에 의해 갑작스럽게 끝장이 났다는게 주제였다.
성적 좌절 그 자체는 음유시인들의 궁정 민네에서 처음으로 핵심적 관심사로 떠올랐다. 에로틱한 사상의 지적 형식이 창조되어, 윤리적 내용을 풍성하게 담으면서도 동시에 그것(윤리적 내용) 때문에 여성에 대한 자연스러운 사랑을 희생시키지 않아도 되었다. 성적 실현을 결코 요구하지 않음으로써 그 자체를 이상화하는 원래 감각적 사랑으로부터 생겨난 것이다. 민네Minne(궁정연예)에서, 사랑은 윤리적•미학적 완성이 화려하게 꽃피어나는 들판이 되었다. 궁정 민네에 의하면 고상한 연인은 그의 사랑에 의해 덕스럽고 순수한 존재가 된다. 서정시에서 정신적 요소는 점점 더 우위를 점하다가 마침내 사라의 효과는 경건한 통찰과 신앙심의 상태에 도달한다. 그것을 이름하여 '라 비타 누오바 La vita nuova(신생)'라 한다.
제5장 죽음의 이미지
265 15세기처럼 사람들에게 죽음의 관념을 강력하게, 또 지속적으로 각인시킨 시대는 없었다. 그 시대에는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의 외침이 평생 동안 울려 퍼졌다. 카르투지오회 수도사 드니는 귀족들의 교양을 위해 집필한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은 권유를 하고 있다. "침대에 들 때면 당신 자신이 침대에 눕는다고 생각하지 말고 남들이 당신을 당신의 무덤 속에 눕힌다고 생각하십시오." 그 이전의 시대에서도, 종교는 죽음에 지속적으로 몰두할 것을 아주 진지하게 권면했다. 하지만 중세 초기의 경건한 소논문들은 이미 탈속의 길로 들어선 사람들 손에만 들어갔다. 탁발 수도회의 인기 높은 설교자들이 등장하면서 비로소 메멘토 모리의 경고는 위협적인 합창이 되었고, 둔주곡 같은 힘을 발휘하며 온 세계에 울려 퍼졌다. 중세의 말기에 이르러, 설교자들의 목소리에 새로운 시각적 재현물이 추가되었는데, 곧 목판화이다. 이 목판화는 사회의 모든 계층에 널리 보급되었다. 이 두 강력한 표현 수단, 즉 설교와 그림은 아주 단순하면서도 직접적이고 또 생생한 이미지로 죽음의 관념을 노골적으로 또 선명하게 표현했다. 죽음에 관한 초창기 수도원의 깊은 명상이 이제는 피상적이고, 원시적이고, 대중적이며, 판화적인 이미지로 응축되었고, 이런 형태로 많은 사람들에게 제시되었다. 이런 죽음의 이미지는 죽음과 관련된 많은 관념들 중 오로지 하나만을 표현했는데, 곧 '사라져 버림'의 관념이 그것이다. 중세 후기의 사람들은 부패하여 없어진다는 것 이외에는 죽음의 다른 측면을 보지 못하는 듯했다.
266 죽음의 세 가지 주제
지상의 영광이 끝나는 것을 끝없이 탄식하는 노랫가락을 지원해 주는 주제가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 주제는, 한때 이 지상에서 엄청난 영광을 누렸던 자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두 번째 주제는, 한때 이 지상의 아름다움을 구성했던 모든 것이 끔찍스럽게 부패해 버리는 것은 어떻게 된 일인가?
세 번째 주제는 어느 시대, 어느 직업의 사람이든 그를 휩싸고 도는 당스 마카브르란 무엇인가?이다.
276 당스 마카브르
14세기에 들어와 '마카브르 macabre'라는 기이한 단어 혹은 원래 철자인 '마카브레'가 등장했다. 시인 장 르 페브르는 1376년에 '나는 마카브레를 춤으로 만들었다"라고 말했다. 그것은 개인적 이름이었고 이 때문에 그 단어의 어원에 대하여 많은 논쟁이 벌어졌다. 라 당스 마카브르에서 마카브르만 형용사로 독립한 것은 훨씬 후대의 일이었다. 이렇게 하여 마카브르는 중세 후기에 죽음의 이미지에 저 독특하고 분명한 의미의 뉘앙스를 제공했다. '마카브르'의 형태로 정립된 죽음의 모티프는 주로 우리 시대의 마을 공동묘지에서 발견된다. 이런 묘지들의 시문과 입상에서 우리는 그 의미의 메아리를 발견한다. 중세의 말엽에 이르러, 이 개념은 중요한 문화적 개념이 되었다. 죽음의 관념을 둘러싼 영역에 새롭고 환상적인 요소가 도입된 것이다. 그것은 유령 같은 공포와 차가운 두려움의 음울한 영역으로부터 솟아나는 전율이었다. 모든 것을 포섭하는 종교적 매커니즘은 즉각 그것을 메멘토 모리에 연결시킴으로써 도덕적 요소로 만들었지만, 동시에 메멘토 모리의 이미지가 가져오는 유령 같은 특성을 적절히 활용한 것이었다.
제6장 성스러운 것의 구체화
289 죽음의 묘사는 중세 후기 사상의 전반적 면모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중세 후기의 사상은 추상적인 생각을 구체적인 그림으로 보여 주려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정신적 생활은 전반적으로 구체적 표현을 추구했고, 황금의 개념이 즉시 황금 주화로 변모되는 듯 했다. 성스러운 모든 것에 형식을 부여하고 또 종교적 아이디어에 물질적 형식을 부여하려는 무제한적인 욕망이 있었다. 그리하여 종교적 아이디어를 마음속에 하나의 선명한 그림으로 간직하고 싶어 했다. 회화적 표현을 지향하는 이런 경향은 고정적인 어떤 것으로 굳어지는 위험을 늘 안고 있었다.
309 사교의 장소가 된 교회
교회에 가는 것은 사회생활의 중요한 요소였다. 사람들은 제일 좋은 옷을 떨쳐 입고, 신분과 지위를 과시하고, 정중한 매너와 처신을 경쟁하기 위해 교회에 갔다. 이미 앞에서 말한 것처럼, '평화'의 막대기는 짜증스러운 경쟁적 정중함의 원천이었다. 젊은 귀족이 교회에 들어오면 우아한 숙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입에 키스를 했다. 사제가 영성체를 높이 쳐들고 신자들이 무릎을 끓고 기도를 올리고 있는 상황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미사 동안에 주위를 돌아다니거나 대화를 나누는 것은 아주 흔한 관습이었다. 젊은 청년과 처녀가 만남의 장소로 교회를 사용하는 것은 너무 흔해서 오로지 도덕주의자들만이 그것을 당황스럽게 여겼다. 니콜라스 드 클레망주는 이렇게 불평했다. 젊은 남자들은 화려한 머리 스타일에 가슴 깊게 패인 옷을 입은 여자들을 보기 위해 교회에 온다. 덕성 높은 크리스틴 드 피장은 순진하게 이런 노래를 읊었다.
만약 내가 교회에 간다면
아름다운 사람을 보기 위해서라네.
새로 피어난 장미처럼 신선한.
교회는 청춘 남녀들의 만남 장소, 사랑하는 여자에게 성수를 건네주는 장소, 그녀에게 '평화'의 막대기를 건네주고, 그녀를 위해 촛불을 켜주고, 그녀 옆에서 함께 무릎을 끓고, 조용한 신호와 은밀한 시선을 주고받는 곳 이상의 장소였다. 교회 안에서, 심지어 성스러운 날들에도 창녀들은 호객 행위를 했고 젊은이들을 타락시키는 부도덕한 그림들이 판매되었다. 교회는 이런 죄악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고 설교했지만 아무 효과가 없었다. 교회와 제단은 거듭하여 불경한 행위들로 모독되었다.
335 중세 사람들은 전적으로 외양에만 매달리면서 미지근한 부패의 양상을 보이는 종교적 생활을 영위했다. 그들의 굳은 신앙심은 두려움과 기쁨을 동시에 만들어냈지만, 단순하기 짝이 없는 중세인들은, 후대의 개신교도들과 다르게, 일상적인 종교 형식에 대해 어떤 질문을 던지거나 정신적 갈등을 일으키지 않았다. 편리하게 식어 버린 종교적 경외심과 일상생활에 만족하는 시기, 그리고 간헐적으로 사람들을 사로잡던 광적인 신앙심의 시기, 이렇게 두 개의 시기가 번갈아 교차했다.
제8장 종교적 흥분과 판타지
361 베르나르 드 클레르보가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해 끓어오르는 감정을 서정적 신비주읠 표현하기 시작한 12세기부터 서정의 곡조는 점점 늘어나고, 중세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를 듣기만 해도 경건한 신앙심으로 충만했다.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이미지는 사람의 마음에 스며들어 깊숙이 파고들었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의 이야기는 어린이의 민감한 감수성에 뿌리를 내렸으나, 너무 음울하기 때문에 다른 모든 감정을 어둡게 덮어 버렸다. 아주 어렸을 때, 장 제르송은 아버지가 벽 앞에서 팔을 벌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한다. "얘야, 너를 창조하고 구원하신 주님께서 어떻게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셨는지를 보아라." 아버지의 그런 모습은 제르송의 노년까지 마음속에 뚜렷이 각인되었다. 그는 아버지의 기일이 돌아오면 어김없이 그 이미지를 떠올렸다.
362 사람들의 마음은 온통 그리스도 생각으로 가득했기 때문에, 주님의 생애나 수난을 떠올리는 아주 사소한 계기라도 생기면 곧 그리스도를 생각했다. 어떤 가엾은 수녀는 부엌으로 장작을 나르면서 자신이 십자가를 지고 있다고 상상했다. 장작을 나른다고 생각만 해도 그 행동을 지고한 사랑의 눈부신 빛으로 감쌀 수 있었다. 눈먼 여자는 빨래하면서 나무통을 말구유로, 세탁장을 마구간이라고 여겼다. 군주를 칭송할 때에도 종교 용어를 남발했다. 이를테면, 루이 11시를 예수에 비교하거나 독일 황제와 아들과 손자를 성삼위에 빗대는 불경스러운 표현도 역시 지나친 신앙심의 결과였다.
제9장 상징주의의 쇠퇴
383 중세 사람들은 늘 종교적 감동을 강렬한 이미지로 바꾸려던 경향이 있었다. 그들은 신비를 눈으로 목격해야만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가시적 표징을 통해 형언할 수 없는 뭔가를 숭배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 14세기 무렵, 예수에 대한 흘러 넘치는 사랑을 표현하려면, 십자가와 어린 양의 이미지만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그것들에 더하여 예수 이름 자체를 숭배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그것이 십자가 숭배를 능가할 정도로 성행했다. 하인리히 조이제는 가슴에 예수의 이름을 문신으로 새겼고, 옷에 연인의 이름을 수놓아 입고 다니는 남자에 자신을 비유하기도 했다. 그는 이 달콤한 이름을 수놓은 손수건을 제자들에게 보냈다. 시에나의 베르나르디노는 감동적인 설교를 마치면서 두 자루의 초에 불을 붙이고, 가로세로 1야드 크기의 서자판을 보여 주었다. 거기에는 파랑 바탕에 금색 글자로 쓴 예수의 이름이 후광에 둘러싸여 있었다. "성당을 가득 메운 사람들은 무릎을 끓고, 예수를 향한 사랑이 북받쳐 올라와 울음을 터뜨렸다."
394 흐릿한 거울의 비유
중세 사람들은 고린도전서의 한 대목이 다른 어떤 구절보다 위대한 진리라고 확신했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 12절에서 한말)
증세인들은 결코 다음과 같은 상황을 잊지 않았다. 즉, 모든 사물이 그 즉각적인 기능과 발현 형식으로 존재 의미가 국한된다면(가령 저녁노을이 그저 저녁노을에 불과하고 그것이 중세의 가을을 가리키는 의미는 없다고 한다면 - 옮긴이), 그 사물은 곧 부조리하게 되어 버린다. 중세인이 볼 때 사물은 결코 사물 그 자체로 있지 않았다. 모든 사물은 나름대로 중요한 방식으로 피안의 세계를 향해 손을 내뻗고 있다. 이런 통찰이 어떤 순간의 형언할 수 없는 감정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가령 나뭇잎에 떨어지는 빗소리나 탁자 위에 비치는 등불이 실용적인 생각과 행동에 봉사한다기보다 마음속 깊은 곳의 인식에 도달하게 해주는 그런 순간 말이다. 그런 통찰은 어떤 병적인 집착의 형태로 떠오를 수도 있다. 그리하여 모든 사물이 저마다 위협적인 의도를 품은 듯이 보이고, 또 우리가 풀려고 애쓰지만 풀지 못하는 수수께끼를 함축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런 통찰은 우리에게 잔잔한 평온함과 강인한 확신을 안겨준다. 또 우리 자신의 삶이 이 세상의 신비한 의미에 동참한다는 느낌을 준다.
제10장 상상력에 대한 불신
420 이 시점에 도달하면 인간의 정신력을 바탕으로 하여, 이미지 없는 절대적 신성을 파악하려는 거센 투쟁이 시작된다. 이 투쟁은 특정 문화나 시대에 얽매이지 않고, 때와 장소를 초월하여 늘 고개를 내민다. "여러 신비가들의 발언에는 영원한 합의가 있다. 사람들은 비판을 멈추고 생각해 보아야 한다. 흔히 얘기하듯이, 신비주의의 고전에 생일도 고향도 없는 것은 바로 이런 합의 때문이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상상의 버팀목은 당장 내다 버릴 수 없다. 그러나 하나씩 하나씩 표현 수단의 결점이 눈에 띄게 된다. 그러면 관념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의인화, 사물을 다채롭게 표현하는 상징주의가 가장 먼저 사라진다. 이런 식으로 상상력을 혁파하려는 물꼬가 한번 터지면, 피, 속죄, 성체성사, 성부, 성자, 성령 따위를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게 된다.
제11장 일상생활 속에서 실천되는 사고방식
465 마녀 사냥: 마법과 이단의 혼동
마녀 사상으로 밀어붙인 끔찍한 망상은 상당 부분 마법과 이단의 두 개념을 혼동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신앙의 직접적인 영역에서 벗어난 것들, 이를테면 과도한 비행에 대한 혐오, 공포, 증오와 관련된 모든 감정들은 이단이라는 용어로 표현되었다.
466 아라스 시는 이런 마녀 박해 때문에 악명이 높았고, 사람들은 아라스 상인에게 방을 빌려주거나 돈 빌려주는 것을 거부했다. 그들은 괜히 그 상인과 거래했다가 그 다음날 마법사의 혐의를 뒤집어쓰고 전 재산이 몰수될까봐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크 뒤 클레르크에 의하면, 아라스 이외의 지역에서는 천 명에 한 사람도 마녀 사냥을 진실이라고 믿지 않았다. "아라스 이외의 고장에서는 그런 일들이 벌어졌다는 얘기가 아예 나돌지 않았다." 마녀 사냥의 피해자가 처형에 앞서서 저지르지도 않은 사악한 행위를 취소하라는 강요를 받았을 때, 아라스 시민들마저도 그 재판에 의심을 품었다.
467 마침내 아라스의 마녀 재판은 완전 무효로 선언되었다. 아라스 시는 이것을 기념하여 즐거운 축제를 열고 도덕 교훈극을 공연했다.
제12장 생활 속의 예술: 반에이크의 예술을 중심으로
474 그림과 문학의 차이
당시에 대한 두 가지 인식, 즉 미술에 반영된 이미지와 역사 및 문학에 담긴 이미지는 어째서 큰 차이를 보일까? 다양한 영역과 생활양식 사이에 큰 격차가 있었던 특수한 시대 탓일까? 화가들이 순수하고 정신적 작업을 하던 환경은 군주, 귀족, 문학가들의 생활 영역보다 더 좋고 또 다르기 때문일까? 화가들은 루이스브뢰크, 빈데스하임 수도자, 민속 음악등과 함께 불타는 지옥의 평화로운 림보에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미술이 시인과 역사가의 문장보다 더 밝은 시대적 이미지를 남기는 게 보편적 현상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확실히 '그렇다'이다. 사실, 우리가 예전의 모든 문화에 대해 스스로 만들어낸 이미지는 취미가 독서에서 회화로 바뀐 때부터, 그리고 우리의 역사적 감각이 점점 시각적으로 바뀐 때부터 더욱더 밝고 명랑해졌다. 미술이 우리에게 과거를 알려줄 경우, 그것은 드러내놓고 슬퍼하지는 않는다. 시대의 고통이 낳은 쓰디쓴 뒷맛은 미술로 오면 투명하게 증발했다. 글로 분명히 표현해 놓으면, 세상의 고통은 늘 즉각적인 비탄과 불만의 어조를 간직하면서 우리에게 슬픔과 동정을 일깨웠다. 그러나 그림으로 표현하면, 고통은 곧 잔잔하게 평화로운 애가로 승화되었다.
467 예술은 중세의 삶에서 여전히 필수적인 부분이었다. 삶은 고정된 관습을 따랐고, 교회의 성체성사, 일련의 연례축제, 하루의 시간구분에 따라 사람들은 함께 모이고 어울렸다. 삶의 노동과 기쁨은 일정한 형식을 가졌다. 종교, 기사도, 궁정 민네는 이런 형식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예술은 아름다운 인생의 형식을 장식하는 중요한 임무를 맡았다. 예술이 추구하던 대상은 예술 자체가 아니라 아름다운 삶이었다. 후대와 달리, 중세인들은 틀에 박힌 평범한 일상에서 벗어나 고독하게 명상하고 예술을 즐기면서 위로 받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삶의 화려함을 강화하기 위해 예술을 이용했다. 드높이 날아오르는 신앙심이든 혹은 지상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기쁨이든 삶의 높은 음정에 맞춰 진동하는 것이 중세 예술의 운명이었다.
제14장 새로운 형식의 등장: 중세와 르네상스의 비교
617 새싹이 피어나는 르네상스의 휴머니즘(인문주의)과, 시들어가던 중세 정신의 상호 관계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사람들은 두 문화를 아예 다르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고대 문화의 영원한 젊음을 받아들이고, 중세적 사고방식의 진부한 표현 방식을 거부한 현상이 갑작스러운 계시처럼 일거에 찾아왔다고 생각한다. 마치 의인법과 화려한 양식에 지칠대로 지친 정신이 문득 깨달아 아, 이것이 아니라 바로 저것이구나!하고 소리치는 모양이라는 것이다. 또는 고전 고대의 훌륭한 조화가 마치 오래 기다렸던 해방처럼 그들의 눈앞에 갑자기 나타나 구원자를 영접하듯이 환호작약하며 르네상스를 받아들였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르네상스와 중세의 구분은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중세 사상이 자리 잡은 정원의 한복판에서, 무성하게 자라는 오래된 시앗들 사이에서, 고전주의가 서서히 발전했던 것이다. 처음에 고전주의는 상상력의 요소에 불과했고, 나중에 이르러서야 새롭고 큰 영감을 영혼에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하지만 고전주의가 도도히 밀려오던 그 때에도 낡고 중세적인 것으로 치부된 정신과 표현 형식들이 넝쿨 위에서 그냥 죽어 버린 것은 아니었다.
618 사실 우리가 15세기의 프랑스와 부르고뉴 세계를 전반적으로 살펴보면, 엄숙한 분위기, 야만적인 화려함, 기괴하고 과장된 형식, 진부한 상상력 등이 일차적인 특징이다. 그것은 중세 정신이 소멸하기 직전에 보여주는 그런 징후들이다. 그래서 프랑스와 부르고뉴에서도 르네상스가 온 사방에서 다가오고 있었다는 사실은 쉽사리 망각된다. 그렇지만 르네상스는 이곳에서 아직 주도권을 쥐지 못했고, 내면의 기조음을 바꾸어 놓지는 못했다.
이 모든 상황 가운데 주목할 만한 사실은 르네상스라는 새로운 흐름이 하나의 형식으로 먼저 찾아왔고 그 다음에 새로운 정신으로 정착되었다는 것이다.
637 15세기에 소수의 프랑스 사람들이 인문주의의 형식을 받아들였지만, 아직 르네상스를 대대적으로 환영할 만큼 다수는 아니었다. 그들의 정서와 방향 감각은 여전히 중세적이었다. 지배적인 '삶의 가락'이 바뀔 때, 혹은 치명적인 현세 부정의 썰물이 새로운 밀물에 길을 내주면서 상쾌한 산들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 비로소 르네상스는 찾아온다. 사람들이 오랫동안 숭상해 온 고대 세계의 영광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반가운 확신(아니면 환상?)이 마음속에서 무르익을 때, 마침내 르네상스는 도래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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