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드레 지드: 좁은문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12. 7. 10.
좁은 문 - 앙드레 지드 지음, 오현우 옮김/문예출판사 |
21 드디어 알리사의 방문 앞에 다다랐다. 잠시 기다렸다. 웃음소리가 섞인 떠들썩한 소리가 아래층에서 들려왔다. 그 소리가 문 두드리는 소리를 덮어버렸는지 대답이 없다. 나는 지그시 문을 밀었다. 문이 조용히 열렸다. 실내는 몹시 어두워 얼른 알리사를 알아볼 수 가 없었다. 저무는 햇살이 스며드는 창문을 등지고 알리사는 침대 머리에 무릎을 끓고 앉아 있었다. 내가 가까이 가자, 그녀는 고개를 돌렸지만 일어서지는 않고 조용히 소곤거리듯 말햇다.
"오! 제롬. 왜 돌아왔니?"
나는 입을 맞추려고 몸을 굽혔다. 그녀의 얼굴은 온통 눈물에 젖어 있었다.
이 순간이 나의 일생을 결정하였다. 지금도 나는 괴로움을 느끼지 않고서는 그 순간을 회상할 수 없다. 물론 알리사의 슬픔의 원인에 대해서는 아주 어렴풋하게 빡에 짐작할 수 없었지만 나는 그 슬픔이, 팔딱거리는 이 작은 영혼과 오열로 온통 흔들리는 연약한 이 육신에게는 너무나 벅찬 것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던 것이다.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는 알리사 곁에 꼼짝하지 않고 나는 서있었다. 솟구치는 가슴속의 격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나는 몰랐다. 다만 그녀의 머리를 내 가슴에 대고, 내 영혼이 흘러넘치는 입술을 그녀의 이마에 대고 있었다. 사랑과 연민에 취하고, 감격과 희생과 미덕이 뒤섞인 어떤 막연한 감정에 잠겨, 나는 내 모든 힘을 다하여 하나님에게 호소하며 내 삶의 목적은 이제 다만 공포와 악과 삶으로부터 그녀를 보호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하면서 내 몸을 스스로 바치기로 하였다. 기도로 가득 찬 나도 마침내 무릎을 꿇었다. 나는 그녀를 내 몸으로 보호하듯 감쌌다. 어렴풋이 그녀가 말하는 걸 들었다.
"제롬! 그들이 너를 못봤지, 그렇지? 자! 빨리가! 그들이 너를 보면 안돼."
23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고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라"
148 "하지만 내가 어떻게 할 수 있겠니?"
그녀는 대뜸 말했다.
"넌 지금 어떤 환영에 대한 사랑에 빠져 있는 거야."
"아니야, 결코 환영에 대해서가 아니야. 알리사."
"상상적인 어떤 인물과..."
"아! 내가 그런 걸 만들어내고 있는 건 아냐. 알리사는 내 애인이었어. 그녀를 기억하고 있어. 알리사! 알리사! 너는 내가 사랑하던 여자였단 말야. 너는 그때의 너를 어떻게 해버린 거지? 무엇이 돼버린 거냔 말야?"
그녀는 얼마 동안 아무 대꾸 없이 가만히 있었다. 고개를 숙인채 한 송이의 꽃잎을 천천히 뜯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제롬, 왜 그전보다 나를 덜 사랑한다고 아주 솔직히 말하지 않는 거니?"
"그건 사실이 아니니가.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라고 나는 격분하여 소리쳤다.
"내가 이보다 더 널 사랑한 적은 없으니까."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하지만 너는 예전의 나를 그리워하고 있어."
억지로 미소를 지으려고 하면서, 살짝 어깨를 들어올리면서 그녀는 말했다.
"나는 내 사랑을 과거에다 놓을 수는 없어."
발밑에서 대지가 무너지고 있었다. 나는 아무것에나 매달리고 싶었다.
"하지만 사랑은 그 나머지 모든 것과 더불어 흘러가버리지 않을 수 없는거야."
"내 사랑은 죽는 날가지 나와 함께 있을 거야."
"그것도 차츰 스러져갈 거야. 제롬이 지금도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그 알리사는 임, 이젠 제롬의 추억 속에만 있을 뿐이야. 언젠가 알리사를 사랑한 적이 있었지. 하는 기억밖에 남지 않을 그런 날이 올거야."
"너는 마치 무언가가 내 가슴속에서 알리사에 대치될 수 있다거나 내 마음이 이젠 더 사랑해서는 안 되게 되었다는 투로 말하는구나. 네 자신이 나를 사랑해 왔다는 것은 이젠 더 생각나지도 않니? 그렇지 않고서야 나를 괴롭히는 게 이렇게 기꺼운 듯이 보일 수 있을까?"
나는 그녀의 핏기없는 입술이 바르르 떨리는 것을 보았다.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로 그녀는 중얼거렸다.
"아냐 아냐 알리사의 마음은 변치 않았어."
"아니 그럼, 아무것도 변한 것은 없잖아?" 하고 나는 그녀의 팔을 꼭 잡으며 말했다.
"한마디면 모든 게 다 설명될 거야. 왜 터놓고 말 못하니?"
"무슨 말?"
"내가 나이가 많다는 것."
"그만둬..."
160 "서로가 서로를 상실한 우리의 삶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본 적은 없어?"
"아니 한번도."
"이제는 너도 알거야! 3년 전부터 나는 너 없이 고통스럽게 헤매고 다녔어..."
밤이 내리고 있었다.
"추워."
그녀는 몸을 일으키면서 내가 다시 자기의 팔을 붙잡지도 못하도록 숄을 바짝 덮으면서 말했다.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고, 혹시 우리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게 아닐까 하고 궁금해하던 그 <성서>의 구절을 기억하겠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였는즉, 그들은 그 약속되었던 것을 얻지 못하였으니라...."[<히브리서> 11장 39~40절]
"그 말을 너는 아직도 믿고 있니?"
"그걸 믿어야 해."
우리는 얼마 동안 나란히 걸었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서. 그녀는 말을 이었다.
"그걸 생각해보렴, 제롬. 그 '더 좋은 것'을!"
그러곤 그녀의 눈에선 갑자기 눈물이 솟아 나왔다. 그러면서 그녀는 여전히 되풀이 했다.
"그 '더 좋은 것'을!"
195
"오빤 가정의 훌륭한 아버지가 될 거예요!" 하고 줄리에트는 웃어 보이려고 애쓰며 말했다.
"언제 결혼하실 거예요?"
"많은 일이 잊히면."
나는 줄리에트의 얼굴이 빨개지는 걸 보았다.
"곧 잊어버리고 싶으세요?"
"언제까지라도 잊고 싶지 않아."
"이리로 와보세요."
이미 어두워진 더 작은 방으로 나를 데려가면서 그녀는 갑자기 말했다. 그 방의 문은 줄리에트의 방으로 문이 나 있었고, 또 한 문은 응접실 쪽으로 나 있었다.
"시간 있을 때면 제가 숨어들어 오는 곳이에요. 이 집에서 가장 조용한 방이죠. 여기 있으면, 삶에서 피난해 있는 것처럼 느껴져요."
이 작은 응접실의 창문은 다른 방들의 창문처럼 시끄러운 거리쪽으로 행해 있지 않고, 나무들이 서 있는 안뜰 같은 곳으로 향해 있었다.
"앉으세요."
안락의자에 주저앉으면서 그녀가 말했다.
"내가 오빠를 잘못 알고 있지 않다면, 오바는 알리사의 추억에 충실하려는 거지요?"
나는 한동안 대답을 하지 않고 있었다.
"아마도 그렇다기보다는 알리사가 내게 대하여 품고 있던 생각에 대해서겠지... 아니, 그런 것을 내가 무슨 장한 짓을 한다고 생각하지는 마. 그렇게 할 수 밖에는 없어서 그러는 거니까. 만일 내가 어떤 여자하고 결혼한다면, 나는 그 여자를 사랑하는 척밖에는 하지 못할 것 같아."
그래!"
그녀는 별 관심 없는 듯이 말했다. 그러고는 내게서 얼굴을 돌리더니 무언지 잃어버린 것이라도 찾으려는 듯이 방바닥을 내려다 보며 말했다.
"그럼, 아무런 희망도 없는 사랑이 그처럼 오랫동안 마음속에 간직되리라고 믿으시는 거예요?"
"그렇단다, 줄리에트."
"그리고 삶의 나날이 계속되어 불어난다 해도 사랑이 꺼지지 않으리라는 거예요?
저녁이 잿빛 밀물처럼 밀려와서는 그 어둠 속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자신의 과거를 되살리고 들려주는 듯싶은 물건들에 부딪치며 적셔주는 것이었다. 줄리에트가 그 모든 가구를 다시 옮겨다 모아놓은 알리사의 방이 다시금 보이는 것이다. 이제 줄리에트는 다시 내게로 얼굴을 돌렸다. 이젠 그녀의 윤곽도 잘 분간 할 수 없어서, 줄리에트가 눈을 감고 있었는지 어쩐지도 알 수 없었다. 줄리에트는 몹시 아름다워 보였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자!"
이윽고 그녀는 말했다.
"이젠 잠에서 깨지 않으면 안 돼요..."
나는 그녀가 일어서서 앞으로 한 걸음 내딛더니 기력이 없는 듯이 옆 의자에 쓰러지는 걸 보았다. 그녀는 자기 얼굴에 손을 가져갔고 울고 있는 듯이 보였다....
하녀가 등불을 가지고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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