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 주트,티머시 스나이더: 20세기를 생각한다

 

20세기를 생각한다 - 10점
토니 주트 & 티머시 스나이더 지음, 조행복 옮김/열린책들

서문 ― 티머시 스나이더

1장 이름은 남는다: 유대인 질문자
2장 런던과 언어: 영국인 작가
3장 가족의 사회주의: 정치적 마르크스주의자
4장 킹스 칼리지와 키부츠: 케임브리지의 시오니스트
5장 파리, 캘리포니아: 프랑스 지식인
6장 이해의 세대: 동유럽 자유주의자
7장 통합체와 단편들: 유럽의 역사가
8장 책임의 시대: 미국인 모랄리스트
9장 선의 평범함: 사회민주주의자

후기 ― 토니 주트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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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 이후: 토니 주트를 추억하며 ― 에릭 홉스봄

 


후기 ― 토니 주트

486 20세기의 교훈과 기억, 성취는 어디로 가버렸나? 남은 것은 무엇이고 무슨 일을 해야 그것들을 되찾아올 수 있는가? 어디서나 당대인들과 학지들은 입을 모아 이제 20세기는 지나갔다고, 독재와 폭력 권위주의적인 권력 남용과 인권 억압으로 점철된 지저분한 기록이라고, 그래서 잊는 것이 최선인 시대라고 추정했다. 그리고 21세기는 더 나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이유를 들자면 21세기는 최소 국가 안에, 모두가 세계화의 혜택을 입고 시장이 무제한의 자유를 누리는 〈평탄한 세계〉 안에 터를 잡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화가 이어지면서 두 가지 주제가 등장했다. 첫째는 상대적으로 더 협소한 〈전문적〉인 것으로서 최근의 역사에 관해 토론하고 그 역사를 회고하면서 어느 정도 이해하려는 두 역사가의 증언이었다. 그런데 두 번째 관심사들이 치고 들어왔다. 20세기를 밀어내면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가? 최근 과거에서 잊히도록 내버려 두어 가장 좋은 것은 무엇인가? 되찾아와 더 나은 미래를 건설하는 데 쓸 수 있으면 좋은 것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들이 좀 더 열띤 논쟁을 불러왔고, 그 와중에 불가피하게 현대의 관심사와 개인적으로 더 우선하는 문제들이 학문적 분석에 끼어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논쟁의 전문성은 줄어들었지만 그렇다고 중요성이 줄지는 않았다. 그 결과로 우리는 놀랍도록 생생하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이 책은 20세기를 〈이야기한다〉. 그런데 왜 한 세기인가? 세기라는 개념을 쓰기 편리한 진부한 표현으로 치부하고 경제적 혁신이나 정치적 변화, 문화적 변동 같은 다른 사항들에 따라 우리의 연대기를 고쳐 쓰자는 솔깃한 제안이 있다. 그러나 이는 조금은 불성실한 짓이 될 것이다. 세기란 인간의 발명품이기 때문에 시간을 10년이나 100년으로 잘라 배열하는 것은 인간사에서 중요하다. 사람들은 전환점을 중요하게 여기며, 그래서 그러한 전환점들은 어떤 의미를 획득한다. 

이것은 때로는 우연의 문제이다. 17세기 잉글랜드인들은 16세기에서 17세기로 넘어가는 이행을 몹시 의식했다. 그 시기가 엘리자베스 여왕의 사망과 제임스 1세의 즉위, 다시 말해 잉글랜드의 정치에서 진정으로 중대한 순간과 일치했기 때문이다. 1900년도 마찬가지였는데, 특히 영국인들에게 그랬다. 1900년은 빅토리아 여왕이 죽기 한 해 전이었다. 빅토리아 여왕은 64년간 통치했으며 한 시대에 자신의 이름을 붙여 준 사람이었다. 영국인들뿐만 아니라 프랑스인들에게도 1900년은 의미 있는 해였다. 프랑스인들은 전체가 하나의 시대를, 즉 세기말을 형성한 문화적 변동들을 민감하게 의식했다. 

그러나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도, 이러한 세속적 이정표들은 돌이켜 보면 거의 언제나 하나의 기준점을 이룬다. 우리는 19세기를 말할 때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 바로 그 시기가 일련의 독특한 성격을 취했고 그것도 그 끝이 오기 한참 전에 그랬기 때문이다. 누구도 〈1800년 즈음에〉 세상이 눈에 띄게 변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1860년경이면 그 시대와 18세기 조상들의 세계를 구별하는 것이 무엇인지 당대인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명백했다. 그리고 이 차이는 사람들이 자기 시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해졌다. 우리는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다면 20세기는 어떻게 되었나? 우리는 20세기에 관해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서, 저우언라이가 프랑스 혁명에 관하여 재치있게 말했듯이, 20세기를 말하기에는 아직 너무 이른가? 답변을 늦추는 것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이 아니다. 20세기는 다른 그 무엇보다도 더 많은 꼬리표를 얻었고 더 많이 해석되고 언급되고 욕을 먹었기 때문이다. 20세기에 대한 최근의 설명으로 가장 유명한 홉스봄의 글은 1917년 라시아 혁명부터 1989년 공산주의 체제의 붕괴까지 이어지는 〈단기 20세기〉를 〈극단의 시대〉라고 기술한다. 20세기 사건들을 상당히 우울하게, 아니 어쨌거나 무지를 깨우치도록 해석하는 이 설명은 많은 젊은 역사학자들의 글에서 되풀이된다. 대표적인 사례를 들자면 마크 마조위를 꼽을 수 있는데, 마조워는 유럽의 20세기를 설명한 자신의 책에 〈암흑의 대륙〉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489 사건들이 발생할 때 당대인들에게 주었던 의미는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과는 매우 달랐다. 이는 자명한 얘기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렇지가 않다. 러시아 혁명으로 그리고 뒤이어 공산주의가 러시아의 동쪽과 서쪽으로 확산되면서 자본주의는 가까운 장래든 알 수 없는 미래의 어느 시점이든 실패할 운명에 처했다는 설득력 있는 필연의 내러티브가 만들어졌다. 그러한 가능성에 절망한 자들에게도 그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로 보이지 않았으며 그 함의는 시대의 형태를 결정했다. 

이 정도는 매우 쉽게 이해할 수 있다. 1989년은 공산주의의 전망이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적어도 그들이 공산주의를 경험하기까지는) 얼마나 그럴듯했는지를 잊을 만큼 먼 옛날이 아니다. 우리가 완전히 잊은 것은 두 대전 사이에 공산주의를 대신할 가장 신뢰할 만한 대안이 서유럽의 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아니라 파시즘이었다는 사실, 특히 (1938년까지는) 나치즘의 종족 차별주의를 포기하면서 권위주의 통치와 근대성 사이의 상관관계를 강조했던 이탈리아 파시즘이었다는 사실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 파시즘과 공산주의 사이의 선택이 유일하게 중요한 선택이었고 그 중에서 파시즘을 선택하려 했던 사람들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았다. 

두 형태의 전체주의 모두 이제는 소멸했기에(지적으로는 아니라고 해도 제도적으로는 사라졌다), 우리는 그 두 전체주의가 그들이 공동으로 경멸했던 입헌민주주의 체제보다 훨씬 더 많은 신뢰를 받았던 시절을 떠올리기가 어려웠다. 입헌 민주주의 체제가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을 얻는 싸움에서 승리할 것이라는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니 전쟁의 승리를 말하는 자가 있었겠는가. 요컨대 20세가 폭력과 극단적 이데올로기의 위협에 지배되었다는 가정은 옳지만, 폭력과 극단적 이데올로기가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호소했음을 이해하지 못하면 20세기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 자유주의가 조만간 승리하리라는 것은 (비록 대체로 완전히 다른 토대 위에 재건된 덕분이긴 하지만) 그 시대의 사태 전개를 봐서는 정말로 예상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자유주의는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놀라운 적응력을 입증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이 책에서 논하는 주된 주제의 하나이다. 

492 돌이켜 보면 문학이나 정치를 공부하라는 교사들과 지도교수들의 유혹을 거부하고 역사에 빠지기를 잘했다. 역사는 어떤 면에서, 다시 말해 시간 흐름에 따른 변화를 설명하는데 기울이는 주의와 주제의 해석에 한계를 두지 않는 특성에서 열세 살의 내게 큰 매력으로 다가왔으며 그 점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마침내 나 자신의 시대에 관한 내러티브 역사를 쓰는 데 착수했을 때 나는 이것이 그 시대를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굳게 믿었으며 지금도 여느 때처럼 확신에 차 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나를 가르쳤던 어느 초로의 지도 교수는 언젠가 자연구조와 지질구조에 푹 빠져 있던 나를 강하게 질책했다(당시 나는 프로방스의 사회주의를 연구하고 있었고 경관과 기후의 중요성예 강한 인상을 받았다). 그 교수는 이렇게 가르쳤다. 〈지리는 지도에 관한 것이고, 역사는 인간에 관한 것이다.〉 나는 그 조언을 잊은 적이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명한 사실일 뿐만 아니라 (인간이 역사를 만든다) 명백한 거짓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역사 만드는 환경은 주어진 것으로 볼 수 없으며 애정이 넘치는 풍부한 묘사를 요구한다. 그럴 때 지도는 중심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지도와 인간의 차이는 실제적이지만 우리를 오도하기도 한다. 우리는 모두 실제적이든 은유적이든 지도의 산물이다. 부모와 선생님들 못지 않게 어릴 때의 지리, 다시 말해 내가 갔던 장소들과 내가 보았던 것들이 나라는 인간을 만들었다. 그러나 청년기와 사춘기의 〈지도〉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유대인적 특성이 뚜렷하면서도 매우 영국적인 성격을 지녔던 1950년대 사우스런던은 여전히 에드워드 사대의 관습과 이야기를 담고 있는 곳으로서, 그곳에서는 장소가 매우 중요했다(나는 풀럼이 아니라 인접한 퍼트니에서 태어났다). 이러한 좌표들이 없다면 훗날의 나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1960년대의 케임브리지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능력에 따른 상향 이동이 뒤섞여 있었고, 1970년대의 학문세계는 쇠퇴하는 마르크스주의와 개인주의적 열정의 불안정한 혼합물이었다. 이 모든 것이 나의 글쓰기와 이후의 족적에 배경이 되며, 이러한 것들을 이해하는 데 관심이 있는 자라면 누구나 지도가 유용한 안내자임을 깨달을 것이다. 

나는 십여 권의 책과 수백 편의 글을 일부러 초연한 마음으로 썼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러한 대화와 성찰이 하찮은 유아론은 아닐지 걱정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최근 몇 달 동안 회고록을 위한 개략적인 글을 발표하기는 했지만 자서전을 쓰지는 않았으며, 역사가에게 적합한 기본은 글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라고 여전히 믿고 있다. 그러나 나 지신의 과거에 조금 끼어들라는 권고를 받고 보니 그것이 다른 과거의 연구에 내가 어떻게 기여했는지 이해하는 데 상당히 유용했음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바라건대 다른 이들도 그렇게 느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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