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ε. Gilson(15), God & Philosophy, Ch. 2

 

2024.06.02 ε. Gilson(15), God & Philosophy, Ch. 2


오늘은 에티엔 질송의 《God and Philosophy》 chapter 2를 마저 읽겠다. 중세 철학은 굉장히 다양한 국면에서 전개되었지만 무엇보다도 중세 신학 또는 철학을 규정하는 또는 시대를 나누는, 사상사적으로 시대를 나누는 핵심적인 모멘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들어온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도입이라고 하는 것은 중세 철학에 있어서 굉장히 큰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설명을 자세히 해보자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 두 사람의 철학 중 어떤 것이 더 영향을 많이 끼쳤는가 라고 하면 그 철학자들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증명하기보다는 오히려 두 종류로 생각을 할 수가 있다. 그러니까 플라톤적이다 아리스토텔레스적이다 라고 말할 때 굉장히 단순하게 일단 나눠서 얘기를 해보면, 플라톤적 사유 계열에 있는 사람들은 아우구스티누스, 보나벤투라, 켄터베리의 안셀무스, 둔스 스코투스, 근대로 오면 데카르트, 칸트 이런 사람들이다. 생각해 보면 신학자들와 철학자 칸트하고 무슨 관계인가, 데카르트는 또 왜 거기에 끼워넣었는가, 그걸 또 왜 플라톤과 연결시키는가, 그리고 플라톤에서 곧바로 흘러나왔다고 하는 플로티노스, 아우구스티누스가 플로티노스를 전범으로 삼아서 그렇게 하고 있는데 왜 그런 것들이 연결되는가 하는 것이 의문일 수 있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아주 다른가. 아주 다르지는 않는데, 생각하는 방식이 굉장히 이질적인 측면들이 있다. 간단히 얘기를 해보면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태어나서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져서 알게 되는 그런 감각의 세계에서 살아간다. 감각의 세계에서 살아가고 그런 감각의 세계로부터 몸으로써 체득한 지식을 일정 정도로, 지식이라기보다는 데이터인데, 그런 지식을 체계화해서 말하자면 지침으로 삼는다. 지금 제 앞에 책상이 놓여 있고, 창 밖에서 바람이 많이 불고, 그 바람에 의해서 제 방 창 밖에 있는 아카시아 나무들이 막 흔들린다. 그런데 왜 저것을 아카시아 나무라고 분류를 할까. 아카시아 라고 하는 이름이 있는데 그 이름에 해당하는 원형은 없다. 그냥 이렇게 이렇게 생긴 것들을 묶어서 아카시아라고 할 뿐이다. 그런 것들을 계속해서 쌓아 올려가면서 삶을 살아간다. 그것이 우리의 인생에서 중요한 지식들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것을 넘어가는, 우리의 감각 세계를 넘어가는 그런 것들을 알 수는 없다. 다만 어쩌다 한 번 누군가가 굉장히 탁월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그 세계를 넘어가서, 지금 우리의 감각 세계를 넘어가서, 그러니까 감각을 통해서가 아니라 플라톤이 말하는 것처럼 지성으로써만 알 수 있는 세계라고 하는 것도 사실 그 감각의 하나 아닐까 라는 생각을 많이 해보게 되는데, 그런 것을 가상으로라도 설정해 볼 수 있다. 그런 세계가 있다. 그리고 그런 세계에 불변의 뭔가가 있어서 그것이 지금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들을 알게 해준다. 그렇지만 그것은 원리와 법칙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런 원리와 법칙이 있다고 해서 그 원리와 법칙으로부터 지금 내 눈앞에서 펼쳐져 있는 구체적인 사물이 그 원리와 법칙으로부터 만들어지는 건 아니다. 눈앞에 펼쳐져 있는 사물의 존재를 그 원리와 법칙이 만들어내는 건 아니다. 가령 우리가 머릿속으로 기이하게 생긴 어떤 사물을 생각할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개념 또는 관념들 몇 개를 결합을 해서 머리가 7개 달린 괴물 같은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 괴물들을 머릿속에 생각해서 그러한 괴이한 물체의 또는 괴이한 동물의 작동에 대해서 머릿속에서 생각할 수는 있다. 그런데 그렇게 머릿속에서 우리가 그것을 생각한다고 해서 그것이 구체적으로 실제로 존재하는가 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거기다가 존재라고 하는 것, 그것이 있다 라고 하는 것, 그것에 있음이라고 하는 것을 부여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사실 그런 것은 아리스토텔레스도 마찬가지이다.  

앞서 God and Greek Philosophy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의 원천과 모형의 정리를 보면, 최상위의 어떤 신이 있다 해도 그 신은 자신의 하늘에 있고 세상을 돌보는 것은 인간의 일이다. 그러니까 신이 머무르는 하늘과 인간이 일을 하고 있는 세상, 이것 사이에는 넘어갈 수 없는 선이 있다. 플라톤이 되었건 아리스토텔레스가 되었건, 이건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는데, 우리 인간이 살고 있는 세계와는 별개로 그리고 인간이 살고 있는 세계에서 도저히 건너 뛰어서 갈 수 없는 그런 하나의 법칙의 세계가 있다고 하는 것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모두 동의하고 있다. 그게 바로 이제 헬라스 철학의 한계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플라톤 철학을 가져오면 그 한계를 메꿀 수 있는 방법이 도무지 없는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가져오면 한계를 메꿀 수 있는 방법이 조금 생겨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가져다가 인간의 세상과 법칙의 세계를 조금이라도 메울 수 있는 틈이 있다고 생각해서 그 틈을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으로 메워보려고 했던 시도, 그게 바로 토마스 아퀴나스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흔히 온건아리스토텔레스주의라고 불린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에 아리스토텔레스를 수용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를 이용하여서 인간의 세계와 법칙의 세계 또는 완전자인 신의 세계를 메꿔볼 수 있다, 그 틈을 이어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토마스 아퀴나스이다. 중세가 지나고 다시 그 틈을 메울 수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데카르트나 칸트나 그런 사람들이겠다. 헤겔은 아니라고 하는데, 헤겔은 흔히 토마스 아퀴나스적인 시도를 했다고 일반적으로 철학사에서 알려지고 있는데, 그렇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법칙의 세계 또는 신의 세계와 우리 인간이 살고 있는 세계를 온전히 메울 수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아니다. 이 점을 생각을 해야 된다.   그런데 토마스 아퀴나스처럼 그걸 메울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 또 메워야겠다고 생각한 사람들 중에는 어떤 것을 가지고 하는 것이 훨씬 더 수월할까 라고 고민을 할 때, 아리스토텔레스가 훨씬 더 적절한 해결책의 원천이었다 라고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질송이 여기서 계속 그리스 철학의 한계, 그리스 존재론의 한계를 얘기하는데, 그리스 존재론의 한계는 플라톤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도 해당한다. 

질송의 말을 보면 "신이 창조한 세계에 관해 사색하는 그리스도교 철학자에게 완벽히 적합한 답변도 분명 아닙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답변이 그렇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 철학자라면 신이 창조한 이 세계, this world는 우리 눈 앞에서 펼쳐지는 감각적 세계를 말하는데, 기독교 철학자라면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감각적 세계가 온전히 신의 피조물이라고 하는 것을, 신은 이것들이 있다고 하는 것에, 신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음을 형이상학적으로 논증을 해야 된다. 즉 신의 도움 없이 계시를 빌리지 않고도 인간의 이성으로써 논쟁을 해야 되는데, 인간은 신의 도움 없이는 진리를 가질 수 없고 세계를 표징으로서만, 희미하게만 파악한다 라고 했던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얘기이다. 그것은 《고백록》에서도 그런 것들이 아주 잘 두드러져 보인다. 그런데 그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한계라기보다는 질송은 그것을 그리스 존재론 자체의 한계로 파악을 한다. 헬라스의 존재론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모두 다 궁극적 실제의 세계를 발견하긴 했다. 그런데 그것을 개념적 원리로서만 이해했지 그것이 우리 눈앞에 펼쳐진 세계에 대한 실제로 존재하는 사태와 필연적으로 어떻게 연관되는지는 설명하지 못했다. 사실은 아닐 수도 있다. 중세 후기 유명론자들, 오캄 사람 윌리암처럼 개념일 뿐이다 라고 말하는 게 정직할 수 있다. 그러니까 프란체스코 교단에서 그런 사람들이 등장했다고 하는 것, 프란체스코 교단이 아우구스티누스의 맥락을 읽었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도미니크 수도회이다, 도미니크 수도회는 어떻게 해서든지 눈앞에 펼쳐져 있는 세계와 신이라고 하는 절대적 초월자를 인간의 이성의 힘으로써 연결시켜보려고 했던 사람들이고,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그리고 그 사람의 제자인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런 작업을 했다. 그러다 보니 말이 많아져야 되고 그것이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으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아퀴나스는 그리스도교 계시의 빛 안에서 in the light of Christian revelation, 기독교적 계시라고 하는 그것의 관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변형했다. 질송이 그렇게 말하는데 metamorphosis, 변형이라고 번역해도 되고, 가령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서 나오는 말이 metamorphosis이다. 이것을 어떻게 변형을 해야 되는가. metaphysically transformation을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일단 아리스토텔레스의 최고 신은 '자기를 사유하는 사유'이다. 나만 생각하고 있으니까 나 이외의 것은 생각하지 않고 그러니 다른 것들은 생각지도 않는다고 하는 것은 다르게 말하면 다른 것을 만들어낼 것조차 생각하지 않는다. 당연하게도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자기를 사유하는 사유', self-thinking Thought라고 하는 것은 우주 만물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창조하는 것이 아닌 그냥 원리일 뿐이다. 그러면 이것을 가져다가 아퀴나스는 어떻게 그것을 창조주로 이해할 것인가. 굉장한 변형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니까 온건아리스토텔레스주의라고 하는 것은 사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 방식을 가져다가 자기들 나름대로 재창조했다 라고 말하는 게 정확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다. 거듭 얘기하는데 '자기를 사유하는 사유'라는 것은 개념적 원리일 뿐이고, 이것을 가져다가 구약 성서에 등장하는 He who is, '있는 나'는 구체적으로 있는 것이다. 그 개념으로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개념적으로 있다는 것과 실존적existentia으로 있다는 것은 분명히 구별되는데, 그것을 실존하는 존재로 재규정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건 사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가 아니다.  

93 그리스도교의 신이 창조한 세계에 관해 사색하는 그리스도교 철학자에게 완벽히 적합한 답변도 분명 아닙니다.

93 그가 도달한 한계는 그리스 존재론 자체의 한계였고, 형이상학의 문제에서 인간의 마음이 도달할 수 있는 한계이기 때문입니다. 

94 토마스 아퀴나스의 아리스토텔레스의 '해설'은 그리스도교 계시의 빛 안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을 변형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당할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자기를 사유하는 사유는 분명히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자연신학의 핵심요소입니다. 하지만 자기를 사유하는 사유가 먼저 'Qui est'있는자 혹은 구약 성서의 '있는 나'로 형이상학적 변모를 겪어야 했습니다. 
62 Let us add only this, that the "explanation" of Aristotle by Thomas Aquinas might perhaps be more justly called its metamorphosis in the light of Christian revelation. The self-thinking Thought of Aristotle has certainly become an essential element of the natural theology of Saint Thomas Aquinas, but not without first undergoing the metaphysical transformation that turned him into the Qui est, or "He who is" of the Old Testament. 


극단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 즉 라틴아베로에스주의자, 순수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라고 불리는 사람들, 아베로에스주의는 아랍에서 넘어온 사유로 아랍인 학자 아베로에스의 아리스토텔레스 주석을 따라가는 사람들은 파리 대학을 중심으로 해서 널리 퍼졌는데 1270년, 1277년에 금지령을 내리고 단죄를 했지만 결국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러느니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가져다가 좀 더 계시의 관점에서 그러니까 in the light of Christian revelation에서 재사유해보자 하는 것이 바로 아퀴나스로 대표되는 온건아리스토텔레스주이다. 그에 반해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을 견고하게 지키려는 사람들은 완전히 아우구스티누스주의자들이다. 철저하게 반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이다. 이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이용해서 초월적 신에 대해서 뭔가 사유할 수 있다고 하는 것 자체가 이미 위험하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의 안내를 반드시 받아야만 한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인데, 이런 사람들이 프란체스코 수도회 사람들이다. 우리 눈앞에 펼쳐진 물질적인 세계와 신의 관계를 필연적으로 이성적으로 증명해 낼 수 없게 되니까, 차라리 그러면 법칙은 법칙대로 두고 신은 신대로 두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세계 자체에서의 원리만 알아내면 되지 않겠는가 하는 것, 계시는 계시대로, 우리가 그것을 알 수 없는 영역에 있으니까, 신이 우리 인간 세계와 우주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은 주권자로서 또는 주재자로서 있다는 건 인정하고 그것은 우리 인간의 이성으로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니까 그냥 두어 두고, 자연과학만 열심히 연구하다 보면 어차피 세계는 신이 창조한 것이니까 자연과학을 열심히 연구하다 보면 되지 않겠는가, 그러다 보니까 자연과학이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프란체스코 수도회에서 자연과학이 발전했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신앙을 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신앙이라고 하는 것을 인간 이성으로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것을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오만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오히려 자연과학 연구에 몰두하게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화이트헤드의 《과학과 근대 세계》를 읽어보면 이런 맥락들이 나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엄청난 통찰을 보여주지는 않으니 지나치게 기대를 하면 안 될 것 같다. 어쨌든 온건아리스토텔레스주의, 즉 아리스토텔레스를 가져다가 초월적 세계와 우리 눈앞에 보이는 가시적 세계를 이성의 힘으로써 연결시켜보려고 하는 존재론, 그것이 아퀴나스의 변형 가지고 있는 힘이다.  

'qui est'(who is)를 어떻게 변형을 시킬 것인가에 대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시도를 존재론적으로 보겠다. who is라고 하는 것은 self-thinking Thought, '자기를 사유하는 사유'와는 다르다. 자기를 사유하는 사유는 개념적 원리로서만 있다. 'qui est'(who is)는 존재함, 있음 자체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되는 것은 개념적 원리로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앞서 예를 든 것처럼 머리가 9개, 팔은 12개, 다리는 27개가 있는 그런 기이한 생물체를 생각해 보자. 그러면 내 생각 속에 있다. it is in my mind, 그게 내 마음속에 있다. 그런데 그게 내 마음속에 있다고 해서 있는 건 아니다. 우리 눈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만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it is in my mind라고 할 때 is가 있다 라고 하는 것이긴 한데, 그 있음이라고 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실제로 있는 건 아니다. 즉 머릿속에 개념적으로 있는 것이 이렇게 나와 있는 건 아니다. 또 거꾸로 생각해서 지금 제 방 창밖에 아카시아 나무가 바람이 흔들리고 있는데, 저 아카시아 나무는 있다. 실제로도 있다. 그러면 저 아카시아 나무에 대해서 생각을 할 때 아카시아 나무는 그것을 아카시아 나무일 수 있게 해주는, 그 아카시아 나무만 가지고 있는, 그 나무에게만 속하는, 그 아카시아 나무 아닌 것들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는 그런 속성들이 있다. 그 속성들은 플라톤적인 용어로 말하면 형상이라고도 할 수 있겠고, 아리스토텔레스도 그걸 형상이라고 했다. 아카시아 나무의 속성들만 이렇게 빼서 내놓으면 그것은 개념일 뿐인데, 그것과 아카시아 나무가 지금 눈앞에 있다고 하는 것 자체도 반드시 필요하다.  머리가 9개, 팔은 12개, 다리는 27개가 있는 생물체도 하나의 특성을 우리가 머릿속에서 그려낼 수는 있다. 그런데 거기다가 있음이라고 하는, 존재라고 하는 것을 덧붙이지 않으면 그게 내 눈앞에 있을 수는 없다. 그러면 지금 제 방 창 밖에 있는 아카시아 나무는 존재자ens이다. 그런데 그 존재자는 어떤 것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존재esse가 일단 있어야 된다. 그다음에 그 존재라고 하는 것에다가 아카시아 나무만 가지고 있는 특성, 형이상학에서는 그것을 본질essentia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아카시아 나무라고 하는 존재자ens는 그것만이 고유하게 가지고 있는 본질, 즉 essentia와 그 essentia을 실제로 있게 해주는 esse, 즉 존재 이 두 가지가 결합이 된다. 그러면 그 존재자ens는 실제로 있는 것이 된다. 그게 바로 existentia이다. 강유원이라고 하는 존재자는 강유원만이 가지고 있는 essentia가 있다. 그것을 누군가 생각해 볼 수는 있겠지만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없다. 거기에다가 존재esse를 덧붙여야만 강유원이라고 하는 존재자ens가 된다. 그렇게 존재자가 등장했을 때 그것을 강유원의 실존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esse와 essentia이 결합해서 ens가 된다. 그렇게 ens로서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 속에 있는 존재를 existentia라고 말한다. 강유원이라고 하는 ens는 있는데, 지금 오늘 6월 2일에 있는 existentia와 내일 6월 3일에 있는 existentia와는 다르다. 오늘과 내일이 다르니까 같은 공간에 있다 해도 시간이 달라지니까 그렇다. 그러면 강유원이라고 존재자ens에게는 끊임없이 다른 시간과 다른 공간이 부여된다. 다른 시간, 다른 공간에 있을 때는 강유원이라고 하는 존재자ens의 차이가 생긴다.  그런 차이에 주목해서 그의 존재자를 살펴보자 하게 되면 바로 그것이 실존철학이다. 사실 실존철학이라고 하는 것도 그 실존existentia라고 하는 말이 거기에 있는 한에 있어서는 존재론의 근본 규정을 벗어나기가 어렵다. 

다시 정리해서 말해보면 개념적으로만 있는 것은 자연과학의 법칙들과 같이 법칙일 수도 있다. 그런 것들은 법칙으로만 있는 것이지 그 법칙에다가 뭔가를 묻혀야 된다.  그리고 그 법칙은 사물들이 움직여가는, 말 그대로 규칙일 뿐이고 사물로서 있는 것은 아니다.  사물로서 있는 것은 아니니까 그것은 essentia에 불과한 것이고 거기에는 esse가 없는 것이다. esse가 없는 것이니까 그것은 당연히 실존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지금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who is는 모세가 누구인지 물었다. 그러니까 나는 있는 자이다 라고 대답을 한 것이 바로 qui est이다.  qui est는 스스로도 있으면서 다른 것들이 있게 하는 것, 즉 다른 것들을 있게 하는 활동, 즉 다른 것들을 창조하는 활동이다. 세상에 있는 것들을 창조하는 원인이자 활동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신이고, 앞서서 토마스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기를 사유하는 사유'를 기독교 계시의 관점에서 metamorphosis했다 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즉 자기를 사유하는 사유라고 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을 가져다가 그것을 qui est로 변형을 시켰다. 자기를 사유화하는 사유는 다른 사물을 창조하는 활동은 아니다. 자기 관조 활동만 하고 나만 돌보고 있는 것이다. 저 초월적인 세계에서 자기만 돌보고 있고 인간 세상의 일, 우주 만물의 일은 알아서 돌아가겠지 하고 있는 것이다. 플라톤은 그 사이에 dēmiourgos를 갖다 두었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마저도 두지 않았다. 어찌 보면 플라톤을 가져다가 하는 게 훨씬 더 나았을 수도 있는데 어쨌든 사상의 역사는 이렇게 흘러왔다. 자기를 사유화하는 사유라고 하는 논리를 가져다가 자기도 사유하면서 세상 만물을 만들어내는 활동이라고 하는 것으로 변형을 시켰다. 그래서 그것을 무원인적 원인causa non causata라고 부르기도 한다. 구체적으로 창조라는 것이 무엇인가 물으면 가능태로서, 개념으로서 있는 본질을 실존으로 있게 하는 활동이 바로 창조이다. 머릿속에 있는 설계도는 가능태이고, 그것을 우리 눈앞에서 펼쳐서 실제로 있게 하는 것은 현실체로 만들어내는 것인데. 이 우주의 모든 만물을, 모든 사물을 existentia로 만들어내는 활동이 바로 창조이다. 그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본질essentia에다가 존재ess를 주는, 즉 있음을 부여해주는 자, 그러니까 토마스 아퀴나스는 구약 성서에 나오는 '있는 자'는 궁극적 존재자의 고유 이름이니까 신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그러면 신은 있음을 부여하는 존재자다, 있음을 부여하는 자 라고 얘기를 한 것이다. 존재를 부여하는 자의 이름은 존재다. 존재를 부여하는 자의 이름, 그것도 하나의 존재자일 텐데, 존재를 부여하는 자의 이름은 존재이다. 너를 있게 해주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esse라고 하는 말 자체가 존재인데, 그것을 자기 이름으로 삼은 것이다. 궁극적 존재자의 고유한 이름이 바로 esse가 된 것이다. 자기가 하는 활동을 자기의 이름으로 삼은 것이다. 

존재를 부여하는, 내가 세상 만물에 있음을 부여하는 자다. 그래서 내가 하는 활동이 있음을 부여하는 것이니까 있음이라고 이름을 짓겠다 라고 한 것이다. 존재를 부여하는 궁극적 존재자의 고유한 이름이 있음이다. 있음을 부여하는 자의 이름은 있음이다. 굉장히 강력한 이름 짓기의 방법이다. 너를 죽게 하는 자다. 죽음을 부여하는 자의 이름은 죽음이고, 있음을 부여하는 자의 이름은 있음이다 라고 한 것이다. 저는 이게 굉장히 재미있는 발상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활동을 이름으로 삼는 것이다. 활동을 이름으로 삼는다. 활동의 결과물을 이름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활동을 이름으로 삼는다. 구약성서에서 모세가 만난 신이 자기의 이름을 짓는 방식이다. 이들의 작명법이 굉장히 특이하다.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생각하는 이 모든 것을 노동이라고 말하면, 인간은 노동하는 존재다 라고 말하면 인간의 활동을 인간의 essentia로 파악하는 것이다. 굉장히 대단한 인간 규정이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라고 말하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성적 능력을 가지고 인간을 규정하는 것인데, 이성적 능력을 가지고 활동으로 들어가면, 사유를 한다라든가 노동을 한다라든가 이렇게 가면, 사유하는 존재, 노동하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자기를 사유하는 사유'는 뭔가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자기를 대상으로 하는 활동이니까 순수한 활동이다. 실존existentia을 만들어낼 수는 없고 따라서 순수한 실존 활동은 아니고 사유 활동일 뿐이다. 현실태를 만들어내는 실존 활동이 아니다. 사유만 있는, 그러니까 그 활동이라고 하는 가능태로서의 사유일 뿐이다. 

97 달리 말하면 '존재함'이 궁극적 존재자의 고유 이름이라는 유대-그리스도교 계시가 가르쳐 주기 전까지는, 철학자들이 본질을 넘어서 본질의 원인이 되는 실존의 에너지에 도달할 수 없었습니다. 

98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최고의 사유는 순수 실존 활동이 아니었기에, 그것의 자기 지식에는 모든 존재자에 관한 지식, 즉 현실태와 가능태가 다 수반되지는 않았습니다. 


그 사람만이 하는 활동, 그 사람밖에 할 수 없는 활동, 그 활동을 그 사람의 이름으로 삼는다고 하는 것인데, 질송은 이것을 얘기하지 않는데, 활동을 다르게 말하면 노동Arbeit이다. 그 사람만이 하고 있는 노동 그러니까 그가 하고 있는 노동의 본질essentia를 파악해서 끄집어내서 그것을 그 사람의 이름으로 삼는다는 것 또는 그 직업의 이름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만물들을 본질의 측면에서 생각하지 않고 실존의 측면에서 생각했다. 질송은 이것을 "본질의 언어에서 실존 언어로 번역"이라고 말했는데, 좀 더 이해하기 쉽게 얘기를 해보면 본질의 측면이 아닌 실존의 측면에서 사유했다. 헬라스 철학은 본질을 찾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뭔가의 본질만 알고 있으면 된다 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 그 사물을 온전히 알고 있는 건 아니다. 그것이 실제로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의 국면에서 어떠한가를 아는 것이 사실 중요한 부분이다. 아퀴나스는 바로 그 국면으로까지 갔던 것이다. 물론 이것이 신에 관한 것이니까 굉장히 대단한 것은 아닌데 거기까지 갔던 것이다.  그래서 세계에 있는 것들, 오늘 계속 예를 들어서 말하는 아카시아 나무가 왜 있는가라고 물으면, 그 아카시아 나무는 이러 이러한 본질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다 라는 것만 알아서는 저 아카시아 나무가 도대체 왜 내 집 앞 창 밖에 있겠는가는 설명할 수가 없고, 그것이 실제로 이 시간과 이 공간에 있다고 하는, 그것을 실존의 측면에서, 실존을 부여하는 궁극 원인을 가지고 설명을 해야만 한다. 그래야 그 존재에 대한 온전한 해명이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니까 essentia만을 가지고 규정할 수 있다 해서, 개념적 원리를 규정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existentia, 실제로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반드시 esse가 포함이 되어야 하고 그렇게 포함이 되었을 때 우리는 그것을 existentia, exsitence, 즉 실존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니까 essentia라고 하는 것, 우리가 뭔가의 법칙을 알고 있다 해서 거기에 실존existentia에 대한 충족 이유가 들어가지 않는다. 그러니까 아퀴나스는 여기서 궁극적으로 esse라고 하는 것을 자기가 갖고 있는, 즉 자기를 사유하는 사유가 아닌 다른 것을 만들어내는 궁극적인 원인으로서의 신을 얘기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들어가면 우리 눈앞에 놓여 있는 수없이 많은 사물들의 궁극원인으로서, 우주의 최고 원인으로서의 신이라고 하는 존재를 뚜렷하게 설명해 낼 수 있겠다 라고 본 것이다. 그렇게 해서 아퀴나스의 신 개념이 정립이 되었다. 그러니까 아리스토텔레스를 어떻게 변형시켰는가, 저는 완전히 대체했다고 보는데, 변형이라기보다는 대체했다고 보는데, 그것이 아키나스의 신 개념을 성립시킨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눈앞에 펼쳐진 세계는 단순한 표징이 아니라 신이 그것에게 존재자ens를 부여한 그런 세계가 된다. 

99 진정한 형이상학적 혁명은 누군가가 존재자에 관한 모든 문제를 본질의 언어에서 실존의 언어로 번역하기 시작하면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면 이제 아우구스티누스는 완전히 해결이 되었는가, 해결이 된 것은 아니겠다. 그것에 대해서는 한 번 더 해봐야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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