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강유원의 미학, 예술학, 예술철학 7-1
- 강의노트/책담화冊談話 2021-25
- 2023. 10. 29.
강유원의 책담화冊談話(https://booklistalk.podbean.com)에서 제공하는 「강유원의 미학, 예술학, 예술철학」을 듣고 정리한다. 2023.09.06~2023.11.15 수원시글로벌평생학습관에서 진행되는 강의이다.
2023.10.25 🎤 미학, 예술학, 예술철학 7-1
커리큘럼
09.06 예술의 목적과 예술론의 학적 위치
09.13 플라톤의 미학
09.20 예술론의 전범으로서의 《향연》
10.04 mimēsis
10.11 신플라톤주의와 고전주의 예술론
10.18 maniera grande, cicerone
10.25 Baroque, Rococo
11.01 헤겔과 역사적 예술론
11.08 미술사의 여러 갈래들(1):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조르조 바사리
11.15 미술사의 여러 갈래들(2): 에르빈 파노프스키, 막스 드보르작
교재
강유원(지음), 《에로스를 찾아서 - 사랑과 아름다움에 관한 성찰》
제7강. Baroque, Rococo
일시: 2023. 10. 25. 오후 7시 30분-9시 30분
장소: 수원시글로벌평생학습관
강의 안내: https://learning.suwon.go.kr/lmth/01_lecture01_view.asp?idx=3345
오늘은 Baroque에 대해서 얘기를 한다. 책 127페이지를 보면 주해 39번은 발터 벤야민의 《독일 비애극의 원천》 이렇게 되어 있다. 새물결 출판사에서 나온 조만영씨의 번역은 품절이고, 한길사에서 나온 것도 있다. 사람들이 벤야민을 많이 얘기하는데 《독일 비애극의 원천》은 읽기가 굉장히 어려운 텍스트이다. 읽고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렵고, 한 페이지를 넘어가기가 어렵다. 이건 그 분야를 특별히 전공한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그런 건데, 어쨌든 그것이 중요한, 그러니까 예술 문예이론에서도 최고로 난이도가 높은 책들이 몇 개 있다. 《신곡》에 보면 최고천에 가면 있는 책들 중에 하나가 벤야민의 《독일 비애극의 원천》이다. 죽기 전에 이룰 수 없는 꿈일 것 같은데 '시민들을 위한 교양 강좌' 이런 데서 이것을 강의해 보는 것이다. 그러려면 시민들이 유식해지기를 기다리기보다 유식하게 만든 후에 《독일 비애극의 원천》 코스를 만들어서 시험을 봐서 수강자를 뽑은 다음에 해야 할 것이다. 인생에 뭔가를 파토스를 겪은 다음에 읽었으면 정말 잘 읽을 수 있는 텍스트였을 거다 라는 생각도 든다. 주해 39번에 해당하는 것은 다시 설명할 것인데, 《독일 비애극의 원천》은 오늘 우리가 하는 Baroque와 Rococo를 읽는 데 굉장히 중요한 1차 문헌에 해당한다. Baroque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할 때는 일단 Baroque를 예술적으로 보면 Baroque라는 개념을 만든 사람이 《미술사의 기초개념》을 쓴 하인리히 뵐플린이다. 뵐플린의 Baroque개념은 미술사에만 해당하는데, 하나의 시대 정신으로서의 Baroque라는 것도 있다. Baroque 시대는 약간 콩가루 시대인데 그것을 이해하는 데는 미술사만 가지고 되지 않는다 라고 할 때 《독일 비애극의 원천》이 1차 문헌, 최상급의 문헌이다.
주해40번에서 루터는 "홀로 탑에서 기도를 하던 중 신과의 단독적 관계에 들어섰다고 하는 '탑체험'(Turmerlebnis)을 계기로", 탑 체험은 독일어로 Turm이 탑이고, ebnis이 체험이다. 독일 사람들은 이 명사 몇 개를 싹 붙여 갖고 단어 하나로 쓴다. "인간은 오직 믿음(sola fide)으로써 의롭게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로마서> 1장 17절의 문장을 강조하였다. 그는 또한 라틴 어 성서를 처음으로 독일어로 번역하여 '9월 성서'라 불리는 것을 펴냈다. 복음 안에 있는 신의 올바름은 믿음으로부터 믿음 안에서 드러납니다." 그게 루터파 교회의 기본적인 모토이다. 그러니까 기독교 장로회 이런 데 가면 그 교파가 딱 내세우는 성서 구절이 있다. 루터파 교회는 1장 17절을 내세운다. 루터 얘기는 다시 또 앞 본문으로 가서 할 것이다. 그다음에 페이지 넘겨보면 "루터는 또한 <독일 민족의 기독교도 귀족들에게 보내는 연설>", 이것은 그냥 여러분들이 읽어보면 되고, 그다음에 129페이지에 주해 41번의 바로크를 본다. 뵐플린에 따르면 "바로크는 속박되지 않고 한계 지어지지 않으며, 자의적인 것을 추구하는 반고전주의적 충동이면서 하나의 비전", 일단 Baroque 정의의 1번은 "속박되지 않고 한계 지어지지 않으며, 자의적인 것을 추구하는 반고전주의적 충동"이다. 자의적恣意的이다라고 하는 게 제멋대로인arbitrary이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고전주의의 반대말은, 일단 가장 넓은 의미로는 낭만주의이다. Klassik의 반대말은 Romantik. 그런데 사실 Romantik이라고 하는 것은 Klassik에 반대기만 하니까 아무런 의미가 없다. 고전주의가 아닌 것이 Romantik이다. 지난번에 얘기한 것처럼 부정 판단은 그 안에 들어가는 원서 입수가 무한하기 때문에 무한 판단이고, 무한 판단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meaningless 것이다.
《에로스를 찾아서》 주해 40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홀로 탑에서 기도를 하던 중 신과의 단독적 관계에 들어섰다고 하는 '탑체험'(Turmerlebnis)을 계기로 인간은 '오직 믿음'(sola fide)으로써 의롭게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로마서> 1장 17절의 문장을 강조하였다. 그는 또한 라틴 어 성서를 처음으로 독일어로 번역하여 '9월 성서'라 불리는 것을 펴냈다. "복음 안에 있는 신의 올바름은 믿음으로부터 믿음 안에서 드러납니다."
Baroque라고 하는 것은 일단 기본적으로 "속박되지 않고 한계 지어지지 않으며, 자의적인 것을 추구하는 반고전주의적 충동"이라고 하면, Baroque는 Romantik의 속성을 갖고 있다. 그러면 여기까지만 얘기를 하면 'Romantik하고 다르지 않잖아'라고 끝내버리면 말이 안 되니까 뭔가 덧붙여야 한다. 덧붙여야 되는데 "하나의 비전을 가지고 대상에 접근함므로 특수한 것, 다양한 것은 이 비전으로 해소된다"라고 했다. Romantik인데 하나의 비전을 가지고 대상에 접근한다 라고 하는 적극적인 규정을 가지고 있다. 그 비전이라고 하는 것은 "창작에 있어서 직관적으로 마음에 나타나는 환영"을 가지고 대상에 접근한다. 그러니까 예술 활동을 하는 데 있어서 창작자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작품은 규정된다 라고 보는 것이 Baroque이다. 그러니까 이제 여기에 오면 Klassik은 객관적으로 질서와 비례가 있다. 그런데 그 객관적으로 있는 질서와 비례는 '피타고라스 정리에 따라서 이렇게 나오잖아'하고 누구에게나 다 공유할 수 있다. Baroque는 내 마음이다. 그러니까 Baroque야말로 현대 회화의 Contemporary Art의 출발점이다.
《에로스를 찾아서》 주해41
뵐플린에 따르면 바로크는 바로크는 속박되지 않고 한계 지어지지 않으며, 자의적인 것을 추구하는 반고전주의적 충동이면서 하나의 비전(예술활동, 특히 창작에 있어서 직관적으로 마음에 나타나는 환영幻影)을 가지고 대상에 접근함므로 특수한 것, 다양한 것은 이 비전으로 해소된다. 하나의 비전이 회화의 중심에 놓이게 되므로 하나의 주된 효과에 초점이 맞춰지고, 그에 따라 디테일은 무의미해지고 공간 구도는 불균형하게 된다. 리글은 무엇보다도 예술가의 '예술의욕'(Kunstwollen)을 강조한다. 예술가는 작품을 형성하면서 모티프를 가지는데 이는 주관적인 것이고 작품 활동을 하는 가운데서야 비로소 표상되는 개념적 원리이므로 존재론적으로는 비소재적이다.
본문 60페이지를 보면 루벤스의 <프랑스 왕비 마리 드 메디시스를 위한, 앙리 4세의 생애를 그린 연작 그림: 앙리 4세의 파리 입성>이라는 부분이 있다. 앙리 4세의 생애의 파리 입성은 좋기는 한데 연작 그림 전체가 과도하다 라는 느낌을 주는 그림들로 연작이 이어져 있다. 다시 주해로 와서 "창작에 있어서 직관적으로 마음에 나타나는 환영", 즉 창작자 마음속에 있는 판타지가 작품의 주요한 창작의 모티프가 된다. 그렇다면 그것은 남들과 공유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일단 그 사람이 마음속에 있는 걸 밖으로 끄집어 내놔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제 Baroque이라고 규정을 할 수 있다. 복잡한 얘기들이 많이 있는데, "하나의 비전이 회화의 중심에 놓이게 되므로 하나의 주된 효과에 초점이 맞춰지고, 그에 따라 디테일은 무의미해지고 공간 구도는 불균형하게 된다. 리글은 무엇보다도 예술가의 '예술의욕'(Kunstwollen)을 강조한다." 예술 의혹이라고 하는 것이 Baroque를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이다. 앞에서 창작자의 마음에 나타나는 환영이라고 얘기했다. 그 환영을 뵐플린의 제자인 알로이스 리글은 Kunstwollen이라고 말한다. Kunstwollen를 배웠는데 Kunstwollen을 모르면 안 된다. Kunst는 예술이고, wollen은 영어로 하면 will이다. 그다음에 보면 Baroque에 관해 아주 중요한 것이 있다. "예술가는 작품을 형성하면서 모티프를 가지는데", 모티프라고 하는 것은 마음속에 내가 무엇을 창작해야겠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모티프라고 하는 것은 공통적으로 사용되는 학문 용어이고 그 모티프를 알로이스 리글은 Kunstwollen이라고 불렀다. "이는 주관적인 것이고 작품 활동을 하는 가운데서야 비로소 표상되는 개념적 원리이므로 존재론적으로는 비소재적이다." 쉬운 말을 어렵게 써놓았다.
루벤스의 마음에 '내 마음속에서 앙리 4세에 대한 불타오르는 충성심을 그림으로 그려보고 싶다'라고 하는 것이 있다. 이게 루벤스의 Kunstwollen이다. 그런데 만약에 그 사람이 Klassik에 속한 화가라고 하면 우리는 짐작을 할 수가 있다. 앙리 4세를 그림의 한 가운데다 놓고 예를 들면 미켈란젤로처럼 이렇게 천장에다가 그리듯이 이렇게 하겠구나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은 루벤스의 마음속에만 있다. 어떻게 그려질지 아무도 모른다. 마음속에만 있기 때문에 그것은 개념적 원리인 것이다. 가령 여러분들에게 『미학, 예술학, 예술 철학』 강의를 하겠다고 하면, 강의도 하나의 강의 활동activity이다, 그동안 강의를 해온 게 있으니까 요러요러한 책들이 있고 요러요러한 게 있을 것이다 라는 내 머릿속에서 공유하고 있는 강의 계획이 대체로 남들과 공유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저는 적어도 Klassik에 속한 사람이다. 그런데 루벤스는 붓을 들고 작품을 그려봐야 그 사람이 무엇을 그리려고 했는지가 나오니까 그게 개념적 원리인 것이다. 그리고 아직 없는 것, 마음속에만 있는 거니까, 존재론적으로는 아직 없는 것이니까 비소재적이다. 지금 읽은 부분이 Baroque에 관한 가장 중요한 규정이다.
다시 정리하면 Baroque는 일단 Romantik 또는 Anti-Klassik이다. 즉 "속박되지 않고 한계 지어지지 않으며, 자의적인 것을 추구하는 반고전주의적 충동"이다. 그다음에 두 번째 "창작에 있어서 직관적으로 마음에 나타나는 환영", 즉 "비전을 가지고 대상에 접근하므로 특수한 것, 다양한 것은 이 비전으로 해소된다." 특수하고 다양한 모든 것을 이 비전을 가져다가 마음껏 쓴다는 말이다. Baroque는 그런 점에서Contemporary Art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시간에는 바로 그 이전에 매너리즘이 어떻게 등장했는가를 이제 미켈란젤로를 통해서 말할 것이다. 제가 지난번에 예술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창작자라고 말했다. great라는 단어를 쓸 수 있다. great라는 단어는 선과 악의 개념이 아니다. 예를 들어서 미켈란젤로의 무슨 작품이 great하다는 것은 선하고 악한 게 아니라 작품 자체가 어마어마하다는 뜻이다. 그다음에 "하나의 비전이 회화의 중심에 놓이게 되므로 하나의 주된 효과에 초점이 맞춰지고", 그러니까 그게 이제 Baroque를 규정한 다음에 Baroque에서 주된 효과가 등장하고 공간 구도가 불균형하다, 앞에서 얘기한 체계공간Systemraum 같은 건 사라진다는 말이다. Baroque의 특징은 하나의 주된 효과에 초점이 맞춰지고, 공간 구도는 불균형하다. 그다음에 리글은 리글은 예술의욕Kunstwollen을 강조한다. 뵐플린이 규정을 했지만 리글이 좀 더 세부적으로 규정했다. 그다음에"예술가는 작품을 형성하면서 모티프를 가지는데 이는 주관적인 것이고 작품 활동을 하는 가운데서야 비로소 표상되는 개념적 원리이므로 존재론적으로는 비소재적이다."
책 130페이지의 두 번째 줄을 보자. 지금까지 Baroque에 대해서 얘기를 했다. 그러면 Baroque라고 하는 게 왜 나왔을까, 도대체 Klassik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굳이 왜 Baroque가 나왔을까를 이제 물어봐야 한다. 그래서 "바로크 시대는 회화만으로는 그 특징을 온전하게 규정할 수 없다"라고 되어 있다. 사실은 세상이 아무리 어지럽고 난리가 났어도 Klassik을 하는 사람들은 그냥 Klassik을 한다. Klassik을 하는 사람들은 시대하고는 무관한 게 Klassik이고 그게 기준이 되어야 한다. 자잘한 해석은 가능할지 몰라도 해석을 넘어서서 변형은 안 된다. 그게 Klassik이다. 우리가 셰익스피어 책을 읽을 때 이렇게 저렇게 해석은 해볼 수 있는데 그것 말고 목록은 바뀌지 않는다. 그와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Baroque 시대에는 Klassik 회화라고 하는 것의 시대가 변화하고 있었고, "매너리즘에서 징후를 볼 수 있었듯이 예술은 시대와의 깊은 연관 속에 놓이므로", 그것이 바로 Baroque를 만들어내는 가장 근본적인 것이다. "갈등의 해소, 격정적인 표현주의적 예술의지, 강력한 인물들, 장엄한 극적 양식, 격앙된 극적 순간", 지금 읽은 것들은 Baroque에서 사용하고 있는 표현 기법이다. "여전히 신에 대한 신앙은 가지고 있으나, 극도로 불확실하고 불안한 시대에 눈앞에 현존하는 초월적인 존재를 통해서 불확실함과 불안을 극복하려는 시도로서 이해하는 것이 더욱 설득력 있을 것이다." 거기 보면 일단 Baroque는 시대와의 관련 속에 있다. 그런데 그 시대는 불확실하고 불안한 시대이다. 불확실하고 불안한 시대에 Baroque가 등장한다. 그래서 Baroque라는 말을 특정한 과거의 시대와 연결시켜서 말하지 않을 때 보편적인 술어로 쓴다면 요즘이 'Baroque적이네'라고 말할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불확실하다는 것은 uncertain이다. 불안Angst은 심정에서 일어나는 거고, ‘안개가 많이 껴서 불확실해'라고 할 때 이것이 마음이 불안해지네로 이어진다. 불확실이 있기 때문에 불안이 있다. 그런데 불확실한 시대에도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사람은 불안하지 않는다. 불안은 내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이게 분명하고 certain하다고 말해도 나는 불안할 수 있다. 그러니까 불안이 극대화되면 실존의 위기가 온다. 불안과 불확실은 구별해서 써야 한다. 불확실한 것으로부터 반드시 불안이 귀결되는 건 아니다. 불확실함이 불안으로까지 나아가면 그 두 개가 합쳐져서 Baroque적인 분위기atmosphere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극도로 불확실하고 불안한 시대에는 저 멀리 있는 신을 찾는 게 아니라 지금 눈앞에 놓여 있는 초월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을 통해서 극복하려고 한다. 그게 이제 루벤스에게는 앙리 4세였던 것이다. 그러면 좀 바보스러운 사람일수록 불확실하고 불안함을 어이없는 대상을 통해서 극복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설명한 것을 토대로 해서 신천지에 빠져드는 사람은 그냥 Baroque적인 심정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해도 된다. Baroque는 눈 안에 있는데 Rococo는 신에게서 찾는 것도 아니고, 예를 들어 한없이 손톱을 깨무는 사람들이 Rococo이다. Rococo는 한없이 여기에 매몰되어서 그 안에서 거의 자폐적으로 엄청나게 공을 들이기는 한데 왜 공을 들이는지 모르는 것이다. 그러니까 Baroque를 이해하면, Rococo는 정신철학적으로 보면 다음 단계지만, Baroque에서 이렇게 휘청거리면서 그래도 떨어지지 않고 걸어가는 게 Baroque라면 Rococo는 그냥 신발에 흙탕물 묻었네 하면서 좀 더 정교하게 흙탕물을 묻히려는 시도, 이게 Rococo라고 할 수 있다.
《에로스를 찾아서》 주해 41
바로크 시대는 회화만으로는 그 특징을 온전하게 규정할 수 없다. 매너리즘에서 징후를 볼 수 있었듯이 예술은 시대와의 깊은 연관 속에 놓이므로, 갈등의 해소, 격정적인 표현주의적 예술의지, 강력한 인물들, 장엄한 극적 양식, 격앙된 극적 순간 등과 같은 예술작품의 표현태들은 여전히 여전히 신에 대한 신앙은 가지고 있으나, 극도로 불확실하고 불안한 시대에 눈앞에 현존하는 초월적인 존재를 통해서 불확실함과 불안을 극복하려는 시도로서 이해하는 것이 더욱 설득력 있을 것이다.
Baroque를 일단 발을 들이려면, 작품의 해석이라고 하는 것은 창작자의 내면인 Kunstwollen을 하나 알아야 되는데, Kunstwollen은 영원히 알 길이 없고 이것이 외화된, 밖으로 드러난 작품을 통해서밖에 모른다. 그런데 이 작품이라고 하는 것은 시대의 불확실과 불안을 반영하기 때문에 작품의 Kunstwollen을 알아내려면 작품과 연결된 시대Zeit를 알아야 한다. 그러니까 Baroque 시대에 오면 작품을 해석하는데 창작자의 일생과 창작자가 살아간 시대와 그 시대에서 가장 중요하게 그에게 영향을 미쳤던 사건, 이런 것들을 다 알아야 작품의 해석이 가능해진다. Klassik은 그럴 필요가 없다. 다빈치가 어떻게 살았는지 우리는 알 필요 없다. 그냥 기술만 알면 된다. 미켈란젤로의 초기 작품들도 그러했는데 피에타나 이런 것들을 그렸을까, 약을 했을까 이런 게 아니라 그가 살아간 시대를 창조해야 될 필요가 생겨버린 것이다. 그래서 이때부터 예술 품이라고 하는 것이 시대하고 연결되는 이른바 역사주의적 예술학이 성립하게 되는 것이다. 역사주의적 예술학을 체계적으로 완성한 사람이 해결이다. 그러면 이제 시대를 읽고, 이 연관을 통해서 우리는 창작자의 Kunstwollen을 막연하게 추정해낼 수 있다. 작품과 시대의 연관을 읽어서 창작자의 Kunstwollen을 추정해내는 것, 이것이 예술비평이다. 그 이전에는 예술 비평할 것이 없었다. 르네상스 회화에 대해서 설명할 필요가 없다. 비평이 아니라 그냥 설명이다. 해석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해석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 개의 의견이 공존할 때 있을 때이다. 그러니까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회화에 대해서는, Klassik이니까, 서술describe만 하면 된다. 수학 문제 풀면 수학 문제에 대한 여러 종류의 해석이 있지 않다. 정답만 있다. 그런데 Baroque 이후부터의 회화는 해석이 필요하다. 이게 극단적으로 가면 Contemporary Art에서는 사람들이 해석을 하는 것도 힘드니까 창작자가 '이렇게 해석하세요'라고 함께 얘기를 한다. 그래서 그런 예술을 '철학하는 예술philosophizing art'이라고 한다. 아서 단토라고 하는 현대 미학자, 예술 철학자가 쓴 책 제목이기도 하다.
Baroque 작품부터는 얼마나 정교하게 해석을 내놓느냐에 달려 있다. 그러면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것이 너무 힘들다. 그리고 모두 다 비평가이다. 만인 비평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거기서도 좀 아는 채 하려고 하니까 이제 여러분들이 이걸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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